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욕망 이후, 귀소歸巢 -김명인 시집 《이 가지 그늘에서 저 그늘로》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1. 시의 진면에 다가가려는 눈높이
시가 의미하는 것의 궁극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볼 때가 많다. 현학일까 아니면 독자에게 실존적 주체로써 시의 정서 전달에 있을까? 요즘 문단 내에 현학적인 자세로 시작을 일구는 시인들도 많다. 그 시인들의 시를 읽다 보면 과연 누가 누구를 위해 쓴 글인지를 가늠할 수 없어 판독 불가하거나 아예 전달 불가한 시도 있다. 그들만의 전가의 보도처럼 내뱉고 있는 끼리끼리라는 시의 유형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유 있는 시작법을 내세운다. 지금보다 더 산문적이거나 지금보다 고도의 시적 형식 단절을 가해 난해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유 없는 시적 담론에 힘입어 그들만의 주체적인 그래서 더욱 개성 있는 진보의 명분으로 시 쓰기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고, 새로운 것이라는 명분으로 따라 하기 하려는 부류를 확산시킨다. 그들만의 심취는 강화되고 고유한 시적 무늬를 감지케 할 그 어떤 기미도 드러내지 않으려 변용을 극대화한다. 더욱 사변적이면서 난해한 수사의 밀도는 시의 형식 파괴는 물론이거니와 전달성과 본래적 기능을 철저히 무시한다. 반대로 시의 본래적 원형에 충실하면서 부단한 시의 정진을 통해 시적 완성도를 높여 서정시의 진수를 보여주려는 올곧은 경향도 볼 수 있다. 그런 시의 경향에 충실하면서 현대인들에게 도시적 담론 즉 사회변화의 탄력을 시 미학적으로 완충해간다. 더 나아가 정치적 담론의 경도에서 심미적 시의 정치성으로 회귀를 부단히 요구하며 시의 정처를 향해 일관되게 창작의 열정을 보여주는 부류도 있다. 그 부류의 중심에는 최근 열 한 번째 시집을 내놓은 김명인 시인이 있다. 이번 시집을 주의 깊게 일별해볼 때 행간의 의미망이 심오해졌고, 언어의 사변과 수사에서 자유로워져 시의 양상이 무욕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매 행간에 은폐된 은유의 진폭이 시 편마다 충실해 시의 아우라를 확장해가는 양상도 탁월해졌다. 새롭지 않아서 더 새로운 시의 경향을 탄탄하게 드러낸다. 시의 사유는 김명인 시인만의 시적 세계로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지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담론처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시적 세계의 근거를 물질문명이 신봉하는 풍요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경향은 당연하거니와 그렇다고 신에 귀의하여 의탁하려는 쇠약함도 없다. 비록 나약한 인간의 의지지만, 죽음 직전까지 놓을 수 없는 자신과 관계하고 있는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의 근원인 자연과 접신해 통어하려 한다. 자연이라는 미시적 공간 속 피안의 세계를 현시하려는 과욕은 삼가고 이해와 포옹으로 의식을 내부화한다. 그럴때에야 가능한 시의 시선은 매우 투명해져 표면 속에 감춰진 세상의 이면까지 투사하여 진면을 소환해낸다. 특별하지 않아 더 특별한 김명인의 시 시계는 눈여겨 봐야 할 혼란의 시대에 필요한 시임을 자부한다. 현실적 공간에서 실존하는 사람들의 사는 일상을 구체적 시의 세계로 소환해내 성찰적 시선으로 공감하여 확산하기 때문이다.
2. 깊숙한 응시와 사유의 천착
시의 세계 속에 현존하는 시인의 시적 대상은 일상이며 크게는 사물의 내면화에서 기인해 수수된다. 매번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유의 접점은 통속적인 삶으로 작용하는 시간성을 초월하여 잠재되었다가 기억으로 회고된다. 그 기억의 정처는 이미 몸으로 유전된 동양적 귀소와 맞물려 인간적인 실존의 문제를 절실하게 긍정하도록 한다. 아름다운 귀소는 생명체에만 부여되는 또 다른 욕망이다. 소유하려는 것도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비움도 가벼워지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하자. ‘윤회’라는 시어마저 낯설지 않게 <물의 윤회>로 환기되지만, 의미론적으로도 이해 가능한 수사임을 보여준다.
물소리가 골짜기를 쪼갠다, 음계를 바꿔가며 계곡을 빠져나가지만 허기를 채우고 마침내 다다르는 바다라면 물은 윤회하는 것일까, 분수라면, 폭포라면, 강이라면? -<물의 윤회> 부분
물이라는 자체가 생명이 있을 리 없다. 그런 물이 물리적인 힘을 가해 계곡의 골짜기를 쪼갠다거나 소리의 높낮이를 바꿔 가는 조음調音 능력은 당연히 없다. 그런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시인의 사유 속으로 침투한 ‘물’은 그냥 흐르는 물이 아니다. 그 자체가 갖는 속성은 다른 곳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물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응시에서 생명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는 목적 지향점을 염두에 두고 살 때 노정路程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물이 계곡을 빠져나가면서 시인의 귀를 자극한 소리가 익숙한 인간의 삶의 모습으로 변주된다. 흘러내리는 물의 정처도 계곡을 빠져나간 순간 본성은 사라진다.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이 되거나 폭포수가 되거나 아니면 바다에서 전혀 다른 물로 변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것은 태어나 죽음에 이르는 인간과 흡사하다. “가령 느닷없는 우박으로 형해를 바꾸더라도/물이 갇혔다 하겠는가, 담거나 비우거나”처럼 세상사 굴러가는 것이 물과 다르지 않다. 결여에 대한 채움의 욕심보다 절실한 것은 비움이어서 생사에 대한 무욕의 언표가 가볍지 않다. 자신 곧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경은 멀리 있지 않았다. “거기 빠진 일행이 제 몰골에조차 무심”해서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현실의 결여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균형을 찾지 못한다면 고스란히 자신의 결여가 되어 욕망하는 귀소에 이를 수 없다. 온전한 경청을 위한 귀 두 쪽을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 귀 한쪽이 문제가 되었다. 온통 시끄러운 사람들이 앉아있는 우측에는 소음뿐이다. 그 사람들의 말소리만큼 다른 소리는 들어올 여지가 없다. 때마침 좌측 차창의 빗소리만 요란하다. <내 부족함은 좌파인 빗소리로 채워진다>며 스스로 선택하고 버려야 하는 순간을 시詩로 채웠다. 서슬 퍼렇던 시대 좌파란 금기어에서도 자유로워진 듯 보이지만, 몸을 좌우로 구분하며 궁리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 안에서의 욕망은 양쪽을 다 취하려는 것이겠지만, 한쪽을 비워내되 다른 한쪽을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난 자연으로부터 온 빗방울 소리로 채우겠다는 것이다. 행동으로 구체화되는 시간은 찰나 같아도 긴 고뇌의 산물이다. 몸의 한쪽에서 또 다른 한쪽으로의 전이가 생사의 윤회와 다를 바 없기에 그렇다. 부쩍 생사에 관한 발화가 빈번해졌다. 스스로 천기天機같은 생의 기운으로 느껴지는 기미를 깨달아버린 것은 아닐까.
채색이 흐린 무늬가 손등으로 번졌지만 아직은 섭생이 내밀할 거라는 착각? 꽃이라 여기지 말자, 목소리도 이젠 탁해질 때가 되었다, 목둘레의 간반이나 볼 언저리 검버섯 어느 날 문득 안 보이던 것들이 보여서 드디어 목적지에 다가섰다는 생각, -<간반> 부분
오래오래 지켜보아야 알 수 있는 신체 변화는 은밀하여 쉽게 시선에 들지 못한다. 세상의 시류에 떠밀려 바삐 살다보면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 문득 거울 앞에 섰다가도 금방 지워져 버리는 화장처럼 기억은 망각을 불러들인다. 혈기가 넘칠 때는 <간반>도 매력처럼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까만 점으로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려 욕망하는 내면을 가리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만큼 산다는 것이 절박했던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보아온 간반’이란 것도 상당한 시간을 초과해야만 기억의 자리를 더듬더듬 내어준다. 아름다운 추억은 회고를 통해 그리움을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검버섯은 치유보다 지속 심화되는 방향성을 갖는다. 육체의 노쇠가 표징하는 징후는 다양하게 발현하지만, 그중 가장 늦게 나타나는 것이어서 말로 치면 썩어가는 언어다. 상한 언어는 부패하게 될 것이고 기어이 독을 품어낼 수밖에 없다. 살며 말을 많이 했을 목 주위로 핀 ‘간반’도 시간이 더해지면 독이 될 것은 뻔한 이치다. 말로 욕망한 것들을 묵묵히 수행하다 “오래오래 걸어와 부은 발등”까지 되어버렸다면 과감하게 “끝내 쥐여지지 않는 다짐이라면/붙잡은 것들 놓아 보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소유하려는 욕망은 달리 본다면 결여에서 비롯된다. “드디어 목적지에 다가섰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욕망에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움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응시는 시의 세계를 향해 그윽하다. 그리고 오래오래 지속된다. 그 사물에 대한 천착은 웅숭깊은 사유다.
햇살이 가지를 비집고 바닥까지 잔광을 퍼질러놓아 빈약한 초록이 아니라면 세한도풍의 전나무들도 하오의 적막과 마주하고 있음을 알겠다 숲을 읽었으나 구실이 사라진 지금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부분
황혼이 잦아질 때의 고요도 더 깊은 적막에 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어느 순간 어둠 천 근이 날개에 매달리”기 직전 마지막 시의 서정을 끌어내야 한다. 고사목은 뿌리를 인 것처럼 하늘을 향해 죽어간다. 비록 뿌리는 땅속에 내려있지만, 뿌리의 힘으로 내뻗은 가지들은 나무의 또 다른 뿌리인 것은 자명하다. 마치 사람 사는 것과 같아 옹기종기 모여 살던 사람들이 흩어져 제각각 모진 삶에 휩쓸리듯 모로 누운 고사목도 군락에서 하나 둘 이탈해 죽어가는 것이다. 나머지 살아있는 나무들도 “하오의 적막과 마주하고 있”어 죽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다. 나무의 노화 과정을 보듯 사람도 생명의 유한성을 초과할 수 없다. 한때는 거대한 숲의 주체였던 고사목을 보며 부쩍 죽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예민해졌다. 남루처럼 다가오는 시간의 유한성에서 조락凋落을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할 일이 많을 것만 같지만, 막상 그렇지 않았다는 시인이다. “숲을 읽었으나 구실이 사라진 지금” 시인은 이 가지에서 저 그늘 사이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해내는 <손의 표정>은 어떤 사람도 읽어낼 수 없다. 손으로 적어나가는 시의 정진은 그만큼 집중되어야 이룰 수 있는 업이다. 가슴에서 번져 나오는 시 문장들이 가볍게 일궈낸 단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억장 미어지도록 미지가 아득해/백지 위로 어둠 새까맣게 내려앉는 밤/손은, 거머쥐지 못했던 제 흑암을/또박또박 받아 적”지만, 잘려나간 검지마저 몰랐던 놀라운 몰입의 결과다. 시는 머리나 얼굴이 아닌 오래 묵힌 가슴 높이에서 나온다는 시론이 진정하다. 시의 세계는 사물에서 비롯하고 숨겨진 날 에너지에 자칫하면 베일 수가 있다. 칼날은 감각을 언제나 능가하지만, 내면의 명철한 의식을 능가할 수는 없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글에 베이지 않기 위한 법도가 따로 있다. 세상사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산다. <간담>에서 말言같은 칼을 도刀라고 비유한다면 신중한 매사는 당연한 것이다. 칼이나 시나 써야 할 때만 쓰여야 하는 것이 세상의 법도다. 매사에 삶이 그러하듯 “도감刀鑑을 펼쳐두고 설핏 잠들었는데/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쇠가 울었을까?/어피로 감싸 안은 칼, 머리맡에 두는 것은/북두北斗의 법도를 따라가는 일이”라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할 일이다. 시인의 머리도 항상 북두를 향해 뉘었을 것이다. 그 “북두北斗의 법도”는 일월성신을 섬기듯 바르고 정의로운 곳에 쓰일 언어의 절제를 이름이다. 비록 칼을 머리맡에 두고 있지만, “당신에게 들이대고 싶은 건 차라리 간담을 저미는 말,/북두를 밟아온 검광이 단숨에 우묵한 허를 찌른다/잘라버려야 할 생각들만 한밤처럼 깊어/오랫동안 칼이 울고 갔다면 너는 이미 훼절한 것이”라는 시적 의미는 냉정할 만큼 매사에 신중을 요한다는 시인의 절제된 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칼집에서 칼을 함부로 뽑지 않듯 내면에 침전된 시의 남발을 엄중히 경계해야 한다는 다짐이다. 사사로운 욕망을 삼가야 할 것은 바다에서도 다르지 않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깊숙한 바다에 이르렀다.
앙다물면 독한 질서로 우묵한 홍합은 바위틈에서나 자루 속에서나 좀처럼 자기를 발설하지 않는다 뿌리째 뽑혀 왔어도 함구로 시종할 뿐,
---중략---
미처 빼물지 못한 붉은 혀가 침묵의 저 안쪽에 오그려 붙어 있다 -<홍합> 부분
무표정한 바다의 생리를 깨닫기 위해 스스로 의문하고 답하고 또다시 되묻기를 반복한다. 김명인 시인은 감각보다는 사물에 대한 밀도를 지향하는 내면화를 통해 시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천렵하며 접한 사물은 단순하게 먹거리인 홍합에 그칠 수 없다. 그 홍합이란 미물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보며 사람의 생존보다 더한 의식까지 자극을 받는다. 인간과 맞서 죽음과 맞바꾼 홍합의 서슬은 가히 엔간한 사람을 능가하겠다. 필연적인 운명처럼 “할퀴듯 뜯겨 무리를 벗은 다음에도/홍합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투가 우직하다. 비록 죽음에 이르지만, 패배를 수긍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시의 정처에서 갈팡질팡하지 않고 오로지 곧은 길이라면 “미처 빼물지 못한 붉은 혀가/침묵의 저 안쪽에 오그려 붙어 있”는 것처럼 자신을 쉽게 풀어놓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이다. 능욕과 오욕 앞에서 의연해져야만 하는 사람의 도리는 긍정을 넘어 존재 인식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구분 선에서 바다는 홍합이 살아야 할 곳이다. 바다 속 미물처럼 얼마나 오기스럽게 세상과 맞부딪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가를 묻고 있다. 인간과 또 한 번의 사투가 벌어진다. 어류는 <아가미>가 있어 산소 호흡으로 생명을 영위한다. 바닷속에서 끌어 올려진 바다 고기가 손질되는 과정을 묘사한 시다. 시적 세계에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려는 딱한 아가미”를 가진 물고기는 어쩌면 마지막 진화를 이루지 못한 생명체로 기록될지 모른다. 문명인이라는 현대인도 결국은 한 끼 식사를 위해 누군가에 의해 “그쪽 수평선이 핏빛 노을에 절고 있”듯 시뻘건 아가미를 헐떡이며 물고기처럼 죽어가는지 모른다. 한때 바다를 유영하는 꿈과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었다는 보통사람 같은 시인이다. 그런 꿈은 불가능하지 않다. 시의 세계에서 화자는 <망상어>로 변주하여 그 꿈은 가능해진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또 있다. 그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난생이 아니라면 태생도 아니어서/한 뼘 남짓 신분 없는 어미가 희푸른/몸통을 휘저어 한 마리씩 새끼를 쏟아낸다/찢어발기는 포말 속으로 풀어놓는 산통이라니!”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은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사력을 다한 투혼이 있어야만 이룰 수 있다. “고리를 푼 어미 망상어 한 마리”가 얻은 자유는 죽음보다 값진 바다였다. 해원解寃의 몸을 해체라는 수순으로 끝맺는 무상함으로 사는 것이 더 무상해졌다. 가끔은 하늘 한 귀퉁이를 의지하듯 쳐다보며 사색은 비움에서 더 깊어진다.
한 발짝 더 내디뎌 허방이라면 너는 백척간두의 무엇으로 서 있느냐? 허물어진 절, 첩첩 능선을 엮는데 탑이라서 아득함 다 헤아리는 것일까 -<우두커니> 부분
시의 근원인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천착은 무한한 개아個我를 지향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표층적 언술은 겸허를 바탕으로 공허 이전까지 상상한다. “이것을 어디다 부릴까, 안장도 바퀴도 없이/헉헉거리며 끌고 온 북내면 고달사지,”의 경내를 답사한다. 풀숲에 가려진 한때의 뜨겁던 욕망을 탐해보지만, 다 부질없었음을 본다. 너무 멀리 왔나 싶을 때 허망한 좌절감이 쓸쓸함으로 대체되는 것은 페허처럼 나뒹구는 절터의 와편瓦片 부스러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때는 ‘북내면 고달사지’ 터에도 지금의 남루를 뒤덮고 남은 영화가 있었음을 상상한다. 욕망을 비집고 들어선 남루한 터에 또 다른 욕망으로 정화되는 안타까움을 돌이켜본다면 꼭 좌절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절터에 들어선 “결벽은 어느 시절에나 뼈저린 거야, 적빈을/추궁당하는 너무 넓은 음역들,/잿빛 남루에도 쓸리며/말매미 떼울음으로 출렁거”릴뿐 사유를 통해 비워내야 할 시간은 더 필요하다. 절터에서 끝없이 이어진 인연의 꼬리를 따라가는 노고에도 피로나 지루함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어딘가에 부려놓지 못할 빌미라면 욕망의 근원을 찾아 나서야 한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가는 것이 고행 같지만, <호박 달>을 따라간다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달이 뜰 때마다 찾아가던 고향집도 부모님 돌아가신 뒤론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되어버렸다. 달을 보며 우두커니 서서 “생사야 장난처럼 단순해 무리도 벗었건만/구름 달 여전히 내 속에 있고/나 혼자 굴러오다 여기 서성거리니/나는 몇 번이나 추석까지 저어 갈까?”라지만, 다 비워내고 마음으로 찾아가는 추억 속 끄트머리에 있을 시인의 가계사에서 “(어떤 달은 열아홉에 가출했고, 스물둘에 저버렸다)”는 단명한 아픔을 회한해본다. 그 아픈 회한은 시인의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회오리바람처럼 들썩인다. 하지만 간혹 말간 추억도 있었다. 바람에 간판이 흔들리듯 <보리수 다방>에서 가슴 설레던 욕망 저 끝에 있을 과거의 추억을 기대하며 시인이 앉아있다. 그 흐릿한 조명발을 피해 구석진 의자에 파묻혀진 낭만이 흐느끼도록 표표하다. 글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느긋한 시절 모락거리는 쌍화차 한잔 기억에 없는 사람은 없다. 다 마시고 난 뒤 빈 찻잔의 무료처럼 허당만 가득한 욕망의 끝은 후회이고 이어 포기와 다름없는 긍정의 비움에 있다. 아직은 그러기에는 시간이 이르다. “스물몇 살의 여자가 이순을 넘겨 전화를 걸어왔다”지만, 다방이라고 세월을 온전하게 되돌려 질 수 없다. 아뿔싸 너무 늦었다는 회한이다. “다방 입구에 걸린 커다란 거울 안쪽에/무언가 놓고 왔다, 사정없이 짓뭉개진 약속이다 보니!” 안타깝다. 인간의 욕망이 와해되는 순간 건져 올린 시였기에 그만하면 시로써는 절창이다. 짧은 유랑이 멈춰 사유 끝을 물더니 무욕의 정처定處에 들었다. <월정에서>에서의 시간은 찰나였지만, 개아個我의 폭은 깊고 짙다. “안부란 미끄덩 청태 낀 바위의 세목일 뿐/누구 탓이라니, 시간이라면 네가 더 누려야지”라며 “나는 한사코 으르렁거리는 파도로 내달”려온 자신의 욕망이 문제였음을 깨닫는다. 월정에서 친구에게 부치려는 엽서 한 장으로 비롯된 시인의 시적 세계가 두툼하니 깨알 같은 생각을 가득 슬었다. 알이 나비로 부화되는 시간은 짧다. 저 알들이 부화하기 전 또 다른 사유를 겹으로 찾아내야 한다. 심층적으로도 사유의 층층이 가능하다면 겹 사유가 맞고 응시가 겹겹이 이루어져 천착은 끝이 없다. <어부의 귀>를 가질 때쯤에야 보인다는 바다다. “우리가 마련도 없이/제 것인 양 불러내지만/닦아세울 듯 조급한 너에게도/바다란 얼마나 울퉁불퉁한 일체인가/파도 위에 파도 그 파란만장이/물 밑 고기의 육성을 알아듣는/어부의 귀를 허락한다”는 전제다. 욕망보다 앞선 시간을 인식하는 경험을 거쳐야 이룰 수 있는 ‘어부의 귀’속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통찰이 눈부시다. 우선 무언가에 도통하려면 자기갱신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과정은 체험을 수반하는“숙련을 곁눈질하는”요령이 아니라 진정한 성실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낭패를 바치는 어로라면/생략/멀미부터 참아내는 단련이 필요하다”는 주문은 세상살이의 덕목 중 하나인 인내임을 일러준다. 이후에도 매사에 겸허한 자세야 말로 삶의 덕목임을 가르치고 있다. 뭇 시선들로부터 창피스러운 <이목>이 집중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세태다. 사회적 윤리를 넘어서는 대낮 까마귀의 희롱을 나무라려는 것만은 아니다. 그 까마귀를 닮은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숲에서의 소란도 이내 가라앉을 것이라 별것 아니라지만. 아찔한 한 때의 사랑까지 뭐라 하겠는가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애인인 듯 불륜인 듯 대낮의 환락”을 빌어 공리적인 윤리의식의 회복을 요구한다. 욕망하는 것들에 마비된 ‘이목’에 대하여 최소한 수치스러움 정도는 가릴 줄 알아야 한다는 질타같은 당부다. 그보다 더한 “흉조는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는다, 법이 있어도/무법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처럼/요즘 이목耳目에는 수치가 없다”며 사회를 품고 있는 국가 질서의 부실함까지 질타한다. 사회 문제 의식을 일깨우려는 시다. 사실 순서에서 밀린 탓이라 해도 시의 궁극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얼굴 1>에서 드러난 명제 앞에 곤혹스러워한다. 사람들에게 얼굴다운 얼굴이 없다는 거다. 얼굴의 일부인 귀를 자르던 고흐와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면 지상에서 나 또한/얼굴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내가 누군 줄 안다 해도/그때그때 읽혀온 표정 뿐,”이라며 생의 깊이를 고스란히 담당했을 얼굴을 통해 심각한 자기반성에 이른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긴 세월이 필요했다. 되짚어보면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살아왔음을 의혹해보며 지난 세월을 반성한다. 바위에 새겨진 “이마에 주름도 파였으니 두상도 분명한/저것을 얼굴이라 믿을까,/누천년 깍아 세운 저기 등신석/눈 코 입은 흐려졌으나 윤곽이 남아/누구도 지켜보지 못한 증언이 되어”준 무욕의 얼굴, 진면을 바라보며 얼굴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다가서면 골짜기처럼 깊어지는/너를 떠올리며 온통 눈물범벅일 때도/얼굴 없는 슬픔이어야 비로소 얼굴은, 담는다”는 등신석은 세상 풍파에서도 오롯한 자존심을 지켜내려는 성찰의 모습이듯 시인의 얼굴이자 시 세계임이 분명해졌다.
3. 담담해진 사유의 도착지
김명인 시인의 시 세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시 인식 지점에서부터 사물에 대한 오랜 응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후회나 반성을 통한 시 의식의 번복이 아닌 성찰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것은 시가 높은 수준의 지향에서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본질적 시작점을 시대와 사회학적으로 접근해보았을 때 당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에서도 김명인 시인의 시가 담당한 부분은 적지 않다. 여하튼 문학과 당 사회가 더 깊숙이 연동해갈 때 시대변화를 이끌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특히 이번 시에서 도드라진 시 의식의 변화를 꼽아본다면, 사물에 대한 폭넓은 사유와 체험을 결집해내려는 오랜 응시로 얻어진 천착에 있다. 시에서 고도와 지평을 넓혀가는 다양한 층위의 시적 발화는 더 많은 진전을 예감토록 한다. 평범한 사물에 대한 관점에서 더 나아가 포착한 진면을 찾아낸 삶의 전언들은 감성으로 가슴에 기억될 것이다. 유해한 욕망의 해체를 통해 이룬 비움의 시적 세계는 변화를 이뤄 더 명징해질 것이다. 힘써 응당한 노정을 통과해서 당도할 곳이 귀소歸巢라고 본다면 틀림이 없다. 시간의 유속에 표류하지 않고 담담해져 무욕에 이르려는 시의 지경地境은 앞으로도 확장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