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주 라파엘호 40일 항해 끝에 황산포 도착
- 오송항 격류 헤치고 조선을 향해…
-. 현재 해군기지로 사용… 출입 제한
-. 예수회 소신학교 횡당성당서 첫 미사
-. 수로 이용해 금가항과 횡당 오간 듯
그믐밤,
서러운 조선의 눈썹은
어디로 가 숨었을까
어둠 내리는
상해 부두의 안개, 안개를 헤치며
조선을 향해 돛폭을 올린 조각배,
선체의 길이 25척
너비는 9척, 높이 7척6치
닻줄을 감는 물레는
반쯤 썩어 내린 동아줄
동아줄 하나.
조선의 서러운 눈썹은
어디로 가 숨었을까
지금 어디에 눈뜨고 있을까.
(배달순 작 「성 김대건 장편서사시」중)
1845년 8월17일 감격적인 사제서품식을 마친 김대건 신부는 일주일간 조선 입국 채비를 갖춘 후 주일인 8월24일 상해 횡당(橫堂)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이 자리에는 물론 서품식때 자리를 같이해 감격을 함께 나눴던 11명의 조선인 신자들도 있었다. 또 강남교구 소속 소신학생 33명이 참석했다. 바로 김대건 신부가 첫 미사를 봉헌하는 횡당이 예수회 신부들이 지도하는 소신학교 성당이었기 때문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후에 주교로 서품, 조선 제5대 교구장이 된 다블뤼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시종일관 거룩하고도 장엄하게 첫 미사를 봉헌했다.
막힘 없이 터져나오는 라틴 창미사곡, 손끝에 땀이 밸만큼 정성을 기울이는 성체축성, 능숙한 중국말로 중국인 소신학생들을 위해 복음을 설교하는 강론, 당당하면서도 절제 있는 김대건 신부의 미사 주례 모습에서 소신학생들은 미래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소신학생들에 무엇을 강론했을까? 먼저 김 신부는 자신이 조선의 첫 사제임을 밝히고, 지금 미사에 참례한 소신학생들과 같은 또래에 신부가 되기 위해 중국 대륙을 횡단해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했다고 소개했을 것이다.
김 신부는 또 이 미사가 끝나는 대로 선교사들과 11명의 조선인 신자와 함께 조국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이라고 밝혔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로마 11,36)는 성서 말씀을 신학생들에게 상기시키고, 『믿음이 없는 이 세상에 보여줄 기적이라고는 오직 순교의 피흘림뿐 임』을 강조, 『복음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론했을 것이다.
백지에 잉크가 퍼지듯 김대건 신부의 강론 한마디 한마디는 순백의 영혼들에게 꺼질줄 모르는 믿음의 불을 지펴나갔다.
어린 소신학생들에게 비친 제대 위 김대건 신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복음을 위해 순교를 각오한 사제의 모습에서 한결같이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순간 이들은 사제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며, 자신들이 지금 얼마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지를 감지하고, 온 몸으로 분출되는 뜨거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금가항성당과 횡당은 지리적으로 볼 때 완전히 반대방향에 위치해 있다. 금가항이 상해 시내를 중심으로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면 횡당은 그 반대로 서북쪽에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
현재 한창 경제특구 개발로 인해 횡당으로 가는 길은 공사로 어수선하다. 아직도 황포강으로 연결된 작은 수로가 있으며 많은 주민들이 교통수단으로 뱃길을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김대건 신부 일행도 불편한 육로보다 금가항에서 횡당까지 뱃길을 이용해서 첫 미사를 봉헌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횡당은 현재 상해교구 「식안골회당」(息安骨灰堂), 즉 우리말로 「납골당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 잉태를 고하고 그 위에 비둘기 형상의 성령이 성모에게 빛을 비추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박한 제대는 김대건 신부와 중국인 소신학생들과의 끈끈한 신앙의 유대를 상상케 한다.
또한 제대를 마주하고 성당 입구에 놓여있는 관은 더더욱 죽음을 이긴 승리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제대와 관」「첫 미사와 순교」「김대건과 소신학생」등 기자의 뇌리에 스치는 복잡한 등식들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케 했다.
현재 18가구가 본당 신자로 등록돼 있는 횡당은 성당 옆 납골당에 유해 1만2천여 구를 안장하고 있다.
또 1988년 11월 성당 정원에 피에타상을 건립하고 그 옆에 1993년에 선종한 상해교구장 서리 리스더(李思德)주교 묘가 있다.
횡당 역시 문화혁명때 페쇄돼 병원으로 사용되다 다시 복구됐고 종탑은 최근 새로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상해 횡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일주일 후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 조국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라파엘호에는 김대건 신부가 선장으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조선인 11명의 신자가 승선했다. 승선인원 모두 14명(페레올 주교의 서한에는 12명으로 기록돼 있음-한국 천주교회사 하권 82쪽 참조).
상해를 떠나 밀물을 이용해 수로로 내려와 황포강을 따라 라파엘호는 바다로 향했다.
황포강, 마카오를 떠나 에리곤호를 타고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상해에 첫 발을 내디딜 때도 이 강을 건너왔다. 벌써 4년전 일이었다.
황포강에 접어들자 화강석으로 지은 상해 영국 영사관이 보였다. 넉달전 1845년 4월30일 조선신자 11명과 라파엘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오다 폭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이곳 영국 영사관의 도움으로 페레올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뱃전에 서서 영국 영사관을 보며 아득한 옛일 같이 느껴지던 지난날을 추억하던 김대건 신부는 소영돌이치는 누런 황포강물을 보며 암울한 조선 교회의 미래에 깊은 시름에 잠겼다.
상해 중산동일로(中山東一路)33번지에 위치한 옛 영국 영사관 자리는 현재 상해 시급건축보호단위(市級建築保護單位) 즉 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상해 영국 영사관 인근에 있는 부두에서 유람선을 타고 오송(吳淞)항구로 갔다. 뱃길로 약 한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오송구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거쳤던 교두보였다.
상해 북쪽에 위치, 상해의 길목인 오송구는 양자강과 황포강 합류지점에 있어 예로부터 어업 중심지였다. 상해로 들어가고 상해에서 나오기 위해선 꼭 오송을 거쳐야만 한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다른 국적의 무역선들이 이곳 오송을 지나치고 있다.
지리적 요충지인 까닭에 오송은 현재 중국 해군기지로 사용되고 있어 외부인의 출입이 극히 제한돼 있다. 사진 촬영은 물론 제방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들은 차단돼 있으며 오직 배편을 이용하는 승객들에게만 항구가 개방돼 있다. 그것도 여객 터미널을 이용해 배에 탈 수 있는 좁은 출입구가 고작이다.
오송에서 뱃길로 약 15분 정도 가면 양자강과 황포강의 합류지점이 나온다. 물길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서 그런지 물결이 예사롭지 않다. 여기서 보면 김대건 신부의 초기 서한들에 자주 나오는 숭명도가 보인다. 숭명도는 섬의 크기가 약 8백평방 킬로미터로 서울의 면적보다 3분의 1이 더 크다고 한다.
사제가 되어 조선교구장 주교를 모시고 동료 신부와 조선인 신자와 함께 한 배를 타고 조선을 향해 오송을 비켜 가는 김대건 신부의 감회는 사뭇 남달랐을 것이다.
작은 방주 라파엘호는 하나의 완전한 교회였다. 주교가 있고 사제가 있고 신자가 있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처럼 순교의 피흘림으로 신앙을 꽃피울 복음의 씨앗들을 가득 채운 채 라파엘호는 40여 일 간의 항해 끝에 충남 강경 황산포에 닿는다.
라파엘호는 조선교회에 구원의 서광을 가져다주는 「구세사의 표징」이었다. 이 배의 선장은 페레올 주교가 기록하고 있듯이 바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였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