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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파미르종주기-소발율국, 길깃트(Gilgit)
(1) 『대당서역기』따라, 길깃트로
‘파미르천’이라 불렀던 조로쿨호수를 지난 현장법사의 발길은 바로 파미르고개를 넘어가는 순리적일 것이다. 그러나『대당서역기』의 순서에는 다소 엉뚱한 곳이 나타난다.
‘파미라천’ 남쪽으로 산을 넘으면 발로라국이 있는데 금과 은이 많이 난다. 특히 금의 빛깔은 마치 불과도 같다.
조로쿨호수의 남쪽 산이라면 힌두쿠시 산맥을 말한다. 그리고 발로라국(鉢露羅國)1)이라하면 현 파키스탄 북부 산악도시이며 또한 카라코람하이웨이(KKHy)2)상의 유명한 거점도시 길깃트이니 현장의 귀국로와는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앞뒤를 곰곰이 헤아려보니 이 나라는 현장에게 있어서 이른바 ‘전문국(傳聞國)’-그러니까 직접 가지 않고 주워들은 사실을 기록한 나라에 속한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앞의 상미국, 치트랄(Chtral)과 같은 경우에 속한다. 아마도 현장은 귀국 시에 파미르고원을 지나가면서 스스로 편집한 비망록격인 지도책에 표시되어 있는, 힌두쿠시산맥 너머 계곡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17년 전 인도로 들어갈 때의 기억을 되살려 문득 이 대목에다 발로라국 이야기를 끼워 넣은 것으로 여겨진다.
▼ 길깃트의 거리 풍경
▼ 연운보에서 길깃트까지
그래서 필자도 잠시에 생각끝에 행로를 수정하여 현장의 붓끝을 따라 소발율로 선회하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 이유는 먼저 회에 이야기하다가 만 ‘고선지 루트’의 나머지 일정을 마저 답사하려는 의도를 첫째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물론 그 이외에도 길깃트는 파미르고원의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곳으로 『왕오천축국전』이나『송운행기』에서도 비중이 큰 곳이기도해서 언젠가는 반드시 들여야만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도상으로 보면 와칸주랑에서 힌두쿠시의 부로길과 다르코트 고개를 넘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루트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길은 이미 오래전에 인적이 완전히 끊긴 봉쇄된 길이다. 그렇기에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중국에서 쿤제랍고개(Khunjerab Pass, 4,693m)를 넘어 파키스탄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횡단로인 카라코람하이웨이를 통해 길깃트로 향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 반대반향으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어느 방법으든 모두 쉽고 간단한 루트는 아니다.
▼ 유명한 가이드북 론니풀래닛(Lonely Planet)편 <Parkistan & the Karakoram Highway> 표지
▼ 인더스강의 현수교
▼ 카라코람 하이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길로 알려져 있다.
▼ 카라코람의 이정표
오늘날의 파키스탄 북부는 흔히들 코히스탄(Kohistan)이라 부른다. “산의 지방” 이란 의미로 여기서 ‘코히’는 산이고 ‘스탄’이 땅이란 뜻이다. 이 말 자체에서 느껴지듯 이 지방은 엄청난 협곡지대로 유명하다.3)
길깃트지방은 예부터 ‘보로(Bolor)’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중국식에서 음사하여 ‘보루[勃律,bo-lu]’가 되었지만 우리식 한자로 쓰고 읽으면 ‘발율’이라는 다소 엉뚱한 이름으로 변한다. 하여간 이 ‘발율국’은 우리의 혜초사문의 호칭으로는 대, 소발율로 나눠지는데, 길깃트가 소발율이고 인더스강 상류 쪽의 스카르두가 대발율이다.
(2) 이어지는 구법승들의 발길
현재에도 오지 중에 오지로 꼽히는 대 협곡길을 예부터 대상들과 구법승들은 수시로 들락거렸다. 먼저 6세기의 북위(北魏) 나라의 사신 송운과 구법승 혜생 일행들이4) 그 길의 험난함을 기록하고 있다.
한 줄기 곧은 길이 발려륵국(鉢盧勒國,Bolor)5)에서 오장국으로 향해 있고 쇠사슬로 만든 [현수교]다리를 허공에 매달아 지나다니게 하였다. 아래로는 바닥도 보이지 않고 옆에는 붙들 만한 것도 없다. 순식간에 만 길 벼랑 아래로 떨어지게 되니 지나는 사람들은 형세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 길을 지나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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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구법루트를 따라 내려온 송운일행의 코스에 비교하면 혜초사문의 루트는 사뭇 다르다. 아니 다르다못해 그가 직접 이곳에 정말로 왔었는가? 하는 의문점이 들 정도로 좀 독특하다. 그래서 ‘혜초학’에서도 길깃트를 간혹 전문국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오천축국의 순레를 마치고 혜초는 북인도에서 카슈미르를 거처, 아마도 카라코람고개6)-지금의 쿤자랍고개가 아닌 # 9-6번도로를 말한다-를 넘어 바로 타림분지의 서역남로상의 호탄으로 넘어가려고 바로 대발율, 소발율국으로 올라왔던 것으로 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카라코람고개를 넘어 중국으로 가지 않고, 다시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아프간으로 향했다. 이 루트에 대하여 혜초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카시미르국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어 7일을 가면 소발율국에 이른다. 이 나라는 중국의 관리하에 있다. 의복과 풍속이나 음식과 언어가 대발율국과 서로 비슷하다. (중략) 대발율은 본래 소발율의 왕이 살던 곳인데 토번(吐蕃)이 침략해오므로 소발율로 쫓겨 와서 그대로 정착한 것이다. 수령과 백성들은 대발율에 그냥 남아서 따라오지 않았다.』
이 구절은 학계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있기에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위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검토해볼 필요를 느끼는데, 그 중 첫째는 혜초가 정말로 카시미르에서 서북쪽 산을 넘어 7일간을 걸어서 소발율국에 이르렀나? 하는 것하고 둘째로는 대발율국을 그냥 전문국으로 보아야 하느냐? 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존의 학계의 가설은 후자 또는 둘 다 전문국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였지만, 필자의 가설7)로는 두 곳 모두 친전국이 거의 확실하다.
혜초가 여행기에서 이렇게 현지명을 중국식 명칭과 함께 사용한 것에 대하여 둔황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폴 펠리오(Peliot)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혜초는 우리에게 8세기 전반기 인도에서의 불교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서북인도, 아프카니스탄, 러시아령 투르케스탄, 중국령 투르케스탄에 관해서는 기타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지식을 제공해준다. 중복되는 말이지만 그는 중앙아시아제국의 명칭을 통상적인 중국식 명칭과 함께 현지명을 기록해 놓고 있다. 예를 들면 소륵(疎勒)을 실제의 호칭인 카슈카르(伽師祇離國)로 적은 등이다. 이 점은 이 방면의 첫 번째이며 또한 마르코폴로나 몽고시대의 기록보다 5세기나 앞서는 것이다.』
혜초의 이곳 사람들의 인상 묘사는 대체로 정확하였다. 다만 수염과 머리털을 깎았다는 부분만은 다르다. 현재의 길깃트인들은 모두 회교도이기에 그들의 율법에 의해 부모가 준 터럭을 깎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곳의 원주민은 전통적으로는 동,서돌궐족(Turq)계통이나 종교적으로는 쿠샨왕조의 지배 하에 있을 때부터 중국, 토번의 점령 때까지 8백년간을 불교도로 살아왔지만 그 후로는 무슬림화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다인요르(Dainyor)마을의 토번고문석8)
725년 토번군이 대, 소발율국을 함락했다는 내용 등이 적힌 석각명문은 산스크리트(Sanscrit)어로 알려져 있었으나 직접 확인한 결과 티베트 고문자가 틀림없었다.
▼ 길깃트 인근의 ‘카르가(Kargah) 마애불’ 전경
7세기 토번 점령시기에 조성된 ‘몽골로이드’형상의 마애석불
(3) 고선지장군의 길깃트 원정
소발율, 길깃트는 『신당서』권221 하 「서역전」하, ‘대소발률’조에 비중 있게 나타나는 곳이다.
소발률은 장안에서 9천 리 거리에 있는데, 약간 동남쪽 삼천 리 떨어져 토번 임금의 아장(牙帳)이 있다. 서쪽 8백 리에는 오장국(烏萇國)이, 동남쪽 3백 리에 대발률이, 남쪽 5백 리에는 카슈미르가, 북쪽 5백 리에 호밀(護密)의 사륵성(娑勒城)9)이 있다.
▼ 구당서 고선지열전 부분
▼ 옛 탄구령이었던, 현 파키스탄의 다르코트 고개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길깃트 일대는 동서양이 직접 교류하던 중요 요충지였다. 혜초가 이 일대를 지나갔던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 일대 군소왕국들은 험준한 산악에 둘러싸인 지형적 여건을 이용하여 각기 독립왕국의 형태로 중개업으로 주로 하고 있었기에 이 일대를 노리는 강대국들의 손길은 항상 끊이지 않았다. 당나라와 토번 그리고 남쪽에서 밀려들어오던 이슬람 세력이 바로 그들이었다.
혜초가 지나갈 당시는 그의 기록대로 이곳은 당나라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이미 전운은 감돌고 있었다. 결국 혜초가 보았던 대로 7년 후 소발율은 대발율에 이어 토번군에게 함락10) 당하지만, 그 뒤 약 10여년 뒤 고선지에 의해 재탈환된다.
먼저 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747년 7월 13일, 고선지군은 세 갈레로 나누었던 병력을 집결하여 강물이 불어나 건너기 어려운 파륵천을 건너 연운보(煙雲堡)요새를 함락시켰다. 그 다음 병력의 일부를 연운보에 남겨두고 힌두쿠시 산맥의 부로길고개[현 Broghil Pass, 3,882m]11)와 다르코트 빙하를 넘어 소발율국을 평정하고 토번에 항복했던 장수들을 처형하고는, 그 뒤 소발율성에서 60리 떨어진 인더스강의 현수교인 파이하(婆夷河)의 등교(藤橋)를 끊어 대발률으로 부터의 원군진입로를 차단하였다. 그 다음 토번의 위협에서 벗어난 후 발길을 돌려 다시 연운보로 돌아와 본대와 합류하여 귀로에 올라 안서도호부의 주둔지인 쿠차로 개선하였다.
그 결과로 실크로드의 헤게모니를 되찾게 되어 서역 72개국이 다시 당나라에 조공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고선지는 명장의 반열에 올라 티베트와 아랍권에서 ‘산의 왕(山地之王)’으로 일컫게 되었다.
그러나 고선자의 이런 빛나는 무공은 4년 뒤인 751년 서역에서의 그의 마지막 전투에 해당되는 탈라스전투12)에서의 패전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와칸주랑의 패권은 영원히 무슬림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본인 자신도 다시 5년 후에 역시 현종의 명령으로 ‘안사의 난’에 참전했다가 감군 변영성(邊令誠)의 무고로 동관(潼關)이라는 곳에서, 파미르원정 때의 전우인 봉상청(封常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또 동시대에 살았던 시성 두보(杜甫)는 <고도호총마행(高都護驄馬行)> 이란 제목으로 고선지의 애마를 노래하며 한 많은 서역의 영웅의 영혼을 달래기도 했다.
안서도호 장군의 총마는, 높은 명성 지닌 채 갑자기 와서 동쪽으로 향하였네. 수 많은 싸움에서 오랫동안 적수가 없어 사람과 한 마음으로 큰 공적을 이루었네.
(중략)
푸른 실로 갈기털 묶고 주인을 위해 늙어가려니, 언제 다시 장안 횡문을 지나 전장으로 달려 갈까나?
(4) 대발율 스카르두(Skardu)
길깃트에서 대발율 스카르두는 지척(?)이니, 내친 김에 발길을 돌려보기로 한다. 말이 지척이지 실제거리로는 170km로 도로상황도 정말 만만치 않아서 거의 하루거리에 속한다. 길깃트에서 KKHy도로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다가 고선지의 무용담이 어려 있는, 파이하(婆夷河)의 등교(藤橋), 즉 파르탑(Parthab) 다리를 건너서 인더스강의 본류를 만나 다시 그 대협곡을 끼고 거슬러 가다보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 티베트풍이 물신 풍기는 스카르두 시가지 광경
이곳의 인더스강은 티베트고원의 카일라스산의 북쪽에서 발원한 셍게카밥[獅泉河]13) 하류이다. 카라코람과 히말라야산맥 사이로 빠져나와 카시미르지방을 지나서 협곡지대를 잠시 벗어나 넓은 데오사이 평원을 이루는데, 그 길게 생긴 협곡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 바로 스카르두이다.
이곳은 옛날부터 원주민인 발티(Baltis)계와 몽골로이드계 산악족과 티베트계 부족이 섞여서 농사와 목축을 주산업으로 하여 평화롭게 살던 은둔의 땅이었다. 그러다가 역사 속에 그 존재를 처음 드러낸 때는 8세기였는데, 당시는 실크로드의 요충지 길깃트를 두고 당과 토번이 다투던 쟁탈전의 와중이었고 그 주인공이 바로 고선지였다.
당시 연운보와 소발율이 고선지의 당군에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토번조정에서는 당시 대발율 스카르두에 주둔하고 있던 2만 명의 구원병을 길깃트로 급파하였다. 그러나 고선지가 유일한 통로인 등교를 미리 끊어 버렸기에14) 토번군은 결국 인더스 강을 건너지 못해 스카르두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황을 혜초도 증언하고 있다.
또 카슈미르국의 동북쪽으로 산을 넘어 15일을 가면 곧 대발률국과 양동국(楊同國)과 사파자국(娑播慈國)이 있는데, 이 세 나라는 모두 토번국의 관할 하에 있다. 의복과 언어와 풍속이 모두 다른데 가죽의 옷과 신을 입고 신는다. 땅이 협소하고 산천이 매우 험준하다.
1)『신당서』권221 하 「서역전」하, ‘대소발률’조에는, “소발률은 장안에서 9천 리 거리에 있는데, 약간 동남쪽 삼천 리 떨어져 토번 임금[贊普]의 아장(牙帳)이 있다. 서쪽 8백 리에는 오장국(烏萇國)이, 동남쪽 3백 리에 대발률이, 남쪽 5백 리에는 카슈미르가, 북쪽 5백 리에 호밀(護密)의 사륵성(娑勒城, 사르하드Sarhad)이 있다
2) 카라코람 하이웨이[喀喇昆仑公路]는 중국 신장자치구의 카슈가르에서 시작하여 옛 총령진(蔥嶺鎭)인 타쉬쿠르간을 지나 쿤자랍고개 를 넘어 파키스탄령으로 들어와 소스트(Sost), 장수촌으로 유명한 훈자(Hunza), 길깃트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도로이다. 1979년 완공되어 1986년부터 관광객의 통과가 가능해진 이 루트는 1,300km를 1박2일로 달리는 대장정이지만 파미르의 설경, 드넓은 초원, 신비로운 호수를 구경하다보면 별로 지루하지 않는 환상적인 코스로, 매년 5월 1일에서 10월 15일까지만 열리는데, 이 루트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봄에서 이른 가을까지로 겨울에는 폭설로 인해 길이 막히고 여름 또한 많은 비가 내려 낙석 등으로 가끔 몇 길이 막기기도 한다. 이곳을 꼭 가고자 한다면 론리플래닛(Lonely Planet)편 <파키스탄과 카라코람 하이웨이'(Parkistan & the Karakoram Highway)>를 참조하기 바란다.
3) 코히스탄은 다시 두곳으로 분류되는데, 서북부의 치트랄, 마스츄지(Mastuj)등은 다르디스탄(Dardistān)이라고 부르고 동북부의 스카르두 지방은 발치스탄(Baltistan)이라 구분하여 부른다.
4) 『송운행기』실크로드 고전여행기 5는 5세기와 7세기의 시대적 공백을 이어준 여헹기로 ,518년에 북위(北魏)의 호태후(胡太后)의 명을 받들어 송운(宋雲)과 혜생(惠生) 등이 서역과 인도를 다녀와 기록한 여행기를 양현지(楊衒芝)가 편저자(編著者)가 되어 여러 사람의 경험을 짜깁기해서 기록한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낙양가람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 문헌은 서역과 인도의 순례기로서는 너무 짧고 불완전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5세기의 법현과 7세기의 현장 사이의 6세기라는 시대적 공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이고, 다음으로는 청해호지방 토욕혼의 차이담분지를 통과하는 특이한 루트를 개척하였다는 점이고, 마지막으로는 미지의 대제국 에프탈에 대한 귀한 정보를 남겼다는 등이 다른 여행기와 차별화되어 역시 귀중한 문헌으로 꼽힌다.
5) 현 파키스탄 북부의 카라코람하이웨이의 교통요지인 현 길깃트(Gilgit)로 현 파키스탄의 북부 발티스탄의 중심도시이다. 『구당서』「서융전(西戎傳)」에는 발률(勃律), 발로(鉢露)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Marco Polo는 Belor로; 커닝엄(19~20세기)는 Pálor, Balor, Balti 라고 표기하고 있다.
티베트어로 쓰여진『돈황편년기(敦煌編年記)』를 보면, 소발률은 737년에 토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747년 고선지(高仙芝)의 서정(西征)에 의해 당으로 귀복되었다. 발률은 실크로드의 대상로의 유일한 목줄이기에 지형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에게 전략상 중요한 곳이어서 토번도 공주를 길깃트로 시집보내 혈연을 공고히 할 정도로 중요시 하였다. 또한 길깃트는 불교의 전파에도 간과할 수 없는 기여를 하여 지금도 도로변에 당시의 마애불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우리의 혜초도 발율(勃律)국으로 부르면서 많은 기술을 하고 있다. 졸저, 『혜초따라 오만리』, 여시아문, 2005 44-60pp에 대소발율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다.
6) (9-6) 카라코람 고개길(Karakoram Pwy/玄照路)
파미르고원의 동쪽 끝의 카라코람 산맥의 카라코람고개(Kkm Pass/磧石嶺,5,575m)을 넘어 바로 인도 서북부의 카슈미르로 가는 루트로 그 시발점은 서역남로 서쪽 끝에 있는 예칭[葉城:Karghalik)이나 호탄에서 출발하여 현 ‘신장공로(新藏公路)’를 이용하여 티베트로 넘어가다가 콩쉬와르(Kongshwar)에서 남으로 방향을 틀어 카라코람 도개를 넘어 인도 서북부로 들어가 카슈미르주의 주도인 스리나가르 또는 조지라(Zojila,3,29m)고개를 넘어 라다크의 레(Leh)로 가는 옛 길이다.
* 8세기 ‘토번로’를 통해 인도를 3차례나 들락거렸던 현조법사의 루트에 해당되지만, 역시 현재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으로 통행이 금지된 루트이다.
7) 현재는, 인도령 카시미르에서 파키스탄령 길깃트로 직접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정밀지도를 놓고 자세히 검토해보면 스카르두와 길깃트로 통하는 길이 확연히 나타난다. 바로 카라코람 산맥의 지류를 넘는 부질(Burzil, 4,199m) 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낭가파르밧 산을 바라보며 데오사이(Deosai)평원으로 내려가 토번군사가 지키고 있는 대발율 성을 피해서 인더스 계곡으로 내려와 소발율로 내려왔을 것이라는 가설의 근거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혜초는 대발율의 땅을 지나가면서 적지 않는 토번인들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의 생활상을 낱낱이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라코람고개를 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서남쪽으로 내려와 간다라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8) 다인요르 마을에서 KKH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하다가 오른쪽 골목에 철판안내판이 붙어 있어서 찾기는 쉽지만, ‘라피드울라(Rafid Ullah)’라는 노인의 개인소유이다. 글씨의 마모가 심해 판독은 어렵지만, 연대로 보아서는 당시 소발율의 왕 수실리디에게 시집간 토번의 공주 중마뢰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졸저.「티베트의 역사산책」 <투뵈왕조의 만개 편> 참조 pp176
9) 바로 고선지의 격전지인 와칸주랑의 연운보요새인 사르하드 부로길(Sarhad-e-Broghil)을 말한다.
10) 당시 토번은 37대왕 티데줍쩬 때였는데 재상 제쌍돈줍이 직접 출정한 토번군은 서부 티베트를 출발하여 대발율을 거처 인더스계곡을 따라 길깃트에 도착하였다. 이에 소발율의 왕 수실리디는 문을 열고 투항하였고 이에 주위 20여 군소왕국들이 연이어 토번에 귀속하여 토번은 실크로드의 요충지를 거의 장악하였다고 토번사는 전하고 있다. 이 상태는 747년 고선지의 원정군이 소발율을 점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1) 현재 지도를 보면 연보보인 아프간령 샤르하드에서 파키스탄령 길깃트를 가자면 탄구령[Darkot Pass, 4,703m)을 넘기 전에 먼저 힌두쿠시산맥의 부로길[Broghil Pass, 3,882m]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고선지루트>에서 제공하는 지도에는 이 고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12) 현 키르기즈스탄의 탈라스평원에서 벌어진 세기적인 전투로,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당군과 동맹군 천산북녁의 유목민족인 카르룩군이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군과 토번의 연합군을 상대로 탈라스 강 유역에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싸운 세기적인 전투였다. 이 때 동맹군이었던 카를룩 군이 아랍측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당나라군은 패배하여 결과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당나라의 세력이 완전히 물러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3) 졸저,「티베트의 신비와 명상」 <4대강의 흐름은 여기에서> pp275
동방-마천하(馬泉河)-탐촉카밥-착수(Ckaksu)-얄룽장뽀-부라마푸트라(BramaPutra)
서방-상천하(象泉河)-랑첸카밥-시타(Sita)-스투레지(Sutlej)
남방-공작하(孔雀河)-맙차카밥-아라카나다(Alakanada)-카르나리(Karnali)-간지스
북방-사천하(獅泉河)-셍게카밥-바드라(Bhadra, Sindhu)-인더스
14) 「舊唐書」卷 104, 列傳 54, 高仙芝 條,
“고선지는 급히 勃律國에서 60리 떨어져 있는 다리를 끊도록 명령했다. 그 후 토번군이 몰려 왔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길은 외길이었고 다리를 수선하는 데는 1년이나 걸리는 대역사였기 때문이었다.”
첫댓글 어수선한 년말 연시 통에 연재가 너무 늦었네요,
한 회 한 회 모두 <왕오천축국전>보다 흥미진진하고 해박하십니다.......좀더 후딱후딱 다음 회가 나오기를 기다리지만..... 두 분 건강은 어떠신가요?
예~~~ 후딱후딱 ~~ㅎㅎㅎ
신문에 쓸, 신년 맞이 시론들이 좀 밀려 있어서요....
인터벌이 좀 길긴합니다요.
네 다시 연재에 매달려서... 단행본 탈고를 앞당기도록 하겠습니다.
8000고지 주변에서 놀고 있으니...
★ 감히ᆞ 누가 손댈 수 도없는 것을 세 세 밀 밀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는 작업인것 같습니다ᆞ
대단하신 저력이 십니다ᆞ>>>>>>>>>>>>
님의 격려.... 심기일전.....
다시 그 환상의 하이웨이 KKH를 넘고싶당~~
근데 각주 13번에서 언급한 책-<티베트의 신비와 명상>을 좀 구할 수는 없는가요?
@천산 네 이미 절판된지 오래되어.....인터넷 중고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다고 하니...한 번 뒤져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