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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만든 책이 사람을 만든다
밤새 비가 내릴 것 같다는 예보를 들었기 때문에(헨로휴게처에서) 너른 지붕 밑을 찾느라
많이 헤맸는데 맞지 않은 예보였다.
이런 오보라면 다다익선이겠지만 오보는 퇴치의 대상이다.
반대 현상의 오보도 반반일 것이니까.
천기를 헤아리는 인간의 한계가 인간에 의해 조작되는 기계로 극복되겠는가.
한밤 잘 보낸 남의 나라 공원을 시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구나 비슷한 규모의 내 동네 솔밭공원이 보물인 것을 새삼 깨우쳐준 고마운 공원인데.
밤에 돌아보지 못한 공원을 먼동이 튼 시간에, 새벽같이 돌아본 후 내린 자평이다.
청결과 관리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동네 공원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귀한 노송 숲이니까.
공원 한쪽에 낡은 증기기관차가 같혀 있다.
우와지마역과 인접하고 있기는 하나 증기기관차의 보존전시장이 왜 와레이공원에 있는지
의아로운 것은 이 종류의 기관차가 우리에게는 남북 분단의 상징이기 때문일까.
와레이 공원을 나와 와레이대교(和靈)로 스카 강(須賀川)을 건넜다.
헤이안 시대(平安/794~1185)에 시작하여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挑山/1573~1603)에
완성했다는 이와지마 성(城)을 눈도 맞추지 못하고 가는 것은 아쉽지만.(어제는 밤이었고
오늘은 새벽같은 아침이었으니)
이른 아침인 6시 50분, 기분이 위축되었다.
인구 74.000의 도시 외곽에 있는 거대 서점 미야와키(宮脇)에 기가 꺾인 것이다.
'本なら 何でも そろう'(揃う/혼나라 난데모 소로/책이라면 무엇이든 다 있다)
오만 같으면서도 기를 죽이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ce)다.
지방의 소도시에도 이처럼 거대한 서점이 있기에 반c 전에, 이미 절판된 우치무라간조(內
村鑑三) 전집(25권)을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U의 선물인데, 전국의 서점들에 재고 유무를 묻는 엽서를 발송하여
구입했다는 후문을 비로소 실감하는 아침이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한국인(교보문고의 설립자 신용호)의 말이다.
지당한 말인데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 만든 책이 사람을 만든다.
결국, 책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이라는 사람'이 사람을 만든다.
그러므로 양서(良書)가 좋은 사람을 만들고 악서(惡書)는 나쁜 사람을 만들 뿐이다.
콩밭에서 콩 나고 팥 밭에서는 팥이 나올 뿐인 이치다.
저자도, 출판사도, 서점도, 독자도, 책에 관련된 모두가 명심해야 하는 경구(警句)다.
책이라면 무엇이나 다 있다는 일본 거대서점의 오만(?)과 과오가 새삼 클로즈업되는 아침.
'무엇이든지'에 '양서'라는 단어가 전치했더라면 그들은 현재의 일본과 전혀 딴 모습일 뿐
아니라 시코쿠헨로를 걷고 있는 이 늙은이도 했복했을 것이련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그들보다 더 추악한 모습일
것이라는 두려움도 엄습하는 아침이었다.
일본의 서점그룹, 최대의 서점 체인다운 자신감일 텐데 한국늙은이가 무슨 토를 달겠는가.
두 다리에 화풀이 하는건지 컴컴한 안을 들여다 보다가 되레 걸음이 빨라졌다.
56번국도를 따르던 헨로미치는 키타우와지마(北宇和島)의 사로다(申生田) 교차로에서 57
번도로로 갈아탄다.
미츠마 강(光滿川), JR 요도선(予土線) 열차와 거의 평행하는 현도(県道)다.
신불 습합의 호국원에서 하필 쿠로타?
41번 류코지 9.9km를 확인해 주는 헨로 표석을 뒤로 하고 걷는 이른 아침(07:10) 길.
지방도로지만 한적한 시골길에서 가속이 붙었다.
타카쿠시(高串)를 지나고 미츠마(光滿)의 신야시키(新屋敷) 노변에 자리한 헨로코야(光滿
제21호)에 당도한 시각은 아침 8시 반쯤.
쉬려는 것이 아니고 내부를 살펴보려고 멈춘 것이다.
아무리 날씬해도 둘이 눕기 어렵겠는데 '아루키 도교니닌'(步き同行二人)의 캐치프레이즈
에 상치되는 시설이다.
방명록의 기록으로 보아 잠간 쉬고 가는 사람 일색이므로 문제될 일은 없겠지만.
이 편한 고야가 야숙 리스트에 왜 누락되었을까.
작년(2013년) 여름에 쉬었다 가며 방명록에 글을 남긴 한국인도 있는데.
어제 알았다면 기어히 이 곳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완만한 고개를 넘는 30분쯤의 거리인 미마초(三間町)의 무덴(務田)에서 57번현도가 31번
현도와 둘로 나뉘고 헨로미치는 그 중간길이다.
미마초 평야의 수로(三間川)를 건너 긴 농로(農路).
41번레이조 류코지(龍光寺)는 JR무덴 역에서 1.4km 지점이며, 토카리(戶雁) 마을의 해발
190m 야산, 이나리잔(稻荷山)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토카리 마을회관(戶雁集會所)를 지나 류코지 100m 전방의 분위기는 이 레이조(龍光寺)의
성격을 짐작하게 했다.
신야시키 헨로코야 근처부터 안내하는 음식점(長命水) 앞의 토리이(鳥居/神社입구에세운
기둥문)의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과 불교가 습합(習合)한 호국원(護國院)임을.
다이도(大同)2년(807), 이 곳에 들른 코보대사가 벼단을 짊어진 백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코보에게 "이 땅에 불법을 펴고 온백성을 이롭게 하라" 고 당부하고 사라져버린다.
코보는 이 노인이 오곡신(五穀大明神)의 화신임을 깨닫고 여기에 절을 세운다.
이나리묘진상(稻荷明神像 )을 조각해 모시며 십일면관세음보살과 협시로 후도손(不動尊),
비샤몬텐(毘沙門天)도 조각하여 안치하고.
황명(皇命)에 의한 대부분의 레이조들과 달리 화신한 이나리신(稻荷明神)의 당부로 세운
사찰이라는 특징이 있는 레이조다.
창건 무렵부터 이나리지((稻荷寺)라 하여 신불 습합의 사찰이었단다.
메이지 시대(明治/1868~1912)의 폐불훼석령(廢佛毁釋令)에 따라 옛 본당은 이나리자(稻
荷社)라 하고 현재의 새 본당을 건립하였다는 것.
상단에 진자가 있고 계단 아래에 류코지 본당과 대사당이 있는 이유다.
신불(神佛) 습합의 대표적 호국원이며 시코쿠레이조의 총진수(總鎭守)라는 것.
진자는 갈 일 없고, 신(新) 본당에 도착한 시각은 9시 35분.
주말을 활용하는 헨로상들과 관광객들로 몹시 붐빌 주말이지만 아직 이른 시각이기 때문
인지 나와 비슷하게 도착한 승용차 부부 1쌍과 나 뿐이었다.
"헨로상의 무료 휴식처. 부담 없이 쉬고" (無料 おへんろさんへ お休み処 お気軽に) 가라
는 카토상점(加藤商店)의 오모테나시도 업무를 시작하기 이른 시간인가.
문이 잠겨 있고 기척도 없으니.
42번 부츠모쿠지(佛木寺)로 가기 위해 긴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눈을 사로잡은 검은 문패.
많은 성(姓) 중에 하필 쿠로타(黑田)인가.
동심을 멍들게 한 일본인 담임선생과 같은 성씨다.
일본 육군고초(伍長/우리의 하사) 출신으로 악랄하기가 비할 데 없는 선생이었는데 이 집
이 그의 후손의 집일 가능성은?
나보다 20년쯤 연상이었으니까 2014년 기준으로 100세를 막 넘겼을 것이다
살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그의 집일 수도 있잖은가.
아침 등교시간이 지나면 교실문을 잠가버린다.
엄동설한 아침에 10리길을 달려오느라 교실 안에 있지 못한 유소년들은 복도에 줄을 세운
후 분필 2개로 콧구멍을 막고 반개로는 벌린 입을 닫지 못하도록 입 안에 고여놓는다.
이것이 그가 나이 어린 식민지 지각생들에게 가하는 가혹한 벌이다.
신불습합 호국원의 총본산이라는 부츠모쿠지 앞에서, 체벌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꿈 속
에서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생각을 하게 한 토가리 마을을 서둘러 벗어났다.
John F. Kennedy의 연설을 생각하게 한 마을
3km미만인데다 갓길이 잘 확보된 31번현도를 따르면 되는 부츠모쿠지(佛木寺).
코보대사가 41번 류코지에 이어 같은 해(大同2년)에 이 절도 세웠나.
그 해에 이 곳에 들른 코보는 소를 끌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난다.
코보는 노인의 권유 대로 소 등을 타고 얼마쯤 가다가 큰 녹(楠)나무 가지(梢)에 걸려 빛을
발하고 있는 보주(寶珠)를 발견한다.
당에서 귀국할 때 인연의 땅을 찾으려고 동쪽을 향해서 삼고(三鈷)와 함께 던진 구슬이다.
이 곳이 영지(靈地)임을 깨달은 코보는 녹나무로 조각하여 미간에 이 구슬을 넣은 대일여
래상(大日如來像)을 본존으로 안치한 절을 창건한다.
우와지마 시 미마 초 스나와치(則)마을의 잇카잔(山) 자락에 있는 42번 레이조다.
(소 등에 탄 고보 대사의 전설이 구전되는 仏木寺에는 경내에 작은 家畜堂이있다.
미니어처 소나 말의 짚신을 비롯해 우마 도자기, 현판 등이 가득히 봉납되어 있다.
당시는 농경을 함께 한 가축들의 안전을 기원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애완동물들을 포함,
동물 일반의 영혼을 공양하고 있다니 애완동물까지 보살펴야 하는 부처님 고달프시겠다.
감소현상인 인구를 애완동물이 채우니 절쪽이야 다다익선이겠지만)
북적대는 42번 후다쇼를 나온 시각은 정오를 막 지난 때.
여기에서 43번 메이세키지(明石寺)까지는 차로와 도보로가 각기 다르며 자료도 제각각이
지만 걷는 길은 대략 11km쯤이라 시간과 거리, 모두가 여유롭다.
여러 헨로미치 중에서 택일하느라 고심한 날들과 달리 와레이공원부터 여기까지 단조로운
외길인 것 처럼 남은 길도 그럴 것이므로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국도, 현도로 이어진 오전과 달리 해발200m 이하 산길이 대부분이라 지루하지도 않겠고.
279번현도가 분기하는 지점의 31번현도를 횡단하여 잠시 279번현도를 따른다.
니시타니 다리(西谷橋)로 작은 개천을 건너 우측 산길을 택한다.
하나가 고개(齒長峠)까지 3km 산길 헨로미치다.
갈림길마다 요란하지 않고 전통 있는 시코쿠헨로미치 안내기둥이 서있으므로 안심길이다.
헨로미치보존협력회도 안내에 가세하고 알맞은 곳에 휴게정자도 있다.
해발400m대까지 올라가면서도 무리 없게 완만하다.
서울둘레길 중 어느 구간을 걷는 기분인 것은 헨로미치에서 오랜만이다.
하나가 터널(齒長隱道) 앞에 당도했다.
에히메 현의 미마 초와 우와 초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이라는 하나가 고개.
옛 헨로미치가 유일한 통로였을 때는 불편이 여간 아니었는데 그 애로의 해결사라는 쇼와
(昭和) 45년(1970년)에 개통된 현도우와미마선(宇和三間線/31번)의 터널이다.
터널내부의 유지보수공사로 인해 통행을 제한하여(平成26년/2014년8월25일~11월 17일)
우회하게 되어 있는데 다행히도 현재(2014년 9월 27일)는 '해제중'이다.
시행중이라 해도 13시 이후 1시간은 통행 가능시간이며 내 도착시간은 13시 19분이므로
지장 없겠지만.
미마 초(宇和島市)에서 우와 초(西予市)로 넘어올 때 31번현도와 터널을 공유한 헨로미치
는 헨로휴게소 앞에서 옛 헨로미치와 31번현도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어느 쪽을 걸어도 막판에 하나가 된다.
남은 수명이 1.8km뿐인 31번현도가 히지강(肱川)의 하나가 다리(齒長橋)에서 현도29번에
흡수될 때 메이세키지로 가는 헨로미치를 인계해야 하니까.
31번현도를 따르면 목장으로 바뀐 중학교 터(下宇和中學校跡)를 지난다.
교가와 학교 연혁을 새긴 비석이 각기 서있다.
쇼와22년(1947)에 설립했으며 18년만인 쇼와40년(1965)에 우와중학교에 통합되었단다.
2차대전에서 패하고 2년이 된 어려운 시기에 이 산간에 중학교를 세운 지역민들의 혜안과
미래를 위한 합심 결단, 실행에 민족적 정서를 떠나 경탄 불금이었다.
패전으로 도탄 상태에서도 근시적 극복이 아니고 거시적 대비, 백년대계라는 교육에 올인
한다면 밝은 미래가 예약된 것에 다름아니니까.
더구나 건건사사 중앙, 지방정부에 손내밀며 지원받아 착복하기 일쑤인 나라의 지방들과
달리 전후의 궁핍한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네의 힘으로 했으니.
"국가가 나를 위해 무얼 해주기 바라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십시요"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for your country)
존 F. 케네디(Kennedy) 미국 대통령의 취임 연설이 생각났다.
다만, 이 허허한 산촌 학교에서 18년 동안에 1465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면 매년 81명
꼴이 되는데 납득되지 않는 숫자다.
전쟁과 출산 관계의 통계에 의하면 출산률이 전쟁의 발발 후 1년이 가장 높고 전쟁기간이
가장 낮으며 종전 1년 후 회복세로 돌아선다.
건강한 청년들이 출정하기 전에 후사(後嗣) 마련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다면 일본이 일으킨 2차대전은 1941년말이며 종전은 1945년이기 때문에 중학생의
학령기로 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
농산촌의 인구 격감 현상은 산업사회 진입에 따른 청장년층의 도시집중화 때문이지만.
추모의 의미를 담은 경건한 품위는 불가능한가.
하나가다리 직전, 너른 공터의 시원스런 휴게소와 야외의 간이식탁과 하나가지조도(齒長
地藏堂) 등이 이렇다 할 관심을 끌지 못하나 지조도 옆 작은 건물(?)에 끌렸다.
애완동물의 우리에 비할 만한데 '헨로노하카'(遍路の墓)라는 커다란 문패(?)가 붙어있다.
그 안에는 비좁게 자리한 5체의 석불이 귤 공양을 받고 있다.
기이하다는 생각은 순간이고 곧 느끼게 된 것은 글자대로다.
헨로미치에서도, 헨로상도 사망은 숙명이구나.
한데, 석불이 1대 1인가 1대 다수의 상징인가.
왜 한 곳에 몰아넣듯 하고 있을까.
추모의 의미를 담은 경건한 품위는 불가능한가.
하나가 다리를 건넌 헨로미치는 29번현도를 따라 10시 방향으로 간다.
히지 강(肱川)과 거의 나란히 가는 29번현도와 헤어져 마츠야마자동차도로 밑을 지난다.
카이다(皆田)소학교를 지난 후 29번현도와의 재회를 즐기라는 뜻인가.
현도와 다시 만나는 지점에 헨로휴게소가 있다.
메이세키지 3.1km지점인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대사도 있다.
이름하여 미치나카안젠미마모루다이시(道中安全見守大師).
대사들도 업무량의 폭주로 포괄적이던 담당 범위를 세분화 했는가.
교통안전대사가 도맡았던 임무를 육해공으로 분리하고 육상도 각종 차량의 격증, 폭주로
인한 사고의 폭증으로 노상안전 전담 대사를 임명했는가.
메이세키지(明石寺) 2.5km 전방에서 현도를 다시 떠난 헨로미치는 곧 2개 길로 나뉘지만
목적지를 찾아가는데 애로는 없다.
세이요 시 우와 초 메이세키(西予市宇和町明石)의 겡코잔(源光山)에 자리한 메이세키지.
본래의 이름은 '아게이시지'(上石寺)였으며 이에 따른 전설이 있단다.
미모의 처녀로 변한 천수관음보살이 심야에 소원을 담은 큰 돌을 산으로 올기는 중이었다.
훼방을 놓으려는 사귀(邪鬼)가 새벽닭 울음을 흉내냈다.
닭울음 소리에 놀란(새벽이 온줄 알고) 처녀의 종적이 묘연해졌다.
'돌을 올린다' 는 뜻의 '아게이시'가 절 이름이 되었다가 메이세키(새벽돌)로 바뀌었단다.
6c 전반에 긴메이 천황(欽明/539~571)의 칙원으로 불자 엔테인마사스미(圓手院正澄)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천수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칠당가람을 세웠단다.
8c(734/天平6년)에도 증축했으나 이름과 달리 황폐가 운명적인가.
사가 천황때 코보대사의 대대적인 재흥에도 피폐를 거듭했다니까.
그래도 이 절의 소재지인 우와 초에는 에히메 현의 역사문화박물관을 비롯해 많은 유적이
남아있는 역사와 문화의 타운이며 이 레이조에도 신기스런 역사의 연기가 남아있단다.
파친코 앞 헨로코야의 밤
43번 후다쇼를 벗어나는 길도 하기모리가 지도를 어지럽힌 지역 중 하나다.
고민스런 양자 택일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회는 해도 안전하고 편한 도로(56번국도)와 산길이라 체력의 협조가 있어야 하며 헤맬
위험은 있으나 우와문화의 마을(宇和文化の 里)이라는 오리지널 길 중에서.
주저 없이 후자를 택했다.
어두워질 때까지 남은(여유로운) 1시간 반이 쉽게 선택하도록 도왔을 것이다.
고개를 넘은 후의 소감은 맛깔스런 길, 헤맬 열려도 없는 길인데 하기모리는 왜 그랬을까.
경고의 남발이다.
현립(県立) 특수학교(시청각장애인?)를 지나 56번국도에 올라설 때까지 2번 물었다.
일본어와 영어의 컬처쇼크를 실감하는 길 안내였다.
같은 일본인이지만 자국어를 쓰는 여인은 먼 곳에서 현 위치까지 설명하느라 장황했으나
영어로 하는 남자는 현 위치에서 56번국도까지만 안내하면 되므로 짧게 끝났으니까.
우와중학교의 이면도로에서 우회로와 결합해 우와(宇和)의 헨로코야(遍路小屋/宇和16호)
까지 어렵잖게 찾아가도록.
이 석양에 가졌던 모든 염려는 부질없는 기우였다.
저녁식사거리를 충분히 준비했고 코야에도 어둡기 전에 당도했으니까.
우와 초 카미마츠바(上松葉)의 56번국도변에 있는 대형 한식당 토요켄(東洋軒 宇和店)의
너른 주차장 한쪽에 세운 코야다.
우와지마 지역에서 여러 식당을 경영하는 무라카미(村上 德/東洋軒 主)씨 자신이 환갑에
시코쿠헨로를 걸으며 곳곳에서 받은 접대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세웠다는 코야.
식당이 한가할 때는 헨로상들에게 다과의 오셋타이(お接待)도 한단다.
식당의 화장실을 자유롭게 사용하라(오전8시~오후9시)는 안내도 하고 있다.
전기가 없는 것이 흠이지만 식당에서 핸드폰을 비롯해 충전도 적극 협조한다.
낮 휴식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밤의 잠자리는 불편하나 필요한(맨바닥에 깔) 종이박스를
식당에서 구할 수 있다.
깊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국도 건너편의 불야성 빌딩(파친코점)에 들려도 되겠다.
도박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상출입의 휴게실을 이용해도 된다는 안내다.
읽을 거리와 유료지만 마실거리가 있으니까.(내가 활용했다)
일본인의 일상에서 파친코의 비중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도 된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