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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1 - 오시는 예수님(1) :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
이사야 9:2 / 요한복음 1:9-14
어느 가정에서 연말인데 남편이 회사에서 매번 송년모임으로 밤늦게 술자리를 자주 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엉엉 울면서 전화를 겁니다. '여보, 누가 내 차에 핸들이랑 오디오랑 계기판 다 떼어가고 훔쳐갔어. 어떡해? '
그 소식을 듣고, 아내가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봤더니, 그 남편은 뒷자리에 앉아서 엉엉 울고있던 것입니다. 도둑이 훔쳐간 게 아니라, 술에 취해서 뒷자리에 앉아가지고, 도둑이 다 훔쳐갔다고 전화를 건거죠.
연말입니다. 모임 많으시죠? 막 취직한 교회 청년이 제게 찾아와서, 목사님, 제가 올해 회사에 처음 취직했는데, 송년 모임 술자리 등 여러 모임에 가는데 죄를 짓는 곳에도 가는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지혜롭게 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가요?
저는 수년 동안 동일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가지마라. 그런 자리에 지혜로운 방법으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죄를 지을 자리에 안 가면 됩니다. 피하면 되고요. 안 가면 됩니다.
손자병법에 병법이 무엇이라 있습니까? 36계 줄행랑입니다. 싸우지 못할 것이면, 도망치는 게 제일 좋습니다. 한 해 마무리 하는 한 달, 죄가 있는 곳은 피하시고, 신앙과 믿음의 삶으로 한 해를 경건하게 구별된 한 해를 마무리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나누기 원합니다. 신앙으로 한 해를 마무리 합시다. 신앙으로 한해를 마무리 합시다.
앞에서 제가 광고때 한 달 동안 설교 시리즈로 팀켈러의 '예수 예수' 라는 책을 제가 권면드렸습니다. 책 읽으시면서 나머지 한달, 2019년도를 신앙과 경건함으로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대림절 첫 날, 우리 오시는 예수님 첫 번째 말씀 시리즈로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설교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유학 시절 첫 해에 한 해라도 유학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가족들을 한국에 두고 저 혼자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첫 해에는 공동기숙사로 개인이 한 방씩 쓰면서, 그리고 세 명이 함께 쓰는 공동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미국 친구들과 함께 썼습니다. 한 친구는 네브라스카 라고 하는 아주 시골 동네에서 온 친구였고, 다른 한 친구는 시카고의 가난한 흑인 동네에서 온 흑인 청년이었습니다. 둘은 완전히 다른 성격으로써 다른 스타일,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흑인 친구는 교회에서 찬양 사역을 하는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늘 매일같이 찬양 사역을 하는데, 일이 끝나면 새벽 한시 쯤 기숙사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주 양식이 팝콘이었습니다. 새벽 1 시에 이 친구가 랩을 하면서 들어옵니다. 그리고 씻고 항상 그 새벽 1시, 2시쯤 팝콘을 튀겨 먹습니다. 새벽 1시에 제가 자고 있으면, 고소한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 아, 이 친구가 들어왔구나 라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때 영어를 배운다고, 새벽 1시에 그 친구, 흑인 친구를 기다렸다가 팝콘을 튀기면 제가 문을 열고 나가서 하이 Hi, 하와유 How are you? 하면서 같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랑 영어를 하면 새벽 1시에 제가 팝콘을 먹어야 합니다. 새벽 1시에 그 팝콘이 들어가겠습니까? 억지로 먹으면서 제가 영어로 공부했는데, 아직도 제가 영어로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할 때 코카콜라 두 잔 주세요 미국에서는 코카콜라를 코크 coke라고 합니다. 코크 두 잔 주세요 라고 하면 제게 찍어먹는 포크 fork를 갖다 줍니다. 아직도 그렇게 영어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야속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흑인 친구와 함께 살던 백인 친구는 자연주의 환경운동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밤에 불을 켜지 않습니다. 제가 저녁 수업을 늦게 듣고 오면, 기숙사 방은 블랙홀처럼 완전히 어둠 속에 빠져 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려면 복도를 지나가야 되는데, 복도가 시커멓습니다. 그럼 제가 벽을 잡고 이렇게 더듬더듬해서 제 방으로 들어갑니다. 너무 짜증나고 마음이 속상해서 하루는 복도의 불을 탁 켜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자연주의 환경운동가 백인 친구가 나오더니, 돈 라이트온 Don't light on 세이브에너지 Save energy라고 얘기합니다. 그 말은 '불 켜지마, 에너지 아껴야 돼' 입니다. 그럼 정말 화가 많이 나고 어이가 없지만, 제가 영어로 대꾸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런데 학기가 거의 끝날 때쯤 또 우울한 마음으로 저녁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에 가면서 야, 또 오늘도 그 어둠 속에 벽을 짚으면서 내 방에 들어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기숙사에 갔는데,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블랙홀 같은 그 복도의 저 끝에 한 촉짜리 촛불이 있는, 그 가짜 촛불로 쓰는 전구 있잖아요. 그 작은 전구 한 촉의 불이 저 끝에 켜져있는데 그 블랙홀 같은 그 기숙사 복도가 너무나 환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 방까지 정말 기쁜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제 방 앞에 작은 쪽지가 붙어있는데, 그 환경주의 자연주의 환경운동가 백인 친구가 이렇게 써서 부쳤습니다. 이디즈 포유 It is for you 너를 위해서 준비했어.
학기가 다 끝났는데,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 힘들게 제 방에 들어갔는데, 이제 마지막 한 주 남았는데, 이제서야 그 촛불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매일 잘 대해주는 선생님이 하루 혼내면, '우리 선생님 이상한 것 같아' 라고 얘기하는데, 매일 혼내고 매일 꾸중하는 선생님이 한번 칭찬해주면, 막 눈물을 흘리면서, '야, 이 선생님 너무 좋은 것 같아' 하는 것처럼, 제가 그 촛불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친구가 정말 좋은 친구였구나 라구요.
어찌 되었던 그때 제가 기숙사 복도의 그 어두움이 여전히 제 기억에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 진짜 어두워서 기도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때 그 시기가 제게는 참으로 인생의 어두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막 와서 수업을 듣는데, 정말 90% 도 이해를 못하는 수업을 듣는 겁니다. 영어도 실력이 안 늘고, 그때 제 딸이 막 100일이 지났을 때 제가 유학을 왔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보고 싶고, 아내도 보고 싶고, 한국이 그립고, 제 삶의 그 어두운 시기에 그 자연주의 환경운동가 백인 때문에 저는 그 어둠이 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같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매일 한 번씩 어두운 밤을 맞이하지요. 그런데 어느 때는 그 어두운 밤이 절대 암흑처럼 느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리적인 어둠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어둠이 있을 때, 내 생애 암흑기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그 어둠이 더 깊은 어둠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어둠이 그냥 어둠이 아니라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절대 암흑,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느끼지요.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직전에 이스라엘 땅은 절대 암흑, 칠흑같은 어둠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예언이 중지됐습니다. 유대 땅을 지배하던 바벨론과 바사제국이 멸망하고 헬라의 유럽의 헬라제국이 애굽에서 인도까지 점령을 합니다. 그런데 그 정복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이 일찍 죽으면서 헬라 제국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그의 부하들은 서로 황제가 되려고 권력 싸움을 할 때 그의 백성들과 식민지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됩니다. 헬라가 로마 제국으로 바뀌면서 국가가 안정이 되지않으니 곳곳의 식민지에는 더 악독한 총독을 보내서 더 강하고 혹독한 식민정책을 폅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권력싸움으로 폼페이우스에서 카이사르로, 카이사르에서 옥타비아누스로 왕권이 2, 30년 사이에 세 번이나 바뀌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또 가중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 범 로마 국가인데 평화가 로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칼과 무기로 로마의 이름으로 평화를 외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강력한 군사 정치를 펼치는 것이지요.
그 가운데 유대 땅은 헬라 시대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 당하고, 성전과 여호와의 이름이 신성모독을 당하게 됩니다. 안식일과 할례는 금지가 되었고, 성경에서 금했던 그 돼지를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단에서 제물로 바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종교가 전부였는데, 그 종교로 수치와 수모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다 백성들은 내부적으로 기득권과 식민국가인 로마제국을 향한 분노와 악한 감정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앞에 말씀드렸던 옥타비아누스 황제, 누가복음에는 아구스도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구스도에게 절대 충성하던 이두매 사람 이방인 헤롯이 유다의 왕이 됩니다. 그는 유다 민족의 정통성을 가지지 않은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저항하는 가족들도 다 죽였습니다. 친족들, 부하, 신하들, 백성들도 잔인하게 죽이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할 때 두 살 이하 아이들을 다 죽였다 라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도 바로 이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하지요.
그 안에서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의 목숨을 살리고자 몸을 사리며 외식된 종교생활을 하고 형식에 묶인 제사만 드리고자 합니다. 율법 논쟁에 탁상 공론에만 빠져있는 것이죠. 신앙이 전부인 유다 백성이 종교지도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바리새인 율법학자들, 그들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은 아무런 영적 위안과 소망, 격려와 위로를 백성들에게 주지 못합니다.
그때 백성들은 나라의 권세자들도 종교 지도자들도 또 세상 어떤 것도 소망과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집니다. 포기하고 낙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야말로 앞뒤가 꽉꽉 막혀있는 탈출구가 없던 암흑의 시대, 바로 그때 예수님의 탄생이 그때 이루어집니다. 어두운 밤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님들도 주변에 있는 분들을 만나면 우리나라가 그렇다 라고 얘기하십니다. 어른 우리 기성세대 뿐만 아니라, 청년 젊은 세대 우리 공부하는 어린 자녀들도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 어둔 밤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세대가 절망을 경험하고 낙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 뉴스에서 한국 교회 청년들이 이단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 젊은 세대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내 모든 얘기를 털어놓을 만한 존경할만한 어른이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당리당략과 진영 논리에 빠져 국민에게 소망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성공 지상주의에 빠져 있고, 교회를 기업처럼 생각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돈으로 생각하는 성직자들이 한국 교회에 있습니다. 영적 도전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을 바꿀 믿음의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 또한 교회 청년들, 젊은 세대들이 이단의 감언이설에 현혹이 되어서 이단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들을 탓할 상황이 아닙니다. 모든 세대가 절망에 빠져 있지요. 우리 교회 우리 신앙의 상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2019년 대림절 첫 주일에 어둡고 그늘진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여러분과 함께 이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왜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빛으로 비유하고 있을까? 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빛이 이 땅에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 사람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구세주의 구원자가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윤동주의 서시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시집에 서문에 있는 시지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윤동주 시인은 저희와 같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늘 이상적인 것을 추구했습니다. 지고지순한 저 높은 곳에 있는 그분, 그 하나님을 그는 시에서 하늘이란 표현으로 하나님을 늘 비유하고 은유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여기서의 바람은 인생의 풍파를 이야기합니다. 지금 오늘 설교대로 말씀드린다면, 암흑기의 어두운 밤에 인생의 시기, 시대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윤동주 시인의 시대의 일제 강점기를 이야기하지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여기서 이 별은 저 하늘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어둠 속에 별이 있으면 우린 빛을 보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그 빛인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바람에 쓰러지고 낙심하고 절망하며 죽어가는 그것들을 나는 그 별을 바라보며 사랑해야겠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신앙의 소명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저 하늘의 별이 빛나는한 바람이 불어도 그 빛은 나에게 내려온다 라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깊은 밤에 괴로워 할지라도 빛을 내는 별은 세상 풍파 세상 굴곡 세상 문제를 지나쳐 나에게까지 임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연약하고 나약한 조선의 문학가처럼 보였을지라도 내 나라 내 민족의 독립을 향한 결의는 결코 잃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오늘 밤에도 일제 강점기에도 이 절망에 가득한 어두운 내 인생의 삶 가운데에서도 저 하늘의 별이 바람에 스치울 지라도 나에게 내려올 것이다. 그것을 확신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에도 별은 빛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내려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선지자도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9장 2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흑암 사막의 그늘진 땅에 빛이 비춘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빛이 무엇일까?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매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흑암 가운데 빛, 사망의 그늘에 가운데 빛은 곧 한 아기를 통해서 이 땅에 올 것이다. 누구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아기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약의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참 빛 곧 세상에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 그 빛을 나의 구주로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해주고 계십니다.
바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이죠. 그 예수님이 빛이 셨다 라는 것을 마태복음은 또한 이렇게 증거합니다.
마태복음 27장 45절에 제 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9 시까지 계속되더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가실 때 마태복음 기자는 그 빛이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것을 45 절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지근 거리에서 예수님을 3년 동안 지켜보았던 베드로 사도도 예수가 바로 빛이었다 라고 이렇게 증거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시기에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심이라."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친히 빛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어둠 속에 우리가 절망과 낙심 속에 있는 그 어둠 속에 우리의 인생 속에 빛으로 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대림절의 때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 그 의미는 단순히 인생의 풍랑 가운데 이제 좋은 곳으로 안정된 곳으로 갈 것이고 내 인생의 시련과 역경 속에 복을 받게 된다는 단순한 의미일까?
윤동주 시인의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라는 의미가 단순히 기독교의 기복주의 적인 의미로만 해석된다면 윤동주의 이 시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윤동주를 비롯해 많은 신앙인들이 어둠과 그늘진 세상 속에 예수님을 빛으로 맞이하는 바른 영적인 신앙의 모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저는 그것을 빛 되신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질서를 찾게 해주는 것으로 맞이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질서를 찾아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시면 힘들고 괴로운 세상 속에서 복 받고 잘 되고 잘 나가게 되는 것으로 빛을 누리면 되는 것, 그 곳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신앙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 빛이 우리의 삶에 우리 절망되고 낙심될 우리 인생에 질서를 찾아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다는 거, 그리고 그 빛을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이제 어지럽고 답답한 인생의 질서를 찾게 해주고 길을 찾게 해주고 방법을 찾아준다는 것입니다.
미국 범죄학 이론에 브로큰 윈도우 씨오리 Broken window theory라는 것이 있습니다. 깨어진 창문 이론입니다. 자동차 2대을 갖고서 두대 다 트렁크를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한 대는 그대로 놓고, 또 한 대는 유리창을 깨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몇 밤이 지나고 오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트렁크만 열려있는 차는 그대로 있는데, 창문이 깨져 있는 차는 도둑들이 들어와서, 다 차 안에 있는 것을 뜯어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심리가 무질서화 되어 있는 곳을 느끼면, 그 곳에서 더 무질서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 정부에서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조금 어렵게 사는 곳, 그래서 창문이 많이 깨어져 있고, 많이 지저분한 곳을 오히려 화단을 꾸며 놓고 지금 보시다시피 벽에 아름다운 그림 그래피티를 만들어 놓고 청소를 자주 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범죄율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저도 이것을 기독교 교육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제가 한 20년 전에 아동부 사역자 할 때 1학년부터 6학년까지 120명 아이들을 데리고 사역을 했습니다. 1학년 애들이 떠들면 6학년 애들이 떠들고, 4학년 애들이 떠들면 3학년 애들이 떠듭니다. 어떻게 하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제가 잘 관찰해 봤더니 한 친구가 떠들기 시작하면, 다 떠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를 불러서 떡볶이도 사주고 사탕도 사주고 자주 칭찬해주고 제가 잘 대해줬습니다. 그리고 몇주가 지나서 예배 직전에 그 친구만 따로 불렀습니다. 오늘 설교할 때 우리 조용히 해 보자 알았지? 예 알겠어요. 전도사님, 그 친구가 설교 때 조용하니까 전체가 조용해집니다.
여러분 무질서한 곳에는 계속 무질서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무질서한 곳에 어둠이 있는 곳에 절망이 있는 곳에 빛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질서를 만들어주십니다. 질서가 오게 되면, 빛이 오게 되면 변화하고 새로워집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 이렇게 증거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화평의 하나님, 조화의 하나님,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임하시면 우리 가운데 그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우리의 삶에 질서를 잡아주고, 질서있는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우리 인생은 결코 길을 가다가 넘어지지 않습니다. 빛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우리 영혼은 결코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빛은 우리에게 영광과 복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영광과 복된 삶을 위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환히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 그 빛과 같은 진리의 방법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빛을 예수 그리스도로 맞이합니다.
제가 대학 때 등산을 좋아해서 여름 방학 때는 항상 큰 산 하나씩을 등산했습니다. 하루는 지리산을 능선을 쭉 걷는 종주를 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에 올라 가지고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천왕봉에서 하동 있는 쪽으로 내려가는 것인데,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로 3박 4일 코스를 2박 3일로 잡고서 친구 하나랑 같이 그 종주를 시작했습니다.
일정이 빡빡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기가 참 힘들었는데 랜턴을 끼고 밤 길을 길을 가다가 야 더 못 가겠다 여기서 평평한 곳을 찾아서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 새벽에 일어났다가 밖에 나오고 저는 인생무상을 경험했습니다. 텐트 바로 옆이 낭떠러지였습니다. 한 걸음만 더 갔으면 저는 저 세상 사람이 될 뻔 했습니다.
제가 청년부 사역할 때 예화를 얘기했더니 막 청년들은 좋아하더라고요 (좌중 웃음). 여러분, 안타까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실력이 있고 능력 있고 높은 지위가 있어도 어둠속을 걸어가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낭떠러지에 떨어질지 모릅니다. 불안과 걱정의 삶이 어둠 속에서는 계속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어두운 길을 걷는 우리에게 내 발에 등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질서를 아기 예수를 통해 빛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먼저 빛으로 오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혼돈과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속에 하나님은 여전히 어둡고 혼탁한 무질서한 세상 속에 빠져있는 우리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질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질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줄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늘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또한 소망과 위로 가운데 늘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의 한 주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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