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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구한 자료입니다. 올해 4월에 열린 학술대회에서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님이 쓴 한국철학의 흐름에 대한 논문입니다. 동학을 우리 철학의 시발점으로 삼고 유영모, 함석헌, 안병무 등 민중적, 생명사상적 흐름을 한국철학의 명맥으로 보고 이를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요지의 글입니다. 긴 글이고 전문적인 학술논문입니다만, 혹시 공부하시는 분들 중에 관심있으신 분들을 위해 허락도 없이 올립니다. 복사금지,스크랩 금지해놨습니다.
20세기 한국철학의 좌표계
: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김상봉 (전남대)
물음의 검토
우리에게 주어진 물음은 원래 이것이었다.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대답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올바른 물음을 던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물음은 올바른 물음인가? 만약 이 물음이 20세기 이후 현대 한국 철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한국 철학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물음이라면 그 물음은 잘못된 물음이다. 그것은 마치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이 비몽사몽간에 언제 날이 새느냐고 묻는 것처럼 가소로운 물음이다. 반대로 저 물음이 20세기에 새로운 한국 철학이 어떤 식으로든 태동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묻는 물음이라면 그 물음은 사실 굳이 필요 없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한국 철학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다면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그것을 이어나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치가 이처럼 확연한데도 아직 이런 물음이 제기되는 까닭은 과연 20세기에 고유한 의미에서 한국 철학이라고 부를만한 철학이 있었는지,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이런 의구심 역시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만약 20세기에 단순히 전통 사상의 반복이나 서양 철학의 수입이 아닌 창조적이고도 주체적인 철학이 한국 땅에서 등장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새로운 철학일 것이니 당연히 모든 새로운 것들이 그렇듯 낯선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철학은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되고 폄하될 것이니, 이렇게 생각하면 20세기 새로운 한국 철학이 있어도 있다고 인정받지 못한 것은 도리어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정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데카르트와 로크가 등장한 뒤에도 오랫동안 유럽 대학의 철학 교육과 연구가 기본적으로 스콜라철학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것이 인정받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오늘날 철학의 연구나 교육이 주로 수행되는 장소인 대학이 기본적으로 창조적 활동을 위한 기관이라기보다는 이미 주어져 있는 철학 체계의 학습과 계승에 적합한 방식으로 조직화되어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교육이 그 형식에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의 철학 역시 교육의 테두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보수적이게 마련이다. 어린이들의 몸을 위해서도 검증된 음식만을 제공해야 하듯이, 학생들의 정신을 위해서도 공공연히 인정된 철학을 위주로 가르치는 것이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 이런 대학의 풍토에 젖어 철학함이 단순히 옛것의 전승과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창조라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 때는 정말로 대학이 철학의 무덤이 되어버릴 것이다.
철학이 전체에 대한 학문이요, 같은 의미에서 세계를 개방하는 정신의 활동이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이래 반복되어 온 일종의 철학적 상투어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언제나 세계-관(Welt-Anschauung)으로서 일어난다. 만약 20세기에 한국에도 온전한 의미의 철학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한국의 대학에서 어떤 교수들이 어떤 책들을 연구하고 가르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철학적 사유의 활동을 통해서 열리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통해 판단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세계관은 책에 대한 연구나 주석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난 역사에 대한 사후적 해석이며 또한 미래의 역사를 향한 선구적 부름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 한국에 철학이 있느냐 없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원한다면, 과연 우리 시대에 어떤 철학자가 있어 한국의 그 굴곡진 현대사와 대결하면서 그것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그로부터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런 작업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한국 철학은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많든 적든 그런 작업이 있어왔다면, 우리는 그런 철학적 작업을 통해 수립된 세계관이 얼마나 주체적이고 개성적이었는지 그 정도만큼 우리 시대의 한국 철학의 고유한 개성을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 시대 한국 철학이 만약 이미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개인적인 지적 성취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문맥 속에서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헤겔의 말처럼 철학이 정신에 의해 파악된 시대라면 그것은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공시적인 맥락과 통시적인 흐름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한국 철학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어갈 수도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역사 속에 굳건히 뿌리박고 자라나 우리가 이어갈 수 있는 개성적이고도 주체적인 세계관이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물음이다.
우리의 물음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다소 판단하기 어려우나, 그동안 20세기 한국 철학의 현황에 대한 전반적 서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들은 세세한 부분에서 나름의 미덕을 보여주지만, 20세기 한국 철학의 고유한 개성과 주체성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라기보다는 대학에서의 철학 연구를 중심으로 기술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대학의 철학연구란 남의 철학에 주석을 다는 것이 주된 일거리인 까닭에, 강단철학의 역사를 아무리 열심히 뒤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남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또 우리가 기꺼이 이어갈만한 주체적인 세계관을 발견할 수 없다. 고작해야 우리는 거기서 한국 대학의 철학과에서 서양철학이 어떻게 수용되고 연구되었는가, 그리고 동양철학이 어떻게 복구되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거나, 아니면 굴곡진 역사 속에서 유명한 철학 교수들이 어떻게 곡학아세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승만과 안호상, 박정희와 박종홍, 전두환과 이규호 등으로 이어지는, 이 유서 깊은 야합의 계보는 20세기 한국의 강단 철학의 지울 수 없는 수치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대학의 역사를 쓰거나 아니면 일종의 정신 병리학적 현상으로서 철학교수들의 일탈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20세기 한국 대학의 유명한 대학교수들의 저술이나 행적을 마치 대단한 철학적 업적이나 된다는 듯이 진지하게 살피는 것은 판단력의 결핍이나 취향의 변태성을 증명해 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의 물음으로 돌아가 대학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우리 시대의 한국 철학이 태어나 자라났다는 것인가? 한 마디로 답하자면 들판이 한국 철학이 탄생한 장소이다. 광야의 철학, 거리의 철학이 20세기 한국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한국 철학이 태어나고 자란 들판과 거리의 지형도를 세세하게 그릴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나중의 지형도를 위해 좌표계를 그릴 수 있을 뿐이다. 그 좌표계의 가운데 원점은 동학이다. 동학은 20세기 한국 철학의 시원이다. 이 시원으로부터 수직과 수평으로 좌표축이 뻗어 나온다. 수직의 좌표축은 역사적 사건으로는 한일합방과 6.25를 따라 이어지는 선이다. 이 선은 끝없는 절망으로 이어지는 선이다. 그 좌표축 위에서 철학했던 사람이 유영모와 박동환이었다. 수평으로 뻗은 좌표축은 3.1운동에서 4.19를 거쳐 5.18로 이어지는 선, 그리고 미래까지 연장하자면 한반도의 통일로 이어져야만 할 선이다. 이 선은 근・현대 한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민중의 저항과 봉기를 따라 이어지는 선이다. 그 좌표축 위에서 이루어진 철학은 만해 식으로 표현하자면 절망적 현실에서도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 붓는’ 자들의 철학이다. 그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정신이 함석헌이었다. 이런 간단한 소묘와 함께 이제 우리는 아래에서 이런 현대 한국 철학의 좌표계를 명확하게 규정하려 한다.
2. 낡은 세계의 붕괴로부터
생각하면 한국인들이 처음부터 비철학적인 민족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리어 원효에서부터 퇴계와 율곡 그리고 다산과 혜강 최한기에까지 이어지는 전통 철학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의외로 철학적인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하나의 증거로서 우리는 이를테면 퇴계와 고봉 사이의 서신논쟁으로 유명한 조선 성리학에서의 사단칠정논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이러저런 특수한 문맥을 추상시켜 일반적인 철학적 언어로 옮긴다면, 한 마디로 말해 악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철학사에서 악에 대한 물음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양 철학의 경우에도 중세 철학에서 기독교적 원죄의 개념이나 칸트의 근본악의 개념에서 보듯이 악의 문제는 철학적 인간이해의 근저에 언제나 내연하고 있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양 철학의 경우 악의 문제는 기독교적 원죄 개념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던 까닭에, 종교적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이성적 성찰에 의해 악의 뿌리를 추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성리학은 그런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순수한 이성적 성찰에 의해 집요하고도 철저하게 악의 근원을 물어 들어갔는데, 이것은 세계 철학사에서 달리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독보적인 역사이다.
하지만 그 역사가 아무리 조선 성리학의 철학적 사유의 철저성을 증명해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철학적 사유의 용(用)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일 뿐, 그 자체로서는 아직 체(體)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퇴계와 고봉의 후예들이 아무리 철학적 사유와 논변에서 치밀함과 철저성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자체로서 독일 철학이나 프랑스 철학 또는 영미철학처럼 개성적인 한국 철학의 존재를 담보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철학이란 그 體에서 보자면 어디까지나 세계관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유의 철저성이 개성적인 세계관의 개방에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신의 세계에서 성실한 노비나 하청업자의 노동일 뿐, 자유인의 주체적 세계형성에는 까마득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역사에서 참된 의미의 철학이 출현한 것은 동학이 처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감히 자기 스스로 세계를 기투한다고 자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한국인들에게는 스스로 세계를 설계하고 기투하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아예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대신 우리의 조상들은 오랫동안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자기 자신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 안주해 왔다. 이런 의미에서 동학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이 땅에 철학자들은 많이 있었으나 철학은 없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동학은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인들이 안주해 왔던 중국 중심의 세계가 붕괴하면서 등장한 철학이다. 그 상황에서 당시의 한국인들이 만약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 편입되어 어떤 식으로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더라면, 동학 같은 주체적 철학이 등장할 여지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일본의 서양 철학 수용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이 땅의 지식인들 역시 새롭게 등장한 지배적 세계관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그것을 내면화시키는 과정을 밟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니시다 기타로(西田機多郞)가 서양 철학의 테두리 내에 충실하게 머물러 불교적 전통으로부터 모호한 말을 보태거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가 기독교의 테두리를 넘지 않으면서 단지 교회라는 제도를 거부한 정도의 선에서 머물렀던 것처럼, 한국인들 역시 서양 철학이 펼쳐 보이는 세계관 속에서 자족하고 안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대다수 강단철학의 상황이기도 하다. 역사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어떻든 한국은 오늘날의 세계 속에서 적으나마 자기 자리를 얻었으므로 철학자들 역시 그 세계 속에서 하청업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그 시원으로 돌아가 우리 시대 한국 철학의 본질적 상황을 살펴보자면, 20세기 한국 철학의 역사는 단순한 서양 철학의 수용이나 전통 철학의 반복으로 분류될 수 없는 새로운 정신의 출현과 자기전개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철학자들은 많았으나 한 번도 개성적인 자기 철학, 주체적인 세계관을 정립해 보지 못한 겨레가 그렇게 갑자기 자기를 자각하고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개방하려는 정신의 노동을 시작한 까닭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서 추방된 자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수운 최제우는 1824년에 태어났다. 그가 18세 되던 해 중국은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홍콩의 할양 등을 비롯하여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체결해야만 하였다. 그 이후 중국은 더는 과거와 같은 천하의 종주국의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 이것은 비단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그 지배 체제 아래 순응하여 살아온 조선인들에게도 수 천 년 지속해온 세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뒤 중국은 1860년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서양 군대의 침략 아래 이번에는 북경이 점령되고 궁궐이 불타는 환란을 겪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 처하여 수운은 “나 역시 두렵게 여겼다”(吾亦悚然)고 고백하고 있거니와, 수운은 바로 그런 파국(catastrophe)의 두려움 속에서 절대자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동학은 한 세계가 종말을 고한 자리에서 태동한 철학이다. 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開闢 후 오만 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이후 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했다고 들었노라 고백하고 있거니와, 기존의 세계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자각이야말로 20세기 한국 철학의 시원인 것이다.
물론 이 세계는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정신의 세계, 즉 철학과 종교의 세계, 한 마디로 말해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 무렵 기존의 세계관의 붕괴를 자각한 것은 비단 조선의 최제우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일로서, 중화질서의 붕괴를 몸소 체험한 중국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의 중화 제국을 붕괴시킨 서양의 내부에서도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명제 속에 표현했듯이, 이른바 세기말이란 보편적 시대정신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수운의 종말론적 자각은 세계사적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상투적으로 입에 올리곤 하는 그 세기말이란 과연 어떤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아마도 그것은 현상적으로 보자면 다른 무엇보다 해월 최시형이 말했듯이 “人心을 引導하는 先天道德이 時에 順應치 못”하는 상황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 점에서라면 동아시아에서 공자의 유학이 설득력을 잃고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신앙이 급속한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그 생명력을 잃어간 것은 유사한 세기말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니체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 틀림없을 최시형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은 이 시대가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세기말적 곤경에 처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新舊相替之時 舊政 旣退 新政 未怖 理氣不和之際 天下混亂矣 當此時 倫理道德 自壞 人皆至於禽獸之群 豈非亂乎 (새 것과 낡은 것이 서로 갈아드는 때에 낡은 정치는 이미 물러가고 새 정치는 아직 펴지 못하여 이치와 기운이 고르지 못할 즈음에 천하가 혼란하리라. 이 때를 당하여 윤리 도덕이 자연히 무너지고 사람은 다 금수의 무리에 가까우리니, 어찌 난리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해월이 낡은 정치와 새로운 정치라는 말을 통해 사람의 정치나 나라의 일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 뒤 문맥으로 보아 분명하다. 권력의 교체가 도덕의 파탄까지 불러올 필요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하늘의 다스림의 교체 곧 낡은 세계의 붕괴와 새로운 세계의 도래 사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시대를 바로 그런 시대, 즉 낡은 세계는 이미 끝이 나버렸으나 아직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은 불안의 시간으로 규정했다. 이런 불안 역시 하이데거에게서 보듯, 서양 철학에서도 그리 낯선 것은 아니며, 그런 점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징후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동학의 시대정신을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아직 우리는 그것의 급진성을 다 파악하지 못한다. 보다 근원적으로 보자면 동학의 역사인식 속에서 낡은 세계의 붕괴는 세계를 규정하는 이러 저러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붕괴만이 아니라 세계로서 개방하고 지탱하는 하나됨(unitas) 그 자체의 붕괴로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각자에게 자명하게 존립하고 있었던 하나의 통일되고 연속적인 세계, 하나의 천하가 더 이상 존립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낡은 세계의 붕괴가 의미하는 보다 심각한 문제 상황인 것이다. 해월은 세계에 만연한 전쟁을 바로 그러한 통일된 세계의 상실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파악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일어나는 대립과 투쟁이 아니라 더 이상 하나의 세계가 존립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충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의식은 동학에서 끝나지 않고 함석헌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20세기 한국 철학의 기본적인 세계관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과거의 세계관이 거의 해체되어버리고 새것은 아직 얼거리도 잡지 못한 때다. 보편적 세계사상의 결핍, 이것이 현대가 당하는 비참의 원인이다.
이 말은 동학의 세계사적 위기의식의 반복이 아닌가. 그러므로 함석헌이 주관적으로는 동학에 대해 특별한 친화성을 느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는 동학의 역사의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함석헌과 동학의 우연한 일치가 아니라 20세기 한국 철학의 공유된 현실인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박동환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하나와 같음이라는 테두리에 두들겨 넣을 수 있는가. 인류는 하나의 생존권에 매여 있는 운명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기의 다름이 하나로 모여 흐르는 존재의 강과 바다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찾아 아직도 세계의 철학자와 정치가와 종교가는 헤매지 않는가.
박동환 역시 동학에 대해서도 함석헌에 대해서도 애틋하게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에게서도 우리는 동학에서처럼 옛 하늘과 땅은 해체되어 버리고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은 열리지 않은 시간을 견디는 철학자의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수운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계를 박동환은 여기서 “각기의 다름이 하나로 모여 흐르는 존재의 강과 바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는 판단에서도 박동환은 동학 및 함석헌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박동환이 자기뿐만 아니라 세계의 철학자 등이 그 바다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몸에 밴 신중함과 지나친 겸손의 발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후설(E. Husserl) 같은 철학자가 아무리 유럽문명의 위기를 말하거나, 하버마스(J. Habermas) 같은 철학자가 타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고민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아무리 진지하게 종교 간의 대화를 모색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문제의식이 동학 이래 한국의 철학자들이 직면한 세계의 분열상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에 필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 정신이 아무리 낯선 타자 앞에서 문화적 상대성을 인정하고, 하나의 동일한 세계의 부재를 자각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기의 고유하고 친숙한 세계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경우에는 단순히 나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와 적대적으로 충돌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 자신의 세계가 타자적 세계에 의해 붕괴되어버렸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분열은 훨씬 더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옛날에는 불교나 유교의 영향 아래서 살았다. 석가와 공자가 말하는 진리는 얼마나 보편적인 것이었던가. 지금은 서양의 과학과 그리스도교의 영향 아래서 산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진리가 나의 평생 연구의 과제가 될 수 있는가. 그들의 파문이 역사의 결코 멈추지 않는 흐름을 지나 사라져갈 때 그들이 전하는 진리 가운데서 무엇이 나에게 남을 것인가. 지난 수백 년의 파란만장한 조선 사람의 체험에 비추어볼 때 무엇이 아직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진리인가.
여기서 박동환이 말하고 있듯이 한국인의 경우에는 옛날에 통용되던 보편과 지금의 보편이 같지 않다. 이 점에서 똑같은 동아시아 나라들 가운데서도 한국은 특별한 데가 있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베트남의 철학자들도 그들이 현대에 들어 전과 달리 서양 과학의 영향 아래 산다는 것을 인정하겠지만, 결코 박동환이 말하듯이 그리스도교의 영향 아래 산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단절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근본적인 세계관의 전환을 경험했다. 그런 만큼 20세기 한국 철학자들의 정신 속에서 그런 단절과 파국의 기억이 반복해서 호출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단절과 파국은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 곧 정신의 흉터로서 남았던 것이다.
3. 주체성의 자각으로ㅡ철학의 지역성과 상호문화성
동학의 창시자들에서부터 박동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전승되어 온 이 정신적 흉터야말로 그 이후 현대 한국 철학의 근원적 체험, 아니 단순한 체험을 넘어 고통이다. 이 체험의 본질은 자기의 정신세계를 가차 없이 해체하는 절대적인 타자성과 그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으로 요약될 수 있다. 타자는 단순히 나와 다르다는 의미에서 중립적인 타자가 아니라, 내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침탈하고 파괴하는 적대적 타자이다. 그 타자 앞에서 무기력한 나는 수동성에 빠진다. 그런데 대단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그 수동성 속에서 나는 또한 주체가 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받는다. 그 까닭은 내가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망각하고 안주하고 있던 세계가 해체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국제관계에서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이 중국의 번국(藩國)이 아니라 독립적인 주권국가로 인정받은 것이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강요의 결과이기도 했던 것처럼, 이 시대 조선인들은 철학적 세계관의 지평에서도 어제까지 친숙하고 자명했던 세계의 붕괴를 통해 어쩔 수도 없이 주체성을 자각하게 되었던 바, 동학은 바로 그런 정신적 주체성의 자각으로 인해 현대 한국 철학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吾亦生於東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孔子 生於魯風於鄒 鄒魯之風 傳遺於斯世 吾道 受於斯布於斯 豈可謂以西名之者乎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나 학인 즉 동학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 공자는 노나라에 나시어 추나라에서 도를 폈기 때문에 추로의 풍화가 이 세상에 전해 온 것이어늘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가히 서라고 이름하겠는가.)
여기서 수운은 자기가 펼치는 도를 서학과도 구분할 뿐만 아니라 공자의 도와도 구별한다. 비슷하게 해월은 “우리 도는 「유」와도 비슷하고 「불」과도 비슷하고 「선」과도 비슷하나, 실인즉 「유」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선」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오늘날까지도 습관적으로 묶이는 동양이라는 이름을 이미 동학의 창시자는 거부했던 것이다. 우리가 동아시아 또는 동양이라 부르는 세계, 다시 말해 중국 중심의 세계는 더 이상 한국인들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수운과 해월은 깨달았던 셈이다. 이를 통해 한국의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중국 철학으로부터의 젖떼기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도를 이 땅에서 받았다고 말한다 해서, 수운이 도 그 자체가 여럿이 있다 생각한 것은 아니다. 道는 天道이다. 그것은 하늘의 일이며, 그런 한에서 같다. 그는 서학과 동학을 구별할 때, 일관되게 “도는 같지만 리가 다르다”(道則同也 理則非也)고 주장한다. 이렇게 같은 하늘의 도가 달라지는 것은 땅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운은 한편에서는 보편학으로서의 철학의 이념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지역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과 함께 시작된 한국 철학의 주체성이란 보편학으로서의 철학의 지역성에 대한 자각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철학의 지역성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동학뿐만 아니라 그 이후 한국 철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동학 이후 유영모와 함석헌을 거쳐 박동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철학자들은 예외 없이 자기 자신이 한국인이며 한국인의 관점에서 철학한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남들을 향해서도 그 사실을 공공연히 전제하고 철학한다. 이를테면 유영모에겐 한글의 신비를 파헤치는 것이 존재의 신비를 묻는 일이었고, 함석헌에게는 한국 역사의 뜻을 묻는 것이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뜻을 묻는 일이기도 했다. 여기서 보편적 진리가 어디까지나 지역적으로 한정된 자기의 땅과 역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한국 철학사의 새로운 국면일 뿐만 아니라 세계 철학사에서 본다 하더라도 의미심장한 물음을 제기하는 사건이었다. 플라톤이 존재와 비존재의 뜻을 물을 때, 그것은 좁게는 그리스어 넓게는 인도 게르만어의 언어의 지평 속에서 물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대화편 소피스테스에서 없음을 있음의 절대적 부정이 아니라 아님으로 환원한 것은 있다(existieren)와 이다(bestimmt sein)가 하나의 동일한 동사로 표현되는 그리스어 그리고 유럽언어의 지평에서가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한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말과 글, 곧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거리를 생각할 줄은 알았으나, 말이든 글이든 그리스어의 외부에 전혀 다른 문법체계를 가진 언어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헤겔이 세계 역사를 철학적으로 서술할 때, 그는 자기가 서술하는 세계사라는 것이 19세기 유럽인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세계사란 것을 진지하게 자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이란 나라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그 역사철학을 당시의 조선인들이 읽었더라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그 답이 무엇이든지 간에,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은 한편에서는 자기의 한계를 자각하는 정신의 겸손의 표현이었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철학이나 종교를 빙자하여 보편을 쉽게 전유하고 참칭하는 오랜 관습에 대한 완곡한 항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종교적 사관을 말함에 있어서 모든 종교를 한 솥에 넣고 끓여서 거기서 승화된 것을 말해보려는,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런 일을 하려 하지는 않는다. ... 내가 종교적인 것을 말하는 것도 다만 내 믿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을 말하면 그것이 사랑의 원리인 줄을 믿듯이, 나는 내 믿는 바를 말하면 그것이 보편적・종교적인 것일 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비교적 관계가 깊은 기독교의 성경에 나타나 있는 사관을 간단히 말해보기로 한다. ... 그러나 좀더 엄정히 말하면 내가 기독교를 말할 자격도 없고 성경의 사관을 말할 자격도 없다. 나는 다만 내가 본 성경의 사관을 말할 뿐이다. ... 나는 나의 믿음이 있을 뿐이고, 내가 본 성경의 진리를 알 뿐이다.
여기서 함석헌은 역사를 종교적 관점에서 고찰하겠다면서도 어떤 보편적인 종교적 사관을 참칭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자기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기독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보겠다 한다. 그런데 그것조차 따지고 보면 객관적인 기독교 사관은 아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자기 자신이 본 성경의 사관을 자기 자신의 믿음에 따라 말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의 한계를 아는 정신의 겸손이다. 물론 이 겸손이 보편적인 세계관을 포기하고 다만 주관적인 의식 세계에 스스로 갇히겠다는 의지의 표현은 아니다. 도리어 함석헌은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보편적이려면 추상적이 되어야 하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그와는 반대다. 가장 구체적이 아니고는 가장 보편적일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구체적이고도 개성적인 자아에 정직하고 충실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하나의 보편자가 사물적인 방식으로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개성적인 인격이다.” 그러나 개성은 다양성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편자라면, 그 보편자는 언제나 개성적 다양성 속에서만 자기를 드러낼 수 있으니, 누구도 그 보편자를 홀로 전유한다고 참칭하고 자기가 제시하는 그 보편자 아래로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교도(敎徒) 있는 것은 종교 아니다. 참 종교는 한 사람의 신자를 가질 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동학 이후 한국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말하든 보편자를 말하든 아니면 철학을 말하든 종교를 말하든, 그것을 기존의 철학이나 종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파악했다. 간단히 요약해 말하자면, 이들에게 세계도 철학도 하나의 종교도 미리 주어진 전제가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과제로서의 보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새 하늘 새 땅”(新乎天 新乎地)인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어디까지나 개별적 주체가 처한 개성적 자리에서 열리는 것이지, 획일적 통일성으로 군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상호문화철학적이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철학은 ‘나’라는 섬에 기초를 두고 우리를 향해 다리를 놓아가는 정신의 노동인 것이다.”
4. 철학과 종교, 정치의 합일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동학 이후 한국 철학의 특별한 개성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철학의 종교성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이다. 동학은 철학인 동시에 종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운은 단순히 이성적 성찰이 아니라 上帝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선포하는 새로운 도의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를 받은 다음 수운은 “나 역시 거의 일년 닦고 헤아려 본즉, 또한 자연한 이치가 없지 아니하였다”(吾亦幾至一歲 修以度之則 亦 不無自然之理)고 술회하고 있는데, 이는 이성적 사유가 계시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서 뒤따랐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적어도 수운의 경우에 이 순서는 뒤바뀔 수 없다. 해월은 이 순서를 바꾸어 이성적 사유에 입각하여 신앙을 근거지으려 한다. 이는 그가 수운과 동일한 계시를 받은 적이 없으므로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운의 경우와 달리 해월의 가르침이 현저히 이성적이고 철학적이기는 하지만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우리 도는 다만 誠・敬・信 세 글자에 있느니라”(吾道 只在 誠・敬・信 三字)고 말한 뒤에 “사람의 수행은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정성드리는 것”(人之修行 先信後誠)이라고 말함으로써 동학이 단순한 도덕이나 철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이처럼 철학과 종교를 근대 서양철학의 경우처럼 날카롭게 구별하지 않고 아예 하나의 道 및 진리의 이념 속에서 통합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비단 동학의 경우뿐만 아니라 다석과 함석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다석이나 함석헌은 물론이거니와 동학 역시 강단철학의 테두리 내에서는 순수한 철학적 수용과 계승에 어려움을 겪어왔던 것이다. 생각하면, 철학과 종교, 이성과 믿음을 구별하고, 더 나아가 철학에서 종교적 신념을 배제하는 것은 서양 근대 철학의 기본적인 전제였다. 그리고 이런 분리는 마치 자명한 진리인 것처럼 대다수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동학의 길을 따랐던 20세기 한국 철학자들은 아직도 계몽되지 못한 중세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철학과 종교를 분리하는 것은 자체로서는 서양 근대의 산물이다. 그것은 철학의 본질로부터 피할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유대-서양적인 종교의 특성 때문에 비롯된 일이라 하는 것이 보다 공정한 판단일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경우에도 기독교 성립 이전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형이상학을 동시에 신학으로 규정했던 것이나 오늘날에 와서도 불교나 유교를 서양식으로 철학이나 종교 둘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동학은 철학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는 전통적 철학의 길에 충실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철학이 추구해온 총체성의 관점을 견지한다면, 철학적 세계관 속에서 믿음이나 영성은 배제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증명과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제한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자명한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동학과 그 계승자들이 철학과 종교의 서구적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나름의 총체적 세계관을 추구한 것이 잘못된 일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철학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총체적 세계관의 추구는 동학 이후 다석이나 함석헌에게로 이어져 하나의 지속적 방법이 되었는데, 이런 경향은 그들이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철학적 사유 속에서 통합시킴으로써 더욱더 확고해졌다. 동서 철학의 방법론적 결합은 단순히 이론적 인식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철학의 실천적 차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바, 다른 무엇보다 그들은 서양 철학의 개념과 분석적 사유방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만큼 동양철학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수양론을 철학의 실천 속에 통합시켰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수양은 단순히 개인적인 수행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에 참여하여 그것을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으로 나타났으니,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동학이 철학과 종교와 정치를 하나로 통합하는 새로운 총체성의 지평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총체성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는 천주이며, 주관적으로는 천주에 대한 믿음이다. 붕괴되고 분열된 세계에서 새로운 총체성을 기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절대자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계몽된 현대인들에게 몇 마디 말로 이런 이치를 납득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안티-크리스트(Anti-Christ)를 자처한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이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알몸이든 옷을 입었든 간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그런 꼴을 보는 것이 나의 오장육부에는 쓰라린 고통이 된다. ... 너희들이 “우리들은 전적으로 현실주의자들이며, 신앙도 미신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니 말이다. ... 그렇다. 너희들이 어찌 신앙을 가질 수 있으랴. ... 너희 현실주의자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신앙을 가질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 부른다. ... 너희들은 생식의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 때문에 너희들에게는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해야 했던 자는 언제나 자신의 현몽과 별의 점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신앙을 신앙했던 것이다! 너희들은 무덤을 파 시신을 묻는 자들이 그 곁에서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 반쯤 열려 있는 문과도 같다. “모든 것은 멸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너희들의 현실이다.
낡은 하늘과 땅의 세계는 끝났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멸망해야 한다,” 아니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현실 인식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하지만 창조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활동이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아직 오지 않은 현실, 올지 오지 않을지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 미래를 꿈꾸고 또 스스로 믿어야 한다. 믿음은 창조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믿음을 포기해버렸다면, 무엇에 기대어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니체는 이 순서를 역전시켜 현대인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창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할 의지도 능력도 없기 때문에 믿음을 구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창조해야만 했던 자들은 믿을 만한 신앙의 대상이 있어서 믿은 것이 아니고 신앙을 신앙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창조해야만 했던 자들이겠는가?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자들, 곧 현실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 그리하여 현실의 무게를 가장 무겁고 고통스럽게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조선의 수운과 그 이웃들이야말로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사정을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모든 신앙의 신앙을 그 내용적 측면에서 무조건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군국주의 시대 일본인들이 천황을 신적인 존재로 숭배했던 것이나, 동학과 비슷한 시대에 중국의 홍수전(洪秀全)이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창시하고 자신을 예수의 동생이라고 내세운 것 등은 모두 그 나름대로 신앙을 신앙하려는 의지의 발로였겠지만, 지금에 와서 볼 때, 결코 올바른 믿음의 길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학은 어떠한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미신이 아니라 새로운 믿음의 길이었던가?
동학은 상제 또는 천주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世人謂我上帝 汝不知上帝耶), 이것이 수운이 처음 들은 말이었다. 이처럼 말씀하는 신, 이른바 인격신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동학은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걷는다. 하지만 수운은 자기가 만난 상제를 순수한 인격성 속에서 파악할 뿐, 그 이상의 어떠한 규정도 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동학의 상제에 대한 믿음은 다른 종교들처럼 다른 인격신을 배제하면서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종래의 인격신 숭배의 종교가 갇혀 있었던 결정적인 한계를 넘어간다. 그러니까 동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용운의 님도 상제일 수 있고 함석헌의 하나님도 상제일 수 있다. 이름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존재의 진리를 인격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진리를 인격성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함석헌이 말했듯이 존재가 뜻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다 같이 가는 데가 어디일까? 의인, 죄인, 문명인, 야만인을 다 같이 구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유신론자, 무신론자가 다 같이 믿으며 살고 있는 종교는 무엇일까?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 하나님은 못 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느냐. 긍정해도 뜻은 살아 있고 부정해도 뜻은 살아 있다. 져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이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 해도 좋고 역사라 해도 좋고 그저 하나라 해도 좋다.
존재의 인격성을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뜻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뜻이 동시에 뜻하는 자를 통해서만 표현되고 실현되는 것이라면, 뜻의 주체가 바로 수운의 상제이고 함석헌의 하나님이고 만해의 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관해 동학 이후 한국 철학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공통점은 상제 또는 하나님을 절대적 홀로주체성 속에서 자족하고 자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인간에 마주선 서로주체성 속에서 파악한다는 점이다. 서양 철학에서 인격(persona)이라는 말이 기독교 신의 삼위일체를 해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를 통해 서양의 기독교는 신을 절대적 허무의 심연 위에 고립된 섬이 아니라 다른 인격과 마주 한 인격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신의 내적 자기관계로서, 신의 인격성은 자기 앞에 마주 선 인격일 뿐, 타자적 인격 곧 인간 앞에 마주 선 인격은 아니다. 이 점에서 서양의 신은 삼위일체론에도 불구하고 자기동일성 속에 갇힌 홀로주체성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이 바로 하늘이요 하늘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 밖에 사람이 없다”(人是天 天是人 人外無天 天外無人). 그리하여 신은 오직 인간에게 마주 섬으로써 참된 의미에서 인격적 존재가 된다. 인간이 없다면 신은 영원한 허무 속에서 침묵하는 사물적 절대자일 수는 있어도 결코 인격적 존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이 아니고서는(人外) 인격적 하늘이란 없다.(無天) 이처럼 내가 하나님을 통해 있듯이 하나님 또한 나를 통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또한 “한울이 곧 나며, 내가 곧 한울이라”(天則我 我則天)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는 범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 나와 신이 서로주체성 속에서 마주 섬으로써만 온전한 인격적 주체로서 자기를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학에 의해 정립된 신과 인간 사이의 서로주체성은 “나는 곧 당신이어요”라는 만해의 시구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이후 한국 사상의 전개 속에서 하나의 공유된 유산으로 남았는데, 이 점에 관해 특히 유영모와 함석헌의 종교철학은 동학의 가르침을 자기의 언어로 이어간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들이 처음에는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서서히 거기서 벗어나 기독교적 신관과 교리 속에 내재한 일체의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요소를 거부하고 (특히 예수에 의한 대속의 교리 같은), 신을 순수한 인격성 속에서 정화시킨 뒤에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절대적 인격을 다름 아닌 ᄒᆞᆫ 我, ᄒᆞᆫ 나로서 파악한 것은 동학의 “天則我 我則天”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유영모는 “‘하-ㄴ아’가 ‘나’”이니 “나라는 것은 절대”가 된다 했고, 함석헌은 “참은 하나다. 한 나다. 아(我)다. 한 아다. 나다.”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참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바, 하나님은 곧 한나-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와 하나님은 근원적 하나의 양극단이기도 하다.
정말 있는 것은, 은, 한 뿐이다. 그것이 혹은 얼이다. 그 한 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
함석헌이 여기서 나로 알려져 있다고 말하는 그 한 ᄋᆞᆯ을 다른 곳에서는 씨ᄋᆞᆯ로 부른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씨ᄋᆞᆯ은 씨앗 곧 種子와 알 그리고 얼 등과 같은 뜻이 겹쳐진 말로서 내가 우주의 생명을 품은 자임을 표시하기 위해 쓴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씨ᄋᆞᆯ의 개념을 한국 철학의 거시적 문맥 속에서 고찰하자면 다음과 같은 해월의 통찰에까지 가 닿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울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이 마치 種子의 생명이 種子 속에 있음과 같으니, 種子를 땅에 심어 그 생명을 養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은 道에 의하여 한울을 養하게 되는 것이라.
함석헌은 동학에 대해 주관적으로는 아무런 친화성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런 주관적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함석헌과 동학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런 객관적 친화성이야말로 동학 이후 현대 한국 철학이 어떤 연속성 속에서 생성되어 왔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처럼 동학은 그 연속적 생성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동학은 20세기 한국 철학의 토대요 근원이다.
5. 파국과 부정의 좌표축
20세기 한국 철학은 동학이라는 원점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지는 좌표축 위에서 전개되어 왔다. 앞서 살펴본 대로 동학은 한편에서는 종말과 파국에 대한 자각과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세계의 개벽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생성된 철학이다. 그런데 우리는 파국의 인식과 새로운 개벽에 대한 열정이 그대로 그 이후 한국 철학의 향방을 결정한 두 좌표축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관념적 사유의 지평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 역사가 이 두 좌표축을 중심으로 움직임에 따라 더욱 더 현실적합적인 기준이 되었는데, 동학 속에 이 두 가지 사유의 계기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은 또한 그만큼 동학의 역사인식이 적실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한편에서 동학이 선구적으로 파악했던 낡은 세계의 파국적 종말은 20세기 들어 한일합방과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 그리고 분단과 4.3학살 6.25 등으로 계속 반복되었다. 이 사건들을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의미부여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사건들이 모두 낡은 생활세계의 파국적 전복과 종말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다른 한편 동학 속에 내재한 새로운 세계의 개벽을 향한 선구적 기투는 3.1운동을 선두로 4.19와 5.18 등으로 이어지는 항쟁의 전통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존 질서의 파국적 전복의 흐름을 세로축이라 한다면 새로운 세상의 주체적 형성의 의지를 가로축으로 삼아 현대 한국 역사를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현실 역사로 끝나지 않고 역사에 대한 응답으로서 철학의 운명을 같이 결정했으니, 20세기 한국 철학 역시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이 두 좌표축 사이에서 생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함석헌의 스승이었고 동학 이후 한국어 또는 근대적 모국어로 철학하기 시작한 첫 세대에 속했던 유영모는 한일합방의 철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은 20세기 들어 한국인들이 집단적으로 경험했던 미증유의 파국이었다. 그것은 좋든 나쁘든 나름의 주권을 지켜왔던 나라가 통째로 식민지로 전락한 사건으로서 이와 함께 모든 조선인은 집단적으로 노예상태에 떨어졌던 것이다. 이 사건은 유영모가 20세 되던 해의 일이었는데, 그 이후 그의 철학은 이 사건이 남긴 정신적 흉터가 아니라면, 달리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의 철학은 전대미문의 파국을 경험한 정신의 절망에서 시작한다. “진선미가 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 땅 위에는 없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에 자기를 태어나게 만든 부모의 “그 짓”을 저주할 만큼 현실에 절망했다. 그가 “이 세상의 것은 다 내버려야 합니다”라고 가르친 것은 세상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고 본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이 불완전한 세상을 등지고 절대자에 몰입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절대자에 대한 성찰로서, 그에게 철학은 동시에 종교이다. 그런데 현실의 종교나 철학도 이 세상에 속한 것인 한, 불완전한 것으로서, 그에게는 모든 종교나 철학이 미정고(未定稿)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철학이나 종교가 현실과 유리된 공리공담이 아니라면 철학이나 종교 역시 비극적 현실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석은 동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를 편견 없이 수용하면서도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구원은 오직 절대 무한의 아들(絶大子)인 자기 속에 있다. 이로부터 자아에 대한 자각과 철학적 사유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 확고히 뿌리내리게 된다. 그의 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 ‘나’로부터 ‘하나’ 또는 ‘ᄒᆞᆫ 나’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가 찾는 “하나는 가장 큰 나”였으니, “나가 없으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낡은 세계의 붕괴를 경험하면서 이 세계의 현실 그 자체에 절망하고 기존의 철학과 종교를 넘어 자기 스스로 진리에로의 길을 열어나가는 과정은 동학이 생성된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동학이 그 이후 한국 철학의 원형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석의 경우에는 동학 속에 내재한 파국과 개벽의 두 계기 가운데서 파국의 계기가 훨씬 더 강조되는데, 이것은 그의 철학의 독특한 개성을 이룰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도 또 하나의 척도로서 한국 철학의 한 좌표축을 형성하게 된다.
이 개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기 부정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절대의 진리를 추구하고 자기를 그 절대의 아들로서 파악했지만, 서양의 근대 철학이 그랬듯이 나를 확장함으로써 절대자에 이르는 길을 걷지 않고 도리어 철저히 나를 부정함으로써 진리에 이르는 길을 걸었다. 단순히 욕망뿐만 아니라 인식조차 부정함으로써 하나에 이르려 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영모는 하나님 역시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존재의 충만함이 아니라 허무 속에서만 온전히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나도 하나님도 모두 자기를 무한히 확장된 크기가 아니라 비유하자면 하나의 점과도 같은 극소의 지경에서 비로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철학의 방법에도 나타나는데, 유영모는 자기 이전의 동학이나 자기 이후의 함석헌처럼 철학적 사유의 주체성을 추구하였으나, 그것을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정치나 역사가 아니라 언어의 길을 택했다. 다시 말해 함석헌이 한국 역사의 뜻을 묻고 더 나아가 현실 역사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실천적 참여의 삶을 살았던 데 비해 유영모는 현실을 등지고 은둔과 수양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 속에서 고유하게 계시되는 존재의 진리를 더듬었던 것이다. 씨알이란 말부터가 그가 처음으로 노자의 도덕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백성 民을 순 우리말로 옮긴 낱말이거니와, 그는 수많은 한자어들을 순우리말로 옮겼으며, 이를 통해 오직 한국의 고유한 말과 글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의 진리를 보이려 하였다.
하지만 만약 유영모의 철학이 그 한 사람으로 끝났더라면 그의 한글철학도 일종의 말장난으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유영모의 의미는 그의 철학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 있었고, 그런 까닭에 후세에 하나의 표준 또는 좌표축이 되었다는 데 있다. 동학 속에 내재한 파국과 개벽의 두 대립적 계기들 가운데서 유영모와 마찬가지로 개벽이 아니라 파국에 천착한 철학자가 박동환이다. 그의 철학 역시 사사로운 기원을 추적해 가자면, 유영모와 마찬가지로 주체가 스스로 장악할 수 없는 처절한 파국의 체험에 뿌리박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내 또래의 나이를 산 이들이 모두 그렇듯이 이미 어린 시절에 일본 국기에 절하며 천황의 만수무강을 빌었고, 해방과 함께 태극기가 게양되니 「동해물과 ...」를 불렀는가 하면, 그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인민공화국기를 흔들며 미제국주의를 규탄했고, 다시 나타난 태극기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는 굴욕적인 변절을 거듭했다. 이 지조 없이 시대의 격류를 바라보며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이러한 시대에도 역사를 보는 하나의 관(觀)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변절 끝에 가질 수 있는 역사의 이념이란 무엇인가?
... 한 시대를 산 모든 사람들의 처절한 인생체험이 다만 이런 저런 이야기로 흩어져 버리지 않고 민족의 뿌리깊은 체질과 정신 가운데서 하나의 철학으로 남으려면 그러한 체험이 존재론적으로 형상화되고 간결한 논리로 맺어져야 한다.
굳이 구분하자면 박동환은 6.25의 철학자이다. 위의 인용문은 1945년부터 5년 동안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들이 조숙한 소년에게 어떤 정신적 흉터를 남겼을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의 철학은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절대적 타자성 앞에서의 자아와 주체의 무기력에 대한 집요한 재확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주체의 진리란 “굴욕적 변절”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일찍, 너무도 처절하게 체험한 그에게 모든 종류의 주관주의는 아직 현실의 위력을 경험하지 못한 철없는 정신의 징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외국에서 전래된 이른바 해체론이나 탈근대사조와 무관하게 자기 자신의 역사적 경험에 입각하여 모든 주체중심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를 과격하고도 급진적인 방식으로 부정했다.
기억할 수 없는 생명의 태동기에 나무에게도 선택을 구사하고자 하는 자유의 의식이 있었다고 하자. 그 자유의 의식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수없이 되풀이한 좌절의 경험 때문에 아마도 그 자유의 의식은 드디어 자연의 질서에 동의하고 말았을 게다. 사람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자유의 의식에 대해서도 결국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의 질서가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박동환은 서양 형이상학의 본질에 속하는 자유의 이념을 좌절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주관적 환상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 그것은 나무의 자유의지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특별하다. 그것은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들이 생각했듯이 세상만사가 미리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수없이 되풀이한 좌절의 경험” 때문이다. 아마도 6.25의 악몽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후 세대는 저 말의 무게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박완서가 회고했듯이 그것은 인간이 “벌레가 됐던 시간”,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미증유의 재난을 경험한 자에게 세계는 이해하거나 주체가 자기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고분고분한 대상이 아니다. 자유가 망상이듯이 하나와 같음의 원리에 입각한 인식도 자루 속에 세상을 넣으려는 망상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루 속에 세상을 넣을 수 있는가. 사람들은 자루를 버리지 못한다. 자루에는 압력이 쌓이고 그러므로 파국에 이른다. 파국은 언제나 보다 큰 힘. 타자로부터의 보복이다.
그런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넘겨줌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자. 타자와의 얽힘에서 자아의 영토를 극소화하는 자. 극소의 생각으로 깨닫는 철학자. 극소의 힘으로 일하는 물리학자. 자아의 동일성을 버리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동환은 유영모와 만난다. 그가 말하는 극소화된 자아의 이념은 유영모가 말했던 가온찍기의 이념을 닮아 있다. 유영모에 따르면 “나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위치만 있고 존재는 없는 하나의 숨 쉬는 점일 뿐이며, 이러한 점이 됨으로써 참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박재순에 따르면 가온찍기는 이런 자기인식에 따라 “‘내’가 모든 욕망과 허영을 없애 버리고 하나의 점이 되는 것이다.” 무심하게 보는 사람에겐 유영모와 박동환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극소화된 자아에 대한 의지가 우발적인 유사성에 지나지 않겠지만, 우리가 현대 한국사를 관통하는 파국적 전복의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이런 유사성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므로 도리어 필연적인 정신의 연속성으로 파악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유영모적인 철학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사성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언어를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방법으로 취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을 방법론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극소주의(minimalism)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영모도 박동환도 일관되게 은둔적 삶을 살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유영모는 한 권의 책도 출판한 적이 없으며, 박동환 역시 대학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글이 줄었으며, 또한 글을 쓰더라도 애써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게으름 때문이라기보다는 가능한 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는데, 이는 그가 마지막에 출판한 책에서는 아예 자신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를 극소화시키더라도 그 가운데서 세계를 전체로서 파악하는 것이 또한 철학자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극소화된 자아가 어떤 길을 통해 세계 전체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유영모와 박동환에게 그 길이 바로 언어였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현실 역사에 자기를 던지지 않았다. 함석헌이 역사 속에서 존재의 진리를 발견하려 했다면 유영모와 박동환은 언어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세계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다석이 언어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거니와 박동환의 경우 안티호모에렉투스는 다른 무엇보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언어철학으로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준다. 그에게 세계는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는 문명과 세계관들의 모태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복수성이 중요하다. 다른 언어는 다른 세계이다. 그런데 서양의 철학자들이 언어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대개 유럽의 언어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암암리에 그것이 언어의 표준이라고 상정하고 언어철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박동환은 이런 관습을 애써 비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옛 중국어와 서양 언어들과 한국어를 비교하면서 이 세 언어체계가 얼마나 다른 사고방식과 다른 세계관을 낳을 수밖에 없었겠는지를 사유한다. 여기서 그것을 세세히 소개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그가 안티호모에렉투스에서 서양과 중국 그리고 한국의 삶의 양식을 형이상학의 방법, 모임살이의 형식 그리고 논리의 방법, 이 세 가지의 관점에서 비교분석하면서 그 차이의 뿌리를 언어에서 찾고 있다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언어를 철학적 탐구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영모의 길을 따르는 철학자들은 박동환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다. 먼저 정대현의 경우 영·미 분석철학적 배경으로부터 한국어를 철학적 탐구의 지평으로 삼는다. 이기상은 하이데거 연구의 최고의 권위자이지만, 하이데거 및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이 그들의 언어에 의해 얼마나 철저히 규정되고 있는지를 간파하고, 한국어 속에서 철학의 주요 개념들이 서양 언어들과는 다른 어떤 개성적인 의미를 감추고 있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쳐왔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형이상학의 지평에서 주체적인 한국 철학의 가능성을 열어왔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기상의 경우에는 다석 유영모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쓰고 거기서 자기 자신의 철학과 유영모의 철학이 어떤 연속성 속에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현대 한국 철학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철학을 유영모와 더불어 역사적 좌표계 속에 스스로 위치시켰다. 그러나 정대현과 이기상이 세계관으로서 철학을 전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이들 외에도 우리는 김영민을 수직의 좌표축 위에서 철학하는 사람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부터 그는 남을 흉내 내는 철학을 거부했는데, 지금에 와서 특히 언어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수성은 남들이 모방하기 어려운 개성적 경지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그는 아직 길 위에 있고, 그가 걷고 있는 길이 어디로, 어디까지 뻗어갈지 감히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김영민에 대해서는 이름을 거명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을 아끼려 한다.
6. 항쟁과 개벽의 좌표축
지금까지 우리는 동학 속에 내재한 파국과 종말의 역사의식이 어떻게 20세기 한국 철학의 한 좌표축으로 정립되고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았거니와, 이 좌표축은 단순히 관념적인 정신의 투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파국적 현실의 반영이다. 그런데 이 파국적 현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연재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타자적 주체에 의해서 초래되는 재난이다. 그런 한에서 20세기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된 파국은 인간을 굴종과 저항 사이의 선택의 기로에 세운다. 굴종하는 인간에겐 파국은 파국으로 남을 뿐이다. 오직 저항할 때, 파국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학이 한 편에서는 개벽의 종교와 철학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적 항쟁이었던 것 또한 일종의 필연이었다. 동학이 꿈꾸었던 개벽 역시 새로운 계절처럼 저절로 도래하는 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저항과 항쟁을 통해 열려야만 할 세계인 것이다. 이처럼 저항을 통해 주체적으로 개방되어야 할 새로운 세계의 뜻을 철학이 묻고 성찰할 때, 20세기 한국 철학에서 또 하나의 좌표축이 전개된다.
평생에 걸쳐 이 좌표축, 즉 저항과 개벽의 좌표축을 걸었던 철학자가 바로 함석헌이다. 1901년에 태어났던 그에게도 한일합방은 미증유의 파국이었다. 이것을 그는 훗날 “어려서 받은 충격 중에 가장 큰 것은 열 살 때 나라가 망했을 때 받은 것”이리라고 또렷이 회상한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공포심”과 비겁함 그리고 패배주의를 낳았다. 함석헌도 그 시절 “이제는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부득이 학문길로나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함석헌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한일합방을 통해 처음으로 자유를 의식하게 되었다 한다. 즉자적 자유를 상실한 뒤에 비로소 자유를 대자적으로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라는 망했다. 산도 그 산이요, 바다도 그 바다요, 하늘도 그 하늘, 사람도 다름없는 흰 옷 입은 그 사람이건만 이제부터 자유는 없단다.
자유가 무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자유 속에 자유가 무언지 모르고 살았던 나는 이제부터 자유가 무언지를 배워야 했다.
“자유가 무언가?” 생각하면 이 물음이야말로 함석헌 철학의 시원이다. 그리고 그 물음은 단지 함석헌 개인의 물음이 아니라 한일합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에게 주어진 가장 심각한 이론적-실천적 물음이요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철학은 헤겔식으로 말해 정신에 의해 파악된 20세기 한국 역사이다. 그러나 자유의 뜻에 대한 물음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역사적 행위와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 물음은 한낱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 우연한 물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건, 함석헌의 삶을 바꾸고 20세기 한국 역사의 운명, 아니 더 나아가 현대 한국 철학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바로 3.1운동이다. 3.1운동은 그 운동을 촉발시켰던 중심 인물인 萬海 한용운이 朝鮮獨立의 書에서 웅변했듯이 한국 민족이 강요된 노예상태에서 자유를 향해 자기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한국인들은 자유인들에게 합당한 용기와 지혜를 나라 안팎에 증명해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예상태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누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가? 자유는 무엇이며 그 조건은 또 무엇인가?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남은 것은 물음이었다.
실패는 섭섭하지만 실패처럼 값어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될 줄 알았다가 그대로 아니되는 것을 본 다음에야 한국의 씨ᄋᆞᆯ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함은 곧 ᄋᆞᆯ듦입니다.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이 허탈감에 빠지지 않고 자라기 시작한 것은 깊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이 다른 누구보다 함석헌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3.1운동 당시 평양고보 3학년생으로서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함석헌은, 끝내 그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자유의 정신을 온 몸으로 체험한 뒤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본 사람들이 일본식으로 교육하는 관립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2년 동안의 방황 끝에 정주의 오산학교에 편입한 함석헌은 거기서 평생의 스승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이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삶과 참을 그리고 “나를 문제 삼게 되었다” 한다. 그러니까 유영모와의 만남을 통해 함석헌은 철학적 사유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승과는 다른 길을 통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는 한일합방의 절망뿐만 아니라 3.1운동의 빛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종말과 파국이 전부였더라면, 함석헌 역시 박동환처럼 인간의 모든 건축술적 시도를 비웃는 절대적 타자성에 몰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종말과 파국의 절망적 상황뿐만 아니라 그에 저항하여 맨주먹으로 봉기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스스로 체험한 사람이었다. 압도적 타자 앞에서의 공포만이 아니라 그 공포를 뚫고 치솟아 오르는 정신의 숭고를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중은 그리고 함석헌 자신은 때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무엇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봉기하는 것일까? 함석헌에겐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대적 타자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런 압도적인 타자성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경이로운 존재였다. 그리하여 그의 철학은 유영모의 절대자나 박동환의 절대 타자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인간과 역사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 역사의 뜻을 묻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인식하고 진리를 찾아나가는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다는 것은 동학의 하늘(天)이나 유영모의 절대자 그리고 박동환의 절대타자 같은 것을 모두 잊고 땅위의 일에만 몰입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럿인 가운데서 될수록 하나인 것을 찾아보자는 마음, 변하는 가운데서 될수록 변하지 않는 것을 보자는 마음,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서 될수록 무슨 차례를 찾아보자는 마음, 하나를 찾는 마음, 그것이 뜻이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뜻을 주관적으로 풀이한 것이지만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그 궁극적 하나가 또한 뜻이다. 함석헌의 말에 따르면, “뜻은 우주와 인생을 꿰뚫는 것입니다. 뜻은 맨 첨이요 나중이요 또 지금입니다. 모든 것이 뜻에서 나왔고 뜻으로 돼가고 뜻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형상은 뜻이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객관적으로 고찰하자면, 함석헌의 뜻은 동학의 한울이요, 유영모의 절대자요, 박동환의 절대타자일 것이다. “뜻이 있음이요, 있음이 뜻이다. 하나님은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하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함석헌에게서 뜻은 나만의 것도 절대자만의 것도 아니다. 도리어 뜻은 나와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사건이다. 만약 뜻이 나만의 것이었다면 그것은 주관적 의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요, 절대자만의 것이었다면 일종의 숙명이나 운명 또는 객관적 법칙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이 말하는 뜻은 일면적 법칙도 의지도 아니라 나와 전체의 만남이다.
운명과 천명이 불가항적인 데서는 같으나 그 뜻에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에는 의미가 없고 하나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명이란 이 우주에 어떤 일관하는 의미가 있는 것을 믿는 말입니다. 믿음이기 때문에 믿으면 있고 믿지 않으면 허무입니다. … 천명인 담에는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미인 담에는 실현해서만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역사가 나옵니다. 운명이라면 몰라도 좋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 운명에는 맹목적인 복종이 있을 뿐이지만 천명은 깨닫지 않으면 아니 되고 실현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체가 내가 문제입니다. … 의미의 세계는 스스로 서는 세계입니다. 그 체험하는 주체에 따라 역사의 차이가 생깁니다.
천명은 그 자체로서는 하늘의 명령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천명을 숙명이나 운명과 구별하여 주체의 믿음과 깨달음과 실천에 정초시킨다. 믿음과 깨달음과 실천이란 본질적으로 나와 하늘의 만남의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역사와 존재의 뜻을 묻되 그 뜻을 만남으로 이해함으로써 함석헌은 형이상학적 사유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은 철학의 영원한 과제이다. 그런데 서양의 형이상학은 존재의 의미에서 이 ‘의미’를 객관적 규정으로 받아들여 왔다. 다시 말해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존재의 본질적 규정을 탐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존재가 비인격적인 실체로 받아들여지든 아니면 인격적 신으로 받아들여지든 마찬가지였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신을 인격적으로 파악할 때조차 신의 이러저런 본질적 속성을 객관적으로 확정하는 일에 골몰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중세의 인격신의 개념이 근대에 들어와 일종의 사물적 근거로 퇴행한 것이 결코 까닭 없는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의 존재가 규정들의 총괄에 지나지 않는다면, 신의 인격 또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존재의 진리는 더 이상 이러 저런 방식으로 규정된 본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만남에 있다. 존재는 말씀하는 존재이다. 존재의 뜻, 존재의 의미는 그 말씀의 뜻과 의미이다. 하지만 존재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누구도 존재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널린 것은 사실로서의 존재자들일 뿐, 결코 그 모두를 하나로 꿰뚫는 존재일 수 없다. 우리가 대상이나 사물로서 존재자들의 영역을 넘어 하나의 존재를 만나는 것은 오직 전체를 뜻으로 붙잡을 때이다. 그러나 이 뜻은 나만의 것도 전체만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만남의 사건으로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만남은 나와 신의 만남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나와 역사의 만남이며, 나와 이웃의 만남이다. 왜냐하면 신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사물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을 만나는 것은 오직 역사 속의 인간 속에서이며, 신에 대한 믿음 역시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진리를 만남 속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함석헌은 서로주체성의 이념과 만남의 철학의 선구이다. 그러나 존재의 진리를 만남에서 찾는 것은 함석헌에게서 처음 시작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최제우의 언어로 말하자면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경지일 것이다.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의 만남, 다시 말해 신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의 만남이 일어나지 않을 때, 역사는 없다. 그런 상태를 가리켜 최제우의 하늘은 “여역무공”(余亦無功), 곧 나 또한 공이 없다고 표현했다. 하늘의 명과 인간의 마음이 만나지 못하면 뜻은 일어나지 않고, 뜻이 없는 곳에는 존재도 역사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역사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말씀이요 뜻이라면, 존재도 역사도 모두 나와 절대자의 만남 속에서 열리고 생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함석헌의 철학이 동학의 계승임을 본다. 함석헌은 역사의 뜻을 묻는 작업을 통해, 주관적으로는 전혀 의도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본질적 정신을 명석한 개념적 언어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구체성을 부여했다. 수운과 해월은 파국과 개벽을 말했지만, 그것을 개념적 언어로 해명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무심한 관찰자에겐 일종의 유사 종교의 환상적 세계관으로 보이기 알맞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함석헌은 역사의 뜻을 물음으로써 우리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 종말과 파국의 시대일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새로운 세계의 개벽 앞에 서 있는 시대인지를 명확하게 보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역사를 형성하는 인간의 능동적 자발성이나 주체성에 먼저 주목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는 동학에서 시작되는 현대 한국 철학에 공통된 시원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 시원이란 종말과 파국의 주관적 결과인 고통과 수난이다. 그리하여 함석헌이 역사에서 존재의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았다는 것은 수난에서, 눈물에서 또는 절망에서 진리를 찾았다는 말과 같다. 이 점에서 함석헌 역시 유영모와 박동환을 사로잡았던 절망에서 시작한다. 그 절망은 수난의 보편성에 뿌리박고 있다. 함석헌의 역사인식에 따르면 단지 한일합방이, 6.25만이 아니라 한국 역사 전체가 처절한 수난의 역사이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 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그런데 함석헌이 여기서 멈추었더라면 그의 역사관은 식민지 백성의 자학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난의 보편성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감으로써 전혀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개방하게 된다.
그러나 말하기를 그만두라. 인류의 역사란 결국 눈물의 역사요, 피의 역사 아닌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온 인류가 다 그렇다. 사람의 매골로 되지 않은 성벽을 어디서 보았느냐? 사람의 가죽을 병풍으로 삼지 않았다는 왕좌를 어디서 들었느냐? 한숨 없이는 예술이 없고, 희생 없이는 종교가 없다. 어떤 자가 이기고 어떤 자가 졌다 하며, 어떤 자가 어질고 어떤 자가 어리석다 하나, 모르는 말이다.
여기서 함석헌은 고난의 보편성을 확고히 함으로써 그것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이끌어 올린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석가모니가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규정한 것을 생각하면, 함석헌의 말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생은 고해라는 깨달음을 역사와 매개시키지는 못했던 까닭에 그 깨달음이 형이상학적 상투어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은 출산과 노동의 고통을 원죄의 결과라고 설명한 유대교나 기독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삶의 고통을 이런 식으로 몰역사적이고 무시간적인 근원으로 환원할 때,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함석헌은 수난의 현상을 구체적인 사회 현실과 역사 속에서 일관된 흐름으로서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그 수난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의미와 뜻을 집요하게 캐물음으로써 상투적이고 진부한 고난이나 수난의 개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철학이 놀라움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플라톤이 퍼트린 오래된 미신의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철학적 놀라움이란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적 경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계에 대한 긍정적 경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사에서 철학의 이 주관적 기원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 적은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데카르트 그리고 니체처럼 철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던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정신의 동요가 아무리 격렬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함석헌이나 유영모 그리고 박동환의 절망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 까닭은 서양 정신이 아무리 격렬한 불안과 동요와 의심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들이 자유를 잃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석헌을 비롯하여 현대 한국의 철학이 마주한 수난은 자유를 빼앗긴 노예에게 닥친 수난이었다는 점에서 종래의 철학이 성찰했던 수난이나 고통과 날카롭게 구별된다.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철학은 귀족의 일이거나 시민의 일이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자유인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그린 밑그림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의 대상에 관해서는 보편성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체에 관해서 보자면 모든 철학이 지극히 당파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전통적 철학의 당파성이 가장 첨예하게 반영되는 장소가 바로 고통과 수난이다. 자유인의 고통과 수난은 언제나 숭고의 아우라 속에서 묘사되지만 노예의 고난은 비겁과 미개함의 결과로서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인 것이다. 철학은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지상에서 가장 약한 자의 눈물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한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한 번도 민중의 철학이 되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함석헌이 조선 민족의 수난의 뜻을 물었다는 것은 세계 철학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귀족이나 자유로운 시민의 전유물이었던 철학을 가장 나약한 씨ᄋᆞᆯ 곧 민중의 자리에서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함석헌만의 고유성은 아니다. 철학이 세계관이라면 세계를 보는 관점의 고유성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적 장소의 고유성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동학 이후 한국의 철학자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지상에서 가장 나약한 자들의 무리 속에서 그리고 식민지 노예의 처지에서 세상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민중의 고통의 자리에서 홀로 벗어나 세계 시민 행세를 하거나 민중의 훈육교사 노릇을 하려 했던 대학 교수들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고, 그런 까닭에 그런 자들이 자기 역사에 굳건히 뿌리박은 주체적 철학을 전개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민중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던 정신들이 종래의 철학과는 전혀 다른 자리와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일종의 필연이었다. 동학이든, 유영모든, 박동환이든,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관의 고유성은 그들이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그들이 고통 받는 민중의 역사적 장소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함석헌은 자기가 선 자리를 가장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민중의 철학자, 그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씨ᄋᆞᆯ의 철학자였다.
그런데 민중은 가장 크게 고난 받는 존재이지만, 바로 그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고 싸우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국의 민중사가 수난의 역사라면 근현대 한국의 민중사는 동학농민전쟁부터 4.19와 5.18 그리고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저항과 항쟁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의 철학이 민중의 철학이라면 그것은 수난의 철학인 동시에 저항과 항쟁의 철학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근현대 한국인의 저항과 항쟁이 노예상태를 거부하고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싸움이었던 한에서, 저항과 항쟁의 철학은 서양의 근대성, 아니 서양 문명의 시원과 맞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0세기 한국인이 추구한 자유가 서양적 자유와 동일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 까닭은 처음부터 한국의 민중에게는 자유로운 자기형성 또는 세계형성이 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상적으로 고찰하자면, 왕조시대와 식민지시대 그리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민중은 본질적으로 소외된 권력의 노예적 억압 아래 있어 왔다. 그런 까닭에 자기 자신의 세계를 자유로이 형성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까닭 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주관적으로는 한국인의 자기상실이 그 수난의 원인이다.
민족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그 원인이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이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일,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 일이 백 가지 병, 백 가지 폐해의 근본 원인이 된다. 나를 잊었기 때문에 이상이 없고 자유가 없다. 민족적 큰 이상이 없기 때문에 대동단결이 안 된다. 민족을 묶어 매는 것은 폭력이나 법이 아니고 민족적 이상이다. 뜻이 하나일 때에 통일은 저절로 된다. 또 자유가 없기 때문에 당파를 짓게 된다.
자유의 첫걸음은 자기를 자기로서 의식하는 주체성이다. 하지만 어떤 ‘자아’도 홀로 세계를 형성하는 주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자유의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자아들이 결속하여 자기들을 집단적인 자아, 공동의 자기로서 의식하고 공동의 자유를 위해 서로 더불어 세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게 자유로운 자기실현을 위해 서로주체성 속에서 결속한 집단적 주체가 바로 겨레요 민족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은 같은 장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생겨나는 자연적 공동체가 아니라, 오직 자기들을 ‘우리’로서 자각하는 집단적 자기의식에 의해서만 생성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식이 단지 추상적 자기동일성의 의식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회상과 욕구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집단적 자기의식은 한편에서는 공동의 기억으로서의 역사의식과 공동의 욕구로서의 도덕적 이상의 정립을 통해서만 온전히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경우 공동의 역사의식도 공동의 도덕적 이상도 정립한 적이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한 번도 자기를 공동의 주체인 민족 또는 겨레로서 정립한 적이 없다. 그렇게 주체가 되지 못한 민족이 타자적 주체에 의해 한갓 객체로서 규정되는 운명에 처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수난(passiones)이란 말 그대로 수동성(passivitas)의 현실태인 것이다.
그런데 공동의 역사의식, 다시 말해 역사에 대한 공동의 의미부여 그리고 공동의 욕구로서 도덕적 이상을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철학과 종교의 일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에게서 철학은 그냥 관념적인 세계관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인 실천의 과제이기도 했다.
철학하지 않는 인종은 살 수 없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유의 철학이 없는 나라다. 그러면 이 비참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물질적 가난은 정신적 가난의 상징적 표시일 뿐이다.
이처럼 철학이 정치적 실천의 과제인 한에서 철학은 또한 정치적 실천과 함께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은 때로는 잠든 민중을 깨우는 외침이기도 하고, 때로는 봉기의 역사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이기도 하다. 3.1운동의 경험 이후 함석헌의 삶에서 철학이란 민중의 수난과 항쟁의 뜻을 영원의 관점에서 찾아내고 이를 통해 다시 민중을 새로운 역사의 창조로 부르는 외침이었다.
그런데 20세기 한국 역사에서 민중의 자유로운 자기형성이 저지된 것은 단순히 한국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의 수난은 자기를 온전히 하나의 겨레로서 정립하지 못한 탓이지만, 마찬가지로 자기를 먼저 하나의 민족과 국가로서 정립한 자들의 침략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이 자유로이 자기를 정립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그들 자신이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그들의 자유로운 자아와 주체성이 부정되고 거부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토록 아름답고 숭고한 서양적 자유의 이념이 왜 한국인들에게는 거부되었는가? 그 까닭은 한국인들 자신의 자기망각과 상실뿐만 아니라 서양적 자유와 주체성의 이념 그 자체 속에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해 실천적 관점에서 한국인들이 서양적 자유인의 공동체로의 진입이 거부당했기 때문이라 답하든, 아니면 이론적 관점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서양적 자유의 이념 자체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 답하든지 간에, 어떻든 한국인은 서양적 자유와는 다른 자유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가 철학적 세계관의 시원적 지평이라면, 20세기 한국인들이 다른 자유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한국 철학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고유하고도 주체적인 철학적 사고방식이 필연적으로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러니를 행운으로 명확히 자각하고 받아 안은 사람이 바로 함석헌이다.
그는 한국인의 수난이 한편에서는 한국인의 책임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사적인 필연이라고 보았다. 그 까닭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우리 시대는 전체가 자라나 종래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알을 깨고 나오는 일은 파괴의 고통을 반드시 수반한다. 그런데 기존의 세계의 알껍질이 갈라지고 깨지는 장소가 바로 한국인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수난은 여기서 비롯된다. 철학이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관한 학문이라는 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부터 명확히 자각되었던 일이다. 철학은 전체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전체 속에서의 나의 존재 의미를 해명하고 나로 하여금 동시에 전체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는 사물적으로 주어진 대상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신에 의해 파악되어야 할 이념이다. 그런데 정신이 파악하는 전체는 다시 그가 실제로 형성할 수 있는 세계의 투사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표상하는 전체는 처음부터 고정되어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의 형성력이 증대되고 확장됨에 따라 자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전체가 자라는 것이라 보았다.
그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말해 현재의 세계 종교와 철학은 국가가 인간의 자기형성의 지평으로 등장하면서 태동한 것이었다. 그 이후 철학과 종교가 표상하는 전체는 언제나 국가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 전체를 천하라 하든, 세계라 하든, 아니면 그 전체가 자연적 세계이든 아니면 하늘나라까지 포함한 것이든지 간에, 오늘날까지 인간이 종교적, 철학적으로 표상해온 전체는 국가와 나라의 이념에 의해 근원적으로 규정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함석헌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국가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인류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한 시대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개벽의 시대인 까닭이다. 또한 그런 까닭에 국가주의 시대에 정립된 모든 철학적 근본 개념들이 동요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인 것이다. 함석헌의의 비길 데 없는 성취는 그 시대적 동요 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철학의 근본개념들을 새로운 시대 확장된 전체의 지평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새롭게 정립한 것에 존립한다. 자유와 역사, 인간과 신, 존재와 가치, 국가와 세계, 우주와 생명 그리고 진화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는 쉼 없는 정신의 노동을 통해 동학이 예감했던 개벽, 곧 새로운 세계의 밑그림을 그려냈던 것이다.
7. 한국 철학의 과제인 남북 통일
여기서 함석헌의 철학사상을 낱낱이 소개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일은 현대 한국철학의 좌표계를 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영모에 의해 대표되는 파국과 절망의 좌표축이 나로부터 절대적 타자로 이어진다면, 함석헌에 의해 대표되는 항쟁과 개벽의 좌표축은 3.1운동에서 시작하여 남북의 통일을 향해 뻗어 있다. 20세기 한국의 철학이 민중의 항쟁과 개벽의 역사와 함께 생성되어 온 것이라면, 그것이 걷는 길은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향한 길인 것이다. 20세기 한국의 어떤 철학자도 함석헌처럼 분단의 비극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깊이 성찰한 사람은 없었다. 함석헌은 한국 역사의 수난의 뜻을 철저하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치열함으로 통일의 뜻과 가능한 길을 탐구했다. 이것은 철학이 통일이라는 특정 국가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갓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함석헌에게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문제가 철학적 성찰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던 까닭은 그가 분단과 통일이 세계사적 의미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남북을 나눈 38도선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그 다음은 38선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국경이다. 이것도 제2차 대전 이후 생긴 것으로서 나타나기는 우리나라·인도차이나·독일에만 나타나 있으나 실상은 전 세계 어디나, 어느 나라에서나 다 그어져 있는 선이다. 땅 밑 어디에나 있는 물이 땅 껍질이 약한 곳을 타서 터져 샘으로 솟는 모양으로, 나라마다에 그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이 역사의 특별한 조건 때문에 볼 수 있게 터져 나온 것이 남·북한이요, 동·서독이다.
여기서 함석헌이 하려는 말은 오늘날에는 모든 국가가 사실은 분단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지금은 국가가 안으로부터 해체되고 보다 더 큰 인류공동체를 향해 발돋움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지리적 경계선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태동하는 인류공동체는 더 이상 그런 국지적 경계에 의해 구분될 수 없다.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하는 것은 새로운 정신적 이상인 것이다. 근대 이후 인류의 역사는 한편에서는 근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류의 보편적 공동체를 개방하기 위한 다양한 사상적 모색이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어떤 이상도 참된 의미에서 인류를 하나로 불러 모을 수 있을 만큼 보편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렇게 인류 전체를 위한 이상임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계급을 위한 계급의식에 지나지 않는 그런 이상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이 점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는 인류를 보편적으로 통일한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모든 국가를 내적으로 분열시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모든 나라에는 보이지 않게 38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다.
만약 한국인들이 일찍부터 하나의 민족으로서 자기를 자각하고 근대적 국민 국가를 건설했더라면 사상적 분단이 지리적 분단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근저에 놓인 분열적 힘이 땅거죽이 가장 약한 한반도에서는 국가를 현실적으로 분열시켜버렸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의 분단이 나타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통일이란 세계의 통일, 다시 말해 새롭게 하나된 세계의 개방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이야말로 함석헌이 대망했던 진정한 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을 대망하는 까닭은 낡은 민족국가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자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분열되어 있지도 않으나 닫혀 있지도 않은 나라, 인류 공동체 속에서 하나의 떳떳한 주체로서 자기를 정립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내어 놓는 그런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국인이 처해 있는 곤경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의 겨레로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낡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있다. 함석헌의 철학은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편에서는 전체에 대한 시야를 과감하게 확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아를 국가나 사이비 전체로부터 해방시켜 그 주체성을 극대화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함석헌의 비길 데 없는 종교적 사유가 빛을 발한다. 함석헌에게서 삶의 종교적 차원을 복원하는 것은 한갓 단체에 지나지 않으면서 스스로 전체를 참칭하는 모든 사이비 전체를 상대화하기 위해 요구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의 이름으로 낡은 종교의 교리 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 아니고, 존재사유의 지평을 좁은 한계에서 해방시켜 그 시야를 한 단계 넓히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함석헌은 오늘날 생명의 진화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연 선택의 시대로부터 인간에 의한 선택의 시대로 이행했다고 보았다. 최초의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개념을 통해 자연에서 목적을 추방해버린 뒤, 자연은 우연과 맹목 속에서 자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 맹목적인 진화의 과정 속에서 우연히 마지막에 출현한 하나의 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르러 인간이 진화의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는 자리에 선 지금, 인간은 스스로 생명의 진화의 목적과 방향을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우주와 생명의 목적이 인간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가? 오직 창조와 생명의 역사의 뜻을 영원의 관점에서 붙잡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생명과 진화의 목적을 스스로 맡아 지키는 목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함석헌에게는 소외된 신과 타율적인 교리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이처럼 스스로 신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위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본질이다.
종교란 다른 것 아니요, 뜻을 찾음이다. 현상의 세계를 뚫음이다. 절대에 대듦이다. 하나님과 맞섬이다. 하나님이 되잠이다. 하나를 함이다.
그가 늘 말했던 씨ᄋᆞᆯ이란 자기 속에 뜻을 찾고 품은 자아이다. 그것은 절대에 대드는 것, 하나님과 맞서는 것, 아니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그 절대적인 하나를 행하는 주체이다. 이런 말들 속에서 우리는 동학이 가르쳤던 侍天主와 人乃天의 이상이 굳건한 내용을 얻는 것을 본다.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하나를 하는 주체들에게 낡은 민족 국가나 이데올로기가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남한과 북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는 소멸하기 직전에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촛불의 마지막 불꽃과도 같다. 그러나 그 마지막 불꽃은 그냥 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직 참된 전체에 의해서만 지양될 수 있다. 참된 전체를 개방하는 것이 종교인 한에서, 함석헌에게 정치는 늘 종교의 문제였다. 하지만 거리의 정치와 영원의 종교가 어떻게 매개될 수 있겠는가? 함석헌에게는 그 둘을 매개하고 이어주는 다리가 바로 철학이었다. 철학은 한편에서는 영원을 향한 동경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 영원을 향해 현실을 혁명하는 실천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우리는 종교와 철학과 혁명을 하나로 통일하고 분리하지 않았던 동학의 정신이 함석헌의 정신 속에서 살아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
함석헌과 같은 좌표축 위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서도 아마 도올 김용옥은 다른 누구보다 함석헌과 비슷한 길을 걷는 철학자일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동양 철학에서 출발했으나, 역시 동양철학의 한계에 갇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철학자로서 평가받아야 하는 까닭은 그가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역사와 함께 철학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치 박정희 치하에서 함석헌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김용옥은 대중들에게 먼저 다가가 “하나의 우는 씨ᄋᆞᆯ”로서 말 건네는 유일한 철학자이다. 하지만 그 역시 아직 길 위에 있는 철학자이므로, 우리는 그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후세의 몫으로 남겨 두려 한다.
8. 결론-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현대 한국 철학의 좌표계를 그려보았다. 동학을 원점으로 하여 수직과 수평으로 전개되는 그 좌표계는 좌표축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현대 한국 철학은 동·서 철학을 구별 없이 넘나드는 철학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동·서 철학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보다 높은 하나의 지평을 개방하려 한다. 이를 통해 한국 철학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보편적 세계관을 모색한다. 그러나 둘째로 현대 한국 철학은 그 보편적 지평을 겸손하게 상호문화성 속에서 제시한다. 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역사적으로 제약된 특정한 장소에서 전개되는 보편의 지평인 것이다. 그런데 셋째로 그 장소는 단지 지리적인 장소만은 아니다. 20세기 한국의 철학자들은 어디든 가장 낮은 장소에서 세계를 바라보려 한다. 그 낮은 곳은 가장 약하고 버림받은 자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그들의 절망과 그들의 믿음이 20세기 한국 철학이 뿌리박고 있는 대지인 것이다. 그런 한에서 현대 한국 철학은 인간의 절망적인 고통에 대한 응답이다. 이 응답은 관념적인 위로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절망적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인 동시에 절망을 넘어서는 굳건한 믿음이며 동시에 그 믿음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실천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한국 철학은 철학인 동시에 종교이며 또한 혁명적 실천이다.
방법론적으로 보자면 현대 한국 철학은 한 편에서는 언어를 통해 다른 한 편에서는 역사를 통해 존재의 진리를 파악하려 한다. 한국어의 고유성과 현대 한국 역사의 특별한 개성은 현대 한국 철학의 주체성의 뿌리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국어가 다른 언어와 다른 고유성을 잃지 않고, 한국의 역사가 다른 나라와 다른 문제 앞에 직면하는 한, 한국인들은 자기 방식으로 철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5.18의 뜻을 서양 철학을 통해 설명할 수 있으며, 누가 다른 나라 철학자의 이론에 기대어 남북통일의 철학적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땅에서 성실하고 진지하게 철학하려는 사람이라면, 결국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방식으로 철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지금까지 전개되어 온 현대 한국 철학의 길을 이어가는 것이다. 철학이 모두를 위한 학문이라면, 아무도 고립된 홀로주체성 속에서 철학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감은 언제나 남을 이어간다는 뜻이요, 이미 열려 있는 길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대 한국 철학의 좌표계를 그려 보았다. 누구든 오늘날 한국 땅에서 스스로 철학하려는 사람은 그 좌표계 위에서 자기가 어디에 서 있고 어떤 길을 이어가야 할 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보다 다양하게 이어져 나갈 때, 21세기는 틀림없이 한국 철학의 역사에서 풍요로운 결실의 세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