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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3강
말씀/ 마가복음 8:27-9:1
요절/ 마가복음 8:34
고난 받는 그리스도, 고난 받는 제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두가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한마디로 ‘나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 혹은 부모와 자식이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GOD의 “어머님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 어머니는 짜장면을 싫다고 하셨어”라는 가사가 기억이 남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받는 딸로 태어나서 하고 싶은 것 많고 꿈도 많았던 꽃다운 시절을 보낸 ‘그 엄마’를 모릅니다. 내게 익숙하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성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해 그랬던 것 같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알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메시지 스타일을 보고, 혹은 오병이어같은 놀라운 기적을 보고 그리 결론 내렸을 것입니다. 물론 복음서를 보면, 말씀 듣고 기적을 목격했던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흙수저라며 평가절하했고,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힘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악평했습니다. 제자들이 부정적인 여론을 몰라서 긍정의 여론만 전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마음이 긍정적이어서 그런 반응들만 모아서 전한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만족하지 않고 두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는 ‘너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너희는’, 개인 신앙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우리의 판단과 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어제까지 괜찮은 사람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비난 여론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여론을 좇아 돌을 던질 때가 많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여론의 향방에 예민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여론에도 휘둘리지 않는 제자들의 개인 신앙을 체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따르는 몇 사람의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무리들은 멀리서 피상적으로 보았다면, 제자들은 동고동락하며 모든 것을 공유한 사람들입니다. 무리들은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러 나온 사람들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자 인생결단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아느냐’는 것은 예수님 사역의 열매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시금석입니다.
다시 2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제가 처음 UBF 수양회 와서 ‘주는 그리스도’라는 타이틀을 봤는데, 그때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뭘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이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말씀을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를 헬라식으로 번역한 말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왕, 제사장,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이 터지면 기름 부어 왕을 세우고 적군을 물리치게 했습니다. 범죄한 백성들을 위해 기름을 부어 제사장을 세우고 속죄를 받게 했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백성들을 돌이키고자 기름 부어 선지자를 세우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은 자라는 명칭은 구원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마다 필요한 구원이 있습니다. 병으로 고통하는 분들은 병마로부터 구원이 필요합니다. 치열한 직장의 현장에 있는 학사들은 낙오하지 아니하고 올라가는 진급이 구원입니다. 청년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험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구원이 주어지기를 저는 매일 기도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인간에게 더이상 구원자가 필요없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간의 힘이 자연의 힘을 능가하는 거기에서 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과학문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이전 세대보다 추위와 기아와 질병과의 싸움에서 더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면서 더욱 확신을 갖는 것 같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문동에서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대 운동장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낯선 세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전에는 한국 외국어 고등학교 같았는데, 이제는 빽빽한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글로벌 대학교 같은 기분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문명의 힘을 느낍니다. 하지만 문명이 발전하는 것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빽빽한 빌딩숲이 기쁨과 희망을 주는 것보다 초라함, 불안과 압박을 더 많이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높이 세워진 빌딩이 앞으로는 찬란한 위용을 뽐내지만, 뒤로는 긴 그늘을 드리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문명은 발전하고 있지만 스트레스 지수, 불안지수는 어느 시대보다 높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불면과 우울과 무기력으로 정신적 치료를 원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나 환경 위기 같은 문제들이 인간 생존에 대한 본질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문화일보는 ‘구글과 오픈 AI의 전 현직 직원 13명이 인공지능이 인류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했다’는 기사를 내었습니다. 치명적인 위험성을 가졌음이 분명한데도 경쟁에 앞서가려는 욕망으로 인해 위기를 제어할 방안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성경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죄와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되고 말았음을 증거합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다면, 인간의 악한 욕망을 씻어내고 사그라뜨리는 죄사함과 성령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느 제도를 걸치고 어떤 능력을 가질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없습니다. 신,구약성경이 그리스도를 예언한 이유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줄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였고, 신약성경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희망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어떤 구원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줄 그리스도로 고백했는지,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부터 구원해줄 그리스도로 고백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문맥상 흐름을 보면 두 번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고백 자체를 기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나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니라” ‘그리스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보다도 고백 자체가 가져오는 축복에 주목하신 것입니다. 고백은 믿음을 불러오고, 믿음은 고백을 통해서 더 깊어집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의 고백을 유도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신랑은 신부를 하나님의 짝지워주신 배우자로 영접하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밥을 잘해줄 때나 잘해주지 못할 때나 아끼고 사랑하고 보살피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떻게 세상 끝날까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보살필 수 있겠습니까! 감당하기 힘든 고백, 무서운 고백입니다. 기쁨으로 고백했지만, 고백의 의미를 다 알고 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고백으로 가정을 이루고, 가정은 고백을 통해 견고해집니다. 신앙의 여정에는 3가지 고백이 필요합니다. 첫째,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죄의 고백입니다. 둘째는 사랑고백입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고백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시간 소리를 내어 고백해봅시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를 따라 드린 이 고백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자리에까지 이어지는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은 고백이 있는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구원의 믿음을 주시고 죄사함의 확신을 주시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축복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리스도 고백을 드린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비로소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32절을 보면 드러내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성품에 대한 믿음을 심는데 주력했다면,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9장31절, 10장 33,34절에서 반복하여 나오는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노중 내내 반복하여 드러내놓고 가르치셨습니다. 동사마다 must의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반드시 고난 받고 반드시 버린바 되고 반드시 죽임당하고 반드시 살아나야 하리라’, 피할 수 없는 코스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합니까! 죄와 죽음 문제는 돈이나 권력, 인문이나 과학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말씀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죄는 생명을 파괴하고 심판을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생명의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어린 양을 잡아 속죄제물로 드렸던 모습이 그러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일시적이었으며, 완전한 대속역사의 예고였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자 당신의 아들을 대속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 받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버려지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임당합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대표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납니다. 그를 통해 만민이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한마디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고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그러나 베드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드러내놓고 말씀하시자, 베드로 또한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32) 항변했다는 것은 ‘강력히 경고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도 안되는 그 따위 말씀 그만하세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세상에서 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기는커녕 가장 심한 욕을 던지셨습니다. 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수제자 베드로가 사탄 베드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적용하면, 사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제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앞세우면 사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창세때부터 만민 구원역사를 준비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세웠습니다. 약속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들을 주셨습니다.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오랜 시간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준비하신 것은 만민구원역사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심은 잘 먹고 잘 사는 강대국 이스라엘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하나님의 종들이 스피릿을 잃고 변질되어 버린 것은 사람의 일에 붙들려 하나님의 일을 놓쳐버린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누구든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외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누구든지 해병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표어가 있습니다. 해병대가 되는 어려움보다 해병대로서의 자부심이 훨씬 크다는 것이죠. 해병대 빨간모자로 상징하는 해병대 자부심이 얼마나 큰 지를 드러낸 표어입니다. 34절 말씀에도 그런 스피릿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정말 어렵다,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보다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제자, 찐 영광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는 메시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지만, 아무나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두가지 명령,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의무와 부담만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해병대 빨간모자처럼 예수님 제자의 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나 직분이나 교회 경력을 예수님 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경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자기 유익과 욕망을 좇아 행동하고 있다면,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첫 번째 명령, ‘자기 부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자기 부인은 자기 체질을 말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 혹은 사명과 충돌하는 자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의 반대말은 자기애가 아니라 예수님 부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 배우고 생명 살리는 역사를 앞세우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찬양팀들이 주말 시간의 여유를 희생하여 매주 모여 연습하며 예배 섬기는 것을 볼 때마다 감사와 함께 비전을 봅니다. 자기 부인의 크기를 떠나,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청년의 때에 주님 역사를 앞세우며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빚어지는 복된 통로가 될 줄을 믿습니다.
두 번째 명령은 자기 십자가입니다. 본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말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가로 막대기를 지고 처형장까지 걸어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배우고 생명을 살리는 길에 찬사와 영광이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받고 손해를 보고 자기 죽음의 고통을 겪습니다. 한마디로 수치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 은혜와 기쁨으로 충만할 것을 기대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은혜와 기쁨이 있지만, 아울러 현실적으로는 수치와 고통으로 죽음같은 시간을 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성경을 오래토록 공부했는데도 예수님이 잘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보도록 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놀랍고 위대한 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본성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너무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5절부터 강력하게 압박하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 목숨이란 언젠가 사라질 육신의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좋은 음식 먹고 열심히 운동합니다. 그럴지라도 100년 후 이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발버둥을 치든, 그렇지 않든, 언젠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만약 평생 자기만 위해 살다가가 어느 날 찾아오는 끝날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얼마나 안타깝고 두려운 일입니까!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인생,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이라면, 그 날은 영광의 날, 구원의 날,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해 애쓰고 수고한 날은 지혜로운 인생여정으로 남을 것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합니까(36)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37) 100억을 줄 터이니 목숨을 달라고 하면 내줄 사람이 있을까요! 내주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일 것입니다. 이 땅에 올인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일 수도 있고, 주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찾아오는 그 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주 앞에 서게 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날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좇아 살아가면 안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음란하고 죄로 넘쳐나는 세상일수록 믿음으로 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유별난 모습으로 받아들입니다. 자랑하고 존경받아야 할 모습인대도 부끄러운 모습처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가장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많은 이들이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며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38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는 그 날에는 완전히 역전되고 맙니다. 그때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간 자들이야말로 가장 빛나고 영광스런 자들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은 생명의 길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우리 앞에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길과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사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