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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6권
14. 수수품[2]
[번뇌와 번뇌에서 나옴]
이미 네 가지의 방일하지 않은 윤을 말하였으니,
다음은 번뇌와 번뇌에서 나옴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법계를 멀리 떠나서는
따로 탐욕 등의 법이 없으니
그러기에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탐욕이 탐욕에서 나오고 나머지도 그러하다고 하신다.
[釋]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는 탐욕 등의 법을 내놓고는 능히 탐욕을 낸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진심(瞋心)과 치심(癡心) 등도 또한 그러하여서 법계를 떠나서는 따로 체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탐욕 등 법의 성품이 탐욕 등의 이름을 얻는다.
여기서는 탐욕 등 법의 성품이 능히 탐욕 등을 낸다고 말하였다.
이 뜻이 이 경의 지취(旨趣)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법의 성품을 떠나서 그 외에는
따로 여러 법의 없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러기에 이와 같이 말한다.
번뇌가 곧 보리라고.
[釋]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명과 보리는 동일하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한 무명의 법의 성품으로 시설(施設)한 것이 보리의 이름이다. 이 뜻은 이 경의 지취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탐욕에 있어서 바른 생각을 일으키면
탐욕에 있어서 해탈을 얻는다.
그러기에 탐욕에서 탐욕을 낸다고 말하며
진심과 치심에서 나옴도 또한 그러하다.
[釋] 만일 사람이 탐욕에서 바른 생각을 일으켜 관찰해서 이와 같이 알았으면 탐욕에 있어서 곧 해탈함을 얻는다.
그러기에 탐욕으로써 탐욕을 낸다고 말하였다.
진심과 치심에서 벗어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2승의 마음에서 멀리 벗어남]
이미 번뇌에서 번뇌를 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2승(乘)의 마음에서 멀리 벗어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보살은 지옥에 처하여서
중생들을 위하여 괴로움을 사양하지 않는다.
3유(有)를 버리고 소승의 마음을 내면
그 괴로움은 곧 심하다.
[釋] 보살은 대자대비하기 때문에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큰 지옥에 들어가면서 큰 괴로움을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니 만일 3유(有)의 공덕을 멸하여 없애고 소승의 마음을 일으키면 보살은 이로써 괴로움으로 여기는 것이 가장 깊고 무겁다.
[문] 이러한 뜻이 무엇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비록 항상 지옥에 처하여도
큰 보리에 장애가 되지 않지만
만일 자기만 이익되게 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는 큰 보리에 장애가 된다.
[釋] 보살이 비록 중생을 위하여 오랜 동안 큰 지옥에 들어가도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넓고 청정한 보리에 있어서는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승의 마음으로 열반을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곧 큰 고통이 된다.
어찌하여 그런가? 대승에 있어서는 열반에 머물기를 즐기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이 게송은 앞의 게송의 뜻을 나타낸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두려운 마음을 막음]
이미 2승의 마음을 막았으니,
다음에는 두려운 마음을 막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체가 없음과 얻을 것이 있음은
이 일이 마치 환과 같으며
성품이 청정하다고 함과 때가 없다고 함도
이 일은 곧 공과 같다고 하겠다.
[釋] ‘체가 없음과 얻을 것이 있음은 이 일이 마치 환과 같다’고 함은 모든 법은 자기 성품이 없고, 그러기에 체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형상과 모양을 나타낼 것이 있음을 본다. 그러기에 가히 얻는다고 말한다.
모든 범부의 사람은 이 두 곳에서 서로 두려움을 내지만 이는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환의 모양과 서로 같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환들은 실제로는 체가 있지 않지만 나타나서 가히 볼 수 있듯이
모든 법도 체를 가히 얻을 것이 없음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기에 이 두 곳에서 마땅히 두려움을 내서는 안 된다.
‘성품이 청정함과 때가 없는 것의 이 일이 곧 공과 같다’고 함은
법계는 본래 청정하며, 그러기에 성품이 깨끗하다고 이르고, 뒤의 때에 티끌을 떠나 청정하고 그러기에 때가 없다고 이른다.
여러 범부의 사람들은 이 두 곳에서 서로 두려움을 내지만 이는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공의 모양과 서로 같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본래 성품이 청정하기에 뒤의 때에도 또한 티끌을 떠난 청정이라고 말한다.
법계의 성품이 조촐한 것과 때가 없음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기에 이 두 곳에서 마땅히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또는 다시 그림과 같다는 비유가 있으니, 능히 앞의 두 가지의 두려움을 막는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그림 그리는 사람이
평평한 데에서 들어가고 나오게 그리듯이
이와 같이 빈 것에서 분별을 일으키지만
보는 이도 볼 대상도 없다네.
[釋] 비유하면 훌륭하고 교묘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능히 평평한 벽에 움푹하고 뾰족한 모양을 그려내거나 실제로는 높고 낮음이 없는 데서 높고 낮음을 보듯이
참답지 못한 분별도 또한 이와 같아서 평등한 법계의 두 모양이 없는 곳에서 항상 능과 소의 두 모양이 있음을 본다.
그러기에 마땅히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다시 물과 같다는 비유가 있어서 뒤의 두 가지 두려움을 막는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맑은 물이 흐려짐과 같아서
더러움을 제거하면 다시 본래 맑듯이
자기 마음이 청정함도 또한 그러해서
오직 객진(客塵)만 여읠 뿐이다.
[釋] 비유하면 맑은 물에 더러움이 오면 흐려진 듯하여서 후에 만일 맑게 하려면 오직 더러움만 제거할 뿐이니, 이처럼 맑음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본래의 성품은 깨끗할 뿐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방편도 또한 그러하여서 마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지만
객진 때문에 더러워졌다가 후에 청정해지려면 다만 객진을 없앨 뿐이요,
깨끗함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본래의 성품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마땅히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미 마음의 성품이 깨끗하지만
그러나 객진에서 더러워짐을 말하였다.
마음의 진여(眞如)를 떠나서
따로 마음의 성품이 깨끗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釋] 비유하면 물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지만 그러나 객진의 때로서 흐려짐과 같아서 마음의 성품도 본래 깨끗하지만 그러나 객진으로 더러워지니 이 뜻이 이미 이루어졌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마음의 진여(眞如)를 떠나서 따로 다른 마음이 있음은 아니다.
말하자면 의타의 모양을 설하여 자기 성품의 청정이라 하는 것이니, 이 가운데 마땅히 알아라.
마음의 진여를 설하여 마음이라고 이름하니, 곧 이 마음이 자기 성품의 청정이라고 말한다.
이 마음이 곧 아마라식(阿摩羅識)이다.
[탐욕의 죄를 막음]
이미 두려움을 막았으니,
다음에는 탐욕의 죄를 막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보살의 중생들을 생각하여
사랑하기가 골수(骨髓)에 사무친다.
항상 그들을 이롭게 하고자 하니
마치 단 하나 있는 자식같이 여긴다.
[釋] 모든 보살이 여러 중생들을 사랑하는 것을 탐으로 삼는다.
나머지는 게송과 같다.
게송으로 말한다.
여러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는 뜻 때문에
탐심을 일으키나 죄를 얻지 않는다.
성내는 마음은 그와 달라서
항상 남을 손상(損傷)시키려 한다.
[釋] 만일 보살이 모든 중생들을 사랑하여 탐심 일으키는 것을 일러 죄라고 이르나 이 뜻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탐심은 항상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인을 짓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둘기가 자기 자식을 사랑함과 같아서
널리 덮어서 지극한 사랑을 낸다.
이와 같이 자비가 있는 사람이
중생을 사랑함도 또한 그러하다.
[釋] 비유하면 비둘기가 탐심이 많아서 여러 자식들을 사랑하고 생각하여 가장 증익(增益)을 얻게 하듯이,
보살은 자비가 많아 여러 중생들을 사랑하여 증상(增上)하게 함도 또한 그러하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비와 성내는 마음과 다르고
고통을 쉬게 함은 괴로움을 주는 마음과 반대되고
이익을 주는 것은 이익이 없는 것과 어긋나고
두려움 없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과 어긋난다.
[釋] 보살은 여러 중생에 있어서 자비한 마음을 얻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성내는 마음과 서로 다르고,
괴로움을 쉬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짓는 마음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익을 주지 아니하려는 마음과 서로 어긋나고,
두려움 없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짓는 마음과 더불어 서로 어긋난다.
그러기에 보살은 이와 같은 탐하는 마음을 일으켜도 죄라고 할 수 없다.
[수행하는 차별]
이미 탐심의 죄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수행하는 차별에 대하여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생사(生死)에 있어 잘 행하여서
병든 이가 쓴 약을 복용하듯 하고
중생에 있어 잘 행하여서
의사가 병자를 가까이하듯 하고
자기 마음을 잘 행하여서
성취되지 못한 종을 조복시키듯 하고
욕심의 티끌을 잘 행하여서
장사꾼이 잘 사고 팔 듯하고
세 가지의 업을 잘 행하여서
사람이 옷을 잘 세탁하듯 하고
남을 괴롭히지 않음을 잘 행하여서
아버지가 자식 사랑하듯 하고
닦고 익히는 데 잘 행하여서
불을 비벼내듯 쉬지 아니하고
삼매를 잘 행하여서
재산을 믿는 사람에게 주듯 하고
지혜를 잘 행하여서
환술사가 환을 알 듯하는 것,
이를 여러 보살들이
모든 경계를 잘 행한다고 이른다.
[釋] 모든 보살이 수행하는 것에 아홉 가지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생사를 잘 행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병든 사람이 쓰고 떫은 약을 복용하는 것이 다만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기에 탐하여 물듦을 내지 않듯이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생사를 가까이하는 것은 다만 사유 책려(思惟策勵)하기 위함이요, 물들어 집착함은 아니다.
둘째는 중생에게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좋은 의사가 병자와 가까이하듯이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큰 자비로 말미암기 때문에 번뇌의 병에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버리지 아니함이다.
셋째는 자기 마음에 착한 행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슬기 있는 주인이 능히 잘 성취되지 못한 종을 조복시키는 것과 같이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능히 잘 조복되지 않은 마음을 조복시키는 것이다.
넷째는 욕심의 티끌에 착한 행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장사꾼이 사고파는 데 잘하는 것과 같아서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보시 등의 여러 바라밀에 있어서 자산과 재물을 증장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세 가지의 업에 착한 행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옷을 잘 세탁하는 사람이 능히 더러운 때를 제거하듯이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세 가지의 업을 닦고 다스려서 능히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번뇌하지 않는 중생에게 착한 행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자애로운 아버지가 어린 자식을 사랑하기에 비록 더러워도 싫어하지 않듯이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중생이 보살에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성내어 번뇌하지 아니함이다.
일곱째는 닦아 익히는 데 착한 행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불을 비벼댈 때에 뜨겁지 않으면 쉬지 않듯이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착한 법을 닦아 익혀서 일찍이 끊어짐이 없는 마음이다.
여덟째는 삼매에 착한 행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재산을 낼 때에 믿는 사람을 보증하여서 날마다 불어 이익을 보듯이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모든 선정을 닦아 익혀서 어지럽지 아니하고 맛들이지 아니하며 공덕을 증장하게 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지혜로 착한 행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환술을 부리는 자가 환이 실제가 아님을 아는 것과 같아서
보살도 또한 관하는 것이 법에 전도됨을 얻지 않는 것이니,
이를 보살의 수행하는 차별이라 이른다.
[3륜(輪)이 청정함]
이미 수행하는 차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3륜(輪)이 청정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항상 큰 정진을 부지런히 닦아서
둘을 익숙하게 하여 청정하게 한다.
청정한 깨달음은 분별이 없기에
점점 보리를 얻는다.
[釋] ‘항상 큰 정진을 부지런히 하여서 둘을 익혀 청정하게 한다’고 함은
보살이 큰 정진의 힘으로써 자기와 남의 이익을 위해 부지런히 행함을 말한다.
그러기에 중생과 자기가 아울러 성숙함을 얻으니, 이를 청정한다고 이른다.
‘청정한 깨달음은 분별이 없기에 점점 보리를 얻는다’고 함에서
청정한 깨달음이란 이른바 법무아(法無我)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3륜을 분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닦는 자의 닦는 것이 바른 닦음이기에 청정을 얻는다.
이 청정으로 말미암아 점점 위없는 보리를 이룬다.
「수수품(隨修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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