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다드의 서, 제24장 먹기 위해 죽이는 것은 정당한가?
샤마담과 백정이 떠난 후, 미카욘이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먹기 위해 죽이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까?”
미르다드가 말했다.
“죽음을 먹고 살면 죽음의 먹이가 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살아가면 고통의 먹이가 된다. ‘전능의 의지”는 이렇게 법을 정했다. 이 사실을 알고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라.“
미카욘이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불사조처럼 고기가 아니라 사물의 향기로써 살아가고 싶습니다.”
미르다드가 말했다.
“그건 정말 훌륭한 선택이다. 인간이 살과 피가 아니라 사물의 정수(精髓)인 향기로 살아가는 날이 온다는 것을 믿어도 좋다. 그리고 그것을 희구하는 자에게 그날은 멀지 않다.
그것을 희구하는 자는 육체의 삶이 육체를 초월한 삶으로 가는 다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희구하는 자는 조잡하고 불완전한 감각이 무한히 섬세하고 완전한 감각의 세계를 엿보는 구멍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을 희구하는 자는 자신이 찢은 모든 살이 조만간 반드시 자신의 살로 돌아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뼈를 부순 자는 자신의 뼈로 재생시켜야 하고, 피를 흘리게 한 자는 그 한 방울 한 방울을 자신의 피로 다시 채워야 한다. 그것이 육체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희구하는 자는 이 법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때문에 그들은 몸의 욕구를 최소화해서 육체에 대한 빚 -실제로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빚이지만-을 덜어내려고 한다.
그것을 희구하는 자는 자신의 의지와 희구로 자기 자신을 억제한다. 한편 희구하지 않는 자는 자신에게 금기를 부여한 다른 이를 기다린다. 희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적법한 사물을, 희구하는 자는 자신을 위해 적법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희구하지 않는 자는 주머니나 뱃속에 넣을 것을 더 많이 얻으려는데 반해, 희구하는 자는 주머니 없이 자기 길을 가며, 어떤 생명체의 피도 뱃속에 넣지 않는다.
희구하지 않는 자가 얻는 것 -혹은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희구하는 자는 영(靈)의 명철함과 이해의 감로 속에서 충분히 획득한다.
푸른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남자 중 한 사람은 이 토지에서 경작한 수확이 몇 섬인지 세어 보고, 거두어들인 것이 금이나 은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한다. 또 한 사람은 눈으로 푸른 들판을 빨아들이고, 생각으로 모든 잎새에 입맞추고, 영혼으로 모든 작은 뿌리와 조그만 돌, 흙과 친교를 맺는다.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나중에 말한 사람이 이 들판의 정당한 소유자다. 설령 법률상 소유권은 앞에 말한 사람에게 있다해도.
집 안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남자 중 한 사람은 그 집의 소유자, 또 한 사람은 단순한 손님이다. 그 소유자는 집의 건축비나 유지비, 커튼이나 양탄자의 가격, 그 밖의 의류나 가구의 가격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한다. 한편 손님은 마음속으로 축복한다. 돌을 갈고 닦아 이 집을 지은 손을 축복하고, 입을 옷을 짠 손을 축복하고, 숲어세 나무를 베어 창이나 문, 의자나 책상을 만든 손을 축복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한 ‘창조의 손’을 드높힘으로써 자신의 영을 고양한다.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이 손님이야말로 그 집의 거주자다. 그에 반해 명목상 집의 소유자는 등에다 집을 싣고 가지만, 거주하지도 않는 집을 운반하는 가축에 불과하다.
한 송아지의 어미 소에서 나오는 젖을 마시고 있는 두 명의 남자 중, 한 사람은 송아지의 연한 살이 머지 않아 다가올 자신의 생일 잔치에서 맛있는 요리가 될 거라는 생각으로 그 송아지를 바라본다. 또 한 사람은 그 송아지를 똑같은 젖꼭지에서 젖을 마시고 있는 형제라고 생각하며, 어린 짐승과 그 어미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송아지 고기에 의해 진정 자양분을 얻는 자는 후자이다. 그애 반해 전자에게는 그 송아지의 고기가 독이 된다.
진정 마음에 들어와야 할 많은 것이 뱃속으로 들어와 있다.
눈과 코에 간직되어야 할 많은 것이 주머니와 창고에 간직되어 있다. 정신으로 씹혀야 할 많은 것이 이빨로 씹히고 있다.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극히 적다. 몸에 주는 것이 적을수록 몸은 많은 것을 그대에게 되돌려준다. 몸에 주는 것이 많을수록 몸은 그대에게 적게 되돌려준다.
진실로 사물은 창고나 뱃속에 있을 때보다는 밖에 있을 때 그대를 훨씬 잘 떠받친다.
하지만 그대들은 아직은 사물의 향기만으론 살 수 없기 때문에 대지의 풍요로운 은혜로부터 필요한 것을 -필요한 것 이상보다 더 많이는 안 된다- 거리낌없이 취할 수 있다. 왜냐면 대지의 접대는 융숭하고 친절하며, 그 풍요로운 은혜는 늘 자식들 앞에 펼쳐져 있으니까.
대지가 자기 자신을 기르는 일을 하지 않고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으며,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대지는 대지를 길러야 한다. 그리고 대지는 초라한 주인이 아니다. 대지의 식탁은 모든 것으로 늘 풍성히 차려져 있다.
대지는 그대들을 식탁으로 초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대들 역시 대지를 식탁으로 초대해 최고의 사랑과 성실로써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머니여! 당신은 내가 필요한 것을 얻도록 당신의 풍요로운 마음을 내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당신이 필요한 것을 얻도록 내 마음을 당신 앞에 펼쳐 놓습니다.’
대지의 마음을 먹는 그 속에 그대를 인도하는 영(靈)이 있다면, 그대가 먹는 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 그것이 그대를 인도하는 영이라면, 대지한테서 그의 자식들을 빼앗지 않는 지혜와 사랑을 가져야 한다. 특히 삶의 기쁨과 죽음의 고통을 느끼게 되어 있는 것들, ‘이원성’의 한 부분에 도달한 것들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천천히 노력하면 ‘하나됨’을 향한 길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길은 그대들의 길보다 멀다. 그들의 진행을 더디게 하면, 그들 역시 그대의 진행을 더디게 할 것이다.“
아비말이 물었다.
“모든 생명체는 죽게 되어 있고,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은 이것저것 여러 가지입니다. 설령 내가 어떤 동물을 죽게 했다해도 왜 내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합니까?”
미르다드가 말했다.
“모든 생명체가 죽음의 운명을 맞는 건 사실이지만, 그 생명체를 죽게 한 그대에게 재앙이다.
그대들은 내게 나론다를 죽이라는 명령을 하지 않는다. 내가 나론다를 아주 사랑하고, 내 마음에는 피에 대한 갈망이 전혀 없다는 걸 그대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능의 의지’는 어떠한 인간에게도 동포나 동물을 죽이라고 명한 적이 없다. ‘전능의 의지’가 죽이기 위한 적합한 도구라고 보지 않는 한.
인간들이 지금과 같은 한, 인간들 사이에는 도적질이나 강탈, 거짓이나 전쟁, 살인, 그리고 온갖 종류의 어둡고 사악한 정욕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둑아나 강도는 재앙이다. 거짓말쟁이나 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재앙이다. 살인자, 그리고 어둡고 사악한 정욕을 마음에 간직케 한 자는 재앙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재앙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전능의 의지’가 재앙의 사자(使者)로 쓰이기 때문이다.
나의 동행자들이여, 온갖 종류의 어둠, 온갖 종류의 정욕으로부터 마음을 깨끗이 하라. ‘전능의 의지’가 이 고통스런 세계에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기쁨에 찬 소식을 전하는데, 그대의 마음이 적임자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그 소식은 극복의 소식이며, ‘사랑’과 ‘이해’에 의한 ‘자유’의 소식이다.
이렇게 나는 노아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나는 그대들에게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