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학다리초등학교 제22회 동창회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여행 나들이 스크랩 전남지역 담양 금성산성 (金城山城)1 : 남문-동문-북문
지기(쌍학/문채) 추천 0 조회 107 09.06.08 13:0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종    목 : 사적  제353호 
명    칭 : 담양금성산성(潭陽金城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1349977㎡ 
지 정 일 : 1991.08.24 
소 재 지 : 전남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대성리 등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박진성외85명
관 리 자 : 담양군,순창군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고, 조선 태종 9년(1409)에 고쳐 쌓은 후 광해군 2년(1610)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성도 함께 만들었다. 광해군 14년(1622)에는 내성 안에 관청을 건립하고 효종 4년(1653)에 성 위의 작은 담(여장)을 수리하면서, 전반적으로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외성은 2㎞, 내성은 700m 길이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동학운동(1894) 때 건물이 많이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동·서·남·북문의 터가 남아 있다. 내성 앞에는 국문영 장군의 비석이 남아 있다.

 

금성산성은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 가운데 하나로 전남 담양군 용면 도림리와 금성면 금성리, 전북 순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있는 돌성이다. 주차장에서 30분 오르니 남문 보국문이다.

독특한 형식의 옹성으로 되어있으며, 외성의 형식을 갖췄다.

 

 

 

안으로 들어가니 문이 하나더 있다.

 

충용문이다.

 

외남문(보국문)과 안쪽의 내남문(충용문)을 합쳐 남문으로 부른다. 성 밖 관찰을 쉽게 하고 적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새의 부리처럼 튀어나오게 쌓은 성곽 끝부분에 외남문이 있다.

 

 

 

 

 

 

충용문에서 바라본 보국문. 

 

 

 

특히 이곳은 정유재란 당시 전투가 치열했는데 시신이 골짜기를 뒤덮었는데 그 수가 이천에 이르렀다 하여 산성 초입의 연동사에서 이어지는 계곡을 이천골이라 부른다. 이것을 기념하기위해 쌓은 탑이다.

 

국문영장군 비석.

 

시계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돌아본다.

연대봉과 시루봉, 철마봉 등 산봉들을 잇는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둘레 약 6.5㎞의 성곽인데 내아터가 있는 내성까지 합하면 성의 총길이는 7.3㎞에 이른다.

금성산성은 고려사절요로 미루어 짐작컨대 13세기 중엽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태종 9년(1409)에 개축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광해군 2년(1610) 파괴된 성곽을 개수하고 내성을 구축했다.

다시 효종 4년(1653) 성첩(城堞)을 중수함으로써 그야말로 지리적 요건을 맞춘 견고한 병영기지의 면모를 갖췄다.

조선 말기엔 성 안에 130여호의 민가가 있었고 관군까지 2천여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29개의 우물을 파고 2만여석의 군량미를 저장했을 정도였다지만 동학농민운동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마을과 관아, 절 등이 소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동서남북의 문과 성곽은 90년대 들어 복원됐다.

 

1872년 지방도의 금성산성.

 

금성산성  해동지도 

 

금성산성 여지도

 

성곽을 따라갔으나, 길이없고 아주 위험했다.

 

다시 돌아가 동헌이있던 내성쪽으로 향했다.

 

동자암이 있다. 동자암에는 금성산성 지킴이를 자처하는, 수염을 거의 배꼽께까지 기른 청산스님과 보리, 황룡, 청룡, 구봉 등 다섯 스님들이 한 가족을 이루며 무예와 수행을 하며 살고 있다.

 

길을따라가니 내성문이다. 

 

 

 

문 오른쪽은 산위로 연결된다.

 

 

내성안의 건물터. 

 

시루봉이 보이고...

 

이윽고 내성 동문이다.

 

 

반대쪽에 운대봉의 모습이다. 

 

망원으로 당겼더니 성곽의 모습이 뚜렸이 보였다.

운이 좋았다. 막상 저기에서는 가팔라 성곽의 옆모습을 볼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내성동문 밖의 모습.

 

 

성곽을 따라 위쪽으로 따라가보았다.

 

전망좋은 수직낭떠러지다.

 

 

암봉사이에 쌓아놓은 성곽.

이곳은 수직암벽이라 성곽을 쌓을 필요가 없었을텐데도...

 

 

능선은 암봉이라 위험하여 등산로를 따라간다.

 

동문이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옹성형태를 갗췄으며, 끝에 망대가있다. 

 

시루봉쪽에서 오는 성곽. 

 

 

문 밖의 망대.

 

북바위다. 

동문에서 성곽이 북바위로 이어진다.

 

북바위는 뒤쪽으로 우회하여 올라야했다. 

 

우회하며 보이는 북바위 성곽.

 

시루봉과 그 오른쪽밑으로 내성이 보인다. 

 

 

북바위와 성곽. 

 

바깥쪽 성곽.

 

안쪽 성곽. 내려서기도 힘들었다.

 

북바위에서 강천산의 구장군폭포가 바로 보인다.

 

가야할 운대봉 방향이다. 햇빛받은 성곽의 실루엣이 생생하다. 

 

 

바깥쪽은 가파르고 높아서, 나갈수가 없었다. 

 

가파른곳은 계단형식으로 쌓았다.

 

 

뒤돌아 바라본 북바위. 

 

운대봉으로 향한다.

 

 

사람들은 성곽위로 그냥다니지만, 붕괴의 위험이 보이는 구간도 눈에보인다. 

 

또다시 망대같은 성곽이다.

 

 

안쪽은 그래도 낮아서, 성곽을 볼수있는곳이 있었다.  

 

 

 

뒤돌아 바라본 모습. 

 

성곽이 다시한번 크게돌며 오른다. 

 

북바위와 운대봉이다.

 

성곽라인이 잘 살아있다. 

 

이제 성곽이 아래로 향한다.

휘어지는곳의 성곽미석이 마치 독수리 날개끝 같아보인다. 

 

밑으로 내려서기전에 다시한번 산성 스카이라인을 바라본다. 

 

조금 내려오니 크게 180도돌며 북문으로 향한다. 

이곳은 뭐했던 곳인지?...

 

북문으로 가는길은  잡초가많아 성곽을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많이 무너져있었다.

 

 

 

기울기가 많이 기울어, 관리가 필요할것 같다.

 

드디어 북문이다. 깨끗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금성산성의 최초 축조 시기는 길게는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기록이다. 고려 우왕 6년 (1380년) 에 왜구에 대비하며 개축했는데, '금성(金城)'이라 했다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실제로는 그보다 더 오래 되었다는 이야기이인 것도 같다. 비록 성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보다 이전인 고려 고종 43년(1256년)에는 몽고의 차라대군(車羅大軍)이 담양에 주둔했다는 기록도 있다.
'금성산성'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초 태종 임금님 때로, 1410년 전라, 경상도의 12개 산성이 수축된 기록에 나온다고 하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도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추월산(秋月山)에 석벽이 사방을 둘러 둘레가 9018척(尺), 13천(泉 : 샘)이 있고, 연동사(煙洞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가까와 오자, 조선은 국가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입보농성(入保籠城)의 최적지인 산성의 보수를 서두르게 된다. 이 때 담양 금성산성 역시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했으며, 계속적인 보강이 이루어진다. 이때부터 금성산성은 장성 입암산성(立岩山城),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리게 된다.

금성산성은 그 훌륭한 지정학적 위치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전화를 겪어 왔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군에 맞서는 항몽의 전적지로, 조일전쟁 당시에는 의병의 거점으로 노령을 넘어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정유재란 때의 전투는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격전으로, 전투가 끝난 후 외남문인 보국문 오른 편 깊은 골짜기로 전사자를 치우고 보니 시신이 무려 2,000여 구에 달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골짜기의 이름을 '이천골(二千骨)'이라 부른다고 한다. 개화기에도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군이 이 곳을 거점으로 삼아 진압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전봉준이 잡혀 죽임을 당한 이후 이곳 금성산성도 결국 관군에게 점령되어 성 내의 전각과 모든 시설들이 불에 타버리는 참화를 겪게 된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