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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빛교회(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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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스크랩 알렌 선교사(Horace Newton Allen, 1858.04. 23.-1932. 12. 11), 조선의 최초 개신교 선교사. 의료 선교사.
은혜와평강 추천 0 조회 52 13.08.04 10: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04. 23.-1932. 12. 11)


알렌

 

조선 최초의 의료 선교사 알렌

 

 

1858. 04. 23.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도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Etthan Allen)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1881년, 23세에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대학 신학부를 졸업했다.

1883년, 25세에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해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갓 결혼 한 아내 패니와 함께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1884. 06. 09. 중국에서 첫 1년 동안 상해와 남경으로 헤매며 자리를 잡지

            못했고, 먼저 온 선교사들과 마찰, 아내의 건강 악화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날 뉴욕 북장로교 선교회에 전보를 보내서 의료선교사가 필요한

            조선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문의를 하였다. 7월 22일, "Allen

            Korea"라는 한국 입국 허락 전보를 받았다.

1884. 09. 20. 9월 14일에 남경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해서 9월 20일에

            제물포 항에 도착하였다. 이날이 조선의 최초 개신교 선교사가

          국한 역사적인 날이다. 처음 그의 공식적인 입국 신분은 미국공관의

           공관의 였고, 후에는 영국, 중국, 일본의 공관의를 담당했다.

1884. 10. 26. 이날 중국에서 출산한 아내와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개신교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선교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1884. 12. 04. 한국 최초의 체신기관인 우정국 낙성식 때 김 옥균을 비롯한

          개혁파가 보수파를 제거하려는 갑신정변이 발생하였다. 이때 보수계의

          중추 세력인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맞고 뒷덜미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동맥이 끊기고 목 뒤쪽과 몸에 입곱 군데의 자상을 입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도 살릴 방법이 없었다. 이때 알렌의 탁월한

         의술과 기도, 석달간의 정성어린 치료로 민영익이 회생하였다.

1885. 02. 15.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이 알렌에게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이날 한국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었다.

           광혜원은 개설된 지 16일 만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광혜원은 고종이 직접 건물도 주며 하사한 이름이며, 고종이

           알렌을 조선 조정의 참판에 서품하고 궁중 어의로 임명하였다.

          알렌은 매일 100명의 환자를 치료했으며 모든 계층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알렌의 의료 선교는 직접적인 복음 전파는 아이었지만 후에

         언더우드 선교사나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여 전도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 놓았다.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과 조선왕실과의 친밀한 관계는 조선왕조의

         탄압으로 수 많은 순교자를 낸 천주교와는 달리 선교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었다.

1887. 09. 술에 빠져있던 포크 공사가 조선을 떠남으로 9월 이후

          외교관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90년,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외교 활동을 했고 총영사, 대리

            공사 등을 지냈다.

1892년, <코리안 레포지토리>를 간행하였다.

1897년, 전차, 전등 등에 관한 설치권을 미국에 넘겨 주었다.

1899년, "제중원 의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1900년,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 조선 지부를 결성하여 회보를 발행하고 문화

             발전에 공로가 있었다.

1902년, <한국위보>를 간행했다.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 1등과 태극 대수장을 받았다.

1904. 09. 04. 제중원의 책임자가 된 에비슨은 본국에서 구한 기금으로

           세브란스 병원을 신축하고,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제중원의 명칭은 실질적으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05년, 카스라 태프트 밀약을 반대하다가 을사조약이 체결 된 뒤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47세).

1908. 06. 제중원 의학교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이것이 세브란스

            의학교의 시초였다.

1932. 12. 11. 미국 오하이오 주 도레도에서 병원을 개업하였고 74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 알렌은 미국 북장로교 파송 의료 선교사이며, 외교관이었으며, 한국어 이름은 안련(安連)이었다.

 

 

알렌 선교사를 통해서, 또 갑신정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조선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선교사들이 마음 것, 조선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1905.07.29. 미국과 일본은 카스라 태프트 밀약(서로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는 것을 합의)을 맺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정부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 정부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 알렌은 의사이며 선교사 였다. 그래서 그는 경건 생활에 힘썼고 추수감사절 예배를 집전하였다(1884. 11. 27).

 

 

⇒ 최초의 공식적인 주일 예배가 알렌의 집에서 드려졌는데 참석한 사람은 바로 전날 도착한 헤론 부부와 스크랜튼 부인의 언니, 그리고 알렌과 그의 부인 이었다(1885.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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