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왕후[顯德王后]
조선전기 제5대 문종의 왕비.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31년(세종 13) 세자궁에 선임되어 승휘(承徽)에 올랐다. 1433년경 양원(良媛)에 진봉되었다. 1437년 종부시소윤 봉려(奉礪)의 딸 순빈(純嬪)이 부덕하여 폐빈된 뒤 세자빈이 되었다.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어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총애를 받았다. 1441년 원손(元孫 : 뒤의 단종)을 출생하고 3일 뒤에 죽었다. 같은 해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상훈과 추모
경기도 안산시 치지고읍산(治之古邑山)에 예장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현덕왕후에 추숭되었다. 혼전호(魂殿號)는 경희전(景禧殿)이다. 능호는 소릉(昭陵)이라고 명명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顯陵)으로 개호되었다. 1454년 인효순혜(仁孝順惠)의 존호가 추상되었다. 같은 해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1457년(세조 3) 현덕왕후의 어머니 아지(阿只)와 동생 자신(自愼)이 1456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형당하고, 아버지 전이 추폐(追廢)되어 서민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 노산군(魯山君)이 종사에 죄를 지어 군(君)으로 강봉(降封)되었다. 이에 “그 어미 된 자가 왕후의 명호를 유지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추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개장해야 한다.”는 의정부의 계(啓)에 따라 폐위되었다. 이와 함께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평민의 예로 개장되었다. 1471년(성종 2) 남효온(南孝溫)이 추복(追復)을 건의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에는 대사간 김극뉴(金克忸), 사간 이의무(李宜茂), 헌납 김일손(金馹孫) 등이 현덕왕후의 추복을 헌의(獻議)하였다. 1512년(중종 7)에도 주강(晝講) 석상에서 경연검토관 소세양(蘇世讓)이 추복을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종묘에 벼락이 치자 그것을 계기로 재차 논의되면서 전교(傳敎)로 추복되었다. 그리하여 현릉 동쪽에 이장되었다. 신주는 종묘 문종실(文宗室)에 봉안되었다. 친가(親家)도 1699년(숙종 25) 단종의 부묘(祔廟)와 함께 신원되었다. 소생으로는 단종과 영양위(寧陽尉) 정종(鄭宗)에게 시집 간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있다. 시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이다. 능호는 현릉(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선원계보(璿源系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릉 [顯陵]
조선 제5대 왕 문종(文宗 1414~1452 재위 1450∼1452)과 문종의 부인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의 무덤이다. 9개의 조선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경내에 있다.
<국조오례의>의 본이 된 영릉(英陵,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의 형식을 따른 능으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의 능이 문종,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으로,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놓았다.
병풍석에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 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상석을 받치는 고석(鼓石)도 5개에서 4개로 줄었다. 묘역 가장 아랫단에는 머리·눈·코가 큼직하고,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선 무인석이 있고, 튀어나온 눈과 콧수염 등이 이국적인 문인석이 있다. 문종 이전 왕들의 능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나 문종 때부터는 신도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병을 얻어 1441년(세종 23) 문종보다 11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안산의 소릉에 묻혔다. 단종 복위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3-09-0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