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얼마나 바보가 아닌지 설명하는 바보원숭이...무묘앙 에오
이 혹성에서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자주 하는 말 가운데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잘 들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난 한 번도 그렇게 말하는 이의 눈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눈은 노여움과 경멸, 강요로 가득 차 있어서 도저히 보기에도 역겨운 추한 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눈을 보면서 나보다 30년이나 오래 산 그들이 너무나도 불행해 보였기에 안쓰럽기까지 했다.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듣는다는 것은 본래 <있는 그대로 듣기>위해서는 필요 없는 일이다. 난 가끔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또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그때 들려오는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통해, 그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무엇이 거짓말인지 아주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때 난 어느 누구보다도 귀기울여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것은, 그들은 항상 말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며, 자기 스스로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고, 결코 듣는 사람의 <필요>를 살피며 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듣는 사람에게 있어 그 말이 필요한지 어떤지를 최우선적으로 살피는 것이야말로 본래 말하는 사람의 예절이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쓰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에게 가치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절이다. 말하는 사람은 항상 듣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말하는 사람이 제멋대로 습관적인<발작>처럼 수다를 떠는 것이라면 듣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수다쟁이 원숭이에게 박자를 맞추는 원숭이 하나만으로 족하다.
가끔 세상에는 의견을 구하는 게 아니라 동의를 구하는 타입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되는 말버릇이 있다. 어미에 '-않아?', '-하지', '-할걸'을 연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은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는 언어이다. 동의를 강요하거나 기대하는 데서 생기는 강조의 말들이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을 한번 시험해 보라. 무언가를 말하면 아무 이유 없이 <고개를 옆으로 흔드는>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곧바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들은 의견을 받아들이는 지성도 없이 오로지 "그래"라고 말해주길 바랄 뿐이다. 이런 타입은 상대하지 말라. 당신들은 누구와도 상대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이런 원숭이 떼들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나는 자주 방문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내 말을 이해하는 데는 30년은 더 걸린다."
또는 "당신 정말 바보로군"하면서 나는 아무 근거도 없이 말한다. 그리고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말을 들었을 때 보이는 그들의 <반응>이다. 내 경멸이나 비난에 대해 소위 지성 있다는 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떻게 3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는 겁니까?" 이것이 소위 지성 있는 자의 반응이다. 무슨 근거로 30년 세월이라고 말하는가에 대해 그는 순수하게 지적 <호기심>을 갖는다.
그러나 날 찾아온 자들의 대부분은 호기심이 아니라 나한테 <바보>라 불려진 순간, 반사적으로 '뭐라고? 당치도 않은 말이야. 우선 너는 나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애송이다. 세상이나 인생에 대해선 내가 더 잘 알아'라는 사고가 발생되고 거기에 사로잡히다 보니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바보가 아닌지에 대해 변명과 주장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굳이 날 찾아올 필요도 없다. 나보다 20년이나 늙었다면 나보다 20년 빨리 죽는 거다. 그렇다면 가서 성불이나 하시게."
진실로 지성 있는 자라면 논점을 피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안정되어 있다. 반면 지성 없는 자는 단지 그 말의 자극만으로 너무나 쉽게 감정적으로 동요하며 허영심을 있는 대로 드러내 놓고 굴욕에 대해서는 심한 노여움에 휩싸이고 만다.
과거, 먼 곳에서 일부러 날 찾아온 심리학자, 박사 학위를 주렁주렁 단 교수들, 정신과 의사, 심령가, 치료가, 큰스님이라 불리는 중들, 평소 남들이 굽실굽실 머리를 숙이는 그 모든 이들은, 내가 보기에는 항상 '귀에 거슬리는 환상적인 바보 이야기'나 하는 '아는 척하는 떠벌이'인 한 마리의 침팬지였다.
이런 연유로 세상은 의견이 아니라 동의를 구하는 자들 천지다. 처음부터 들을 만한 귀도 갖지 못한 주제에 단순히 타인에게 의견을 구하는 <척>하는 자를 상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 타입의 사람들이 찾아오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박수를 칠까요? 아니면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요?" 이렇듯 그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게 아니라 동의를 구하고 싶어하는 어린애 같은 동기로 수다를 떤다.
그래서 난 그런 수다를 단숨에 끊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박수를 치고 머리를 쓰다듬읍시다. 그러면 당신이 처음부터 바라던 결과가 속시원하게 성취되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필요없잖소." 이런 연유로 난 이 혹성에 태어난 뒤 이곳 원숭이들의 기묘한 습관을 보며 키워졌지만 티끌만큼도 그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인간이 머리를 끄덕이는 세가지 이유
그런 기묘한 원숭이의 습관 가운데 내게 가장 흥미있던 것은 <응 - 하고 끄덕이는> 동작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세계 원숭이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동작이었다. 말 없이 동의나 승낙을 나타내기 위해 <끄덕이는> 것인데 이를 자세히 관찰해보니 실로 기묘했다. 왜냐하면 동의, 승낙, 이해라는 것은 굳이 고개를 흔들지 않아도 <예스>라든가 <노>라는 대답만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숭이들이 한결같이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난 이게 도대체 무슨 습성인가 싶어 관찰해보았다.
그 결과 알아낸 것이 무수히 많다.
첫째,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자는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의 내용과 자신의 의견이 일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쌍방의 일치 신호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는 어떤 정확함도 없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내용이 <옳기 때문에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듣는 자의 <의견에 합치됐기 때문에 끄덕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대가 고개를 끄덕일 때는 저 자식은 <나와 의견이 같았구나>라는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원숭이들은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를 보고 자신이 <옳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 사실에 난 쓴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않은가?
도둑 세 명 또는 살인자 셋이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갈 계획을 세울 때 그들 역시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두 나라의 국민은 제각각 따로따로 일치단결해서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인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옳은 것일까?
그 후에 일어난 일에 관해 굳이 말하자면 두 나라 사이에는 20년에 걸친 살육과 전쟁이 있었다. 20년동안 국내에서는 <끄덕거리고>, 상대 나라에 대해서는 <계속 고개를 옆으로 흔들어댔기> 때문에 고로, <끄덕임>과 <정론>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두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동의에 마음 편안해 할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경우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가 진행될 때, 원숭이들은 <아는 척>하기 위해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일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라면 실제로 듣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듣고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맥을 끊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아는 <척>하기 위해 목을 끄덕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상대에게 "잘 아시겠습니까?"하고 한번 물어보라. 대답은 항상 이렇다. "...잘은 모르겠지만 알 것도 같아." 이는 사실 전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 것도 같은데 중간에 혼선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고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세 번째로, 아주 미미하게 경련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그런 모습을 보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경련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쪽 이야기는 듣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그들은 자신의 머릿속 세계에 듬뿍 취해 있을 뿐이다. '그래그래, 그렇지. 정말 그래. 그것 봐, 난 옳다니까.' 이런 이유로, 원숭이들은 정말 잘도 고개를 끄덕인다. 동의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애써 고개를 흔들지 않아도 좋을 텐데 어떻게 된 이유인지 원숭이들에게는 <위 아래로 흔드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또 <예스>라고 할 때는 고개를 옆으로 흔드는 민족도 있을 법한데 어찌 된 연유인지, 없다. 추측하건대, 아무래도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가장 편하다는 생물학적인 원인에 의한 것 같다. 지구의 원숭이들이 타인을 받아들인다는 <이완> 상태가 자연스레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거리게 하는 것인데, 굳이 그런 동작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응>하고 입으로 한 마디만 말하면 되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혹성의 새끼원숭이들은 부모로부터 강제적으로 <끄덕이는> 또는 <대답할 것>을 강요받으며 자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듣고 있건 말건, 알건 모르건, 어찌 되었든 우선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거리면 부모의 짜증스러운 설교가 빨리 끝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리고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는 법을 머릿속에 입력시킨다.
이렇게 해서 그 동작은 이해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이야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동작으로 기억된다. 이렇듯 <고개 흔들기 운동>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지고, 나아가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사회적인 체제와 인사와 위선의 동작으로 이 습관은 일상의 당연한 동작이 되는 것이다. 자, 그런데 나는 이 끄덕거리는 짓도 못하고 <대답>조차 못했다. 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모든 힘을 기울여 듣기 때문에 고개를 흔들 여유도 그들의 박자를 맞출 여유도 없이 의식이 깨어 있다.
난, 있으나마나 한 사람들에겐 직장에서 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을 때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도중에 내가 필요한 말을 하지도 않았다. 상대는 중간중간 "아시겠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난 "끝까지 말씀하십시오"라고 밖에 말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나는 끄덕이거리지도 않고, <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상대의 모순된 논점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종합해서 지적한다. 이렇게 하면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가 듣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듣고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마지막에 나오는 질문의 내용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난 이 <끄덕이는> 원숭이들의 습관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못한채 날마다 목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