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한풀선사와 무예 한풀은 전연 관계가 없습니다. 한풀선사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소문은 긍정적이지만은 아닌 듯하더군요.
한풀은 덕암최용술선생의 제자 김정윤선생이 기술을 정리해 만든 무예입니다.
다케다의 제자들이 배운 무예가 호신술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다는 글에 대해
호신술수준이 무엇인가 물어오셨는데요.
다케다가 살았던 시절은 무사대가 막을 내릴 무렵이었지요. 검을 차고
다니지 못하는 법령이 발표되는 등 일본정부가 치안에 노력했지만
여전히 검을 지팡이등에 숨겨다니는등 휴대한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지요.
따라서 당시 배운 무예수준이 호신술수준이었다는 말은 오늘날의 호신술과
혼돈해서 안됩니다. 검객을 만나 자신의 몸을 보호할 정도가 되어야 호신술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예를 할 줄아는 인물은 그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고 보아야겠지요.
격기술이 없으므로 호신술수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만
전혀 틀린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요.
다케다의 무예를 배운 일본의제자들이 가르치는 기술에는 대개 공격기술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 그들은 무예의 정신운운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므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등의 논리를 펴겠지요.
당초에는 공격기술까지 배웠는데 평화의 정신을 해 빼버렸을 수도 있겠고
아예 없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판단하기로는 당초 배우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첫째이유는 아이키도 유술(다케다의 아들3명과 그들의 제자들이 가르치고
있음)에 공히 공격기술이 없는 반면 덕암 최용술의 기술에는 그것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다케다는 평생 유랑하면서 무예를 가르치고 다니면서
무예를 가르치는데 중요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한곳에서 절대 85일 이상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덕암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다케다는
사람을 보아가면서 무예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관상을 보아가면서 가르쳤다고
말했지요. 덕암은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귀국했을 때 다케다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기술공개를 평생 꺼렸3지요. 자신의 사진을 절대 찍 못하게 하는 등 무예의
공개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지요.
두번째 이유는 덕암의 제자였던 지한재,서인혁,김무홍선생등이 훗날 합기도를
만들어 보급했는데 같은 덕암의 제자인 김정윤선생이 배운 기술을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는 것입니다.
덕암선생이 평생 부적처럼 갖고 다니던 목검(34센티미터)이나 투검기술을 위
3분이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덕암이 기술공개를 꺼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기술을 배우지 못하고도 한국의 합기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에 그런 기술이 거의 공개되지 않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사람을 꺾어 넘기는 기술은 당시만해도 놀랄만큼 신기한 것이었지요. 지금이야
호신술용으로 흔한 기술이 도해 버렸지만...
제가 판단하건데
공격할 줄 모르고 하지 않는 것과 알고도 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알고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제대로된 무예라고 생각합니다. 방어기술은 없고(빈약하고
)공격기술만 있다거나 그 반대인 경우 그 무예는 불구라고 보는 것입니다.
훌륭한 공격기술이 있는데 일부러 제거하고 무예를 정리한 다는 것은 왠지
설득력이 없질 않습니까?
상대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공격기술과 상대의 공격을 완전 무력화할 수 있S棋
는 방어기술을 공히 갖고 있으나 먼저 공격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무예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갖고 있으면 쓸수도 있다는 논리는 물론 염두에두고 한말임을 밝힙니다.
참고로 다케다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공격용기술을 갖고 있지 않거나 극히
소수만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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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35 / 646 [등록일] 1998년 04월 01일 09:03 Page : 1 / 10
[등록자] KEMGA [조 회] 221 건
[제 목] [답변310] 유니텔의 최용술옹 관련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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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니텔의 최용술옹에 관한 글을 읽고
말씀하신 유니텔에 게재된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황약사님이라는 분이 쓰신 글인 것 같습니다. 그분 글의 기본적
인 초점은 일단 한풀에서 게재한 글을 반박 하면서 동시에 유니
텔에 올라온 최용술옹에 관한 글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인 것 같
습니다.
유니텔의 글에 대해 천리안에서 논하는 것이 각 통신 무예동호
회 상호간의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 글을
읽고난 저의 생각을 적겠습니다.
먼저 한풀측에서 게재한 글은 진실이라고 봅니다. 저는 한풀인
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동안 최용술옹의 역사가 궁금해 적쟎은
분들을 만났던 느낌을 종합해 볼 때 한풀의 주장은 'Fact' 라고
판단합니다.
한풀측이 소지하고 있다는 '육성 녹음테이프'는 분명히 대구 최
용술옹 자택에서 생전에 녹취된 것이 사실입니다. 한풀측 제자
가 아닌 그 현장에 있던 다른 대구 분들이 당시 상황을 말해주
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테이프가 조작인가 혹은 가공인가의 문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또 의심하는 것이 최용술옹이
자신을 격상시키기 위해 일부러 다께다 소오가꾸의 수제자인양
구술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입니다.
이 사실의 진위를 따지기에 앞서, 왜 유니텔의 '황약사님'은 의
심에서 출발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분 글의 서두는 " 자신이 관
심을 갖고 최용술옹과 일본 대동류 자료를 나름대로 찾아본 결
과 한풀측의 주장을 뒤엎는 사료를 발견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선입견이 부정적 의식에서 출발했다는 느낌이 듭니
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 혹시 한풀에 대한 어떤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동안 한국합기도에서 도주라고 해놓고도 막상 최용술옹에 대
한 국내 자료와 올바른 평가가 전무한 상황에서, 한풀측이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을 터트리리니까, 반대급부로 거부감이 생긴
것은 아닌가 라고도 생각해봅니다.
한풀측이 그 내용을 발표하게 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일단 한
풀은 최용술옹에 대한 역사를 정면으로 내놓을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는 정통유파입니다. 김정윤씨는 최용술옹에 대한 녹음
테이프가 없었어도 이미 최용술옹에 대한 전사를 모두 알고 있
는 분입니다. 그분은 57년부터 64년까지 최용술옹의 문하에서
최장기간 수련한 정통제자입니다. 그 수련기간 동안 아침 4시간,
저녁 4시간 등 도합 8시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마했던 분입
니다. 그분은 경북대학교를 다니시다가 수료하셨는데 이유는 공
부와 수련이란 양갈래에서 도저히 양립할 수 없기에 공부를 접
어두시고 무예수련에 일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분의 청소년시
절의 꿈은 성직자였다고합니다. 한 평생을 무술에 바친 그분으
로서는 바로 무예인의 길이 성직자의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대구도장에서 김정윤씨가 사범으로 계실때 아침수련이 6시
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최용술옹은 매일 어김없이 5시면 나
오셨고 사범인 김정윤씨는 이보다 1시간 앞서 4시에 나와 도장
을 열준비를 미리하고 스승을 맞았습니다.
5시에 도장에 나온 스승 최용술옹은, 6시까지 김정윤씨와 서로
맞대어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아 지나온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때는 최용술옹이 귀국한지 10여년정도 였으므로 일본에서 스승
다께다 소오가꾸와 함께 순업수련한 과정과 일본에서 최용술옹
이 활약한 생생한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 나날이 무려 7년입
니다. 하루도 어김없이 2천5백여일을 수련하면서 들으셨던 겁니
다.
그런 김정윤씨가, 굳이 녹음테이프를 갖고 최용술옹의 일본행적
의 진위를 따지려든다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기가막히겠습니까.
또한 김정윤씨가 최용술옹의 수제자라는 것은 한풀측의 얘기가
아니라 다른 합기도원로에게서도 들은 바 있습니다. 70년대를
전후해 최용술옹을 측근에서 모셨던 한 원로는 매번 이렇게 들
었다고 합니다. "도주선생은 제자들을 얘기할 때면, 항상 정윤
이, 정윤이, 하면서 (지)한재나, (김)무홍이가 내게서 국민학교
과정을 마쳤다면 (김)정윤이는 고등과정을 마쳤지"하고말입니다.
또 60년대 최용술옹의 측근 사범을 지낸 한 사범은 "지한재, 김
무홍, 김정윤씨 모두 당대 최고의 파이터다, 그중에서도 술기는
김정윤씨가 가장 높았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황약사님이 한풀측의 주장에 대해 그 사실여부가 궁금했다면,
합기술의 원로이신 김정윤씨를 직접찾아 뵙고 정중하게 질의하
지 않고 왜 일본자료만 조사하고 진위를 따지려고 했을까요.
어느정도의 일본자료는 저도 입수하여 그정도의 의문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상적으로는 황약사님 처럼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일본
아이키도측이 초장의 역사를 다 말하고 있지 않으며, 대동류측
도 다께다 소오가구까의 전모를 제대로 알지 못한 소치라고 봅
니다.
최용술옹은 50년대말 일본서 국내로 유입된 아이키도 책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사진을 보고 '이자는 내 제자였다', 라고
말했었으며, 몇해전 사망한 대동류 종가의 다께다 도끼무네를
어렸었을 때 업고 다닌 일화와 대동류의 인물중에서는 사가와고
오기에 대한 언급을 가끔하시곤 했었답니다.
일본 현 대동류의 계보에는 황약사님이 말한대로 최용술옹의 이
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의 이유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국보급 술기인 대동류의 엣센스를 모두 마스타한 조선인의 이름
을 굳이 넣을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과 또 현재 나와있는 일본
대동류 계보의 제자와 최용술옹의 격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봅니
다.
지금 나와 있는 대동류 인물들은 다께다 소오가꾸가 소위 수수
료를 받고 기술을 일부씩 전해준 '외제자'인데 비해 최용술옹은
'내제자'였다고 봅니다. 그들에게는 1수당 약 5백만원을 받았던
것으로 전합니다. 그것도 일부의 술기만 전하면서 말입니다. 그
러나 최용술옹은 이국의 고아로서 입문했는데 무슨 돈이 있었겠
습니까.
최용술옹은 일종의 시봉으로 입문해 대동류를 배워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예로 불교의 큰스님밑에서 동자승이 졸졸 붙어 다니
는 것을 본일이 있을 겁니다. 처음에는 그런 상황에서 출발해
다께다 소오가꾸의 모든 뒷일을 보아가며 배웠던 겁니다. 그 와
중에 다께다 소오가꾸는 최용술옹의 비범한 자질을 인정하고 또
최용술옹은 일본전역을 순력하며 시범을 보인 다께다 소오가꾸
의 연무의 대상자로 손목을 숱하게 잡혀 나가떨어지면서 알게모
르게 다께다소오가꾸술기의 진수를 체득해갔던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산악 8년수련에 의해 대동류 술기계승의 정통인가를 받
게 됩니다. 다께다 소오가꾸가 최용술옹에게 네가 나의 적전제
자로서 나의 체면을 세웠다고 말한 칭찬을 최용술옹은 평생의
기쁨으로 간직했습니다.
최용술옹이 소년시절, 다께다 소오가꾸를 따라 북해도에 갔던
한겨울이었습니다. 북해도의 겨울밤은 매우 춥다고 합니다. 다께
다소오가꾸가 방문할 한 집에 당도하면 다께다소오가꾸는 방안
으로 들어가도 소년 최용술옹은 추운 문밖에서 스승을 지키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몇시간이 되도 밖에서 지켜서있으며, 게다
가 내내 스승의 신발을 자신의 양팔짱 사이에 끼여 체온으로 ㄷ
인후 스승이 나오면 발이 시리지 않게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말년에 최용술옹은 가끔씩 스승 다께다 소오가꾸 선생
의 얘기를 할 때면 눈물을 흘리곤 하셨답니다. '내가 다께다 소
오가꾸 선생의 은혜 때문에 이국에서 죽지 않고 밥을 먹고 살았
는데' 하며 스승을 그리워 했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알려지지 않은 최용술옹의 역사가 지금껏 잠재워져있
는데 이제 한풀에 의해서 점차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한풀에서만 나오는 얘기가 아닙니다. 최
용술옹의 전사에 관한 얘기는 그외에도 합기도계 원로를 비롯해
몇몇분에게 구체적으로 전해진 바 있습니다. 그런데 한풀의 뛰
어난 점은 그 모든 얘기들을 실증적인 역사로서 세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껏 모두가 잃어버리고 팽개친 소중한 역사를 말
입니다.
예컨데 최용술옹의 산리현 서장산 암굴 8년수련에 대해서는 일
본의 대동류쪽 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용술옹
이 생전에 수련장소로 언급했던 그 산악암굴의 동굴터와 인근의
폭포와 산세등 각 지형지물과 그 곳에서 피던 꽃까지도 그대로
확인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최용술옹과 다께다소오가꾸가 순업했던 경로의 답
사, 북해도의 생활등 제반 사료들에 대한 이 모든 확인작업을
김정윤씨는 10년전부터 비디오와 사진, 문서 등에 일일이 기록
하고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과연 한국에서 누가 그렇게 최용술
옹의 역사를 찾고 있는 분이 있겠습니까.
김정윤씨는 나아가 최용술옹의 역사만이 아니라 최용술옹의 귀
국이 결국 일본으로 건너갔던 한민족의 고유무예를 1천여만에
되찾아온 것이므로 대동류의 한계를 넘어 한겨레의 고유무예로
서의 원형을 다시 되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리우는 이름이 '삼
랑무 한풀'입니다. '삼랑무'라는 표현의 의미하는 바가 그것입니
다.
아울러 김정윤씨는 대동류와 택견의 연관을 동일무예라고 까지
논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를, 송덕기옹의 시연필름 3천통과
비디오 필름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직접 찍은 사람이 확
인해준 얘기입니다.
만일 이 논증이 사실로 판명되면 그동안 가슴앓이 했던, 일본서
는 전승된 대동류가 정작 본국인 우리나라에서는 왜 전승되지
않았는가의 의문이 풀리게 됩니다.
대동류와 택견이 곧 하나의 무예로서 전승과정만 달라진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한풀이 주장하는 바가 어느정도
나 깊은 배경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통신상의 글은 담론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상
술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상황을 잘 모르고 궁금해하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들
었던 몇가지의 글을 올린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