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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쉘비 스퐁의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제3부 비종교인들을 위한 예수
7장 십자가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초상
세계는 항상 옆으로 비껴서는 것 같고, 바다는 항상 갈 곳을 아는 사람을 위해 갈라지는 것 같다.
당신은 담대한 일을 할 때 당신의 담대함에 대해 전율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이해해왔던 종교의 영역 밖에서 예수의 새로운 초상화에 대해 결론을 맺기 전에, 나는 기독교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결정적 순간으로 되돌아가야겠다. 갈보리의 십자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왜 십자가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가 그 밑에 서서 영광을 돌리려 하는가?1)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타락의 대가를 지불한 곳이 곧 십자가라고 보는 낡은 방식은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죄의식을 조장하며 하나님의 징벌의 필요성을 정당화하고 자신과 남을 학대하는 초기 증상을 오랜 세월 동안 유발시킨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그 효력을 잃었다. 내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구출하는 신은 그 신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자아내지만 인간성의 확장을 초래하지는 못한다. 십자가의 이야기가 고무하는 듯한 끊임없는 감사는 신자들에게 나약성, 유치함 및 의존성을 초래할 따름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함을 예배를 통해 격찬하게 하는 반면에, 인간 생명의 비참함과 나와 같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불한 대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궁극적인 계시의 순간으로 보지 않고서는 예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태의연한 해석을 넘어,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분과 함께 나누었던 체험을 그 해석으로부터 분리시킬 필요가 있디. 나는 바로 그 체험이 부활 이야기에 영감을 주었고 기독교 성만찬을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해석의 과제는 예수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했다는 유신론적 신의 이미지를 극복하도록 요청한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분에게 현존했음이 확실한, 생명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과제다.
복음서들은 십자가를 예수의 필연적 운명으로 제시했다. 복음서들은 예수가 예언자들의 기대에 따라 십자가에 달렸다고 기록했다. 십자가는 나약함을 통해 완전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제는 알게 된 바와 같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히브리 이미지들의 시각에서 해석된 것으로서, 그 히브리 이미지들은 이를테면 유월절, 속죄일, 세상의 학대를 용납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갚은 제2 이사야의 "종", 주님이 오시는 날의 서곡으로서 성전에서 돔물을 매매하는 자들의 손에 배신당한 제2 스가랴의 "목자 왕" 등의 이미지였다. 우리의 과제는 이것들을 역사로서 액면 그대로 읽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 처형의 폭거에 대해 이런 해석을 하도록 만든 예수 체험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이제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룬 드라마 전체를 재구성해보기로 하겠다.
예수와 그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 사이의 관계는 각별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차원에서 피차 관계를 맺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교훈을 경청했으며 그 감동이 그들 자신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 주변의 인물들은 그의 언행에 대한 권리와 권위에 대해 물었으나 그에게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성이 있음을 그들의 질문 자체가 웅변적으로 말해 주었다. 복음서들은 이런 반응을 다음과 같은 구절에 담았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마가 6:2-3).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가 1:22). "무리가 이 일[중풍병 환자의 치유]을 보고서....[그들은] 이런 권한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마태 9:8). "예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당신에게 주었습니까?'"(누가 20:1-2).
예수에게 있었던 능력, 예수가 추종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과 같은 것은 필연적으로 예수 현존의 부분으로서, 제자들이 며칠, 몇 주, 몇 달, 심지어는 그들이 그와 함께 했던 아마도 몇 해 동안에 걸쳐서 느리게, 점진적으로 흡수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또한 예수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관계성 안에서 살아갈 기회도 얻었다. 제자들은 이런 관계성도 표현해야만 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친밀감과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가 기도하는 것도 지켜보았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그 의미에 대해 고뇌하는 것도 들었을 것이다. 제자들 사이에는 예수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도록 사랑했다는 느낌이 있었다. 예수는 자신들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부족의 장벽을 넘어서도록 촉구했으며, 예수 자신은 시로 페티키아 여인(마가 7:24-30)과 로마의 백부장(누가 7:1-10)을 그렇게 대했다. 그들은 예수가 사마리아인들, 여인들, 아이들에 대해 유대인들이 지녔던 뿌리깊은 편견에 매이지 않은 것을 보았다. 이 모든 계기들은 제자들에게 성장시키는 체험이 되었고, 그들의 삶은 그 경험들을 통해 분명히 확장되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인간 역사 속에 비집고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 계속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다. 이것이 최소한 그의 교훈이 기억된 방식 가운데서 지배적인 주제였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의 삶 자체가 어떤 면에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했고, 예수의 삶이 그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하게 생각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매우 희귀한 완전함을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에게는 어떠한 여건 아래서도 그 자신의 참된 존재 의미에 충실하는 용기가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기억한 예수는 그가 친구들이나 원수들이 부연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그 자유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제자들은 그런 자유를 얻게 되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예수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깊숙이 현존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폴 틸리히가 말한 "영원한 현재"(the eternal now)안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2) 예수는 전심을 다해서 사람들과 만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그와 관계를 맺었을 때는 마치 시간이 사실상 멈추었던 것처럼 보였다. 예수가 대면한 사람이 부자 청년이었거나 우물가의 여인이었거나 간에 그는 제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소위 "영원한 밀도"(the intensity eternity) 안에서 그 사람과 만났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현존 자체가 인간을 차별화하는 계급제도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온전해질 가능성, 영원한 가치를 투자할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본 것 같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 만남으로 인해 성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질병과 아픔이 신의 혐오와 징벌의 징표로 여겨지던 시대에, 예수는 병자들을 감싸주고 그들에게 손을 얹고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그들의 몸을 씻어준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는 또한 거리의 여인이 눈물로 그의 발을 씻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는 것을 허락한 것으로 기억되었다(누가 7:36-50). 종교 지도자들은 이 여인의 비도덕성을 하나님의 도리에 역행하는 표시라고 비판했다. 예수는 비도덕성에 관한 이런 정의에 대해 거듭 도전했던 것 같다. 그는 유대인들을 정복한 이방인들과 결탁한 것 때문에 불결한 것으로 치부된 세리를 자신의 제자들의 무리 속에 불러들였다(마가 2:13-14). 만일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서 동족의 고난을 증폭시킨 이 사람마저도 가치가 있다면, 예수에게는 변화되지 못할 인간이란 아무도 없었다. 예수는 제자들이 거부하려했던 힘없는 아디들을 그의 사랑으로 환대했다. 이처럼 관대한 행동들을 제자들이 지켜보았으며,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들을 매혹시켰고 유인했으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이 예수에 대해 반발하도록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항상 예수의 행위 하나 하나가 자신들의 가치를 재평가하도록 촉구할 때마다, 예수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게 되었다. 예수와 함께 했던 삶은 영원히 변하는 만화경속의 삶과 같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존재를 사실상 어떻게 생각했던지 간에 그 실재는 그 자신의 삶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현존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을 다앙하면서도 상당히 일반적이고 심지어 평범한 상징들로 표현했다. 즉 하나님은 탕자의 귀향을 환영하는 아버지와 같았다((누가 15:11-32). 하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와 같거나(누가 15:3-7), 잃은 동전을 찾을 때까지 열심히 방을 쓰는 여인과 같았다(누가 15:8-10). 예수가 인식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지금의 모습 그대로 환영하는 분이었던 것 같다(마태 11:28). 하나님에게 가는 길을 찾은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요구가 충족될 때까지 계속해서 문 두드리는 성가신 과부처럼 소란스럽거나(누가 18:1-8), 내밀한 마음속에 무한한 자비와 용서를 지님으로써 영원한 의미에 가서 닿은 사람들과 같을 수 있다(요한 8:1-11). 그의 제자들은 이런 모든 체험에 틀림없이 동참했을 것이다.
예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비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무력감을 주는 세력들에 대해 통제력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기적이 편만한 시대에 예수 주변에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이 모여들게 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아마도 예수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의 깊은 영적인 우물에서부터 그처럼 완전하게 또한 지속적으로 목마름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리의 숫자와 상관없이 음식의 소모량보다는 항상 더 풍성한 영적 만찬에 큰 무리가 참여하는 것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을 것이다(마가 6:36-44, 마태 14:13-21, 누가 9:10-17, 요한 6:1-14).
제자들은 또한 예수가 사명감에 충만했음을 간파했다. 그들은 그 사명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으나 그 실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세상은 항상 사명감에 불타는 자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 비껴서는 것 같고, 바다는 갈 곳을 아는 사람을 위해 항상 갈라지는 것 같다. 복음서 이야기에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거나 드디어 그 때가 십가가 처형에 이르렀다는 개념이 확실히 있다(마가 14:41, 마태 26:45, 누가 22:53, 요한 2:4). 이 특별한 "때"가 그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어떤 식으로든, 고대 히브리 사람들이 "주의 날"이라 불렀던 것과 결합되었다. 이 결합은 예수를 신비한 존재로 숭배하는 분위기를 고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만간 유대인 성서 여러 곳에 있는 메시아 대망을 예수와 연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 가지 확연한 사실은 예루살렘이 자석처럼 예수를 끌어당겼다는 것이다. 그의 "때"는 그 거룩한 도시에서 와야만 했다. 어떻든지 간에 그를 기억했던 사람들의 기본 주제들은 그의 "때", "주의 날" 및 예루살렘이 예수의 마음속에 함께 뒤얽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황홀감을 갖게 하며 신비를 느끼게 하는 현존이었다.
이 모든 주제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야기 속에 합류된 것 같다. 즉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은 가장 큰 상처를 남겨준 치명적인 기억으로서, 그의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 생각했었던 많은 것들에 대한 철저한 도전이었다. 그의 죽음은 극도로 비탄에 빠진 제자들에게 그의 삶의 의미를 판단하는 외계적 하나님이 보여준 철저한 부정(no)과 다름없는 것으로 보였다. 메시아는 죽을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죽은 메시아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가 죽었을 때, 그들은 예수와 약속된 메시아 사이를 연결시켰던 생각들이 어쩌면 영원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종교적 권위에 강하게 도전했던 예수는 수치스럽게 죽었고, 토라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를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다(신 21:23). 그 종교권력의 구성원들은 분명히 승리자들이었다. 예수는 패배자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렇듯 불가피하게 보였던 결론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달래야 했다. 만일 예수가 죽었다면,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를 살려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본 것이 분명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생각이 틀렸거나 혹은 착각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만일 예수가 틀렸다면 자신들도 틀렸던 셈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았고" "오도되었고" "잘못이었다"는 말로 자신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결론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제자들의 내적 갈등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죽었다는 현실은 자신들이 그와 함께 지낸 체험의 현실에 의해 계속해서 도전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에 대해 어떻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이 창조한 모든 사람의 인간성을 드높이기 위해 모든 분리장벽을 극복한 분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예수는 그처럼 철저하게 생명의 대리인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대리인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그처럼 거저 주면서도 사형죄에 해당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황당한 현실에 대해서는 보태진 것도 전혀 없으며, 따라서 어떤 해답도 나올 수 없는 것 같았다. 십자가 처형이 예수와 제자들에게 가져온 내적 갈등과 긴장은 확연했고 격렬했으며 끝이 없었다.
이처럼 해결되지 않는 긴장 때문에 십자가 처형(이 체험이 긴장을 만들었다)과 부활(이 체험을 통해 그 긴장이 궁극적으로 해소되었다)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고 나는 믿는다. "3일"은 그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는 예배적인 상징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복음서 이야기들은 십자가로 인한 정신적 상처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부활절의 변화가 있었음을 함축하고 있다(누가 24장, 행 1,2장, 요한 21장). 애도의 주기를 연구한 학자들이 보기에는, 이 본문들 속에 제자들의 심리 상태가 십자가 처형 후 6개월에서 1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는 증거가 있다.3)
십자가 처형이라는 비극을 겪은 후 최소한 2세대, 아마도 심지어 3세대가 지난 다음에 기록된 복음서들에서 이런 긴장이 해소되는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고 "성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씀, 즉 마가(15:34)와 마태(27:46)에만 기록되어 있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버림받음에 대한 외침이 누가에서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로 바뀌어져 승리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또한 요한에서는 예수가 "다 이루었다"(19:30)고 선포함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암시하는 것으로 바뀌어지는데, 이것은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창조 작업이 완성되고 영원한 안식일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2:1)를 새로운 관점에서 풀이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에 비유되기 시작한 것은 십자가 처형 이후 한참 지난 다음이었다. 또한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 희생양의 죽음에 비유되기 시작했는데, 이 양의 죽음은 하나님이 창조가 파괴된 것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한 몸값으로 이해되었으며 타락의 대가를 지불하는 피의 제물로 이해되었다. 예수를 유월절 어린양과 연결시킴으로써 죽음의 권세는 파멸되었다고 선포되었다. 예수와 속죄일 희생양을 연결시킴으로써 속죄의 의미가 성취되었다고 선포되었다. 이처럼 마침내 상징적인 해석들 속에서 이해된 예수의 죽음은 이제, 성전에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성소와 하나님만이 계시다고 하는 지성소 사이를 언제나 분리시켜왔던 휘장을 둘로 가르는 능력을 지녔다고 선포되었다(마가 15:38, 마태 27:54, 누가 23:45). 이런 상징들이 예수의 죽음을 견디기 힘든 비극에서부터 목적이 있는 구원의 행위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렇듯 예수에 대한 이해가 발전하게 된 것은 모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유신론적 하나님 개념 속에서 벌어졌다. 즉 이 창조의 하나님은 인간의 불복종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하늘 위에 있는 이 하나님은 징벌과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타락한 인간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 징벌이 가혹했기 때문에, 세상 죄악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한한 은총의 행위를 통해, 기적적인 출생을 거쳐 예수의 인격으로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삶속에서 신적인 능력을 드러냈으며, 하나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예수의 능력을 통해 드러냈다. 즉 죄인을 용서하고 병을 치유하고, 타락하고 왜곡된 세상을 극복하고, 창조자로서 자연의 힘들을 통제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그를 묶어놓은 무덤에서 걸어 나오고, 끝으로 왕복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하나님에게 구속받은 피조물과 인간성을 봉헌하기 위해 기적적인 승천을 단행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좌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 이야기는 전해졌고, 복음서에 처음으로 기록되었으며, 나중에는 신조에 구체적이고 교의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교리들과 성례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설명은 항상 그 설명이 이루어진 세계관의 현실을 전제로 한다. 그 세계관이 죽게 되면, 그것에 첨부되었던 설명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만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1세기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설명, 즉 하나님, 천당 및 기적에 대한 1세기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설명과 같은 것으로 본다면, 그 체험 또한 필연적으로 소멸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며, 이 때문에 예수를 과거 종교관의 사슬에서 풀어놓고 "비종교인들을 위한 예수"의 초상화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달라지는 것이다. 즉 예수 체험은 삶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목적에 대해서, 하나됨을 의한 영원한 추구에 대해서, 하나님과 하나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무엇을 드러내는가? 만일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는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아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유신론적 신의 가학적 본성의 표징 대신에, 우리에게 유용한 상징이 될 수 있다. 그 신학이 우리 예배의식에 들어올 때, 그것은 인간을 폄하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예수의 피의 정화 능력을 중심으로 발전시킨 물신숭배를 조장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타계적 구조는, 희생제물에 관한 그 언어, 징벌하는 하나님에 대한 그 가학적인 모습, 타락과 범죄와 파멸로 인해 자비를 구걸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정의와 더불어, 이제는 파산되었고 철거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추구했던 우리의 여정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조물이 철거될 때 남을 것이 없다고 불안해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기독교는 사멸했고 탈기독교 세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직시하도록 하자.
그러나 나는 21세기의 크리스천으로서 그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의 과제는 과거의 상징들에 인공호홉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그럴 가치도 없으며 그럴 가능성도 없는 것들이다. 나의 과제는 이제 유통기한이 지나고 사멸하는 상징들을 생산한 그 체험 속에 들어가서, 그 예수 체험의 능력을 전달하기 위해 나의 세계관에 적절한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를 위해 이 작업을 할 수는 없다. 나는 다만 나의 시대를 위해서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정체성과 그의 본질에 관해 말할 수 없다. 비록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신조와 교리를 통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위선을 떨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실재는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체험할 수 있을 따름이며, 우리는 그 체험마저도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고 항상 인식해야 한다. 초자연적 유신론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부적절한 정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버릴 필요가 있다.
내가 나의 하나님 체험을 말하고자 할 때는 오직 인간적인 유비들(analogies)만으로 할 수 있다. 곤충은 새가 되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가장 초보적인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적 유비의 언어로 나의 체험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포용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삶을 체험한다. 내가 그런 삶을 완전히 살기 위해서는 나의 인간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삶의 꿀맛을 볼 수 있고 또한 그 영원성을 묵상할 수 있다. 나는 그 때 내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생명의 원천과 교통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랑을 나를 넘어서 어떤 것으로 체험한다. 나는 사랑을 창조할 수는 없으나 사랑을 받을 수는 있다. 내가 일단 사랑을 받았으면 그 사랑을 남에게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내가 참여할 수 있고 나를 변화시키는 초월적 실재이다. 나는 보다 심오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원천을 묵상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의 원천을 나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존재를 내가 참여하는 어떤 것으로 체험한다. 그러나 나의 존재는 존재 자체의 내용을 소진할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한다. 나는 나보다 훨씬 위대한 어떤 것에 근거하고 있다. 존재 자체는 소진될 수 없고 무한하며 또한 파괴될 수 없다. 내가 존재의 근거와 접촉했을 때 나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접촉한 것으로 믿는다.
바로 이런 초월적 체험에 대한 확대된 의식을 통해서, 나는 나사렛 예수를 직시하고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의 뜻을 깨닫는다고 감히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견해와 심지어 내가 예수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견해도 객관적 실재라고 믿는 것에 대한 나의 주관적 서술이다.
나는 예수를 경계선_파괴자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안전체계 울타리를 벗어나도록 촉구하는 분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예수의 삶은 공포가 인간성을 질식시키고 방어벽을 구축하고 규정적인 편견을 조작하고 종교제도를 설립하는 등, 만성적인 공포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안전을 제공하기 위해 고안된 현실을 인식한 삶이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이런 인간적이며 다양한 안전체계에서 벗어나고 초월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비종교적인 새로운 인간성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 인간성을 속박하는 모든 종교 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신성을 외부적인 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가장 깊은 차원으로서 찾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내어줄 만큼 자유롭게 될 때만 신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과 본질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미를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을 직시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신의 현존을 인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것은 성육신론과 삼위일체론으로 이끄는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온전함, 새로운 창조, 새로운 인간성 및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이끄는 현존에 대한 탄성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하나님에 대한 체험 곧 온전함을 가져다주는 체험을 전제로 십자가 이야기를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십자가 처형이 잔인한 세계의 잔인한 처형형태였기 때문에 그 잔인성은 감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이 그린 예수의 초상화는 우리의 신앙심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십자가 이야기 가운데 어떤 자세한 내용이 역사적으로 정확한지 아닌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복음서들은 목격자들의 증언이 아니라 고대 히브리 자료에 근거하여 예배용으로 편집된 문서라고 보기 때문에, 십자가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들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 이야기들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기억, 곧 나를 여전히 놀라게 만드는 초상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우선 오늘날 여전히 수난주간에 읽은 예수 이야기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는 승리자처럼 예루살렘 속으로 행진해가고 있다. 분위기는 축제와 같다. 큰 무리가 모인다. 그 메시아적 상징은 스가랴에서 따온 것이 뚜렷하다(슥 9:9-10).
그는 왕으로 오지만 권력의 상징은 없다.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은 그들의 저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The Last Week)4)에서, 예수의 행진과 똑같은 시기에 있었던 빌라도의 행진(유월절에 발생할 지 모를 테러 행위를 진압하기 위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는)을 비교하고 있다. 권력자는 나귀를 타지 않는다! 권력자는 비무장이 아니다. 복음서들은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서 그에게 자기들의 옷을 던졌다고 전한다.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꺾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다. 모두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의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가 11:1-10). 복음서 저자들이 전하는 메시아적 열망에는 잘못이 없다. 무리는 예수를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한다. 이것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고차원적인 말이다. 불안한 인간에게는 사람들의 칭송만큼 달콤한 마약 이상으로 매혹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온전한 인간인 예수는 그런 유혹을 받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는 온전해지기 위해 인간의 환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환장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 나귀를 타고 간다.
복음서 저자들이 그 마지막 주간의 날들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으로 묘사하는 동안 예수의 행진은 냉혹하게 이동해간다. 베다니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서 대결하게 된 성전에 이른다. 성전이 다시 천명된다. 즉 성전은 제도종교를 후원하기 위해 모인 강도들의 소굴일 수는 없다. 성전은 모든 민족들이 기도하는 집이다. 온 우주에 편재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민족이든 분리시키는 장벽이란 없어야 마땅하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건설한 성소, 곧 하나님의 존재 전체가 임재한다는 공간에 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은 그 한 주간 동안에 긴장이 조성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종교 지도자들이 포도밭 주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비유가 언급된다. 위로를 찾기에는 그 비유가 너무나 가깝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행동에서 자신들은 마치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지만, 결국에는 예수를 새로 세워질 건물의 초석으로 삼는 데만 성공했다고 마가는 암시한다.
그 다음에 예수는 당시 종교가 규정한 경계선과 전통적 종교 규칙들과 대결한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이 인간성을 속박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누가 하늘나라에서 결혼하는가? 죽은 자가 살아나는가? 가장 위대한 계명은 무엇인가? 예수는 이런 질문들을 모두 회피한다. 그는 다른 비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규칙은 하늘나라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계명의 본질은 사랑이다. "다윗의 자손"은 그리스도 생명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참 종교는 신분에 저촉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그의 존재와 직결된다. 거짓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 정의는 무성할 것이다. 종교적 규칙들은 극복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을 발견하는 곳은 권력이 아니라 무력함에 있다. 항상 준비하여라. 주 하나님은 기대하지 않을 때 삶 속에 도래한다. 하나님은 속박되지 않는 무한대의 사랑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기억한 나사렛 예수가 말하고 살아낸 강력한 메시지다.
그 다음에 예수의 드라마는, 일종의 신적인 필연성을 지닌 채, 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한 여인이 장례를 위해 그에게 기름을 붓는다. 배신행위가 발생한다. 유월절 만찬이 준비되고 거행된다. 빵 조각과 포도주의 상징은 그의 찢긴 몸과 흘린 피의 전조가 된다. 제자들의 나약함이 묘사된다. 그들은 자랑하고 잠자고 도망치고 드디어 부인한다. 예수는 체포된다. 그는 홀로 있다. 그의 운명은 결정된다. 그의 삶은 종말로 다가온다. 여기서 복음서 저자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응시하고 관찰해 보자. 그는 배신당했으나 배신자를 사랑했다. 그는 저버림을 당했으나 저버린 자들을 사랑했다. 그의 체포자들은 저지 당했으나 그는 방어자들에게 칼을 치우도록 명령했다. 그는 허위로 고발당했으나 고발자들 앞에서 침묵했다. 그는 자신을 전혀 방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조롱당하고 고문당할 때도 조롱하는 자들과 고문하는 자들을 사랑했다. 그는 채찍을 맞았으나 그들을 사랑했다. 그는 부인 당했으나 부인하는 자를 사랑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살인자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증오와 거부, 학대와 죽음, 이런 것들조차도 그의 인간성을 축소시키지는 못했다.
이것은 결코 미워하거나 해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인간의 초상화다. 사람이 부당하게 죽게 될 때 생명에 집착하는 것, 즉 한 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는 것이 인간의 성향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의 모든 노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곧 생존투쟁 앞에서 허망하게 끝장난다. 즉 피해자들은 저주하고 싸우고 침뱉고 자신의 운명에 저항한다. 이것이 통하지 않을 때 그들은 빌고 간청하고 흐느끼고 기도한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날 기회가 있다면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덤비게 마련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 체험의 기억을 파악하려고 애쓰면서 그의 죽음에 관해 그린 초상화는 전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오히려 예수가 온전한 인간 곧 그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했기 때문에 그것을 내어줄 수 있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힘없는 자들에게 보복을 자행하는 강자들에 대해 예수는 힘없는 사람으로서 폭력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파괴된 인간성을 목자로서 돌보았다. 예수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누가 23:34)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비록 로마의 압제자들은 이 사람을 더러운 유대인 종교적 광신자로서 아무런 궁극적 가치가 없는 자에 불과하다고 간주했으나, 그는 존재의 능력 곧 학대자들에게 항상 깃들어 있게 마련인 억압된 죄책감을 승화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죽어가는 이 피해자는 그들의 무딘 영혼들을 향해 용서의 말을 던졌다. 무리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으나 그는 연민으로 응답했다. 그와 함께 죽는 강도는 그에게 희망의 손을 뻗쳤으며 예수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 23:43)는 약속으로 대했다. 요한복음만이 사실상 예수의 어머니가 십자가 곁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거기서 예수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19:26).
이 그림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나는 이 그림의 역사적 정확성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예수의 존재를 기억한 초상화이고, 따라서 예수의 인격과 예수 체험의 본질에 대한 통찰로 가득 차 있다. 예수의 삶은 그토록 온전하고 자유로운 삶이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자의식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징표인 생존의식을 초월한 분의 모습이다. 사람은 자기가 소유하지 않은 것을 내어줄 수 없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소유했고 자기의 생명을 내주었다. 십자가는 결코 하나님의 정의가 신의 아들의 고난을 통해 충족되는 곳이 아니다. 십자가는 완전한 삶의 소유자가 자기의 존재 전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곳인 동시에, 이 행위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이란 말로 뜻하는 바 모든 것이 가시화되는 곳이다.
완전한 인간성에는 하나님의 징표와 의미가 주어진다. 완전한 인간성은 신적 실재 속으로 유입된다. 신성은 인간성의 궁극적인 깊이가 되며 또한 그 궁극적인 깊이다(Divinity becomes and is the ultimate depth of humanity.). 하나님은 세계나 인간성 위에 있는 어떤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미와 실재는, 우리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생명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흐르는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체험에서 발견된다. 하나님 체험은 삶이 초월적 타자에게 개방될 때, 즉 우리의 삶이 모든 장벽을 넘어 더욱 극대화되는 인간성 속으로 초청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1세기 예수 체험은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말했고, 우리가 또한 그들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을 통해서 생명, 사랑 및 존재가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는 고문과 죽음의 장소가 아니다. 십자가는 한 사람이 자기의 존재 전체와 자기 소유 전체를 내어줄 수 있을 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묘사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고 사랑하고 존재하도록 촉구한다. 십자가는 인종, 부족, 국가, 성별, 성적인 성향, 왼손잡이, 오른손잡이, 그 밖의 삶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적 다양성 모두를 포용하는 사랑을 뜻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되는 하나님의 이런 요청은 단순히 우리 각자가 온전한 존재가 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 인간성을 통해, 모든 인간이 보다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더욱 무진장하게 사랑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도록, 하나님의 선물을 제공하라는 요청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살아내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사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존재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초청은 종교로의 초청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고통을 회피하고, 안전을 추구하며, 마음의 평화를 소유하라는 초청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생명_파괴적인 우상숭배로 초청하는 것이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초청은 완전한 인간이 되고, 방어벽을 쌓지 말고 위험을 감수하며, 마음의 평화가 없는 것을 인간성의 필요조건으로 용납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확대된 인간성의 맨끝에서 만나는 생명, 사랑 및 존재의 체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서 저자가 예수의 목적에 대해서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10:10)고 선포한 것을 인용할 때 그가 분명히 뜻했던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확대된 세계관의 사상자로서 죽어가고 있다.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 체험, 곧 기독교의 초석이었던 그 체험은 새롭게 동터오고 있으며, 조만간에 새로운 형태들을 창조하여 그 새로운 형태들을 통해 그 새로운 비전이 약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예수가 종교의 감옥에서 풀려나면, 갱신과 개혁은 가능하다. 비종교인들을 위한 예수가 출현하는 것이다.
나의 위대한 선생이자 친구인 존 하인스(John E. Hines)가 내게 말한 것과 같이 "당신은 담대한 일을 할 때 당신의 담대함에 대해 전율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예수의 새로운 폭발을 예상하며 또한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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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 그늘 아래"(415장)와 "영화로운 주 예수의"(148장)을 참조하라.
2) Paul Tillich의 저서(1963) 제목이다.
3) Elizabeth Kubler-Ross는 On Death and Dying에서 이 과정을 잘 보여준다.
4) Borg and Crossan, The Last Week A Day-by-Day Account of Jesus's Final Week in Jerusalem. 오희천 옮김,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중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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