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끝마다 ‘하나님’이고 말끝 마다 '기도'를 내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마치 유행가에서 ‘사랑’을 빼면 노래가 안 되듯이 하나님과 기도 빼놓으면 아예 말이 안 된다. 무조건 자기 편에서 유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불리한 것은 마귀 사탄의 장난이다. 기도는 완전히 제 개인적인 희망사항이고 하나님께 보내는 청구서이다. 아마 종도 그렇게 부려먹으면 사표내고 도망갈 거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 속에 부적을 달고 다닌다. 그들의 부적은 울긋불긋한 종이가 아니고 성경 구절일 뿐이다. 족자나 액자 혹은 목각으로 파져 있는 이런 부적들이 보통 교인들의 집이나 사업장에 걸려 있다.
아마도 제일 인기 있는 부적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욥8:7)라는 구절일 것이다.
성경에 쓰여 있다고 모두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 구절은 흔히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사실은 욥의 친구인 빌닷이 쫄딱 망해 버린 욥에게 시비 걸고 비꼬는 말로 '네가 청결하고 정직하면' 했다면 왜 망했겠느냐는 뜻이다.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부적이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하는 구절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흔히 편지를 쓸 때에 "집안이 두루 평안하시고……."와 같은 편지의 서두일 뿐이다. 차라리 쓰려면 바로 그 다음에 있는 구절인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를 구절을 집집마다 걸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부적이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리라'(신28:13)하는 구절이다.
이 부적을 즐겨 인용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앞의 구절인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느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행하면'이라는 조건 문장은 어디에다 갔다가 버렸을까?
오히려 예수는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누가 22 : 26)라고 말하고 있지 않던가?
그 다음으로 유행하는 부적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 또한 예수의 말씀을 가위질하여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 오히려 예수의 입을 틀어막는 대표적인 예가 되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바로 다음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는 방법론을 선명하게 제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교의 멍에에서 벗어나서 당신이 주는 멍에를 메고 따르라고 권하는 것이다. 무조건 "푹 쉬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멍에를 메고 따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부적은 기독교인들 사이에 도깨비 방망이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 : 13)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 역시 바로 그 앞의 11절부터 "내 처지가 어려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부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생략한 체 남용되고 있다.
믿음 안에서 환경을 초월한 참된 자유함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환경을 마음먹는 데로 조종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적 중에 가장 미신적 증세가 심한 것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라는 이사야 58장 6장이다.
이 구절은 바로 밥 굶는 금식 따위를 하지 말라는 말인데 오히려 밥 굶는 금식을 강조하는데 쓰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기독이 개독으로 불리는 이유가 설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