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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선전씨 석릉군파 임하군파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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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 성의 역사
[태그: 전씨, 성씨, 역사] 꿈을 향해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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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 성의 기원
전씨 성은 비교적 복잡한 성씨로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소 많은 견해가 있다.
그 중 대다수 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견해는,
전씨 성의 유래가 최초 주조(周朝)의 관직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일부 전씨 성 족보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주조(周朝) 시대에 화폐유통과 시장무역을 관장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천(泉)이라 불렸으며, <주례(周禮), 지관(地官)> 체계에 속한다. 천(泉)은 바로 화폐를 말한다.
훗날, 이 관직을 맡은 사람이 관직명을 성씨로 하였는데, 바로 천(泉)씨이다.
그 훗날, 천(泉)자와 전(全)자의 독음이 비슷하여, 일부 천씨를 가진 사람들이 전씨를 성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전씨 성이 생겨났다.
이로 보건대, 전씨 성은 관직에서 유래한 성이며, 혈통은 대략 주조(周朝)의 왕실 구성원과 관계가 있다.
이 견해가 과거 전씨 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유행하였기 때문에, 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주요 유래가 되었다.
그 외, 전씨 성의 기원과 관련한 다른 견해가 있다.
그 중 대대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고대국가 명칭 혹은 지명이 기원이며, 이 고대국가 명칭 혹은 지명은 대략 현재 안휘(安徽) 전초(全椒) 일대로서, 그 지방은 일찍이 한(漢)나라 시대에 전초(全椒)현으로 불렸다.
또 다른 일부 견해에 따르면, 전씨 성은 은(殷)왕조 고종의 후손이거나, 혹은 한(漢)나라의 왕씨 성이 성을 바꾸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서한(西漢) 말년에 한원제(漢元帝) 황후와 동족인 사람들이 왕망(王莽)의 독재와 정권찬탈에 불만을 가지고, 그들과의 동성(同姓)인 것에 수치심을 느껴 성을 전씨로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전(全)자의 뜻은 한자 상으로 “왕(王)”자와 “인(人)”자의 두 부분을 포함하므로, 비록 성을 전씨로 바꾸더라도 자신의 기원이 왕씨 성의 사람이라는 것을 여전히 기억하게 된다.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5대10국 시대에 전촉(前蜀)의 군주였던 왕건(王建)이 전종랑(全宗郞)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왕종랑(王宗郞)으로 개명시켰는데, 이는 전씨 성을 왕씨 성으로 바뀐 직접적인 예증이다.
전씨 성이 기타 소수민족에서 기원했다거나, 혹은 당대 일부 소수민족 중에 전씨 성이 있었다는 견해의 경우에는 분별하여 고찰하기가 더욱 어렵다.
전씨 성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론이 분분하다는 점을 불문하고, 다수가 이것이 당대 중국의 흔한 성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역사상, 전씨 성은 경조(京兆, 현재 산서성 서안)를 군망(郡望)으로 하며, 적지 않은 유명인물을 배출하였다.
그 중의 주요 인물에는
동한(東漢) 상서승(尙書丞)을 지낸 전유(全柔),
삼국 오나라 대장군 전종(全琮),
진나라 선비 전자서(全子棲),
수나라 명의(名醫) 전원기(全元起),
오대 문주자사(文州刺史) 전사웅(全師雄),
원나라 학자 전겸순(全謙孫),
명나라 대학사 전사성(全思誠),
청나라 학자 전조망(全祖望) 등이 있다.
그 분포에 관해서는, 기타 성씨와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특징 이외에, 당대 전씨 성은 호남(湖南), 하남(河南), 절강(浙江)의 3성에 가장 집중되어 있다. 관련 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3성의 전씨 인구는 약 전국 전씨 총 인구의 3/4을 차지한다.
전씨 성은 대륙과 대만에서 여러 성씨 가운데 100위권에 모두 들지 못한다.
천(泉)은 과거에 일종의 화폐였다. 주조(周朝) 시대에 천부관(泉俯官)이라는 관직을 만들어 화폐를 전문적으로 관리하였으며, 천부(泉府) 역시 화폐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천부관(泉府官)의 후손 일부는 천(泉)을 성씨로 하였는데 훗날 전씨로 변하면서 오늘날 전씨 성의 기원이 되었다.
원(元)대에는 만전(萬全)이라 불리는 소수민족의 우두머리가 있었다.
훗날 이 소수민족과 한족(漢族)이 통혼(通婚)을 하면서 점차 한(漢)문화를 받아들였다.
만전(萬全)의 후대는 성을 전씨로 바꾸었으며, 이는 역사상 전씨 성의 또 하나의 유래이다.
一. 성씨 원조. 전씨 성의 유래 세 가지.
1. 서주(西周)에서 기원하였으며, 관직을 성씨로 하였다.
<길기정집(鮚埼亭集)·전씨세보(全氏世譜)>에 따르면, 전씨 성은 천(泉)씨 성에서 나왔으며, 서주(西周) 시대에 천부(泉府)라는 관직이 있었다.
주례(周禮)에 따라 지관(地官)에 속하여 화폐교류와 시장무역을 관장하였다. 과거에는 화폐를 천(泉)이라 하였으며, 모든 부관(府官)의 후대는 관직을 성씨로 하여, 천(泉)씨를 성으로 하였다. 천(泉)과 전(全)의 독음이 같아 일부 천씨는 전씨로 바뀌어 전씨로 불렸다.
2. 지명에서 유래하였다. 과거에 전지(全地, 현재 지명 불명확)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지명을 성씨로 하여 전씨로 불렸다.
3. 청나라 아이신교로(Aisin Gioro) 정친왕(鄭親王) 이후에 성을 전씨로 바꾼 사람이 있었다.
二. 군망당호(郡望堂號)
[당호(堂號)] 경조군(京兆郡):
수도 장안직할시로, 오늘날 섬서(陝西)성 서안(西安)에서 화현(華顯)까지의 일대이다.
[당호(堂號)] “수남당(綏南堂)”, “전후당(錢侯堂)”:
삼국시대 전종(全琮)으로, 부친이 그에게 몇 천 휘(斛, 열 말의 용량)의 쌀을 시장에 내다 팔도록 하였는데, 그는 전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전종은 훗날 분위교위(奮威校尉)로 임명되어 동해태수를 지냈으며, 수남장군(綏南將軍)으로 승진하여 나아가 전당후(錢唐侯)에 봉해졌고, 대사마좌군사(大司馬左軍師)까지 올랐다.
三. 역사적 명인(名人)
전유(全柔):
삼국시대 오나라 전당(錢塘) 사람으로, 동한영제(東漢靈帝) 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다.
동탁(董卓)의 난 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훗날 손권이 오나라에 진입하자, 그는 군사를 일으켜 손권에게 몸을 의탁하여 단양도위(丹陽都尉)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계양태수(桂陽太守)를 지냈다.
전겸손(全謙孫):
자는 정충(貞忠)이며, 원나라 은(鄞) 사람이다.
그는 아우 전진손(全晉孫)과 함께 진훈(陳塤)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양간(楊簡)의 학문 연구를 좋아하였다.
전진손의 부친인 전여매(全汝梅), 형 전정손(全鼎孫), 아우 이손(頤孫) 및 전정손의 아들 전기(全耆),
3대 인물 모두 씨족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에 뜻을 두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의전육노(義田六老)”라고 불렀다.
전정(全整):
명나라 학자로, 자는 수재(修齋),
은(鄞) 사람으로, 양간(楊簡)의 학문 연구를 좋아하나 벼슬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영락(永樂) 초년에 명성조(明成祖)가 그를 불러 <영락대전(永樂大典)>을 편찬하도록 하였으나, 그는 이 직책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서방(書房)을 “삼석초당(三石草堂)”이라 불렀으며, 작품으로는 <삼성산방문(三石山房文)>이 있다.
전대성(全大城):
명나라 학자로, 금계(金溪) 사람이며, 자는 희공(希孔)이다.
그의 부친은 중병으로 수개월을 병상에 있었는데 그는 항상 밤낮으로 간호하였다.
훗날 그의 조모가 병환으로 눈이 멀자, 대성은 밤낮으로 혀로 눈을 핥아 시력을 되찾게 했다.
전조망(全祖望):
청나라 학자로, 자는 소의(紹衣), 은(鄞) 사람으로, 옹정(雍正)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건륭(乾隆) 때 홍박(鴻博)에 급제하였다.
그는 기개와 절개가 있고, 학업에 임하는 태도가 엄격하고 신중하며 두루 섭렵하였으며,
저서로는 <교수경주(校水經注)>, <구여토음(句余土音)>, <길기정집(鮚埼亭集)> 등이 있다.
전양범(全良範):
명나라 기주(沂州) 사람으로, 자는 심구(心矩)이다.
명나라 만력(萬曆) 시기에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진사(進仕)에 급제하였다.
나아가 하남(河南) 안찰부사(按察副使)를 지냈고, 수로를 함께 관장하였다.
당시 변구(汴口)에 수해가 수년간 이어졌으며 3월에 부임하여 공적을 세웠다. 젠핑에 40리의 상점거리를 세웠으며 질병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교비(敎匪)의 난을 겪으면서 자금을 기부하여 성(城)을 수호하였다. 기주 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어 중각(中恪) 선생으로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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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氏姓氏的历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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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姓源流
全姓是一个较为复杂的姓氏,关于其起源问题一直有较多的说法。
其中一种被大多数全姓人认可的说法是,
全姓的来源最早与周朝的官名有关。
据一些全姓谱牒记载,
在周朝时有一种掌管货币流通和集市贸易的官吏,
被称为泉,属〈周礼、地官〉系统。泉,也就是钱币。
后来,担任这种官职的人便以官名为姓氏,姓泉。
再后来,由于泉字与全字读音近似,一些姓泉人又以全为姓氏,从而有了全姓。
由此看来,全姓是一个由职官而来的姓氏,血统大概与周朝的王室成员有关。
由于这种说法在古今全姓人中颇为流行,因此也是全姓人的主要来源。
除此而外,与全姓起源有关的还有其他一些说法。
其中如相传全姓起源于古国名或地名,这一古国名或地名大约在今安徽全椒一带,当地早在汉代时就被称为全椒县。
又如另外一些说法,全姓是殷王高宗的后代,或是由汉代的王姓改姓而来。他们认为,在西汉末年,与汉元帝王皇后同族的人因不满王莽专政和篡国,耻于与他同姓,于是便改姓为全。
因为全字的含义,在写法上包括“王”和“人”两部分,虽改姓为全,仍不忘自己原是姓王的人。
另外还有一种说法,在五代十国时期,前蜀国君王建把一位名为全宗朗的人改名为王宗朗,应是全姓改为王姓的直接例证。
至于关于全姓起源于其他少数民族,或者当代一些少数民族中有全姓,则是更难以考辩了。
无论全姓在起源问题上多么众说纷纭,多都不影响它成为当代中华大姓之一。
历史上,全姓以京兆(今陕西西安)为郡望,并出现不少著名人物。其中主要有东汉尚书丞全柔、三国吴大将军全琮、晋名士全子栖、隋名医全元起、五代文洲刺史全师雄、元学者全谦孙、明大学士全思诚、清学者全祖望等。
至于其分布,除具有与其他姓氏一样广泛的特点外,当代全姓又以湖南、河南、浙江三省最为集中。据有关专家研究,三省全姓人口约占全国全姓总人口的3/4。
全姓在大陆和台湾都没有列入百家姓前一百位。泉,古时候是一种钱币。周朝时候,设有一种官职叫做泉俯官,专门管理钱币,而泉府也就是专门管理货币的机构。
泉府官的后代有的以泉作为姓氏,后来演变成全,成为今天全姓的起源。元代是有少数民族的首领叫作万全。
后来这支少数民族和汉族通婚,渐渐接受汉文化。而万全的后代亦改姓氏为全,这是历史上全姓的有一个来源。
一、 姓氏源流 全姓来源有三:
1、 源于西周,以官职为姓。据《鲒琦亭集·全氏世谱》载,全姓出自泉姓,西周时有泉府之官。按周礼属于地官,掌管货币交流和集市贸易。古称钱币为泉,全府官的后人以职官为姓,遂为泉姓。因泉与全同音,故有的改泉为全,称全氏。
2、 出自地名。古有全地(今地不详),住在那里的人有的以地名为姓,称全氏。
3、 清代爱新觉罗氏症亲王之后有改姓全者。
二、 郡望堂号
【堂号】 京兆郡:首都长安直辖区,在今陕西省西安至华县一带。 【堂号】 "绥南堂"、"钱侯堂":三国时全琮,父亲给他几千斛米到集市上去卖,他全部救济了穷人。全琮后来做了奋威校尉,领东海太守,加绥南将军,封钱塘侯,官终大司马左军师。
三、 历史名人全柔:三国时吴国钱塘人,东汉灵帝时举孝廉。董卓之乱时,他弃官归乡。后孙权入吴,他起�侗妓锶ǎ�蝗挝�ぱ舳嘉荆�笪�鹧籼�亍?全谦孙:字贞忠,元代鄞人。他与其弟全晋孙一起在陈埙门下学习,喜好研究杨简之学。全谦孙之父全汝梅、兄全鼎孙、弟颐孙及全鼎孙之子全耆,三代人都置义田赡宗人,时人皆谓之"义田六老"。
全整:明代学者,字修斋,鄞人,喜好研究杨简之学,不愿入仕。永乐初年,明成祖征召他编修《永乐大典》,他不愿就职。他称他的书房为"三石草堂",著有《三石山房文》。
全大城:明代孝子,金溪人,字希孔。他的父亲重病数月,他衣不解带,日夜服侍。后来他的祖母患目盲,大城日夜以舌舐眼,得以复明。
全祖望:
清代学者,字绍衣,鄞人,雍正举人,乾隆年间举鸿博。他为人有风节,治学严谨,涉猎广泛,著有《校水经注》、《句余土音》、《鲒琦亭集》等。
全良范:
明沂洲人。字心矩。万历中乡试第一。登进士第。累进河南按察副使。兼管河道。时汴口水患数年。莅任三月。遂着治绩。建平成店四十里。以忧旋里。值教匪之变。捐资守城。沂人咸德之。尊为中恪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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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머나 복잡다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