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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이 뱀허물처럼 벗어놓은 몸의 역할>의 줄거리: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이보다 더 심하게 그리고 더 명료하게 남녀 차별 사상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교회의 예배에서 남자와 동등하기를 원하는 고린도 교회 내의 여성들의 자유와 권리를 향한 움직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쐐기를 박습니다. 사도 바울 말씀의 요지가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차별은 있다. 그러나 차별의식, 즉 차별받는다는 의식도 없고 차별한다는 의식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뱀 허물처럼 벗어놓은 몸의 역할
(고린도전서 11:1~16)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이 뱀 허물처럼 벗어 놓은 몸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이 뱀 허물처럼 벗어 놓은 몸의 역할”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예배를 드릴 때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때의 예배란 집에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 교인들이 남자와 동등하게 예배 중에 너울 쓰기를 거부하면서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생겼고 이 일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용에 대해 여자는 너울을 쓰라며 단호하게 쐐기를 박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절을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고도 단호하며 극심하게 남녀차별 사상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머리란 주권과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는 자유와 권리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 자유와 권리를 사용함에 있어서 또 다른 방식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여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남자와 동등하기를 원하여 관례로 지키고 있었던 너울 쓰기를 거부하고 자유와 권리와 해방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너울을 쓰라며 쐐기를 박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는 다분히 억지스러운 면이 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본문을 대하며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사도 바울이 절대불변의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14절에서는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라고 본성을 언급하였고, 16절에서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고 관례를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태도를 보자면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은 모두가 지키는 관례이며 다른 어떤 교회에서도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판단함과 본성과 관례를 언급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입니다. 본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죄에 찌든 장아찌와 같이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가르치는 바가 진리에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관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로부터 논리를 발전시켜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돕는 배필을 주시기 위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하와를 만드신 것을 언급하며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도 바울이 창조의 질서를 통하여 남녀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다시피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닌 스스로 판단함과 본성과 관례입니다. 이는 당시의 어느 교회에서나 지켜오던 관례를 성경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명한 것입니다. 진리를 풀어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관례를 성경 말씀으로 설명해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례나 풍습은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과 믿음의 진리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본성이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와 은총 가운데 주어지는 말씀 속에서만 깨달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에서 시작해 남녀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영원히 유지되고 지켜져야 될 진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에 너울을 쓰라고 쐐기를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판단함과 본성과 관례를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경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영원히 지켜야 될 남녀관계의 규칙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스스로 판단하고 본성으로 깨달아야 할 일이며 관례에 관한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느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에 대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있지만 이 문제 자체는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 헬라 사회에서 노예들은 주인에게 순복한다는 의미에서 머리에 무엇인가를 썼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4절에서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곧 당시에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권세와 주인에 순복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권세와 주인에게 순복하는 것이기에 남자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의 과정을 다 알고 있는 천사들이 예배를 내려다볼 때 눈에 보이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관례대로 너울을 쓰라고 말하며 창조의 이야기로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도 바울은 관례를 중시하여 남녀를 차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본문 전체를 보자면 남녀차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보입니다. 11~12절을 보면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최초의 여자인 하와 이외에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나옵니다. 좀 더 확장하면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의 생각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낸 부분이 있습니다. 3장 27절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8절을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쪽에서는 동등함을 말씀하시고 관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남녀차별 주의자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한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서로 충돌되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갈라디아서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하였는데 말씀드렸듯이 이는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고린도 교회에 있는 여성들에게 적용해봅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은 복음이 자유와 권리를 주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때 답답하게 머리에 너울을 쓸 필요가 없으며 남자와 동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동등함을 주장하는 영역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동등함은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실제 주체는 마음입니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마음이 몸에 얹힌 신분을 벗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라는 신분은 모두 몸에 얹혀있는 특징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이 감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에 마음이 사용하던 몸은 뱀이 허물을 벗듯이 벗어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입을 때에 그 몸이 부활하고 그 몸이 승천하고 그 몸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을 옷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이고 이 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사회에서조차 동등함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투표권이 모두에게 있고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을 하지만 이것이 민주사회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동등함의 한계입니다. 이 이상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우선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동등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상태가 동등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능력과 특성이 동등하지 않습니다. 동등이라는 말은 이 세상 안에는 없습니다. 동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듯 마음이 몸을 벗어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동등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동등함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 시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제사장과 창기는 전혀 동등한 입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살아있을 때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듯 마음이 몸을 벗어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몸의 상태입니다. 마음으로 아까워하고 좋아할 만한 이 세상 가치가 몸에 많이 붙어있을수록 미련 없이 몸을 벗기는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대제사장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세리나 창녀는 대제사장과는 반대의 입장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천대받던 이들은 몸을 벗어버리고 마음만 빠져나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이유에서 마태복음 19장 24절에서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살아있을 때 마음이 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몸을 내 몸처럼 여겨서 연합하는 상태가 되어야만 실제로 몸이 죽어서 삶이 끝날 때도 진정으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가치가 많은 상태이기에 그만큼 몸을 벗어버리기가 어렵습니다. 뱀이 허물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는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아들아이가 운동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려고 하면 욕실 앞에서 땀에 젖은 옷을 허물 벗듯이 벗어버립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질 수 있도록 지음 받은 공백의 영이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동안 몸에 달라붙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과 동시에 마음이 몸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나의 몸으로 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예수님의 몸에 붙은 나의 마음도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곧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 몸은 뱀의 허물처럼 이 땅에 남겨지게 되고, 몸이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내용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관례를 중심으로 하여 여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남녀관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당시의 관례와 관련된 일이기에 이 본문의 내용을 요즘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관례에 대해서 성경을 동원해서 설명하는 사도 바울의 관점과 태도는 복음적입니다. 복음적이라 함은 영원한 진리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러한 사도 바울의 태도와 관점을 배우고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근본적인 관점은 복음적으로 볼 때 몸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동등함이나 평등함은 없다는 것입니다. 동등과 평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인과 종이 있던 당시에만 적용되는 일이 아닙니다. 재벌이나 노숙자나 대통령이나 택배기사나 환경미화원이나 다 똑같은 상태가 되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갔을 때 몸은 어떤 상태로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사도 바울의 태도를 배우기 위해서 꼭 기억해야 할 점은 앞서 살펴보았던 7장에서 잘 드러납니다. 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계속 반복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7~20절을 보면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가 중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이 반복되어 20절에서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하였고, 24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자유인으로 살던 사람이 복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유인이라는 신분은 몸에 얹혀있는 것입니다. 한편 종으로 살던 사람도 복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종이라는 신분 역시 몸에 얹혀있는 것입니다. 이때 두 사람의 마음은 모두 뱀이 허물을 벗듯이 신분이라는 허물이 얹혀있는 몸을 벗게 됩니다. 자유인이라는 신분이 얹혀있는 몸을 벗고, 종이라는 신분이 얹혀있는 몸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나의 몸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나의 마음도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게 됩니다. 또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실 때에 나의 마음도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만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을 만나서 뱀이 허물을 벗듯 마음이 몸을 빠져나가고 나면 이제 자유인이었던 몸과 종이었던 몸이 남게 됩니다. 이는 할례자였던 몸이나 무할례자였던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더 나아가면 남자였던 몸 여자였던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 작용과 좋음을 추구하는 욕구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버린 사람은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몸의 신분이 자유자든 종이든 이 세상에서 주어진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개선시키거나 바꾸려 하는 의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든 개선과 변화를 위한 의지는 마음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바람으로써 나타납니다.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현재 상황을 바꾸려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몸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바꾸려 하는 원초적 에너지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삼아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이 땅에 허물처럼 벗어버린 몸은 더 이상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발동하며 행동을 취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의미의 말씀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 상태로부터 어떤 변화나 개선이나 발전이나 혁명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의도에서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간다면 재벌인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노숙자인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재벌은 재벌의 상태에서 노숙자는 노숙자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시키는가를 듣고 그 계명을 따라 행할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명이란 십계명이나 율법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십계명이나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굳이 이것을 언급할 이유가 없었고 말해봤자 소용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란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을 때 몸이 행해야 될 바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알려주시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몸이 행해야 될 바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복음적 태도로부터 본문에 기록된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라고 한 이유를 오해 없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린도 교회의 여자 성도들이여! 그대들이 진정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였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여러분 각자의 몸으로 가졌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온통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만을 느끼고 아버지의 좋음만을 느끼면서 아버지를 소망하고 교제하는 일에 전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름을 받은 여러분의 마음에서 어떤 마음 조각이 땅에 남아있기에 너울을 벗을 자유와 권리를 추구합니까? 복음이 주는 자유와 권리는 하늘을 향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마음을 하늘에 적용시키지 못하고 땅에서 남자와 동등하게 되는 환경과 조건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개선과 향상을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의 태도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게 하고 싶어서 너울을 쓰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존재로 머물러 있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은 관례였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연극 무대의 세트와 같습니다. 자유인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자유인이라는 신분은 몸이라는 무대에 얹혀있는 세트입니다. 마찬가지로 종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종이라는 신분은 몸이라는 무대에 얹혀있는 세트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언급되는 여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도 현재 관례로써 주어지고 있는 세트입니다. 이러한 관례가 진행되는 중에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관례를 따라 몸이 행하면 그만입니다. 마음이 여전히 몸에 붙어있어서 몸이 처한 환경이라는 무대의 세트에 불과한 상황을 개선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마음을 땅에 쏟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 환경과 조건에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에 담겨있는 요지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입장차이가 있을 수 있고, 자유인과 종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몸에 얹혀있는 신분의 차이입니다. 정말로 복음을 받아들여서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갔다면 몸에 얹혀있는 신분을 바꾸려 하거나 개선 시키고자 할 수는 없습니다. 종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적 역사하심에 따라 자유로워질 기회가 주어졌다면 자유해 지면 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자유해 지고자 벗어나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뱀이 허물을 벗듯 마음이 빠져나간 몸과 몸에 관련된 모든 일들은 단지 무대의 세트이고 역할이고 배역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7장 19절에서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하였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대사와 지시를 따라 행동을 취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몸이 남아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행동할 뿐이지 기쁨이나 보람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삼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면 하나님만 바라보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머리에 너울을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대단한 일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할 인격의 핵심인 마음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닙니다. 재벌총수도 아니고 노숙자도 아닙니다. 대통령도 아니고 말단 공무원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며 하나님을 보물로 여길 뿐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몸이 여자로서 행동하는 것은 그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배역을 담당할 뿐입니다. 종이라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연극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종의 배역을 담당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종이라는 배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정말로 가져야 할 것을 못 갖는 일은 없습니다. 또 종이라는 신분이라고 해서 갖지 말아야 될 것을 가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자와 남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남편에 대해서 나의 하늘이시고 나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배역일 뿐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이야기하자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차별은 있으나 차별의식이 없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돈이 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은 아닙니다. 몸에 가난이 얹혀있는 상태는 여러분의 역할이고 배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난이라는 배역을 주셨습니다. 그 가난한 배역을 진행하는 중에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진정한 보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한 보물로 가지면 가난 속에서도 평강을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부자도 평강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배역을 맡은 자가 진짜 보물을 가진 표시를 내고 티를 낼 때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이용해나가십니다.
여자라는 것도 몸에 얹혀있는 배역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배역을 따라 여자다운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자다운 일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여성스러운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독의 지시를 기다리는 배우처럼 “하나님! 제가 여자라는 배역을 맡고 있는 중에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면 되겠습니까?”라고 기도하며 맡은 배역의 내용을 하나님께 들어야 합니다. 인격의 핵심인 마음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다 하나님 아버지를 보물로 받은 동등한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이 땅에서 외모가 다른 사람에 비해 못하더라도 못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보이셨던 것과 같은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못생겼다면 하나님께서 그 배역을 주신 것입니다. 이 배역을 통해서 마음이 하나님을 가짐으로 갖게 되는 평강과 기쁨을 발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나타나는 영향력과 힘을 연출하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이 못생긴 것이 아니고 못생긴 자의 배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한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의 배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못하는 자의 배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께서 지금 몸이 아프더라도 실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픈 자의 배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배역을 맡은 순간에 하나님께 배역의 내용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픈 자로서 가족과 사람들 앞에서 보여야 될 행동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만을 바라시기를 바랍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어도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아픈 상태는 하나님이 주시는 배역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배역에 충실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배역에 충실하다 보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낫게도 하실 것이며 건강한 자의 배역을 담당하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혀서 죄수의 배역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때가 되었을 때 총리의 배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다윗도 마찬가지로 목동의 배역을 담당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꺼내셔서 국가의 지도자 배역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 세상의 배역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지금 몸이 아픈 배역을 맡았다면 몸이 아픈 자로서의 배역에 충실하여 행동과 말을 하나님께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배역을 맡았으면 가난한 중에 해야 될 말과 행동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배역 자체를 바꾸어달라고 요구하는 배우는 없습니다.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채택함으로써 하나님이라는 진짜 보물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사도 바울은 마음의 영역과 몸의 영역을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서 사도 바울이 갖고 있었던 근본적인 마음가짐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뱀이 허물을 벗듯 마음이 몸을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뜻을 따라 배역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매사에 적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채택하게 하시고, 뱀이 허물을 벗듯 벗어놓은 몸은 이제부터 주어진 그대로의 배역에 충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