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의 이념·사상 위해 불교 공격한 성리학자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언론삼사, 수륙재 폐지 거듭 주장
어린 임금 이념적으로 압도해 신권 세우려는 시험대와 같아
존중받았던 불교, 계속된 공격에 서서히 어려운 시기 맞이해
서울 세검정초등학교 경내에 위치한 장의사지(莊義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
장의사는 성종의 초재가 이루어진 곳으로, 국상 수륙재가 설행되었던 주요 사찰 중 하나였다.
1494년 12월 성종이 훙(薨)하였다.(‘성종실록’ 297권, 25년 12월24일.) 재위를 계승한 연산군이 국정에 임한 첫날, 예조판서 성현(成俔)이 아뢰었다. “선대 조정의 사례에 의하면 국상(國喪)이 있을 경우 칠칠일(七七日)과 소대상(小大祥)에는 모두 절에서 재(齋)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문(禮文)에 실리지 않았으며, 대행대왕께서도 불교를 믿지 않으셨는데 이번에는 어찌 하오리까?” 왕이 대비에게 물으니 대비가 말하였다. “대행대왕께서 불교를 좋아하지는 않으셨으나 재를 지내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없었으며, 또 역대로 조정에서 다 행하셨으니 이제 폐지할 수 없습니다.”(‘연산군일기’ 1권, 즉위년 12월25일.)
다음날 사헌부와 사간원의 실무급 관료들이 “대행대왕을 위하여 수륙재를 시행하라는 전교를 들었습니다. 대행왕께서 일찍이 불법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또 지금은 새 정치[新政]가 시작되어 신민이 좋은 정치를 바라는 시기이니, 사도(邪道)를 버리고 예문을 좇아야 할 것입니다”라며 반대하였다. 그러자 새 임금이 말했다. “선왕께서 어찌 다 불법을 좋아하셨겠는가? 다만 수륙재의 거행은 조종조로부터 이미 그러하였고 대행대왕께서도 그만두라는 유명(遺命)이 없었으니 이제 문득 폐지할 수 없다.”(‘연산군일기’ 1권, 즉위년 12월26일.)
이날 관료와 임금 사이에서는 세 차례의 논쟁이 더 되풀이되었다. 이의를 제기한 관료들은 모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소속으로 이른바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 불리던 부서의 사람들이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삼사 관료들의 반대는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새 임금은 장의사에서 수륙재 초재를 지내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권, 즉위년 12월29일.) 이후 진관사와 봉선사, 그리고 정인사에서 돌아가며 칠칠재가 진행되었다.(‘연산군일기’ 2권, 1년 1월7일, 14일, 21일.)
1년이 지나 선왕의 소상이 돌아오자 사간원이 또 나섰다. “듣자오니 성종을 위하여 수륙재를 지내려 하신다 하옵는데, 이는 성종께서 평일에 하시던 일이 아니니 어찌 예가 아닌 일을 거행하여 선왕을 욕되게 하는 것이 가하겠습니까?”(‘연산군일기’ 10권, 1년 11월2일.) 강연(講筵) 자리에서도 반대가 이어졌다. 임금이 “3년 안에 있어서는 소상(小祥), 3년 뒤에는 기신재(忌辰齋)라 이르는데, 지금 만약 재를 지내지 않는다면 선왕·선후의 기신재도 파해야 할 것이다”라고 응수하자, 신하들은 “아울러 기신재까지 없애자는 것입니다”라며 한 발 더 나아갔다.(‘연산군일기’ 11권, 1년 12월16일.) 당시 신하들의 기세는 매우 극렬하여 ‘실록’에만 스무 건 가까이 수륙재 반대 기사가 보고되고 있다. 또 한 해가 지나 대상 때가 되었을 때에도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었다.(‘연산군일기’ 20권, 2년 12월13일.)
연산군 재위 초의 이 수륙재 논쟁은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먼저, 신료들의 반대가 전에 없이 극심해졌다. 이전에도 수륙재에 부정적인 기류가 없지 않았으나 연산군 때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둘째, 반대를 주도한 세력이 언론삼사의 신진 사림파(士林派) 관료들이었다. ‘성종실록’에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며 정사를 논한 강연 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성종 대에 사림이 활발히 정계에 진출한 사정을 반영한다. 이들이 성장하여 어린 새 임금(연산군은 즉위 당시 만 19세의 나이였다)을 이념적으로 압도하며 신권(臣權)을 내세우려고 했던 첫 시험대가 바로 수륙재 논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세종 2년(1420) 원경왕후의 사망으로 정비되었던 왕실의 국상 수륙재 관행이 70여 년이 지난 이때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성종의 경우를 둘러싼 임금과 관료들의 논쟁을 통해 그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첫째, 국상이 발행하면 칠칠재 및 소상재와 대상재가 수륙재로 설행되었다. 대상이 지난 뒤의 기신 때에는 기신재라고 불리는 불교 행사가 수반되었다. 수륙재와 기신재를 구분하여 지칭했던 것으로 보아, 대상재까지는 수륙재의 형식으로 진행되고 기신재는 그보다는 간소한 규모의 불교식 의례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수륙재의 형식이라 함은, 조상의 영가를 대상으로 하는 제사를 불교식으로 지내되 그 규모를 해당 영가 뿐 아니라 무주고혼까지 모두 불러 시식을 베푸는 대규모의 형식으로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게 치러진 기신재는 오늘날의 천도재와 유사하게 불보살단과 신중단에 공양을 올리고 하단의 영가에게 대령, 관욕, 시식 등의 절차를 진행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칠칠재와 소상재 사이의 백일재는 ‘성종실록’에까지는 기록이 보이지만 연산군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세종 6년(1424) 전국의 공인 사찰을 36개로 정리할 때 통상의 사원전(寺院田) 이외에 수륙위전(水陸位田) 100결씩을 더 받은 사찰이 개성의 관음굴과 경기도의 진관사였으므로(‘세종실록’ 24권, 6년 4월5일), 국상의 수륙재를 주관한 기관은 진관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구체적인 설행장소는 진관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장의사, 봉선사, 정인사 등 여러 사찰에 돌아가면서 배당되었다.
당시 한양의 4대문 안에는 세종 이래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로 지정된 흥천사(현 정동 소재)‧흥덕사(현 동대문 안 소재)와 함께 세조 때 새롭게 중창된 원각사(현 탑골공원 소재) 등이 존재했지만, 국상의 불교 재례(齋禮)는 그러한 대형 도심사찰보다는 한양 인근에 위치한 왕실의 원찰들에서 주로 행해졌던 것 같다.
봉선사와 정인사는 성종 때 세조와 의경세자의 원찰로 지정되어 새롭게 중시되기 시작한 사찰이고, 장의사는 진관사와 함께 국초부터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찰로서 관료들의 독서당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음을 이전 글에서 확인한 바 있다. 그러니까 왕실 제사의례로서의 수륙재와 기신재는 국가와 왕실이 주최하고 진관사가 주관하여 한양 인근의 여러 왕실 원찰에서 번갈아가며 설행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진관사 스님들의 노하우로 행사의 음식과 각종 장엄물이 준비되었을 것이며, 이미 세종 1년(1419) 사찰노비가 혁파되었으므로(‘세종실록’ 6권, 1년 11월28일) 스님들이 손수 정성껏 제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연산군 대 신진 사림세력의 수륙재 반대 운동은 군권(君權)에 대한 신권의 도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념과 사상을 존숭하여 불교를 공격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즉위 초 신료들에 대해 군권을 바로세우며 통치에 임했던 연산군은 재위 10년이 지나면서 급격히 폭정으로 전회하였다. 조선 초 국정의 파트너로 존중되었던 불교는 서서히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nirvana10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