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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바닷가..
흑백영화로 착각하게 하는 늘 회색인 날씨,
바닷가에 버려진 피아노,
그녀의 회색의 스타킹,
그것에 난 구멍사이로 보이던 그녀의 뽀얀 살결..
그 구멍속 살결에 집착하던 원주민의 분장을 한 무서운 얼굴의 남자..
...
도저히 그 어린나이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등장인물들의 이상한 감정관계들이...
또 한명의 묘한 인물... 그녀의 딸..
하긴 이 영화에서 묘하지 않은 인물이 어디 있나...
아이인지 어른인지 알 수 없는 그 깊이가 이상하게 두려웠다
아웅.... 아무리 검색을 해도 그 구멍난 스타킹의 영화장면을 찾을 수가 없다
정말 인상깊었는데..
그 구멍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말해도 될 정도로..
뭐랄까... 얼음공주의 녹는점 같은 곳이었다고 해야할까?
완전무결한 방패의 유일한 약점같은 ..
고등학교때 영화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한국지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 "Piano"란 영화에 대해서 정말 맛갈나게 소개를 해주었었다.
그래서 내가 이 영화 전체를 다 본건지,
그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와, 영화소개 TV방송에서 본것들을 가지고,
내가 봤다고 기억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무섭고 흉측하게 생긴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여주인공을 당시에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흐를까-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느릿느릿흘러가는 극의 전개와..
단조로운 화면과...
스타킹의 구멍에서... 한쪽 어깨, 한쪽 다리..
그리고 그녀의 전부를 차지하기까지..
스타킹 구멍만큼 열리던 그녀의 마음..
팔한쪽, 다리한쪽만큼 열리던 그녀의 마음..
그리고 모두 그로 가득찬 그녀의 마음..
어찌보면 지겨울 정도로 느리게 열리던 그녀와 마음과 그 둘의 관계...
하지만.. 그 깊이는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회색바다 같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모녀관계...
모녀가 아니라 쌍둥이가 아닐까-
그녀의 언어소통수단이기도 하면서...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수 없는 불명확한....
이 영화를 보고 "안나 파킨"에게 완전 빠져들었다
X-man에서의 안나도 좋지만, <아름다운 비행>, <제인 에어>에서처럼..
안나는 좀더 복잡하고 강렬한 역할을 하는게 어울리는 것 같다
아주 심오하고 센스티브하고 깊이있는 인물을 맡아 열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말을 못하는 언어장애자인데,
자기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아주 거침없었던 그녀..
나중에는 이 여인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까먹게 되었던것 같다
화를 내거나 좋아하거나, 여튼 본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것에 장애가 없었다
금욕주의자 같은 얼굴과 말을 하지 않는 절제를 가지고서도, 놀라운 열정과 욕망을 감추고 있던 그녀..
무서울 정도로 영특했고 그아이의 눈에서 도데체 내 눈을 뗄 수가 없게 하던 그녀의 딸..
미녀와 야수에 등장하는 야수같은 얼굴을 하고.. 뒤로 갈수록 그 험악한 얼굴에 익숙해지게 만들던 그녀의 남자..
가장 멀쩡한 모습을 하고선 누구에서도 애정을 받지 못하고 가장 외로움에 갇혀있던 그녀의 남편..
아카데미였던가 깐느였던가..
여튼 유명한 시상식 상을 죄다 다 휩쓸었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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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alovenest.com/madang/2005_1/2005_1_12.htm
소통의 방식과 선택의 문제
-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The Piano’ / 이민하 (시인)
“당신이 듣는 이 소리는 내 말소리가 아니다. 내 마음의 소리다. 나는 여섯 살 이후로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것을 나의 불길한 재능 때문이라고 하셨다.… 오늘 아버지는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나를 시집보냈다. 내 딸과 나는 곧 그의 집으로 가게 된다. 내가 말을 못
하는 건 상관없다고 남편은 말했다.”
영화 <피아노The Piano>(1993)는 마이클 니만Michael Nyman의 음악 ‘To The Edge Of
The Earth’와 함께 지구의 가장자리로 떠나야 할 주인공 에이다의 보이스 오버로 시작한다.
여기서 친절하게도 영화를 푸는 몇 가지의 단서는 제공되고 있으나,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의문점으로 돌아온다. 미혼모이며 언어장애자인 주인공이 말을 못 하게 된 이유나, 그녀의
아버지가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그녀를 시집보낸 일, 아내가 말을 못 해도 개의치 않는 남편
…. 다시 보건대, 이런 의문점들은 주인공의 ‘불길한 재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다. 당연히 나의 관심은 ‘불길한 재능’에 집약된다.
이 영화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 에이다와 딸 플
로라, 남편 스튜어트와 그의 친구 베인즈의 관계를 축으로 여성의 억압된 내면과 정체성의 문
제를 밀도 있게 그린 수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인류학과 미술을 전공하고 심리학과 교
육학을 두루 섭렵한 뉴질랜드 출신의 여성감독 제인 캠피온Jane Campion 특유의 감수성과
홀리 헌터의 섬세한 내면 연기가 마이클 니만의 독창적인 선율과 어우러져 빛을 발한 작품이
라 할 만하다.
다양한 표현체계를 구사하여 사건들의 관계를 엮고 긴장시키고 있는 점 또한 이 영화의 묘미
이다. 칸영화제 대상, 아카데미상 3개 부문 수상이라는 타이틀에 값하는 메시지 찾기에만 집
착하지 않는다면, 경직되고 고정된 각도의 틀을 비켜서 있는 매력적인 시각적 부호들을 발견
할 수 있다. 피사체가 렌즈로 전달되는 사이 깃털처럼 피사체를 스치는 햇빛을 훔쳐보듯이 말
이다. 어디선가 햇빛이 피사체에 명암을 드리우고 또한 반짝이게 하듯이, 영화 <피아노>에서
는 유기적으로 짜여진 색조와 다양한 이미지들의 구조가 그러하다.
자기 목소리를 가진 ‘불길한 재능’
거센 파도를 넘어온 20대의 미혼모 에이다(Holly Hunter 분)와 그녀의 아홉 살 난 사생아 딸
플로라(Anna Paquin 분)가 도착한 곳은 뉴질랜드의 어느 바닷가. 하룻밤이 지난 뒤 원주민
들과 함께 모녀를 찾아온 낯선 남편 스튜어트(Sam Neill 분)는 운반하기 무겁다는 이유로 피
아노를 바닷가에 버려둔 채 그들만을 데려간다. 버려진 피아노를 되찾기 위해 에이다는 그곳
의 원주민 마오리족처럼 문신을 한 얼굴에 글조차 읽을 줄 모르는 남편의 친구 조지 베인즈
(Harvey Keitel 분)에게 도움을 청한다.
여기서 피아노가 버려진다는 사건은 에이다가 부딪치는 첫 번째 난관이다. 그녀가 말을 못 한
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는 그녀의 남편은 당연히 피아노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다. 단
순한 악기가 아니라 그녀에게 대화 통로인 피아노는 남편에게는 거북하고 성가실 뿐이다. 그
녀를 한 남성(아버지)에게서 또 다른 남성(남편)에게로 편입시키는 아버지의 결혼 명령이 그
러했듯이, 남편 역시 아내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선택의 여지를 봉쇄하거나 응징하
는 일―그녀의 혀라 할 수 있는 손가락을 거세하는 잔혹한 행위―까지 서슴지 않는다. 제도와
문명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폭력의 은신처이기도 한 이 지점에는 교환 및 금지 체계에 의한
결혼, 즉 인위적인 규범이 물론 개입돼 있다. 더욱이 섬이라는 폐쇄적인 무대의 설정, 원시성
과 문명이 격돌하는 미개척지라는 공간구조, 19세기의 식민지 상황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억
압과 정체성의 문제를 극대화한다.
그러므로 주체적인 통로가 막혀 버린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의 에이다의 침묵은 어쩌면 필연
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까지 보인다. 그녀가 대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고 전하
는 스튜어트의 말은, 애시당초 그녀가 고작 흉내낼 뿐인 남성 본위의 언어체계를 거부하고 대
신 피아노를 비롯한 다양한 유형의 자신만의 의사전달체계를 선택한 것임을 증명해 준다.
이제 앞에서 에이다의 아버지가 그녀의 침묵의 원인으로 지목한 ‘불길한 재능’에 대한 해답
은 명백해진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녀가 가진 다양한 소통방식과 자기주장인 것이다. 그녀
가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것은 수화(手話)를 할 때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드러난다.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은 바로 이 점을 우려하고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
에서 딸과 아내인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건 그들에게 불편하고 불안하며, ‘불길한’ 일임
에 틀림없다. 그들의 세계 안에서 여성은, 에이다를 가리키는 스튜어트의 말처럼 “확실히 작
고, 왜소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양한 소통방식과 관계의 ‘틈’
“나는 내가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피아노 때문이다.”
에이다의 말소리이자 숨소리인 피아노의 선율은 대부분의 장면들에 삽입되어 사건들의 관계
를 엮어 주는 매개체로서 영화의 주된 서술을 담당한다. 물론 그녀는 수화라는 시각적·신체적
인 언어를 사용하여 플로라의 입을 통하거나, 목에 걸고 있는 메모지를 이용하여 강력한 표현
으로 다급한 상황에 대처하기도 하며, 빤히 바라보거나 서성거리거나 발을 구르는 행위 등으
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소통 수단인 피
아노는 그녀와의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섬세하게 이끌어 준다.
가령, 해변의 연주 장면에서 섬세한 멜로디를 한올 한올 교차시키며 애잔하면서도 격정적인
심리를 직조해 내는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에이다의 고향 스코틀랜드의 대중가요
인 보니 윈터의 ‘누 아와’에서 선율을 따온 곡이라 한다), 베인즈와의 교감 속에서 깨어나는
꿈과 열정을 느리고 빠른 음의 연결로 물결처럼 펼쳐 보이는 ‘The Scent Of Love’, 조바꿈이
반복되는 단조 멜로디를 통해 베인즈가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 후의 슬픔의 독백을 맴돌듯 자
아내는 ‘The Mood That Passes Through You’ 등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묘사된 에이다의 심
리를 영화에 꿰어 나간다. (음악을 담당한 마이클 니만은 유기적 리듬과 음표 사이의 자연스
러운 연결을 통해 소리를 이미지와 이야기에 개입시키는 작업들을 독자적으로 실험해 왔으
며,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프로스페로
의 서재> 등 피터 그리너웨이 영화의 음악들을 맡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다양한 시각적 부호들의 율동이 영화의 흐름을 돕기도 하는데, 삶의 전환기마다 에이다
의 내면을 수평적인 형태(바다)로 비추었던 ‘물’의 이미지는, 외부―남편과의 갈등과 마찰을
고조시킬 때는 수직적인 형태(비)로 변주되면서 극적 효과를 가져다준다.
처음 에이다가 건너온 바다는 예기치 못한 현실을 암시하듯 거센 파도로 일렁이며 피아노를
덮치기도 하는 공포의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피아노를 치는 에이다 옆에서 플로라가 나풀거
리며 춤을 출 때의 바다는 원초적인 꿈과 자유의 공간으로 그려지며, 영화 종반부 바다를 건
너는 중에 자살을 기도해 심해에 가라앉던 그녀가 과감하게 수면 위로 박차고 나올 때의 바
다는 시련과 극복의 의미를 띤다. 반면에 “힘든 여행이 될 거”라는 남편의 예고처럼 진흙탕
에 푹푹 빠지는 신발을 끌고 당도하는 낯선 집―결혼사진 촬영―남편의 응징으로 이어지는 장
면들에서는 비가 몰아치는데, 특히 손가락을 잘리는 장면에서의 폭우는 에이다의 처절함을
대변해 주면서 혼돈과 질서의 계기를 동시에 제공해 준다. 폭우가 휩쓴 뒤 남는 건 새롭게 빛
나는 세상이거나, 피해복구라는 난관이다. 에이다는 후자의 과정(손가락을 잃음→피아노를
버림)을 거쳐 전자의 상황(새 땅을 향함→새 삶을 찾음)을 획득해 간다.
절제된 흑과 백의 화면 속에서 자연스럽게 물드는 욕망처럼 펼쳐 보이는 원색적인 풍경들의
탁월한 영상미 또한 이 영화가 주는 섬세한 미덕이다. 원주민의 눈에 “천사같이” 창백한 피부
에 검은 드레스로 그려지는 에이다는 스커트 버팀대인 후프 속에 감금된 육체를 지닌 무채색
의 존재로서 강렬한 색채의 원시림 뉴질랜드와 철저하게 대비된다. 그 원시의 땅을 닮은 베인
즈의 순수한 열정으로 인해 비로소 에이다의 억압된 내면은 서서히 풀려 간다.
해변에서 날이 어둡도록 피아노를 연주하며 즐거워하는 모녀를 본 베인즈는 스튜어트를 찾아
가 땅과 피아노를 거래한 후, 다시 에이다에게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행
동을 허락한다면 건반 하나씩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후 지불되는 건반 수에 따라 육체
관계까지도 받아들여지지만, 사랑이 욕정으로 변질되는 것이 두려운 베인즈는―그가 자신의
옷을 벗어 피아노를 닦는 행위는 무척 인상적이다―결국 피아노를 그녀에게 조건 없이 넘겨주
는 것으로 계약을 종료시킨다. 그러나 피아노를 되찾은 에이다는 피아노 연주로 보상받던 베
인즈의 시선과 손길에의 결핍을 깨닫고 자발적인 밀회―이때 그녀의 목에 늘 걸려 있던 메모
지가 없음은 눈여겨볼 만하다―를 감행하다 스튜어트에게 목격돼 감금당한다. 감금에서 벗어
나자 그녀는 베인즈에게 사랑의 정표를 전하려다 플로라에 의해 스튜어트에게 알려져 도끼
로 손가락을 잘리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에이다의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스튜어트는 결국
베인즈를 찾아가 그녀와 함께 멀리 떠날 것을 허락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기치 못한 플로라의 행위이다. 에이다가 열다섯 살 때 피아노를 가르
치던 가정교사―그 역시 에이다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 주는 사람이었기에 그녀와의 사랑이 가
능했었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 관객의 시선에서 비켜나 있는 동안 에이다의 의사를 대
변하거나 분신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플로라는 에이다의 자기주장을 아버지와 남편에
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정도로 약화시키는 존재에 불과했으나, 위급
한 상황에서 스튜어트를 개입시키는 행동은 자못 위협적이다. 이는 자신의 생명과 동격인 엄
마의 사랑을 위협하는 베인즈에 대한 정당방위인 동시에, 억압과 자유, 윤리와 자아 사이에
궁지에 몰린 에이다에게도 이미 두려움 속에 예비돼 있던 불가피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로
써 미미하기만 했던 에이다의 존재를 세상이라는 거대한 심판대 위에 올리는 일, 그것은 그녀
의 분신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딸 플로라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맥락에는 ‘틈’이라는 긴요한 장치가 숨어 있다. 에이다가 처음 해변에 도착했을
때 플로라를 무릎에 누인 채 부서진 궤짝 안에 손을 넣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 것도 ‘틈’을
통해서였고, 그러한 그녀의 공허한 내면을 베인즈가 바닥에 누워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리게
하고 구멍난 스타킹 사이로 드러난 맨살을 통해 어루만져 준 것도 ‘틈’을 통해서이며, 이들의
육체적 교감이 시간차를 두고 플로라와 스튜어트의 눈에 목격되는 것도 문 사이의 ‘틈’을 통
해서이다. 관찰과 접촉의 통로인 ‘틈’을 통해 그들은 관계를 맺고 갈등과 이해를 거쳐 새로운
상황에 도달해 가는 것이다.
꿈 깨기와 인조손가락-‘거부’에서 ‘극복’으로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바다 위에서 에이다는 무용지물인 피아노를 던져 달라고 부탁을 하고
피아노를 묶었던 밧줄이 풀리는 틈새로 발을 끼워 자신도 함께 수장되고자 한다. 그러나 피
아노와 한 몸이 되어 끝없이 바다 속에 잠기던 에이다는 문득 발목에 감긴 밧줄과 사투를 벌
이다 신발을 벗어 버리고는 수면을 향해 솟구쳐오른다. 80초가량 전개되는 바닷속 장면은 깊
은 파장을 일으키는 ‘All Imperfect Things’의 높은 현악음과 함께 에이다의 미세하면서도 치
열한 마음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데 할애된다.
피아노와 자신의 발목을 묶은 밧줄을 푸는 일, 그것은 초반부 그녀의 피아노에서 부각된 ‘NE
W ZEALAND’라는 각인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자신
의 과거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큰 의미는, 침묵해야 하는 상황 자체보다도 그
녀를 더욱 옭아맸던, 자신의 삶이 피아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설정해 놓았던 관념의
덫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침묵의 울타리 안에 잠든 자신의 의지를 깨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뚫
고 몸을 내미는 일. 그것은 알껍데기를 깨부수고 세상으로 나오는 어린 새의 날갯짓과도 같다.
그녀는 비로소 폐쇄적 공간 안에서의 ‘영원한 침묵에의 꿈’을 깨게 된 것이다.
“조지는 나에게 인조 손가락을 만들어 주었다.”
‘인조 손가락’은 상처받은 정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에이다는 드디어 베인즈로 인해 자기
목소리를 찾았으며, 이제 단순히 ‘거부’가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서의 말을 배우며 피아노 선
생님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에이다의 보이스 오버가 시종 여섯 살 정도의 앳된 목
소리로 진행된 점은 그 무렵에 중단됐던 소통의 성장이 새롭게 시작됨을 알려 준다.
요컨대 에이다에게 제2의 삶이 가능했던 것은 극한상황에 처할 때마다 확고한 자기주장과 자
발적인 선택으로 대처해 온 주체적 결단에 의해서였다. 그녀는 완강한 사회적 규범 속에서도
아이를 혼자 낳아 키웠으며, 낯선 밀림에서도 거추장스러운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남
편이라는 형식보다 베인즈라는 진실을 고집했으며, 자살에의 충동 대신 생존에의 의지를 선
택했으며, 인조 손가락을 끼우고 당당히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이는 침묵으로 인해 박탈당
하는 자기변명의 기회들을 만회하기 위한 본능적 욕구일 수도 있으나, 어쨌거나 그녀가 늘
필사적이었던 ‘선택’의 결과들은 곧 하나하나의 극복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
화 <피아노>는 소통의 방식과 선택의 문제가 존재의 의미에 어떻게 개입하며 발현되는가를
섬세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세상과의 소통을 포기한 채 바다 저 깊숙한 곳으로 끝없이 가라앉게
하는 피아노를 누구나 발목에 하나씩 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단으로 내모는 자포자
기와 패배감이 소통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복수일 수는 없다. 에이다에게 피아노는 목숨과 같
은 것이었으나, 그것은 완벽한 소통이 유예된 침묵 속에서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다가 상
상하는 바다 밑 피아노에 밧줄로 묶인 채 애드벌룬처럼 떠 있는 그녀의 영상은 그런 점에서
묘한 잔상을 남긴다. ‘무덤’을 추억하는 마지막 보이스 오버는 이미 ‘무덤’ 밖에 존재하므로.
“소리가 존재한 적 없는 그런 고요가 있다. 소리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고요가 있다. 바다 깊
은 곳 차가운 무덤 속….”
이민하
1967년 전주 출생 . 2000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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