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고친 글]: 시작이 반 / 이임순

시작이 반 / 이임순  몰입하고 싶다. 자꾸만 수그러드는 자신감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더 좋겠고, 새로운 것이라도 상관없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스치듯 생각난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글쓰기다.  글쓰기는 내 옆지기였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자꾸만 나태해진다. 처음부터 소질이 있어 시작한 글쓰기가 아니었다. 고달픈 나의 생활을 일기로 썼다. 결혼 초, 과수원지기가 꿈인 남편이 야산을 사자고 하더니 꿈에 부풀었다. 남편과 살자니 그의 뜻에 따르는 것은 필수였다. 이렇게 내 발목이 잡힐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과수원지기가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과수원 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연장 이름이며 용도도 제대로 몰랐다. 호미로 땅을 파니 옆집 아저씨가 자기네 괭이가 갖다 주며 나에게 땅 파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인부를 사서 일을 하면 나는 그 사람 수발드느라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웬만한 일은 내가 했다. 소나무가 섰던 자리에 감나무와 온갖 유실수를 심었다. 과일을 먹을 줄만 아는 사람이 과수원지기가 되었으니 서툰 것이 많았다. 밭고랑을 가득 메운 풀을 보고 뽑는 것보다 베는 것이 수월할 것 같아 낫을 들었다. 순간 아찔했는데 풀은 멀쩡하게 서 있고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낫을 든 오른손을 그대로인데 풀을 잡은 왼손은 성한 손가락이 없다. 연장을 다루는 일은 서두르면 상처가 났다. 그렇게 배워가면서 일을 했다.  앞만 보고 과수원을 둘러보다 뱀을 밟고 놀라 한동안 문밖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콩이 나는 족족 꿩이 쪼아 먹어도 눈뜬장님이 되어야 했다. 그뿐이랴. 정성껏 심은 감나무 묘목이 뽑힌 자국을 보고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의 것을 뽑아갈 용기로 무엇을 못해 도둑놈이 되었느냐고 허공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둑놈을 잡아 사람들 앞에 세워 놓고 뺨이라도 한 대 때려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유비무환’이라 했던가. 묘목을 심을 때 접목 부분에 하얀 페인트를 칠해 심은 것을 단서로 밤손님을 잡았다. 그는 도둑질한 묘목을 다른 집에 팔았다. 알고 보니 우리처럼 황당한 일을 당한 집이 꽤 있었다. 그의 소행이 밝혀진 후로는 감나무 도둑은 없어졌지만 아이를 업고 도둑을 찾아다니느라 흘러내린 목걸이는 변상받지 못했다. 땀 범벅 눈물범벅이 된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글쓰기였다.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속을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숨이 멈출 것 같았다.  젖먹이를 다라니에 앉혀 밭언덕에 두고 일을 하는 데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호미를 팽개치고 달려가니 뱀이 아이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얼른 아이를 업고 안정시키며 한여름인데도 가슴이 오돌오돌 떨리던 심정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가을이면 감나무가 일제히 홍등을 켰다. 달밤에 과수원을 바라보면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마당 가득 감을 따다 놓고 늦은 밤까지 출하작업을 해도 고단한 줄을 몰랐다. 나누는 재미도 쏠쏠했다. 남편의 제안으로 형편이 여의치 않은 둘째 오빠한테 작은 아파트도 한 채 마련해 주었다. 받는 즐거움보다 주는 재미가 더 크다는 것이 실감 되었다.  수입개방이 되면서부터 과수원은 빛 좋은 개살구와 다를 바 없었다. 한때는 서울 가락동 농산물공판장에서 수확한 감의 판매량을 수시로 확인하며 전량을 자기네로 보내 달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밤은 농협에서 전량 수매를 하니 판로 걱정이 없는데 감은 시세에 따라 수확량을 조절하는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수확을 포기했던 적도 있었다. 수입개방이 되기 전에는 콧노래를 부르며 수확을 했다. 광양제철이 생기면서 인건비가 턱없이 오른 데다 수입개방으로 사철 과일이 유통되니 관리비도 나오지 않는 과수원은 이래저래 애물단지가 되었다. 땅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이 문제였다. 웃고 울린 아픔을 글로 쓰며 달랬다. 그리고는 애써 쓴 글이 아까워 주제가 비슷하면 여기저기에 응모를 했다. 어쩌면 생활을 통해 나의 글쓰기를 검증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남편 도시락을 네 개까지 쌌다. 세 아이 모두 천으로 기저귀를 만들어 빨아 썼다. 과수원은 손 놓은 지 오래 전이다. 지금은 남편과 둘이 사니 아이들한테 잔손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고무줄 늘어난 작업복처럼 느슨해진 나를 추스르며 더 늦기 전에 무엇인가에 도전해 보고 싶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도 좋은데 익숙한 것을 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었던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다시 시작하려고 결심했다. 재능이 없는 것을 알기에 부단히 노력해야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과수원을 일구던 그 정신으로 하면 무엇을 못하랴. 자만은 꽁꽁 묶어두고 나의 희망을 찾기 위해 시동을 건다.  하루 종일 풀 매고 괭이질한 고단한 몸으로 밤새도록 뒤척이다 동이 틀 무렵이면 한 편의 글이 완성되고 했다. 그때 느꼈던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던 희열을 앞으로도 맛보며 살고 싶다. 시작이 반이라 했는데 내 인생 변곡점을 훨씬 지났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몸도 마음도 힘들고 어려웠던 일을 썼다. 꽃길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제부터는 즐기면서 살고 싶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함께 사는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눈 오는 밤 달구경 하던 노루가 생각난다. 마음의 여유는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가질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즐기면서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리라 다짐하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