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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정(원광대학교 HK마음인문학연구소)
I. 동학과 천도교
동학이 의암 손병희에 와서 천도교로 바뀜은 동학혁명 이후 정부의 탄압과 시대적 정황이 맞물린 것이기도 하지만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는 근대화운동을 상징하기도 한다. 손병희가 문명개화로 눈을 돌린 것은 동학의 시대적 조응이었다. 천도교 3.1운동은 동학의 역사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그치지 않는 논쟁은 동학과 천도교의 구분을 둘러싼 논의이다. 과연 동학과 천도교는 구분되어야 하는가? 강재언의 경우는 동학과 천도교를 동일선상의 사상적 일체로 보는 반면 조경달, 박맹수 등은 이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는 갑오년 봉기 이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동학의 분화현상에 대해 적절하게 고려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학이 분화된 측면은 분명하지만 동학과 천도교를 별개로 보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고 본다. 동학과 천도교를 분리시킨다면 동학과 3.1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단절시키는 것이 되고, 동학혁명이후 문명개화운동의 연장선 속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의 근대국가수립의 맥을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박맹수가 비판하는 바는 동학과 근대화를 구분시켜보고자 하는 것에서 기인하고 근대문명과 동학사상을 일체화시킴으로 해서 동학이 본래 지니고 있던 보국안민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점차 약화되었다는 점의 우려인데, 의암에 의하면 전통이란 정체되어 있는 어떤 원형의 전달이 아니라 다양한 힘들에 의해 변화, 생동하는 흐름으로써 말해진다. “천도의 근본 원리는 불멸이지만 시세의 변화에 의해 방법은 변한다.”는 것이다. 동학혁명 이후 그들의 변혁운동은 동학을 토대로 하면서 용시용활(用時用活)하는 변통을 갖추는 것이 필요했다.
또한 최동희는 교리적으로도 동학과 천도교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데 그는 『각세진경』에서 시천주 대신 侍天이라고만 기록되어 主자가 탈락하고 있음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본래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주의 주는 하늘에 대한 존칭을 뜻하는 것인데 천도교에 들어와 탈락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천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늘을 모시는 것으로 이것은 하느님의 의지적 성격을 부정하려는 의식적인 의도”라 하였다. 시천주(侍天主)가 아닌 시천(侍天)에서 말하는 천은 만물의 생성을 설명하는 원리, 또는 원소를 뜻하기에 존경의 대상일 수 없고 따라서 존칭을 뜻하는 ‘님’을 붙일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해석이다. 동학의 天은 기독교의 인격적 神의 개념과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인간과 만물 자체에서 살아 활동하는 신령한 한울님이기에 主자가 붙든 안붙든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천도교의 근대 문명에 대한 이해는 근대국가수립에 토대를 둔 것으로 이는 손병희의 『삼전론(1902)』에서 표명된다. 손병희는 道戰·材戰·言戰, 즉 도덕, 경제, 법률 등의 세 가지를 중심으로 시대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정치개혁을 말했고, 국가문명의 궁극을 도덕에 두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道義의 시대”와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 기운”,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투사함” 등의 문구는 패권주의에 반하는 천도교 근대국가수립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천도교는 갑진개화운동의 일환으로 憲政硏究會(1905) 창립에 참여했고,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를 결성했으며 신민회 활동을 했다. 그들의 근대국가수립의 열망은 1919년 3.1운동을 거쳐 임시정부수립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3.1운동은 자주독립과 근대국가 창설을 위한 민족운동이자 민족정체성 확립이다. 3.1운동으로 탄생한 임시정부수립은 개화기 근대국가수립운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 당시 임시정부안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임시정부를 세워 국내외 독립운동을 이끌고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선포된 것은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 측의 임시정부안(대한민간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이 제일 앞선다. 조선민국임시정부안은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가장 양이 많고 구체적이다. 조선민국임시정부헌장은 “전국 300여 처에 일어난 3.1운동에 의한 국민의 신임을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한다.”고 밝히고 있고 임시정부의 주권적 근원이 3.1운동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2천만 민중의 이름으로 고한 3.1운동의 자주와 독립의 선언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민주공화정의 탄생이자 근대국가수립의 승인이었다.
II. 3.1독립운동과 천도교
천도교는 3.1운동을 주도했다. 천도교는 운동의 계획과 준비를 주도하였고 각 종단과 학생측을 포섭하여 통합시키는 일을 주선하였으며, 기독교 측에 거사자금을 조달하는 등 운동자금을 전액 부담하였고, 선언문의 작성 인쇄 제작 배포를 전담하였다. 그리고 천도교내 조직뿐만 아니라 기독교, 불교의 연합을 이끌어냈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제휴를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은 이승훈이었는데 그는 평북지방을 중심한 장로교파와 서울을 중심한 감리교 각파의 움직임을 합류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천도교는 기독교 요구를 염두에 두어 독립청원 방식을 기존의 독립선언 방식과 병행하도록 결정하였는데 기독교를 대표한 이승훈은 이에 전폭적으로 동조하였으나 감리교파 박희도나 정춘수, 오기선 등은 독립운동 전술은 독립청원만을 유일한 방식으로 채택하려 하였다. 박희도는 천도교가 과격한 수단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않을까 의심하면서 기독교 단독운동을 모색하기도 하였고 오기선은 독립선언을 말하자 대표명단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불교측과의 협의는 최린이 일본 유학 때 알게 된 한용운을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하면서 본격적인 협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도주 명의로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각 지역의 교구장들에게 명하여 49일 특별기도가 끝난 2월 22일 이후에 교구의 상황 보고를 겸해 상경하도록 하여 3.1운동의 조직적 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의 만세시위에 참여케 하고 이들은 3월 2일 두 번째 만세시위를 끝내고 각 지방에 돌아가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다.
일제의 무단통치라는 상황에서 민족의 독립운동을 거사한다는 것은 전국적 조직체나 사회단체가 주도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도교 지도층은 3.1운동의 비폭력적 수행을 위하여 독립운동의 대중화도 함께 추진하였다. 평화적 시위로 무력봉기 못지않은 위력을 과시하려면 전민족이 참여하는 시위운동이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민족대표를 선정한 것도 전민족이 참여하는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손병희는 3.1운동을 결심한 후 최린, 권동진, 오세창 3인을 참모로 하여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원칙을 먼저 정했다. 이병헌에 의하면 3.1운동의 시작은 1910년 이전으로 소급된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한 달 20일 전인 동년 7월 2일에 일반 교도들을 모아 놓고 독립운동의 뜻을 피력했다. 1912년 4월 15일부터 우이동에 신축된 봉황각에 전국의 교인 우수 지도자를 모아놓고 한울님께 기도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연성수련회를 시작하여, 1915년까지 3년 동안 일곱 차례 열고, 以身換性을 강조하였다. 연성수련회는 바로 道戰을 의미하였다. 손병희의 비폭력 독립운동의 발략은 이미 1902년부터 간직해 온 것이었다.
1918년 12월 1일에는 서울 대교당 기공식을 갖고 동월 6일 전체 교인들에게 49일 특별기도회를 명하였다.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 특별기도를 실시하도록 전국 교구에 시달하고 오후 9시에 일제히 촛불을 밝히고 기도식을 봉행하게 하였다. 또한 인일기념에 상경한 간부들을 상춘원으로 불러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도 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보국안민이 되고 못되는 것은 새해 1월 5일부터 시작하는 특별기도에 달려 있으니 정성껏 시행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는 1919년부터 2월 25일까지 계속되는 행사로서 3,1거사를 앞에 두고 전국 교인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굳은 의지를 갖도록 하는 준비운동이었다.
천도교 측 민족대표로 선정된 인물들은 첫째, 개화파 관료들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손병희와 교유한 후 동학에 입교한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권동진, 오세창, 최린, 양한묵, 이종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동학시대에 입도하여 손병희 휘하에서 동학학명에 참가하고 천도교 장로로서 활동한 인물들이 주목되는데, 이종훈, 홍병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지방의 지도자로서 서북지역 즉 평안도 출신의 도사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평안도는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손병희가 동학을 본격적으로 전파했고 천도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지역이다. 요컨대 민족대표로 선정된 인물들은 손병희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입교하였거나 동학혁명 때 휘하에서 활약하거나 손병희가 포교하였던 평안도 지방의 두목을 중심으로 선정되었다고 하겠다. 여러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교회조직과 연원조직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독립만세운동의 사실이 전파될 수 있었던 데 연유한다.
III. 3.1운동과 『조선독립신문』
천도교 3.1운동에서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조선독립신문 발행을 주도한 인물은 보성사 사장과 월보과 과장을 맡고 있던 이종일이었고 천도교회월보 주필이던 이종린이 창간호 원고를 집필했으며 발행에 따른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천도교 대도주 박인호와 이 신문의 사장으로 올라 있는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장 윤익선 및 인쇄를 담당한 보성사 감독 김홍규 등이 주요 관련 인물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의 명칭은 이종린이 정하였으며 사장 명의는 이종일로 발행하려고 하였으나 이종일은 독립 선언 후 일제에 체포될 것을 각오하였기 때문에 박인호의 의사를 좇아서 윤익선의 이름을 넣기로 하였다.
천도교는 삼일운동에서 조선민중들에게 조선 독립 선언의 취지와 독립사상 고취 및, 임시정부수립을 알리기 위해 이종일 등으로 하여금 1919년 3월 1일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제1호를 발행하였다. 제1호의 기사를 보면 ①“조선민족대표 손병희, 김병조 씨 외 31인이 조선건국 4253년 3월 1일 하오 2시에 조선독립선언서를 경성 태화관에서 발표하였는데 동대표 제씨는 종로 경찰서에 拘引되였다더라.”는 것. ②“대표 諸氏의 信託, 조선민족대표 제씨는 최후의 一言으로 동지에게 고하야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노니 나의 신령한 형제들은(吾神靈兄弟)는 우리들의 素志를 관철하여 何年何月까지든지 我 2천만 민족이 최후의 1인이 남더라도 결단코 난폭적 행동이라던지 파괴적 행동을 勿行할지어다. 1인이라도 난폭적 파괴적 행동이 유하면 이는 永千古不可救의 조선을 作할지니 千萬注意하고 천만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③“全國民響應”이라 하여 대표들이 拘引되는 동시에 전국민이 제씨의 素志를 관철하기 위하여 일제히 향응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는 33인의 민족대표가 태화관에서 3월 1일 오후 2시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민족대표들의 순국 결사의 결의와 민족에게 보내는 대표들의 신탁을 밝히고 있으며 셋째는 그들의 운동계획이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될 것을 전망하는 내용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은 서울 시내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배부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민중에게 널리 읽혀졌다. 시위 학생들이 나누어 맡아 배부하기도 하고, 수십명 수백명이 신문 보급을 담당하였다. 3월 6일에는 배달 관계자 63명이 한꺼번에 체포되기도 하고, 3월 15일 밤부터 3월 16일 아침까지는 서울 시내 일원에서 330명에 달하는 독립신문 배달 관계자가 체포되었다. 삼일운동의 일제 재판기록을 보면 『조선독립신문』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월 1일 손병희 등이 독립선언서를 발포하여 因하야 그 선언서 발포의 전말을 기술하고 또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야 국헌을 문란케 하는 취지를 기재한 조선독립신문을 일반에게 반포하니 경성에서는 각처에서 이에 의하여 조선독립에 관한 황당무계한 사실을 날조하고 또는 全鮮에 亘하야 봉기한 독립운동의 풍문을 과장하는 등 불온한 文辭로서 독립사상을 고취 선전함과 같이 문서를 간행 반포하야 讚揭하는 자가 속출하얏더라.”
한편 3월 3일자 조선독립신문(제2호)에서는 “假政府組織說, 日間 國民大會를 開하고 假政府를 組織하며 假大統領을 選擧하였다더라, 安心 安心 不久에 好消息이 有하리라.” 하여 3.1독립선언이 있은 지 이틀 만에 임시정부의 조직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절차와 정부형태까지 명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3월 5일자 조선독립신문(제3호)에서는 “십삼도 각 대표자를 선정하여 3월 6일 오전 11시 경성 종로에서 조선독립인대회를 개최할 것이므로 신성한 我 형제자매는 일제히 회합하라.”하였다. 이는 국민대회의 성립요건, 즉 13도 각 대표자의 참석, 개최 일시 및 장소와 대회 명칭(조선인독립대회)을 일반에 알리는 것이고, 이는 3.1 독립선언이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천도교 지도부는 임시정부수립구상에 대하여 국민적 합의를 거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독립신문을 통하여 발표된 국민대회라든가 13도 대표자회의가 그러한 절차를 밟기 위한 수순이었다. 천도교에서는 3.1운동을 일으킬 때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假政府案[과도정부]으로서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간정부를 선포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3.1운동을 기하여 조선에 민주정체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천도교 지도자들이 투옥이 됨에 따라 정부수립의 일은 진전되지 않았고 정부수립의 일은 기독교의 헤게모니 안으로 흘러갔다.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는 천도교의 정부수립안을 부인하고 기독계가 주도하여 임시정부 수반을 구성하고자 한 일련의 권력 쟁취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천도교측 청년인 이봉수라는 인물이 3.1운동 당시 국내 국외를 출몰하여 정부 조직에 노력하고 손병희로 대통령, 박영효로 부통령, 이승만으로 국무총리로 천거할 뜻을 秘傳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천도교측의 노력이 상해에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손병희가 영어의 몸이 된 상태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봉수를 보내 다시 천도교의 의향을 물었고 천도교는 상황을 인정하여 상해의 사람들에게 맡겼을 것이다. 이에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조직안은 폐기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로운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 당시 대통령을 정부수반의 명칭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손병희 측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는 것일 수도 있다. 나중에 이승만의 집요한 요구에 따라 이승만이 대통령 호칭을 쓰게 되지만 말이다.
IV. 3.1운동 당시의 임시정부수립안
3.1운동 이후 선포된 임시정부안은 총 6종으로 분류된다. 그것은 대한민간정부,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안이다. 이 중 대한민간정부, 대한국민의회, 조선민국임시정부는 손병희를 수반(首班)으로 하고 있고 신한민국정부는 이동휘를, 한성임시정부와 상행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고 있다. 기존연구를 토대로 각 정부수립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간정부
천도교 민족대표 이종일의 비망록에 따르면 3.1운동이 성공할 경우 일제로부터 정권을 이양받기 위한 과도정부로서 대한민간정부를 수립하고 그 본부를 천도교중앙총부에 둔다는 계획하에 정부각료들의 인선까지 마쳤다.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오세창,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부장관 이동녕, 외무부장관 김윤식, 학무부장관 안창호, 재무부장관 권동진, 군무부장관 노백린, 법제부장관 이시영, 교통부장관 박용만, 노동부장관 문창범, 의정부장관 김규식, 총무부장관 최린이었다.
천도교는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 등을 여러 인사들과 함께 주도하면서 근대국가수립운동에 힘써왔고 임시정부수립구상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거치는 절차를 도모했다. 조선독립신문을 통해 국민대회라든가 13도 대표자회의 발표는 그러한 절차를 밟기 위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
1907년 이래로 수십만의 조선 동포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던 블라디보스톡에는 여러 조선인 단체들의 전로한족중앙총회(1917)가 결성되어 조국의 독립운동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들은 헤이그 밀사 파견과 안중근 의거에 지역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었고 의병장 유인석, 간도관리사 이범윤 등의 영향으로 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구한국참령 이동휘가 노령회 회장으로 있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로 확대개편하고 윤해와 고창일 등의 대표단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3월 17일 대한민국의회는 독립선언서를 반포하고 21일에는 대한독립과 일본 통치의 철폐, 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등 5개항의 결의문과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 탁지총장 윤현진, 군무총장 이동휘, 내무총장 안창호, 산업총장 남형우, 참모총장 유동열, 강화대사 김규식 등을 추대하는 명단을 발표하였다.
3. 조선민국임시정부(서울)
조선민국임시정부는 4월 9일 서울에서 일본경찰이 압수한 불온문서로부터 알려진 것인데, 이는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조선민국임시정부 조직을 선포한 것이다. 조선민국임시정부는 『조선독립신문』 제2호에서 밝힌 바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한다는 원칙과 부합하면서도 조선자주당과의 연합 형태를 취하고 있다. 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장정은 12장 33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독립선언 후 국내외에서 발표된 임시정부 조직안들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며 짜임새 있는 것이었다. 조직은 正都領 손병희, 副都領 이승만, 내각총무경 이승만, 외무경 민찬호, 내무경 김윤식, 군무경 노백린, 재무경 이상, 학무경 안창호, 법무경 윤익선, 식산무경 오세창, 교통무경 조용은, 만국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할 민국외교위원 이승만, 민찬호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간정부안과 조선민국임시정부안 모두 손병희를 수반으로 하고 있지만 조선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간정부안과 달리 이승만을 비롯하여 미주한인사회의 인물들이 대폭 늘어났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기독계를 의식한 결과라 할 수 있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외교 및 선전의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4. 신한민국정부(서북지방)
1919년 4월 17일 철산, 선천, 의주 등 서북지방에서도 신한민국정부를 조직하고 約法 7개조를 제정하여 이를 선포하였다. 이 선언서는 삼일운동 이후 일제의 비인도적 폭력을 규탄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하였음을 공포하면서 집정관 이동휘, 국무총리 이승만을 비롯한 정부각원의 명단과 경제적 공약 6개조가 명시되었다. 이 정부의 특징은 집정관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러시아 영내와 만주에서 활동해 온 이동휘를 최고 지도자로 추대했다는 점이다. 신한민국정부는 이춘숙, 홍진의, 강대현 등이 앞장서 만든 정부이며 그 배후에는 러시아 영내의 한인지도자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 한성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는 1919년 4월 23일 서울 시내에 배포된 전단에 의하여 알려진 정부인데 이는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들이 그 배후세력이라 할 것이다. 조선민국임시정부가 조선국민대회, 조선자주당 연합회의 명의를 사용한 것을 따라 한성정부의 경우도 그들의 대표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국민대회라든가 13도 대표의 명의를 활용했다. 이는 주로 유림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물들로 구성된 정부안으로 이승만을 정부수반으로 명시하고 있고, 대부분 구성원이 기독교인 중심으로 짜여져 있으며 지역적으로 기호출신이 우세하다. 이는 천도교측에서 만든 대한민간정부안이나 조선민국임시정부와 대조적이며 함경도출신 일본유학생들이 조직 선포한 신한민국정부안과도 대별된다.
원래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은 3월 중순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한남수 김은국 홍면희 이규갑 등은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기로 뜻을 정하였으나 이 때 지방의 국민대표들은 오지 않아 13도 대표자회의는 열리지 못했다. 이 때 회의에 참석한 종교단체 대표들을 보면 천도교는 불참했고, 불교와 유림은 각 1명 뿐인데 기독교측에서는 5명이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한 한성정부 조직에 앞장선 이규갑과 홍면희가 국민대회 개최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 4월 중순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는 것은 곧 국민대회가 비밀리에 조직된 임시정부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겉치레적 절차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또한 국민대회 개최건으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15명인데 이 중 8명이 지도부라 할 수 있고, 그들은 모두 국민대회를 개최하려고 한 사실만을 인정할 뿐 자신들이 정부조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정부조직은 이규갑과 홍면희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1919년 3월 상순부터 자신들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계획하는 일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한성정부 조직은 각 종교단체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전체 인적구성을 볼 때 기독교와 유교 측 인사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기독계 인사들은 정부조직에 참여한 뒤 상해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잠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검거되어 불기소처분을 받거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기독교측에서는 한성정부 선포 이후의 사태에 충분히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성정부가 선포되기 하루 전인 4월 22일 신흥우가 미국에서 개최되는 감리교 백주년기념대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출국했고, 이때 신흥우는 한성정부의 선포문건을 비밀리에 갖고 나가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신흥우는 오기선, 이상재, 박승봉과 더불어 한성정부의 조직에 간여했던 배후 인물로 추정된다. 신흥우의 경우는 공공연히 친일파라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3.1운동에 방관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오기선은 3.1운동 준비과정에 감리교측 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청원을 주장하다가 독립선언으로 결정되자 선언서의 서명에서 빠진 인물이다. 장로교 대표로서 한성정부 조직에 참여한 장붕과 박용희는 이상재, 박승봉 등과 함께 연동교회에 다녔었고 3,1운동 전후에서 서로 접촉하고 있었다. 함태영과 같은 대한제국기와 일제 초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법률가들이 연동교회의 교인이었고 한성정부의 조직에 홍면희, 권혁채, 한성오 같은 변호사 또는 현직 검사들이 참여한 것도 이들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6. 상해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3.1운동 후 3월 하순부터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 조계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현순을 총무로 하여 국내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홍보하면서 삼일운동 소식을 각국의 통신과 신문에 제공하고 각지 동포에게 알렸다. 4월초에는 정부 조직의 관제 제정과 국무위원 선임 등을 구체적으로 토의하였으며 4월 6일에는 정당으로 통일당을 발족하였다. 1919년 4월 11일에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국호, 관제, 임시헌장 제정, 의정원 간부 및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선정을 하였고 4월 1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 때 의정원에서 선출한 국무위원 임원은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 서기 이광수, 백남칠, 의원 현순, 신익희 등이고, 국무총리 이승만 외에 각부 총장과 차장을 의정원에서 선출하였다. 국내의 한성정부와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를 모두 합류시킴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한성정부안의 영향이 컸다고 할 것이다.
7. 임시정부와 이승만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 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민족대표들을 중심으로 정부각료로 선임한 대한민간정부와 조선민국임시정부의 경우는 독립을 전제로 한 [과도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신한민국정부와 노령정부, 한성정부는 국외에 본부를 둔 독립운동 [최고지도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은 3.1 독립 선언 후 임시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천도교와 기독교간의 갈등이 은연중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한성정부수립에 천도교도 일정 부분 참여했지만 한성정부는 이승만을 염두에 둔 친미 기독교계열의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상해임시정부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에서 수반으로 추대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비쳐졌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운동노선이 외교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가장 주된 관심의 대상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잘 수행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이승만이 주목된 것이 그가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된 배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성정부를 주도했던 기독교계의 입장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기독교를 매개로 미국을 이상적인 국가로 상정했고 장래 한국의 독립도 미국의 지원 여부에 달려있다고 확신한 친미외교론자로서 “독립운동 인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을 동양의 처음되는 예수교국으로 만드는 것”이라 공언했다. 그리고 3.1운동은 토착 기독교 목회자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고 주장하였고 나아가 그는 3.1운동 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들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물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신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임을 암시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은 기독교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신생기독교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지원해야 할 도의적 의무가 있다는 논리를 도출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불리할 때마다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48년 제헌국회가 처음 열렸을 때도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주창했다. 제헌국회의 정부수립이 남한단독정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곧 “29년만의 한성정부 부활”임을 그는 역설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선출에서 자신이 유일한 적임자임을 정당화시키려는 것과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정당화하고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하였다.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로 선출된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수반(국무총리)으로 추대되었고 이후 미국에서 국무총리가 아닌 한성정부의 대통령으로 행세했다. 즉 자신을 대통령으로 칭하고, 한성정부 수립건을 열강에 통지하여 이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가 안창호에게 보낸 통신에는 “(상해)임시정부안이 한성정부안과 상충되게 되면 우리의 대의를 해칠 것”이라 하여 임시정부를 비난하였다. 통합임시정부가 나중에 정부수반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게 된 것은 이승만의 줄기찬 요구 때문이었다. 심지어 상해임시정부가 자신을 탄핵했을 때, 그는 한성정부가 정통이라고 내세우기까지 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한성정부 정통성의 근거로 활용되는 13도 대표대회나 국민대회는 실재하지 않았다. 13도 대표대회는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참석자는 기독교계 인물들과 경인지역 거주자 몇 명이었고 4월 23일 국민대회 역시 소수 학생의 시위운동으로 종결되었다. 13도 대표회의와 국민대회는 국민적 합의 절차를 강조하기 위한 형식이었을 뿐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 노선은 지배자에게 청원을 하거나 외세에 의존하는 사대주의적 방법으로 독립을 하려한 것이었고 일제 말기에 가서 이승만 노선에 임정이 가세했다는 것은 해방 공간에서 또 다른 교훈을 삼게 된다.
V. 3.1 독립선언서의 민족정체성과 한국인의 ‘마음앓이’
한국의 근현대사는 ‘民의 한(恨) 많은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그러하고 3.1운동과 같은 일제하의 수많은 독립운동이 그러하고 해방공간의 민족·통일운동 역시 그러하다. 그 한(恨)은 실패와 좌절 그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더 큰 요인은 역사의 진실과 민중의 삶이 왜곡되는 정체성의 혼란에 있다. 필자는 이를 “마음 앓이”로 표현하고 싶다.
3.1 독립선언서는 민중의 독립에 대한 절실하지만 막연한 감정상태에 머물러 있는 의식을 구체화시켜 조리가 선 상징체계로 형상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중들이 확신을 가지고 운동에 참여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이 역할을 담당했다. 최남선이 말했듯이 독립선언은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이천만 민중의 誠忠’을 바탕으로 하고 ‘민족의 항구여일한 자유발전’을 위하여 선언된 민족의 독립은 “철두철미 민족 고유의 양심과 권능에서 발동된 것”이었다.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은 미래의 일로서 기필코 성취되어야 할 현실적 목표가 아니라 현실적인 사실로서 공표된다. 누구의 승인이나 인정과는 관계없이 스스로 자명한 사실로서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일 때 그것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같은 외재적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3.1독립선언은 조선의 독립이 쟁취해야 할 미래의 과제가 아니라 지켜나가야 할 현재의 사실임을 선포했던 자존과 正義의 정신이다. 조선의 자주독립이 어떤 외부적 근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자기정당성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할 때 이는 그 어떤 강권과 폭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잃지 않는 민족정체성의 선포이다.
독립선언은 민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시간적인 범위와 공간적인 전 영역이 그 하나로 결집되면서 민족정체성과 자체정당성을 부여하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 민족정체성이 조선인 스스로에게 각인되었기에 일제측의 잔인무도한 진압행위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광범위하게 지속될 수 있었다. 홍일식은 말하기를 “이는 3.1운동의 정신과 방법이 우리 민족의 정신적 근원에서부터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며, 그 핵심적인 자리에 民族自存의 정신이 놓이는 것”이라 했다.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의 선언은 동전의 양면이자 내면과 외면의 측면이다. 자주민의 내면적 정체성이 외면으로 드러난 것이 독립국이고 민주체제로서의 독립국은 민족정체성을 영위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그래서 독립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지켜나가야 할 근본 가치가 되었다. “죽음을 넘어서는 그들의 몸짓 속에서 조선의 독립은 정치적 현실로서의 목표가 아니라 이미 선취된 의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克明하고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자존의 正權을 영유케 하노라.”
독립선언은 조선인의 자주, 독립의 정체성을 공간적으로 세계만방에, 시간적으로 자손만대에 고하는 것이고, 민족자존의 바른 권리를 영구히 가짐을 선언함인데 이는 어떤 민족도 타민족에게 억압받지 않을 권리로서의 인류평등의 大義를 克明함이다. 조선의 민족정체성은 세계평화와 인류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선상에서 제시된다.
“반만년역사의 권위를 仗하야 이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誠忠을 합하여 이를 佈明함이며 민족의 恒久如一한 자유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 기운에 순응병진하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一天의 明命이며 시대의 대세며 全人類 共存同生權의 발동이라. 천하 何物이든지 이를 沮止 抑制치 못할지니라.”
즉, 조선독립은 반만년의 과거 역사에 의지해 있고, 현재 2천만 민중의 대의에 대한 충성이 합해져 미래의 영원한 자유발전을 위하여 널리 선포되며,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 기운에 순응해 함께 나아가고자 함이다.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 기운”이란 천도교가 조직한 조선민국임시정부안에서도 언급되었던 “道義의 시대”를 말함이다. 천도교가 지향했던 근대국가수립의 궁극은 “도덕적 문명”을 실현하는 것에 있었다. 이는 세계 열강들이 패권적 제국주의로 나가는 것에 대한 비판이요 저항이었다. 천도교는 국가문명의 지존을 도덕문명에 놓았고 개화기 대표적인 근대국가문명을 위한 교과서라 할 『국민수지(國民須知)』, 『유년필독(幼年必讀)』, 『초등교서(初等敎書)』에 이를 반영시켜 국민을 계몽하고자 한 바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초등교서는 도덕적 국가문명을 제기한 대표적인 계몽서이다. 조선독립과 양심과 도의의 시대를 향한 세계개조의 대기운에의 병진은 온 천하, 하늘(一天)의 명령이고 시대의 대세이며 전인류의 共存同生權, 즉 함께 생존하고 서로 더불어 살아 나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다.
“今日 吾人의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生營을 遂케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邪路로서 出하야 동양지지자인 重責을 全케 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여금 몽매에도 免하지 못하는 불안공포로서 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 문제리오”
조선의 독립은 일본의 침략과 억압에 대한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인이 정당한 생명을 영위하고, 일본을 잘못된 길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중국민의 불안공포를 없애는 동양의 평화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단계였다.
“아아 신천지가 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去하고 道義의 시대가 來하도다(필자 밑줄) 과거 전세기에 鍊磨長養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始하도다. 新春이 세계에 來하야 만물의 回蘇를 촉진하는도다. 凍氷雪寒에 호흡을 閉蟄한 것이 彼일시의 勢라 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니 천지의 復運에 際하고 세계의 變潮를 乘한 吾人은 아모 주저할 것 없으며 아모 忌憚할 것 없도다.”
그러나 독립선언에 나타난 신천지의 전개와 신문명의 서광은 그 빛이 강렬했던 만큼 그림자도 짙었다. 독립선언을 통한 민족정체감과 한국인의 自存과 자주, 公益과 公德의 문명의 진보를 위한 생명의 영위, 이 모두를 가능케 할 독립과 국가건설은 3.1운동의 실패로 좌절되었고, 조선 민족정체성에 깊은 혼란을 가져왔다. 근대적 국가 체제가 형성되기도 전에 식민지 공간에서 일제의 폭력에 노출되어 겪게 되는 고통과 억압의 삶은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 앓이의 징후를 보인다. 민중들이 끊임없이 창출하고자 했던 자주민의 자유와 독립국으로서 “도의의 시대”를 열어갈 문명 창조의 주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타자와 관계를 맺지 못하며 떠돌아다니는 “난민”과도 같다. 김홍중은 타자들과 함께 사는 연대의 기예를 알지 못하는 마음앓이를 한국근대의 전형적 마음 앓이로 간주한 바 있다.
한국은 3.1독립운동으로 민족정체성을 각인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물적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고, 근대를 주체적으로 소화해 내지 못했다. 일제가 강요한 식민지 근대 공간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은 늘 흔들려야 했고 스스로 구현한 근대국가와의 계약을 맺지 못한 체 허공을 떠돌아야 했다. 식민지 공간은 정신분열, 마음 앓이 그 자체였다. 한국인은 일본으로 동화될 수도, 조선인으로 살수도 없는 경계인이었다. 오늘날 남북의 분단 현실은 미완의 민족국가를 의미하고 민족정체성의 분열을 의미한다. 그 정체성의 상실과 왜곡에서 헤매이는 현대인들의 마음 앓이는 근대의 어두운 식민지 유산에 기인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물화되어 버린 ‘중층적 마음 앓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