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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현우가 중국에서 돌아왔다. 현우의 눈길을 보고 나영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감출 수 없는 애잔한 감정과 인자함이 담겨있었다.
“괜찮소? 별일 없었소?”
그의 말은 짧았으나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말하지 않았다. 나영은 슬며시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해가 질 무렵, 나영이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나며 안절부절 못했다. 알 수 없는 그 어떤 일이 닥쳐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며 갑자기 희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희수가 걱정되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다급히 정원을 지나 대문을 빠져나와 거리로 향했다. 서울의 풍경이 한 눈에 안겨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빌딩들이 줄 서 현대 건설의 변화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번창해졌다.
오백 미터 앞에서 승용차 한 대가 달려오며 균형을 잃은 듯 어느새 나영에게로 덮쳐오며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다른 차를 들이박았다. 이 끔직한 사고를 발견한 사람은 현우였다. 현우는 나영이 대문 밖을 나서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를 따랐던 것이다.
“정신 차리시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현우는 급히 차문을 열었다. 희수의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술 마시고 운전을 하다니, 희수 정신 차려. 어서 일어나란 말이야.”
희수를 잡아당기는 순간 희수가 퍽 쓰러졌다.
‘주여! 이 두 생명을 구원하소서.’
구급차가 그들을 싣고 병원으로 달리는 동안 현우는 나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어서는 안돼요. 들었소? 당신은 맘대로 죽을 권리가 없단 말이오. 당신의 목숨은 당신 한 사람의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 순간 나영의 입술이 달싹였다.
“들려요……”
그녀가 자신이 살아야 함을 것을 깨달은 걸까? 의식의 끝자락을 붙들고 허우적거리며 현우의 응원 속에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현우가 응원하고 있기에……
배가 뒤틀리며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주기적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통증을 참고 소리치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잃어갔다.
“소리를 질러요. 소리를…… 제발 정신 잃지 말아요.”
병원에 도착해서 입원실에도 채 들어가기 전에 희수는 숨을 거두었다.
“왜 이렇게 가버리니…… 어서 눈 좀 떠, 죽지 말란 말이야.”
현우의 눈에선 눈물이 샘처럼 솟구쳤다. 그러나 울 시간마저 없었다.
검사를 마친 뒤 의사가 말했다.
“출산도 힘들지만 지금 환자의 간이 파열되었습니다. 속히 간 이식을 해야 합니다. 일초가 급합니다.”
“시간이 촉박하시면 먼저 제 것을 검사해 보세요.”
현우는 힘든 결단을 내렸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영에게 피와 살을 나누어 주리라 다짐했다. 그는 죽어가는 나영을 지켜 볼 수만은 없었다.
“주여! 불쌍한 생명을 살려주소서.”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현우의 팔을 걷고 피를 뽑았다. 소식을 듣고 식구들이 달려왔다. 불행한 소식을 듣고 할머니는 쓰러졌다.
“아이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희수가 이렇게 죽다니 하늘도 무심하지. 너를 앞세우고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식구들의 울음소리가 병원을 채웠다. 의사가 들어왔다.
“다행입니다. 혈형이 맞아 간이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난산이어서, 그리고 환자의 상처가 심해 자연분만은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상태에서 분만이 촉박해지고 환자의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님, 어떤 일이 있어도 환자와 태아를 꼭 살려주세요.”
“시간이 촉박하지 않으면 다른 병원으로 옮기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맥박도 약하고 자궁수축도 비정상적이어 태아와 산모 다 위험합니다. 태아를 살리려면 먼저 수술을 해 애기부터 꺼내야 합니다. 보호자 분께서 동의한다면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방법을 써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영영 대가 끓어질까봐 두려움이 앞선 황경철은 의사의 손목을 붙잡고 간절히 애원했다.
“지금 아이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으니 그것 외의 최선책을 찾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수술 중에 어떤 위기상황이 닥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현 상태로서는 수술을 감행하는 게 무리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의사의 마지막 말은 식구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경각에 달린 두 운명을 하늘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현우는 가슴을 찌르는 그 어떤 예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분명 그 누군가가 자신을 간절히 찾고 있는 목소리였다. 착각일까? 아님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현우는 바람처럼 복도를 달렸다.
“기다려! 내가 갈게.”
가물가물 사라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그녀는 온갖 힘을 다해 싸웠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절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릴 수 없었다. 암흑 같은 지하의 수렁을 헤매면서 새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떴다. 누군가가 옆에 있음을 느끼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들었다. 그녀는 현우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기…… 내 아기를 살려주세요.”
마지막 한 마디가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간신히 흘러나왔다.
“주님! 신이여, 이 가여운 운명을 버리지 마소서.”
현우는 마취가 시작되기 전까지 기도를 끊지 않았다.
수술은 다섯 시간 거쳐 기적처럼 성공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병실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으로 넘쳤다. 기도의 힘일까? 두 생명이 다 무사히 살아났으니 어찌 기적이 아니라고 할까? 식구들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 태어났다. 의사는 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 육체의 모든 발육이 부진해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두 주일 후, 희수의 장례를 치렀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성대한 장례 행렬은 비통한 곡조 속에 조상들이 묻혀있는 양지바른 남산으로 향했다.
나영은 비칠거리며 상여 차 뒤를 따랐다.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망연한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왠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눈물은 육체가 빚어내는 무색무취가 아닌가? 그녀에게는 울 수 있는 축복도 없었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는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묵묵히 영혼 속의 정적을 깨뜨리고 싶었다. 잿빛 하늘이 그녀의 마음을 더 우울해지게 했다. 머릿속에는 오지원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선생님, 당신의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지금 어찌해야 합니까?”
울었던가? 가물가물 사라지는 촛불 앞에서 그녀는 울었던가.
현우도 장례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그 역시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행렬을 따랐다. 그의 눈길은 내내 소복을 입은 나영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병석에 누워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황경철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손자를 앞세우는 발걸음은 무겁고 힘겹기만 했다. 눈물이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씻어 내리고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초목들이 차츰 누렇게 옷을 입더니 그 사이 마치 땅을 가르고 나온 불씨와도 같이 단풍잎들이 다시 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원의 단풍나무는 부끄러운 처녀처럼 빨간 얼굴을 쳐들었다.
비통한 시간은 흘러가고 어린 아기의 웃음소리만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 웃음소리에 가족들은 비통함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일 년 후 나영은 현우가 간이식을 해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현우를 찾았다. 현우는 그녀가 방에 들어서자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긴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이 어찌하여 내 방에?”
현우를 바라보는 나영의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설움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일까?
“무슨 일 생겼소? 왜 울기만 하는 거요.”
현우는 나영의 어깨를 감싸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왜 살렸어요? 그냥 죽게 놔둘 것이지. 저 같은 여자를 왜 살렸나 말이에요.”
“당신이 살아있으니 다행이요. 울지 마오,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에 있습니까? 삶이 힘들어도 어린 아들을 생각해 눈물을 그치고 아까운 인생을 포기하지 마시오.”
“살기 싫었어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단 말이에요.”
“내 맘이 당신을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었소. 당신이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단 말이오.”
“당신의 건강은 왜 생각지 않았어요? 내가 그 빚을 무엇으로 어떻게 다 갚아야 한단 말입니까?”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지 않소. 먼 길을 떠날 때마다 내 발길을 붙잡는 것은 당신의 눈길이었소. 그리고 당신의 한숨소리가 강력한 힘으로 나를 붙잡았소.”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현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알고 있소.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감정을 가슴 속에 묻어두려 했소.”
“……”
그녀는 현우의 얼굴을 더는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말할 수 없었다. 현우의 손길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그녀의 눈물은 현우의 가슴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영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알 수 없는 무엇이 공포로 되어 다가왔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가슴이 아팠다. 황급히 몸을 돌려 총총히 빠져나왔다. 뜨거운 눈물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이튿날 현우는 또 배를 타고 멀리 떠났다.
나영은 몸이 회복되는 동안 매일 화초를 들여다보며 물을 주었다. 검은 흙을 뚫고 나온 새싹이 어느새 무성하게 자라 잔잔한 보라색의 꽃망울을 터치며 피어나기 시작했다.
‘너의 신세도 고향이 그리운 내 운명처럼 가엾구나.’
그녀의 두 눈엔 맑은 이슬이 고였다가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느 날, 가연은 나영에게 매달리며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다.
“새 언니, 부탁이 있어요. 우리 집에서 언니만 저를 도와줄 수 있어요. 꼭 도와주실 거죠. 대답 좀 해봐요.”
“어떻게? 아가씨. 천천히 말해 봐요.”
그러나 가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현우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나요?”
“보았어요.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 있었겠죠. 그런데 내 말은 그 때문이 아니라 현우 오빠는 언니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잖아요. 또 언니 말이라면 무엇이나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언니가 오빠에게……”
가연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운 듯 더듬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왜 울어요? 어서 말해 봐요.”
나영은 어쩔 줄 몰라 가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제가 현우 오빠를 좋아해요. 새 언니, 어쩌면 좋아요? 도와주세요. 저 오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오빠가 돌아오면 새 언니가 말 좀 잘해보세요. 저 오빠가 아니면 영영 시집 안 갈 거예요.”
나영은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일찍부터 현우 오빠를 좋아했어요.”
“울지 말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대답은 했으나 나영의 마음은 말 할 수없이 괴로웠고 착잡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서성거려 보았으나 마음 한 구석이 공허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 하필 그 사람이란 말인가?”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서글픔에 쌓였다.
‘내가 어떻게 감히 시누이가 좋아하는 남자를?’
나영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현우가 돌아왔다. 몇 달 사이 훌쩍 여위여 있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나영의 방에 울려 퍼졌다. 바이올린 소리는 심란한 마음속으로 더 애달프게 파고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이올린 소리가 멈췄다. 아들 해송이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주위는 적막 속에 잠겨 있었고 식구들은 모두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영은 어둠을 더듬으며 정원을 가로 질렀다. 몇 미터 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꼼짝하지 않고 나무 뒤에 서있는데 어느새 현우가 앞을 막아섰다. 나영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현우의 큼직한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요. 소리 지르지 마오.”
“……”
“잠 못 이루는가 보군. 난 바람 쐬러 나왔소.”
그녀는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전 당신께 하고픈 얘기가 있어서 찾아가던 중인데……”
현우는 나영에게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소? 어떤 좋은 얘길까 몹시 궁금하군.”
나영은 숨을 몰아쉬면서 마음을 진정하려고 무진 애쓰고 있었다.
“아가씨가 병에 걸렸어요. 오래 전부터 당신을 사모하면서 당신께 말을 못해 요즘 마음의 병을 앓고 있어요. 아가씨는 진정 당신을 좋아해요.”
현우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영을 바라보았다. 눈빛 속에는 알 수 없는 비애감이 어려 있었다.
“이런 일로 이 밤에 나를 찾다니…… 그럼 당신도 내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이었소? 내가 그렇게 되면 당신은?”
나영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쓰리고 아파왔다. 현우는 나영을 품에 안으며 다그치듯 물었다.
“솔직히 말해보오. 당신의 가슴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
현우는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어느새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숨이 막혔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눈물을 흘렸다. 온 힘을 다해 현우를 밀쳐내면서 뺨을 때렸다.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전 한 남자의 아내란 말이에요.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고…… 그런데 당신이 어찌 이렇게?”
현우는 눈을 감아버렸다. 나영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당신의 전 남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소. 내 마음에는 온통 당신뿐이란 말이오. 내 마음을 차지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 한 사람…… 난 오직 당신만을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당신의 몸에는 내 살이 살아 숨 쉬고 내 피가 흐르고 있지 않소.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설레고 떨렸고, 나도 모르게 당신을 향한 내 감정을 지금까지 절제하여 왔소. 그런 고통 때문에 내 마음은 괴로움 속에서 방황하며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소. 이런 내 맘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나영은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서있었을까.
현우가 급히 다가가 그녀를 막았다.
“정녕 대답을 못한단 말이요?”
“어찌해야 하나요, 내가 당신을 원한다 해도 우린 서로 사랑하면 안 되는 인연이잖아요. 제가 당신을 찾아오지 말아야 했어요. 이 일 때문에 당신에게 더 큰 상처가 되리라 생각 못해서…… 저 역시 당신을 보는 첫 순간 당신의 모든 것이 내 삶 속에 들어와 뿌리를 박고 있었기에 죽지 못하고 살아났죠. 하지만 우린 그런 감정을 서로 묵묵히 깊은 곳에 묻어둘 수밖에……”
“그럼 서로 멀리서 바라만 보자는 거요?”
“유혹을 참지 못하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무서운 일들을 겪게 될 거예요.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겠죠. 진정 당신이 나를 위한다면 부디 저를 잊으시고 가연 아가씨와 결혼하세요. 아가씨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요.” 나영은 흐느끼며 몸을 돌려 어둠을 향해 힘껏 달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허둥지둥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 바람으로 침대에 쓰러져 베게 깃에 얼굴을 묻고 설움을 토했다.
‘아아! 엇갈린 인생! 지척에 있어도 잡을 수 없는 것을 어느 별에서 그대를 찾아야 할까?’
이제는 그와 침묵의 대화마저 단절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염없는 외로움에 떨고 있었다. 삶이 쓸쓸하고 외로워도 이리저리 차이면서 가고 또 가는 것이 인생일까? 나그네처럼 떠도는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머물까.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방문 여는 소리와 함께 가연이 들어와 나영의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새 언니, 현우 오빠를 만나 봤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나영은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오빠가 저를 싫다 하던가요?”
나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며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것이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가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답을 받아 왔어야지. 이제 어떻게 해요? 그럼 내일 아빠께 졸라볼까요?”
나영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왠지 가슴 한 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허전함과 슬픔이 휩싸였다. 가슴이 아려왔다.
며칠 후 황경철은 저녁밥상을 물리자 바람으로 현우를 불렀다.
“현우 네가 오랫동안 우리 집에 머물면서 공로도 크고 고생도 많았다. 물론 그동안 희수의 일로 집안이 뒤죽박죽이었지. 그래도 네가 며느리의 생명을 구했으니 그보다 더 큰 공이 어디 있겠니? 너무 고마웠다. 나는 모든 것을 털어내고 기나긴 고통 속에서 해탈되었다. 가연이를 일찍 시집보지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구나. 네가 어이없다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가연이와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냐. 점을 쳐보니 너희 둘 궁합도 잘 맞더구나. 네가 좋다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말씀드려 보겠다.”
현우를 바라보는 황경철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현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에게 너무 과분합니다. 생각해볼 시간 좀 주세요.”
황경철은 안색이 굳어졌다.
“싫은 거냐?”
현우는 당황해서 급히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아…… 그리고 저는 가연을 친동생처럼 여겼기에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제 감정이 바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네가 마음만 정하면 감정이란 바뀔 수도 있는 거지. 약혼날짜를 받을 터이니 그리 알거라.”
“회장님, 그건 아직 안 됩니다.”
현우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피곤할 텐데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라. 너에게 시간을 줄 테니 생각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주마.”
현우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이올린 소리가 나영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처량하게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는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현우가 털어놓은 진심…… 그리고 서로 묵묵히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만 하는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현우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었다. 시선이 머무는 곳엔 어디에나 현우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우의 눈길, 현우의 목소리, 어디론가 정처 없이 도망치고 싶었다.
“주님! 가엾은 이 몸 어찌해야 합니까.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그날 밤, 가연도 현우의 바이올린 소리에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소리 없는 현우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불어가 어디쯤에서 멈출지 알 수 없었다. 슬프게 울려오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을수록 가연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설레고 있었다.
세월은 빨리 흘러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어느 날 모두가 빙 둘러 앉은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중대한 발표를 했다.
“현우와 가연 두 사람의 약혼 날짜를 음력 8월 20일로 정했다. 모두들 그리 알고 축하해줘야 한다.”
가족들은 현우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냈지만 현우는 얼굴색이 하얘졌다.
“너무 걱정 말아라, 데릴사위로 된다는 것도 부담 갖지 말고. 지금처럼 한 집에서 살자는 것뿐이다. 어차피 우리 황 씨 가문의 사업을 앞으로는 네가 이끌고 가야 할 것이니 우리 가연과 결혼하면 좋지 않으냐?”
순간, 나영의 가슴속에 무엇을 잃어버린 듯 알 수 없는 풍랑이 세차게 일었다. 슬펐지만 눈물을 겨우 참았다. 고통을 가까스로 견뎌내며 자신을 추슬러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주님! 불쌍한 나를 위로하여 주소서.”
현우는 어떻게 해야 할 방법이 없었다. 거절하자니 식구들 앞에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어 마음 착하고 여린 가연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심어줄 것이여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나영을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는 더욱 없었다.
날이 갈수록 현우의 얼굴은 초췌해졌다. 꼼짝할 수없이 옥에 갇힌 신세였다. 그는 혼란 속에서 방황했다. 인생의 적막하고 쓸쓸한 고독 속에 몸부림쳐 보아도 운명은 결국 슬픔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절대 멀어지지 마라!”
그토록 애원했건만 그녀는 그를 피하기만 했다.
“넌 무엇이냐? 어찌하여 나를 이다지도 혼란스럽게 하느냐?”
그녀의 눈동자에 서려있는 힘없는 슬픔이 현우의 맘을 붙잡을까.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운명 속에 끝없이 기나긴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바람으로 스쳐가도 좋으니 잠시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이제 와서 애원할 수도 없고 부탁할 수도 없고 운명을 바꿀 수도 없었다. 아! 바보 같은 운명!
축 처진 그대의 어깨가 너무 슬퍼
가만히 다가가 그대 가슴 달래줘야 하나?
그대를 살며시 안고 싶어 머뭇거리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대의 이름을 부를 것 같아
끝내 덤덤한 얼굴로 돌아서 보았지만
정녕 그대를 못 잊어 또 다시 돌아섰네.
벼랑 끝에 닿은 삶
며칠 후 현우는 정원에서 나영과 마주쳤다. 그녀는 가정부와 해송이를 데리고 산책 중이었다. 현우는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쫓아갔다. 이제는 더 지체할 수 없었고 앞뒤를 가릴 겨를이 없었다.
“아주머니, 해송이를 데리고 망 좀 봐주시오.”
현우는 아이를 가정부에게 부탁하고 나영을 끌고 정원을 에돌아 뒷산으로 갔다. 가정부는 세파를 겪은 여인이라 나영을 많이 동정하여 목숨을 걸고 보호해주었다.
안전한 곳에 이르자 현우는 나영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내 말 잘 들으시오. 열흘 뒤 배 타고 중국으로 떠날 것이오. 이번에 가면 서너 달 있다가 올 것이니 지금이 제일 적합한 기회요. 당신은 누구도 모르게 나와 함께 떠나는 것이오. 한국을 떠나면 당신은 다시 이 가문으로 돌아오지 말아야 하오. 잠시 친정집에 가 기다리고 있으시오. 내가 일을 처리한 후 당신 데리고 멀리 외국으로 떠나겠소.”
나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 한 번 말씀해 봐요. 함께 중국으로 가자구요?”
“그렇소. 우리가 영원히 함께 있자면 오직 이 길밖에 택할 수 없소.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영영 당신을 잃을 것이고 당신 또한 가문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우리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길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안식처를 찾겠소?”
“그건 안 돼요. 전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요.”
나영은 길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더는 당신을 묵묵히 바라만 보며 살아갈 수 없소. 내가 당신을 지극히 사랑 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 모두 알게 하고 싶소.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떳떳이 사랑을 나누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단 말이오.”
“안 돼요. 아들을 잃은 불쌍한 시부모들은 어쩌라고. 그리고 가연 아가씨는 어떻게 해요?”
“당신은 꼭 가야만 하오. 나는 마침내 알게 되었소. 당신을 잃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를 믿고 용기를 내시오. 죄책 속에 빠질 필요도, 당황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소. 내 말을 듣고 내 뜻에 따라주시오.”
“나는 당신 뜻에 따르지 않겠어요.”
“당신도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는 줄 아는데.”
“나는 지금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어요. 내가 만약 당신과 떠난다면 결국 자신을 증오하게 될 것이고 마음은 스스로 무너지고 말 거예요. 무너진 내가 어찌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겠어요?”
현우는 낮은 신음을 토했다.
“제발 당신 생각을 고치시오. 그런 도덕관념에 얽매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시간이 없소. 이렇게 만날 기회도 없을 거요. 어서 결정을 내리시오.”
나영은 현우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이러시면 우리 두 사람 모두 불행해요. 우리는 절대 사랑해서는 안 돼요.”
나영은 총총걸음으로 뒷산을 에돌아 나왔다. 그리고 어린 해송이의 손을 잡고 현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현우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있었다. 그늘진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그는 쓰러졌다. 머릿속이 흐려오고 있었다. 빛도 희망도 없이 이렇게 덧없이 살아가는 것이 삶인가, 아, 별이 없으면 영영 그대를 기다릴 수도 만날 수도 없는데. 무엇을 바라보고 누구를 그리워하랴! 그는 울 수도 분노할 수도 없었다.
현우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괴로움을 잊고 싶었으나 견딜 수 없었다. 사흘 째 되는 날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며칠 전 가정부 아줌마가 한 말을 떠올리며 더욱 괴로워했다.
“나영 아가씨가 너무 불쌍해 지켜볼 수 없네. 자네가 좀 보살펴 주게나.”
현우는 모진 아픔에 견디다 못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했다.
‘하느님! 당신이 만든 세상이란 이런 것이나이까. 내가 심히 구부려 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헤매나이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가족들이 현우의 방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몇 번이고 둘러보아도 그녀가 보이지 않자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가연은 다급히 현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현우 오빠, 몸이 불덩이 같아요. 빨리 병원에 가야겠어요.”
가연은 눈물이 가랑가랑 맺힌 눈으로 걱정스레 말했다.
황경철이 어서 병원에 가자고 서둘렀지만 현우는 갈 필요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무엇이 그리 힘들어 사람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쯧쯧.”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펑펑 눈물을 쏟으며 푸념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감기 몸살이니 약을 먹으면 낫겠지요.”
의사가 다녀갔지만 아무런 효과가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현우는 눈을 감고 가끔 헛소리를 했다.
“그 운명이 너무 불쌍해 도와줘야 해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운명을……”
가족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보며 아연해졌다.
현우는 의식이 점점 몽롱해지며 가라앉았다. 그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바로 그때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의 저 끝에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우 씨! 이봐요. 정신 차리고 눈 좀 떠봐요. 내 말 들려요?”
그립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현우는 눈을 번쩍 떴다. 몽롱한 가운데 나영의 얼굴이 한눈에 안겨왔다.
“이제 깨어났군요. 현우 씨! 내가 보여요?”
“당신이 오다니, 이렇게 와주다니……”
현우의 해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지금 주방 아주머니가 망을 보고 있어요. 오래 있을 수 없어요. 괜히 의심을 사면 어떻게 해요. 당신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어서 정신 차리시고 일어나세요.”
현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영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나영의 눈물이 현우의 얼굴에 떨어졌다. 현우가 손을 내밀자 나영이 손을 잡아주었다.
“당신을 위해 또 나를 위해 몸을 돌보세요. 서로 만날 수 없고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도 우리 더 이상 스스로 학대하지 말아요.”
나영의 가슴속에는 파도가 잦을 줄 모르고 출렁이었다.
현우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으나 휘청하면서 앞으로 쓰러질 번했다. 나영은 급히 그를 부축하여 침대에 눕혔다.
“현우 씨!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현우는 힘없는 손길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불현듯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내가 이렇게 당신에게 걱정을 끼치다니. 당신이 왔으니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몸이라는 것을 깨달았소.”
현우의 손은 열기 때문에 뜨거웠다.
“지금 이 몸으로 당신을 보살펴줄 수 없소. 회복되면 우리 가족들 몰래 먼 곳으로 떠납시다. 내가 영원히 당신을 지켜주고 보살펴 주리다.”
나영은 손을 빼기가 아쉬웠다. 이대로 서로 꼭 잡고 영원히 함께 있고 싶었다.
“어린 해송을 어쩌고 떠납니까? 그건 절대 될 수 없는 일이예요. 잡생각은 마시고 몸이나 빨리 회복하세요.”
“해송이를 데리고 떠납시다. 이번 기회는 물 건너갔고 다음에 내가 모든 준비를 해놓을 테니까 그때 우리 실수 없이 떠납시다.”
“당신의 뜻에 따르겠으니 이제 더는 아프지 마세요. 당신의 몸이 완전히 회복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준비해 떠나도록 해요.”
나영은 컵에 물을 따라 현우에게 약을 먹인 후 휴식을 권했다.
“고맙소. 내 뜻에 따라 주어서……”
그는 나영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한결 시름을 덜은 걸까, 나영이 마음을 고쳐먹은 걸 알고 마음을 놓았다.
그때 밖에서 헛기침소리가 들렸다. 주방 아줌마가 보내는 위급한 신호였다.
“빨리 돌아가야 해요.”
그녀는 급히 문가로 달려갔다. 눈물이 쏟아졌다. 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급히 말했다.
“눈물을 닦고 가시오. 그리고 울지 마시오.”
사흘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현우는 모든 준비를 해놓았다. 그동안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비밀리에 만나 계획을 짰다. 비상 시 대응 방법도 생각해 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나영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10월 20일 밤 11시.
구름이 덥힌 하늘은 칠흑같이 어둡고 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까만 승용차 한 대가 뒷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이 잠들어 집안은 방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고요한 적막에 쌓인 정원은 밤바람이 나무에 부딪쳐 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뒤뜰에 사람의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현우가 가방과 보따리를 들고 앞서 걸었고 나영은 해송을 업고 뒤따랐다. 나영은 심장이 뛰면서 온몸이 떨리며 발걸음이 흐트러졌다. 혹시 아이가 깨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조심조심 걸었다.
정원의 오솔길로 들어서는 찰나 고양이 한 마리가 처량한 울음소리를 내며 뛰쳐나오는 바람에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아차 할 사이에 일은 터지고 말았다. 등에 업혀 잠들었던 해송이가 깨어나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해송은 울면서 소리쳤다.
“엄마, 무서워. 엄마……”
“해송아! 무서워하지 마. 우리 착한 해송이 말 잘 듣지?”
해송이의 울음소리에 나영의 마음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번개처럼 무엇이 스쳤다.
‘이것은 하느님이 떠남을 허락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떠날 수 없나봐.’
나영은 다시 굳은 결심을 내린 듯 현우의 등을 떠밀며 낮게 말했다.
“어서 가요. 혼자 떠나세요.”
현우는 다짜고짜 나영의 손을 잡아 당겼다.
“왜 마음이 바뀐 거요? 안 가겠다는 거요?”
나영은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난 떠날 수 없어요.”
“지금 물러앉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소.”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울어댔다. 현우는 마음이 급해 나영을 끌고 달렸다.
“사람들 깨어나겠소. 어서 빨리 애를 이리 주고 뛰어요.”
현우가 애를 빼앗아 안으려 하자 나영은 놓아주지 않았다.
“전 못 가요. 이제 곧 누가 나올 지도 모르니 어서 제 걱정 말고 가세요. 전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더는 지체하면 안 되오. 어서. 시간이 없어요.”
현우는 안타까운 눈길로 재촉했지만 나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저를 버리고 떠나세요. 나와 함께 떠나면 우리 둘 다 잡힐 수 있어요.”
현우는 막무가내였다.
“당신 이렇게 시간 끌지 말아요. 어서 빨리 뜁시다.”
현우는 나영의 손을 잡았다. 어찌나 꼭 쥐었던지 나영은 뼛속까지 아려왔다. 나영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갈게요. 좋아요. 당신이 옆에 있어준다면 하늘 끝이라도 같이 갈게요.”
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승용차가 있는 곳까지 다 닿을 무렵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 나오더니 앞을 가로 막았다.
“거기 멈추어 서거라. 너희들 어디로 도망가려는 거냐?”
시어머니의 위엄 섞인 목소리였다. 시어머니가 나영의 심상치 않은 행동들을 주시하다가 정원으로 나왔던 것이다.
“어머님……”
나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너희들 지금 어디로 도망치려는 거냐? 어서 말해라.”
나영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 마디 변명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는 그 사람이 많이 아프다기에……”
시어머니는 나영의 옷자락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너와 현우 사이에 절대 발생해서는 안 될 일이라도 발생한 거냐? 그래서 현우가 앓아누운 것이고…… 너희들 도대체 어디로 도망하려고 했느냐?”
나영은 쿵쿵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달래며 진정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떨렸다.
“없습니다. 결코 아무런 일 없습니다.”
“없다니? 아직도 변명이 남았느냐? 이제 네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었다고 이렇게 사통을 하느냐?”
시어머니의 노기는 곧 하늘에 닿을 듯했다.
“전 그런 여자가 못됩니다. 맹세코 부끄러운 짓 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생명의 은인일 뿐입니다. 믿어주세요.”
“네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어찌 보따리까지 싸서 도망갈 수 있단 말이냐? 이제 곧 가연과 약혼할 남자가 아니냐?”
시어머니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어머니가 나영의 머리채를 잡아채려는 순간 현우가 재빨리 앞을 막으며 무릎을 꿇었다.
“탓하려면 저에게 하세요. 제가 죽일 놈입니다.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 사모님, 제가 저 사람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현우 씨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친정집 생각이 나 떠나자고 졸랐습니다.”
등에 업힌 해송이가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바람에 시어머니의 화가 누그러진 듯 우는 아이를 빼앗아 안고 달랬다.
“우리 손자 참 착하지. 울지 마라. 해송아, 할머니랑 집으로 가자꾸나.”
나영은 애를 안고 돌아서는 시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 사람이 아프니 제 마음도 아파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소홀했어요.”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며 잠들고 나영이와 시어머니는 누가 깨어날까 조용히 발걸음을 죽이며 방으로 들어섰다. 시어머니는 나영이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이 년아, 얼른 이실직고 해봐라.”
나영은 시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어머님, 용서해 주세요.”
“네 잘못을 안다면 더 큰 일 벌어지기 전에 당장 이 집에서 떠나거라.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떠나야 한다.”
나영의 얼굴에는 절망의 안개가 서렸다.
“제가 집을 떠나겠습니다. 해송이만은 데리고 가게 해주세요.”
“애는 절대 못준다. 혼자 떠나거라. 날이 밝기 전에 당장 떠나야 한다.”
빌어도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불쌍한 해송아! 이 못난 엄마를 용서해다오. 아가야! 엄마가 없어도 울지 말고 씩씩하게 자라거라.”
피부를 찢고 온몸에서 살을 조각조각 저며 내는 아픔이 가슴을 뚫고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가야! 어린 너를 두고 가야하는 엄마가 너에게 죽을죄를 지었지만 절대 너를 잊지 않을게……”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잠든 아기의 얼굴에 떨어졌다. 울 시간마저 없었다.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현우 씨!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당신 곁을 떠나야만 하는 아픔 속에 무슨 아쉬움이 있겠습니다만 당신과 사랑을 이뤄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떠나야 하는 가슴엔 피멍만 들 뿐이에요.
현우 씨! 내 몸 속에 당신의 피와 살이 숨 쉬고 있어요. 당신이 저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될 인연이기에 이렇게 떠나는 나를 용서하세요. 하느님이 우리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군요. 그래서 저는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감당할 자격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기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을 이렇게 떠납니다. 제가 떠나면 가연 아가씨와 꼭 결혼하여 영원히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가연 아가씬 마음 착하고 예쁘며 인정도 많습니다. 저를 잊어주세요.
나영은 다 쓴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제가 떠나면 현우 씨께 전해주세요.”
주방 아줌마가 가지 말라고 옷자락을 붙잡았으나 정원을 빠져 나왔다. 아! 가여운 운명이여! 너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만 할까?
그대여! 나는 떠난다! 그리움을 묻어두고……
이름 모를 머나먼 곳으로! 마음 따라서
못 다한 말 가득히! 그 아픔에 그리움 갖고
두 번 다시 아픔 없는 곳에 꽃잎이 흔들릴까?
상봉의 눈물
저무는 해는 낙조를 끼얹고 황혼을 재촉하는데 멀리 서해바다의 경치가 그림 같이 하늘가에 펼쳐 있었다. 해는 바다에서 최후의 발버둥을 쳤지만 끝내 바다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그녀는 어둠이 짙어가는 바다의 파도를 향해 부르짖었다. 대답 대신 거센 파도만 밀려왔다. 서러움은 까맣게 어둠을 내리고 짝 잃은 이름 모를 물새 한 마리가 찌르륵 찌르륵 제 짝을 찾아 애절히 울었다.
한 많은 가슴에 빙설이 찾아드니
한창 피는 슬픈 꽃 홀연히 지는데
알 수 없는 시름의 눈물 흔적을
무슨 수로 신 추령께 보내야 할까?
그녀는 하얗게 밀려오는 설움을 토하며 어둠을 깔아놓은 백사장에 누워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나, 둘…… 별들이 반짝이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아! 날 저문 황혼 속에 눈물 젖은 운명이
설움 속에 한을 품고 허공을 떠도는가?
환각일까. 아니! 그것은 바람소리였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불어갈까? 인생은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가야만 하나? 눈물이 흘러내렸다. 창망한 하늘에 흐르는 별빛 하나가 검푸른 장막을 두른 어둠을 뚫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빛을 뿜었다.
“어디로 가야만 합니까? 어디로……”
나영은 아득히 먼 별빛을 바라보며 애절히 울부짖었다.
‘너는 십자가를 향해 걸어라.’
아주 멀리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신의 음성이었다. 별빛의 음성인가? 신은 누구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살아계신다면 어찌하여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계시는 걸까. 신이여. 왜? 침묵하십니까? 신은 꿈 많은 사람들이 저 높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공상에 공상을 더해가면서 만들어낸 가공적인 피조물일까?
갑자기 그 무엇이 그녀를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십자가를 바라보며 걷고 걸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를 누구냐고 묻는 너는 누구냐?”
분명 신의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음성과 대화했다.
“너는 왜 살고 있느냐? 살고 있는 목적은 무엇이냐?”
“주여! 왜? 나를 구속하나이까?”
이렇게 부르짖는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목사님이 몸부림치는 그녀에게 기도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설교가 죽어가는 그녀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슬픈 일 생기면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상상치 못할 재난이 덮치면 사람들은 신을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불속을 지나가고 물속을 헤매고 있을 때 하느님을 만나 나의 모든 생각, 인간적인 열정이나 소원들이 다 불타 없어졌을 때 그 잿더미 안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워 하셨습니다. 이 잔을 치워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시며 땀방울이 핏방울 될 때까지 자신의 육신과 싸웠습니다. 아버지께 버림 받을 때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주여! 내가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나이까?”
그녀는 가야할 곳이 없었다. 부모님이 그리웠지만 친정집으로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편을 잃고 시집에서 쫓겨난 몸으로 어찌 부모님을 만날까? 무섭고 두려웠다. 그리고 어린 아들이 보고 싶었다. 아들의 이름을 하루에 몇 번씩 불러보기도 했다. 또 가슴 한 쪽에는 앓고 있는 현우가 걱정스럽고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그가 자꾸만 생각났다. 너무 그리웠다.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다가가 전화기를 들었다.
“어머니 저예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네가 시집에서 도주했다는 말이 사실이냐? 며칠 전 네 시어머니가 전화를 했더구나. 왜 나왔느냐. 너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
“묻지 마세요. 어머니,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마세요.”
“어디 아프진 않느냐? 밥은 먹었느냐? 떠돌지 말고 어서 집으로 오렴. 네 아빠가 많이 아프다. 뼈 암이란다. 수술하면 희망이 있다는데 돈이 원수구나. 네 언니가 지금 돈 구하느라 애쓰고 있다.”
울음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애통에 젖어있었다.
“용서해주세요. 저에게 돈 한 푼 없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들어가요. 어머니 기다려 주세요. 제가 돈 많이 벌어갈게요.”
나영은 울음이 터져 나와 얼른 전화기를 놓아버렸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애절히 울부짖었다.
‘주님! 당신의 못 자국 난 그 손길로 불쌍한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그녀는 며칠 동안 밥 한 술 입에 대지 않고 울며 기도했다. 목이 타고 눈물이 말랐다. 아! 이럴 땐 절망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녀는 절망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존경하는 그녀였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신을 사랑하라. 그래야 남을 사랑할 줄 안다. 나쁜 것도 미운 것도 슬픔까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사랑 앞에서는 절망도 울분도 사라지는 법이다.”
나영은 천지 창조의 신화 성경의 비밀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신의 조화란 도대체 어떤 걸까? 그녀는 성경의 첫 장을 넘겼다. 제일 앞장에는 <창세기>라고 씌어있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눈을 부비고 다음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느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며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느님 보기에 좋았더라. 하느님은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오! 여호와여! 낮과 밤이 당신의 세계입니까?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과 그리움으로 가슴이 꽉 막혔다.
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영이니?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빠!” 그녀는 아버지가 사실을 알고 쓰러질까 두려웠다.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쌓였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졌다.
“왜 연락 안 했어. 보고 싶구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밥은 잘 챙겨먹고?”
“네. 아빠! 죄송해요. 조만간 갈게요. 부디 몸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아픈 추억들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그리운 고향집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흘러간 소녀시절의 추억들을 그렸다.
그녀는 교회에서 시름시름 고혈로 1년 넘도록 아픔 속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동안 목사님과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로 목숨을 유지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
눈에 띄게 빛나는 웅장한 은빛 건물이 강남 구청 옆에 버티고 서있었다. 본사 건물은 44층의 앞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건물 유리가 알루미늄 색의 빛을 뿌려 한결 돋보였다.
강남 신광본사를 둘러 싼 옅은 안개가 이른 아침 출근길에 있는 사람들을 감싸고 있었다. 나영은 시원한 아침 공기를 들이 마시며 첫 출근길에 올랐다. 경비원이 나영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나영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네. 수고하세요.”
단정한 옷차림, 윤기 도는 검은 머릿결에 늘씬한 키, 그리고 날씬한 몸매, 웃음 어린 아름다운 얼굴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나영은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문 앞에 멈춰 섰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었고 검은 색 회전의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상사님의 자리겠지? 어떤 사람일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멈칫했다. 분명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영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오지원은 깜짝 놀라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혹시 나영이?”
“아! 선생님이 어떻게……”
오지원은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다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늘 새로 온다던 비서가 나영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 그런데 나영이가 여기로 오다니?”
나영은 화석처럼 굳어져 말을 잊지 못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오지원은 설레는 감정을 억누르며 흥분에 휩싸였다.
“묻지 마세요 선생님. 제가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그녀의 말은 오지원의 가슴속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내 곁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군, 벌써 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으니. 세월은 흘렀어도 난 너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동안 괴로웠어요. 그리고 미안했어요. 학교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해놓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여기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었죠?”
“4년이 흘렀어. 네가 떠난 후 구석구석 너의 그림자가 얼른거려 도저히 학교에 있기 힘들었어. 아버지가 한국에 사는 할아버지를 찾았고 할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게 되었어.”
그의 절절한 눈빛은 애달픔 속에 젖어있었다.
“결혼하셨어요? 많이 궁금했는데……”
“미혼이요.”
“지금까지 혼자입니까?”
오지원은 대답 대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점심시간이군. 나영이 첫 출근이니 일찍 퇴근하고 술이나 마실까? 오랜만에 만났으니 서로 쌓였던 회포도 풀어야지.”
그들은 회집으로 향했다. 나영은 뜻밖의 상봉이 실감나지 않았으나 걷잡을 수없이 설레었다.
“자! 오늘 우리 외로움에 쌓였던 인생을 기꺼이 술잔에 담아볼까?”
나영은 오지원을 바라보며 기쁨보다 슬픔이 앞섰다. 불쌍한 해송이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아려왔다.
오지원은 말없이 나영을 바라보았다. 나영의 표정은 슬펐고 곧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오지원은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웠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영아, 그동안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울고 싶으면 내 앞에서 참지 말고 울어. 지금 네 얼굴에 슬픔이 꽉 차 있구나.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혹시 시집에서 쫓겨나기라도……”
오지원은 더 말하지 못했다.
“선생님, 인생 너무 슬프죠? <홍루몽>에 임대옥의 영혼이 울고 있나 봐요…… 생각나네요, 보옥이 태허환경에서 들었던 홍루몽의 세 번째 곡 <인생이 무상함을 한탄하다>는 슬픈 노래였어요. 그때 선생님 왜 저를 붙잡지 않았어요? 저와 함께 어디로 멀리 도망이라도 쳤다면 내 운명이 이렇게 비참하게 바뀌지는 않았을 텐데……”
나영은 취한 나머지 탁자 위에 쓰러졌다. 오지원은 계산을 치르고 서둘러 그녀를 들쳐 업고 나왔다.
“한강 호텔로 가주세요.”
차에 오르자 오지원은 재킷을 벗어 나영의 몸에 걸쳐주었다. 엇갈린 세월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오 년이란 세월, 그녀 없는 세상에서 아픔과 슬픔을 안은 채 속절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녀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다니…… 운명의 조화일까?’
이루지 못할 사랑
605호실은 비록 그리 크지 않으나 화려하고 아담했다. 아늑한 방과 침대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지원은 나영을 안아 조용히 침대에 뉘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이 동요했다.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숨을 한번 길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입술이 나영의 하얀 이마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 이윽고 하얀 나비처럼 조용히 그녀의 살깃에 내려앉았다. 그럴 때 그 어떤 힘의 욕구가 온 몸의 뜨거운 감각으로 퍼져나갔다. 갑자기 그는 깊숙이 그녀의 향기를 빨아들이고 싶었다. 한껏 들이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오지원은 어쩐지 자꾸만 속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그는 이지를 되찾으려 애썼다.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오늘 밤의 시련을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그녀의 살결에서 입술을 떼고 일어섰다. 지금이라도 어디든지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나영의 숨 막히는 유혹 앞에서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 나영이 팔을 벋어 확 끌어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선생님 저를…… 저를 가지세요. 원했잖아요. 전…… 전 남편이 없어요. 벌써 오래전 저 세상 사람이 되었어요. 시집에서 쫓겨난 몸이라 갈 곳도 없어요.”
오지원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의 운명이 가여웠다. 그러나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많이 힘들었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나영아, 오늘 밤만은…… 오늘 밤만은…… 날 유혹하지 마.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그냥 조용히 잠들기로 해.”
오지원의 강렬한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숨길 수 없는 욕망의 빛을 가득 띠면서 삼킬 듯 나영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영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애원했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더는 저에게서 멈추지 마요. 선생님, 제 몸이 더럽기 때문에 더는 선생님의 사랑을 바라지 않을 거예요. 오늘밤 구제불능이 된 이 몸 안아 주세요. 절…… 절…… 소유해 주세요.”
울음 섞인 그녀의 호소는 오지원의 맘을 녹였다. 그토록 처절했던 그녀의 아픔이 오지원에게로 옮겨오고 있었다. 이제 그 마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는 하염없이 죽음의 골짜기를 헤맬 것 같았다.
오지원은 울고 있는 그녀의 날씬한 몸을 두 팔로 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안쪽의 침대에 옮겨 눕혔다. 그는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사랑이란 너무도 아픈 것이기에…… 지금도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어.”
이 시각 그녀의 두 손이 그의 목을 감아 세차게 끌어안았다.
“가지세요. 이 몸…… 이 밤만은 선생님 거예요.”
오지원의 입술은 어느새 그녀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느껴지는 그녀의 매혹적인 숨결 속에서 오지원은 섬세하게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나영은 눈을 감았다. 멈추지 않는 남자의 손길,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 손길에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문뜩 갑자기 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영은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불타던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많이! 아주 많이 현우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두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현우 씨. 너무 미안해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내가 없어도 견뎌 낼 수 있죠? 부디 날 용서해요. 내가 없어도 아가씨와 영원히 행복하세요.’
그녀는 신음을 했다. 오지원의 강한 입맞춤에 온 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불속에서 타오르는 현우의 얼굴을 보았다.
“사랑했어. 아주 많이.”
숨길 수 없는 욕망의 빛을 띤 강렬한 눈빛이었다.
“가지세요. 저를……”
나영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 헉!”
갈망 속에 굶주렸던 입술이 목덜미에 닿자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혔다. 뜨거운 남자의 숨결이 나영의 목덜미로부터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산봉우리처럼 봉긋 솟아오른 부푼 가슴으로 가 닿는 순간 가늘게 눈을 떴다.
오지원은 온몸의 전율을 느끼며 그녀의 가슴에 키스를 퍼부었다. 꿈결처럼 금속성의 감촉 속에 나영은 신음하며 몸을 뒤틀었다. 오지원은 그녀의 가슴에 꽁꽁 닫혀있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은밀한 갈망이 불타올랐다. 그는 나영을 원하고 있었다.
“너를 가지고 싶다.”
“선생님……”
오지원이 그녀의 몸을 감싼 옷가지를 하나 둘 벗겨내자 어느새 나영의 하얀 알몸이 드러났다. 너무 눈부셨다. 그는 그녀의 눈, 귀, 입, 귓불로 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입술로 애무했다. 나영은 혼미한 듯 신음하며 몸부림 쳤다.
“사랑해, 영원히……”
오지원은 그녀의 달콤한 향기를 한끝 들이키며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을 음미했다. 애무와 키스 속에 그대로 녹아져 타버릴 것 같은 기분에 온몸이 둥둥 떠 있었다. 그는 이제 더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불타고 있는 몸이 거칠어진 호흡을 하며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의 관능적인 움직임에 그녀는 허리를 틀었다. 허공에 흩어진 날개가 파닥이며 하얗게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무의식은 어느새 그들을 한 몸으로 되게 했다. 방안의 가득 찬 열기도 두 사람의 정열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남자는 서둘렀다. 순식간에 여자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가쁜 숨소리가 온 방안에 울려 퍼질 때 서로에게 뛰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렸다. 절정에 달한 그들은 하나가 되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멈춰 버린 걸까?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한 나영은 전날과 같이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사무실 안을 말끔히 정리했다. 전날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오지원이 들어오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인사조차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했다. “피곤하지? 오늘 나오지 말고 푹 쉴 것이지.”
“아뇨. 괜찮아요.”
“난 네가 필요해. 넌 이제 내꺼야. 영원히…… 우리 서둘러 결혼하는 게 어떨까?”
“……”
나영은 대답을 못했다. 가슴만 두근거리고 떨렸다. 애초에 지키지 못하고 깨어져버린 사랑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이 진실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가슴 설레고 머릿속은 온통 오지원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찼다. 그녀는 그의 사랑을 믿었다. 그러나 운명 따위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삶이 깊게 얽혀있다는 현실 또한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오지원에 대한 신뢰, 그와의 깊은 교감은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직감이었다.
“왜 대답 없어? 너도 나를 원했잖아.”
오지원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휘감아 안으며 다그쳐 물었다.
“제 운명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사랑이 무섭고 떨리는데…… 결혼이란 웬 말입니까?”
나영의 얼굴은 슬픈 빛이 감돌았으나 이내 붉어졌다.
나 이제 네 없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오래전 너와 함께 했던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 그 시간들을 지금까지 가슴에 묻고 그리움만 쌓이고 쌓여 아픔 속에서 한으로 남아 상처가 되었어. 너는 내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내 삶의 전부야.”
“선생님……”
“너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들을 몽땅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새 출발해. 너에게 좋은 시간들을 만들어 주고 싶어…… 내가 노력할게, 행복하게 해줄게……”
“……”
말없는 나영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오지원의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같았다. 빼곡한 스케줄을 확인하고 결재서류를 나영에게 내밀었다.
“영업부 전화해 결재사안 확인 좀 해봐.”
“네. 선생님.”
“여기 회사니까 공무 중에는 이사님이라고 불러야지.”
“네, 이사님, 명심하겠습니다.”
인터폰을 집어든 나영은 지체 없이 전화를 했다. 그녀는 오지원과 함께 매일 맡은 업무에 몰입했다. 때때로 허전함을 느끼다가도 오지원과 눈길이 마주치면 묘하게 안심되었고 긴장이 풀려 맘이 편해졌다. 그녀는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고 싶기도 했다. 그와 함께 매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현실이 못내 안심되었다. 그리고 빈 틈 없이 일 처리를 잘하는 그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골똘하게 가다듬고 서류를 넘길 때 조용한 그의 얼굴에 위엄이 묻어났다. 반나절 내내 서류를 검토하던 오지원이 얼굴을 찌푸렸다. 지끈 지끈 편두통이 심해졌다. 서류로 신경을 돌리려했지만 눈앞이 흐려졌다.
“어디 아프세요? 이사님 ,”
“머리가…… 몸살 왔나봐.”
오지원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두통약 사올게요.”
“괜찮아, 난 너만 옆에 있으면 되니까.”
오지원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의 입김이 몹시 뜨거웠다.
나영은 오지원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뜨거워요. 열이 많이 나네요.”
그녀가 약을 사오자 시원한 물과 함께 약을 넘겼다. 이윽고 약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열이 차츰 내려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멀리 웅장한 건물이 보였다. 창밖을 응시하던 오지원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코에서 피 방울이 하얀 종잇장 위에 떨어졌다.
“아! 코피…… 이사님, 코피 흘러요.”
나영이 손수건으로 흐르는 코피를 닦았다. 코피는 멈추지 않고 흘러내려 손수건을 적셨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 해도 건강부터 챙기면서 해야죠. 이러다 몸 다 망가지겠어요.”
그녀는 안타까운 듯 그를 바라보며 핀잔조로 말했다.
일찍 퇴근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온 오지원은 약기운에 취했는지 내내 잠만 잣다. 몇 시간 푹 자고 눈을 떠보니 나영이 가지 않고 옆에 앉아 지켜주고 있었다.
“깨나셨군요. 선생님, 배고프죠? 전복죽 끊여 놨어요.”
“배고팠는데, 고마워.”
어느 듯 창가로 환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달빛처럼 환해진 나영의 얼굴을 보고 한결 기분이 나아 졌다.
식사를 마친 오지원은 소파에 기대고 앉아 나영을 빨아들일 듯 응시하고 있었다. 테이블에서는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달콤한 멜로디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은은히 비치는 달빛에 취한 듯 오지원은 나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같이 춤출까?”
“선생님 몸도 편찮으신데……”
“즐겁고 유쾌하면 병도 빨리 났겠지.”
오지원은 나영의 어깨에 팔을 올려 천천히 몸을 밀착시켰다. 나영은 그의 품에 안겼다. 남자의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음악에 맞춰 부드럽게 회전을 돌았다.
“우리 다음 주말에 여행이나 떠날까? 단풍든 가을 산과 가을의 바다를 너와 함께 보고 싶었어.”
“그것이 소원이었어요?”
유혹하듯 바라보는 나영의 시선에 오지원의 눈은 가늘어 졌다. 불현듯 그는 욕망을 느꼈다. 나영에게 깊은 뿌리를 내리고 싶었고 그녀의 심연 속으로 푹 빠져보고 싶었다.
나영은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느린 속도의 템포를 유지했다. 서로를 느끼며 바싹 밀착한 채 깊이 조금 더 깊이 서로에게 다가섰다.
뜨겁고 정열적인 사랑 속에서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매일을 함께 지냈다. 시간 나면 함께 영화를 보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도 하고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도 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는 약속대로 멀리 여행을 떠났다.
황홀한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섬 주위로 깎아지른 듯 아찔한 절벽 아래 멋진 바위들이 다듬어놓은 예술조각 마냥 넓게 펼쳐져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섬이었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단풍잎이 날렸다. 오지영은 놓칠세라 나영의 손을 꼭 잡고 낙엽 깔린 오솔길 따라 산모퉁이를 에돌았다. 시월이 막가는 늦가을이여서인지 싸늘한 저녁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누런빛을 지니고선 이깔나무들은 바람에 술렁일 때마다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산 주위의 그늘을 누렇게 덮었다.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산꼭대기에서 흩날리다가 산 뒤로 가물가물 살아졌다. 가을은 아름다우면서도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다홍빛 단풍, 검푸른 분비, 노란 이깔, 은백색 백양과 사시나무들이 떠나는 잎들을 바라보며 슬프게 서 있었다. 먼 곳 어디선가에서 처량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바람마냥 귓전을 스치며 울려오는 것이 바람에 실려 너무 슬프게 들려왔다.
‘현우일가? 아니, 아닐 거야.’
“누가 켜는지 너무 슬프군.”
“글쎄요. 저 동쪽 섬 끝에서 들려오는 것 같네요. 어떤 슬픈 사연이 있는 사람이겠죠.”
말을 하고 있는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자기 서러운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그녀의 머릿속에 현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애써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오지원의 뒤에 서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머리를 그의 등에 바싹 기대고 섰다. 그녀는 이렇게라도 자신의 맘을 달래고 싶었다.
침묵이 흘렀다. 오랫동안 서로가 말이 없었다. 슬프게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도 멎었다. 나영은 눈물 젖은 얼굴을 그의 등에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슬픈 노래를 불렀다.
짙은 그리움에 석양빛 기울고
애잔한 가을꽃 찬 서리에 지는가?
지워지는 영혼의 마지막 사랑이
혼자되어 가을비에 젖어있는데
지는 가을 슬프다고 그 누가 울었던가?
아! 창가에 가을은 이별위해 우는 걸가!
오지원이 그녀의 노래에 뒤를 이어 쓸쓸한 목소리로 나직이 불렀다.
해가 어둠을 깔면 별이 뜨건만
눈물 없는 새는 왜 슬피 우는 걸까
천만년을 울어도 못다 울어서
애통한 저 울음 마디도 못 꺾고
이별이 남긴 꽃잎 우에 핏물이 드는가?
아! 슬픔만 불러오는 가엾은 운명이여! 한참이 지났으나 그냥 그대로 오지원의 등에 기댄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어느 듯 둥근달이 동쪽 바다 끝에서 떠올라 넓은 바다를 비췄다. 나영은 조용히 저 멀리 달빛 젖은 외로운 섬을 바라보았다. 달빛어린 저쪽 섬에서 현우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오지원과 함께 있으면서 왠지 자꾸만 현우가 그리워졌다. 잊으려고 애쓸수록 더욱 보고 싶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하얗게 첫눈이 내리는 날, 회사에서 창립기념일 파티가 있었다. 창문 밖에 거위 털 같은 함박눈이 쏟아져 내려 부풀어 오른 직원들의 마음을 한결 더 들뜨게 했다. 잔과 잔이 부딪혔다. 오지원이 잔을 들고 축제의 연설을 시작했다.
“꿈을 실현하겠다는 욕망을 불태우려면 자기 자신부터 믿으십시오. 우리 신광 그룹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 힘차게 분투하며 목표를 향해 달려갑시다. 단순한 희망이나 기대를 불타는 욕망으로 혼돈하지는 마십시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면 누가 나를 믿겠습니까? 성공은 내가 내 손으로 움켜쥐는 것입니다. 이제 곧 묵은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는 자, 망설임을 맘에 두고 있는 자, 그는 절대 성공 할 수 없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환경과 상황이 어찌하든 계획을 박차고 나아가겠다는 집요한 결의 속에 기필코 해낸다는 무쇠 같은 의지가 있으면 반드시 성공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꼭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확신을 갖고 모든 힘을 한 곳에 집중시켜 성공의 그날을 위해 달려 나갈 때 희망하던 성공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 지불할 수 있는 대가, 그것은 불타는 욕망입니다. 불타는 욕망에 미쳐 있을 때 성공의 여신은 나의 손을 기꺼이 잡아 줄 것입니다. 성공의 욕망은 성공의 의식을 불러줍니다. 자, 우리 새해에 새로운 성공을 위하여 잔을 들어 욕망을 불태웁시다.”
직원들이 모두일어서서 축배의 잔을 부딪쳤다.
“이사님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열정을 다할 꿈의 세계가 있다면 그것 혹시 불타는 사랑 아닙니까?”
팀장 승호가 무슨 낌새라도 챈 듯 씽긋이 웃으며 물었다.
“사업도 사업이지만 먼저 사랑이라는 것이 있고 또 결혼이라는 것이 있어야 살아갈 흥미가 생기는 게 아닐까? 팀장도 새해는 결혼을 목표로 힘내봐야지.”
“하지만 님을 봐야 뽕을 따죠. 결혼할만한 여자가 안 나타나서…… 이사님은 언제 결혼식 올릴 겁니까?”
“때가 되면 하는 거지. 팀장만 바라보는 강 실장 다 늙어버리겠네.”
직원들 모두가 강 실장에게 눈길을 돌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강 실장은 난처하여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오지원이 웃다가 말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일조일석에 이루지진 않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만리장성도 하루아침에 쌓아 올린 거 아닙니다. 어린 묘목이 정정한 거목으로 되려면 숫한 풍상 속에 모진 시련을 겪어야 하니까요. 사랑도 곡절을 겪어야만 더 달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겐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은 꿈의 세계가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팀장이 잔을 들고 익살스레 강 실장의 눈치를 보며 외쳤다. 사실 그도 강 실장을 좋아하고 있었다.
“자 우리 다 같이 미래의 좋은 꿈을 이루기 위하여 잔을 비웁시다.”
“자. 위하여……”
그들은 웃고 떠들며 거나하게 취하였다. 회식이 끝나자 그들은 2차 노래방으로 향했다.
하얀 눈꽃 속에 이별
나영은 언니의 전화를 받자마자 한시 급히 중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가는 동안 숨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 왜 이렇게 빨리 떠나십니까?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으면 오래오래 사셔야지 어찌 그리 빨리 가시는 겁니까?”
그녀는 자신의 못난 인생을 원망하며 한탄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그리 빨리 떠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 인생이란 원래 이리 헛된 것인가? 그녀는 아무것도 예감치 못했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나영은 <전도서>에 첫 장을 기억에 떠올리며 “인생은 섧구나.” 하는 생각에 억수로 눈물이 쏟아졌다. 이 시각 그녀는 애통함의 눈물 속에 바람같이 헛되고 헛된 인생이 너무도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얼굴에 이미 흰 천이 덮여 있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차디찬 몸이 침상에 실려 영안실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버지 못난 저를 용서하세요. 저 왔어요. 아버지…… 눈 좀 떠보세요.”(다음 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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