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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23코스 제1부
운남동경로당-비석거리-저동마을-저동방조제-두곡마을-성동마을-송현마을-조금나루
20221026
1.무안 조금나루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들
지난해 10월 26일의 서해랑길 탐방을 탐방 기억에 의존하고 그날 찍은 사진과 지도, 무안문화원 자료를 참조하여 개략적으로 기록한다. 제1부는 운남면 연리 비석거리부터 망운면 송현리 조금나루선착장까지 정리한다.
아침 7시 45분, 서해랑길 22코스 탐방을 마치고 운남동경로당 뒤 팽나무 아래 쉼터정자에서 아침을 먹었다. 22코스를 새벽의 어둠 속에 걸어서인지 정신이 멍해져 있었다. 늦가을 바람이 쌀쌀하다. 아침을 쓸고가는 청량한 바람은 멍해진 정신을 일깨우고, 마음의 어두운 빛을 맑게 씻어준다. 쌀쌀한 바람 탓에 아침을 재빨리 해결했다. 8시 10분이 넘어서 서해랑길 23코스 탐방에 나섰다.
서해랑길 23코스는 무안군 운남면 연리 운남동마을과 저동마을, 하묘리 둔전마을과 두곡마을, 망운면 송현리 성동마을과 송현마을로 이어진다. 운남면소재지 연리 중심거리를 통과하여 저동마을로 들어간다. 아침의 햇빛이 투명하다. 저동마을은 하동 정씨 세거지임을 증거하는 하동 정씨 세장산碑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넓은 양파 모종밭에 양파 모종들이 자라고 있다. 양파 모종을 심는 여인들의 일손이 바쁘다. 오늘 이른 아침 운남면 성내리 농장마을에서 양파 모종을 내는 풍경을 생애 처음으로 보게 되어 감동하였다. 그러나 모판의 양파 모종을 양파밭에 옮겨 심는 노동이 몹시 고되 보여 길손의 마음이 아렸다. 그래서 무안 지역에서는 양파 농사를 많이 짓기도 하지만 일손이 많이 가지 않는 양배추 농사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저동마을 앞 들녘을 거쳐 탄도만 저동방조제로 나갔다. 저동방조제 제방길에서 탄도만 전체가 조망된다.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바다, 탄도만 해안에 자리한 마을과 바다의 섬들이 투명하게 들어온다. 남쪽으로 운남면 내리의 풍력발전기들이 위치 확인의 증거가 되면서 이국적 풍경을 연출한다. 그 오른쪽으로 신안군의 선도, 그 오른쪽 뒤에 신안군의 지도가 가늠되고, 곧 탐방하게 될 조금나루와 탄도가 서북쪽에서 춤을 춘다. 북쪽으로는 운남면 하묘리에서 망운면 송현리로 이어지는 해안으로 이어지는 긴 해안선과 물이 빠진 바다의 모래 벌판이 사막처럼 펼쳐져 있다. 저 벌판으로 내려가서 조금나루로 그냥 횡단하고 싶다. 무안군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의 바다는 모래 벌판이 고운 것이 특징 같았다. 저 모래 벌판을 사막을 가듯 고행하고 싶다.
하묘리 팔학마을을 가늠하면서 저동방조제 제방길에서 해안을 벗어나 두곡마을 가는 들길로 나가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에서 뒤돌아보면 걸어온 해안길과 운남면 하묘리 일대와 둔전마을이 가늠된다. 하묘리 동쪽의 원하묘마을과 신촌마을은 톱머리해안과 청계만을 바라보고 있고, 하묘리 서쪽 둔전마을과 두곡마을은 탄도만을 향하여 있다. 그런데 하묘리 팔학마을은 탄도만과 청계만을 모두 조망하는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묘리 두곡마을 언덕밭에 한 차량이 거름을 뿌리고 있다. 콩과 고구마 농사를 끝낸 밭을 일구어 양파 모종을 심기 위해 밭에 퇴비를 주는 것 같았다. 그 현장 바로 위 언덕에는 이미 모종 심기를 끝낸 드넓은 양파밭에서 스프링쿨러가 돌아가며 물을 뿌리고 있다. 무안군 들녘의 10월 풍경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고구마와 콩 수확 풍경, 양파 모종 내는 풍경, 양파밭에 스프링쿨러 돌아가는 풍경, 이 풍경들이 무안의 10월 들녘을 아름답게 수놓는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운남농협저온저장고 앞으로 나왔다. 이곳은 두 번째다. 지난 21코스 탐방 때 길을 잘못 들어 23코스 이 탐방길로 걸었다. 국도77호선 항공로 서쪽의 운해로를 따라가면서 운남면 내리곶(串)의 이국적인 풍력발전기 풍경과 탄도만 서쪽 해안과 신안군 섬들을 살피면서 아침의 투명한 햇빛을 받고 신선한 대기를 호흡한다. 무념무상으로 오직 아름다운 풍경에 감각의 즐거움을 느끼며 걸었다. 목화농장 입구에 이르러서 지난 21코스 탐방길과 작별한다. 21코스 탐방 때 목화농장 입구에서 국도77호선 항공로 지하통로를 통하여 운해로 동쪽으로 나가 용동마을회관 앞으로 향하였다. 23코스는 직진하여 송현리 송현보건진료소 방향으로 이어간다.
송현보건진료소로 가는 언덕에서 뒤돌아서서 하묘리 '꽃회사'마을을 가늠하였다. 탄도만 바다와 청계만 바다가 가장 근접하여 육지의 폭이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곳에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육종연구소인 꽃회사(flower company)를 설립하여 꽃씨를 채취했다고 하여, 이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지금도 '꽃회사'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꽃회사마을이 낭만적 감성을 불러 일으킨다. 그 꽃회사에서 재배한 다년생 화초가 금계국, 천일국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노랗게 피어나는 꽃이다.
21코스 시점인 송현리 용동마을회관을 가늠하며 조금나루길을 따라간다. 송현4리는 성동마을과 유종동마을로 구별되는데 조금나루길 남쪽인 송현교회가 있는 곳이 성동마을이고, 조금나루길 북쪽 탄도만 무안낙지공원을 향하여 있는 곳이 유종마을이다. 그 두 마을을 모두 아울러 송현4리 마을회관이 조금나루길 성동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소나무재, 솔고개, 松峴은 탄도만 남쪽과 북쪽을 모두 조망하는 곳이라 생각하며 송현마을로 내려갔다.
송현3리에 있는 송현마을은 원송현마을로도 불리는데 마을 앞 조금나루가 마을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나루는 섬이었으나 이제는 제방으로 송현마을과 이어져 있다. 왜 조금나루일까? ‘조금’은 潮水가 가장 낮은 때인 ‘음력 매달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을 이르는 말로, 마을에서 이 나루를 건너려면 물이 제일 많이 빠질 때인 조금에 가서야 건널 수 있다 해서, 또 조금이 되면 물이 빠져 마을 앞 섬인 탄도와 선도를 건널 수 있다 하여 '조금나루'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나루의 명물은 모래밭이다. 마을 앞 조금나루해수욕장은 예전에 십리에 걸쳐 모래밭이 뻗어 있다 해서 '명사십리'라고 불렸던 명품 모래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둑이 조성되고 주변에 인위적 시설물이 생기면서 조류에 변화가 생겨 지금은 명품 모래밭이 사라지고 있다. 그 명품 모래밭을 되살릴 수 없을까? 조금나루의 또 하나의 명품은 해송숲이다. 그 해송숲에 백년초 선인장과 해당화가 자라고 있었는데 조금나루유원지가 생기면서 그 아름다운 꽃들을 사람들이 채취하여 사라졌다고 한다.
조금나루의 명품은 이러한 자연 명품만이 아니다. 조금나루는 자연 풍경을 감상하는 위치로서도 명품을 대표한다. 조금나루는 탄도만의 사방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명품 위치에 있다. 운남반도 북쪽의 운남면 내리에서 동쪽으로 휘도는 해안 풍경, 신안군 선도와 지도, 바로 앞 망운면 탄도 등 여러 섬들 풍경, 탄도만을 북쪽으로 휘돌아 망운면과 해제면을 거쳐 신안군 지도로 이어지는 광활한 해안 풍경, 이 풍경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나루에서 배를 타고 탄도 섬으로 들어가고 싶다. 탄도에 들어가는 그 어느 날, 육신은 더 낡아있을 것이고 정신 또한 훨씬 메말라 있을 것이다. 조금나루에 불어오는 해풍을 들이마시며 바람의 그날, 내 육신과 정신의 상승을 기대한다.
2.탐방과정
탐방거리 : 20.4km 중 9.84km
소요시간 : 6시간 8분 중 2시간 52분
무안군 연리 운남동경로당 뒤 쉼터정자에서 약 25분 동안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운남면 연리 운남동마을에 대한 유래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 놓는다.
"운남면은 우리 군의 중서부 끝에 위치한 면으로서 본래는 망운면이었다. 1971년에 망운면의 서남부지역이 독립하여 운남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3년에 면으로 승격되면서, 운남면이라 칭하였다. 망운반도에 위치하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수산물 양식의 적지이며, 面 전체가 높은 산이나 깊은 계곡이 없는 평지로 되어 있어서 농업에도 알맞은 지역이다. 운남동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 위치한 마을로 면에서 가장 큰 번화가이며 행정구역명은 운남면 연리 1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연동에서 살던 행주 기씨 기자화씨가 1930년대 중반에 이곳으로 옮겨와 터를 잡으면서 형성되었다. 후에 저동에서 하동 정씨, 그리고 내동에서 광산 김씨 등이 옮겨와 살게 되면서 마을이 커져 현재의 마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원래 이 마을은 연동의 마을에 속해 비석거리로 불렸으나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1971년 운남출장소가 설치되면서 분동(分洞)이 되어 운남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운남동이란 마을의 지명 유래는 운남 지역 소재지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를 살려 정한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1974년 7월 1일 연동에서 분동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전체적인 지형이 연꽃과 같아 행정단위가 연동(蓮洞)이라 하다가 연리(蓮里)로 바뀌었다. 이후 이 마을도 면사무소 등 각 기관들이 들어오면서 상가들이 자리 잡게 되고
주민이 늘어나자 2005년도에 운남동, 비석동, 상동 등 3개 마을로 분리하게 된다. 면소재지를 지나는 809번 지방도로를 기준으로 복지회관에서 초등학교까지의 북쪽은 운남동이고 맞은편의 남쪽은 비석동이며 복지회관을 넘어서 면사무소 쪽은 길과 관계없이 상동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 무안문화원
"조선시대 농토를 많이 가지고 있던 지주가 전답 경작자들로부터 소작료를 많이 받자 부담을 덜기 위하여 비석을 세워 '비석거리'라 부르다가 1971년에 운남출장소가 민원업무를 시작함과 동시에 '雲南洞'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표석의 내용을 더 상세히 알기 위해서 무안문화원에서 비석거리 유래를 옮겨 놓는다.
"운남동마을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픈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와 한국인 마름 사이에서 신음하는 이 지역 민중들의 염원이 담긴 비석이 그것이다. 이 비석은 현재 운남농약사가 있는 자리에 두 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월악마을 입구에 있는 이현장씨 창고 아래에 묻혀있다. 비석 중 하나는 ‘서인섭주사공적비’이고 또 하나는 ‘영세불망비’이다. 일제강점기 운남면 일대의 커다란 농지를 갖고 있던 일본인 지주 밑에 지배인의 역할을 했던 한국인 마름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신안군 압해면 매화리의 서인섭이었다. 서인섭은 이 지역의 소작인들에게 가혹할 정도의 높은 소작료를 징수했는데 걷는 방법도 일본인 지주보다 더 독하게 걷는다고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해서 높은 소작료를 피하기 위해 소작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은 결과 서인섭의 덕을 찬양하는 송덕비를 세운다면 소작료를 깎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송덕비를 세우기로 하였다. 설마 송덕비까지 세워줬는데 모질게 하겠느냐는 소박한 염원이 깃든 것이다. 그러나 소작인 중에 서인섭이 무엇을 잘 했다고 송덕비를 세우느냐는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오자 그렇다면 공적비로 이름을 바꿔서 세우기로 했다(이때 주동자가 이진택, 기자일, 김채연, 김옥태 등 4인이며 천삼문도 참여했다).
소작인들이 비석을 세우고 낙성식을 한다고 하자 당시 의분에 찬 운남 청년 회원인 최금옥, 박채진, 기행도, 천옥봉, 김장봉, 김이봉, 박연규 등 7명은 낙성식에 참여하고자 운남으로 오는 서인섭을 가로막고 식장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다. 싸움이 격렬해서 목포헌병대에서 순사들이 달려 와서야 멈출 수가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낙성식은 열리지 못하고 청년회원 7명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2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들 청년회원 중 박채진(자-현앙, 호-국사. 1903-1952)의 공적을 찬양하는 ‘국사박채진선생공적비’가 팔학에서 면소재지로 들어오는 입구에 서 있다. 비문은 청화스님이 작성했다. 또한 팔학마을의 천옥봉은 양곡마을에서 간이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두 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길을 비석거리라 했으며 현재의 운남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기 전까지는 ‘비석거리’로 불려졌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비석거리'라 부르고 있다. 문제의 비석은 월악마을 입구에 있는 이현장씨 창고 아래에 묻었다고 양곡마을의 이의철씨가 증언했다." - 무안문화원
삼거리 버스정류소 뒤 주차장에 서해랑길 무안 22·23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 뒤에 운남면 연리 운남동경로당이 있다.
삼거리 버스정류소 뒤 주차장의 서해랑길 무안 22·23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고 무안 23코스 탐방에 나선다.
제일마트 운남버스 정류장 앞 전봇대에 서해랑길 23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걸어온 22코스 탐방길 남쪽을 뒤돌아보았다. 왼쪽에 서해랑길 무안 22·23코스 안내도, 오른쪽 도로표지판이 붙은 기둥에 23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23코스는 무안군 연리 비석거리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이어간다.
운남면소재지 연리 운남동 운해로를 따라간다. 연리(蓮里) 지명 유래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 놓는다.
"운남동, 저동, 자작, 양곡, 연동, 내화, 비석동, 상동 등 8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연리(蓮里)는 본래 영광군 망운면과 무안현 현화면에 속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화촌, 양곡동, 저동을 합하여 연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망운면과 분리되어 운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지형이 연꽃 같다 하여 연리 또는 연동이라 했으며 운남면 소재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809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문헌을 통해서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모시촌과 연동리만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망운면 연동, 저동, 내화촌이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망운면 연리 내화촌, 양곡동, 연동, 저동 그리고 항장 일부가 표기되었다. 1987년의 자료에는 운남면 연리 운남동, 저동, 자작, 양곡, 연동, 내화 등이 나온다. 이후 인구가 불어나면서 비석동과 상동이 추가되었다. 저동에 충효사, 양곡과 내화촌에 고인돌 군락지가 있으며 운남동에 효자각과 열녀각이, 내화촌에 절부각이 그리고 자작마을에 열부각이 있다. 또한 연동마을에는 여러 기의 비가 있다." - 무안문화원
운남농협 옆 골목으로 서해랑길은 이어지는데 그냥 지나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운남농협을 지나쳐와서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고 농협 옆 골목길을 찾아간다.
농협 옆 골목을 통과한다.
에덴지역아동센터와 운남중앙교회 오른쪽 길로 진행한다.
저동(苧洞)마을에 대한 지명 유래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 놓는다.
"저동(苧洞)은 연2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 형성 당시 이곳 갯벌에 모시가 많이 자생해 있었기 때문에 '모시가 많은 갯벌'이란 뜻으로 '모시개' 또는 ‘모시울’ 등으로 불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모시밭이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모시밭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모시를 째고 모시를 삼았던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서 일손이 많이 들었던 몹시 힘든 작업이었다고 회상한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毛時村으로 나온다. 이는 ‘모시울’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쓰여진 글자로 보인다. 이어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서 현재의 이름인 망운면 저동(苧洞)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원래 평산 신씨 터였으나 현재는 동암리 신기마을로 들어가고, 하동 정씨들이 들어오면서 정씨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예전에 마을은 대나무와 소나무가 2중으로 둘러싼 아늑한 분지형으로 소쿠리 형이었다. 또한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전형적인 촌락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현재는 간척이 이루어지고 주변이 전부 개간되어 겨울철 마을의 모습이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성한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으며 망운면 송현을 바라보는 바다 쪽으로는 저동 제방이 있어 바닷물을 막고 있다. 두무골(감나무골 또는 시목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리 건너(진천동 또는 참샘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저동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옆으로는 둔전-신월 간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감나무골에는 이 시대의 큰 스님인 청하스님이 출생하신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참샘골이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로 물이 좋아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물 걱정을 하지 않았다. 특히 주민들이 모두 이용했던 들샘은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주변 마을 사람들은 물이 풍부한 이 마을을 대단히 부러워했다. 마을 앞에 있는 저수지는 일제 말기 막기 시작하여 해방 후에 완공되었다. 얼마 전까지 그 저수지 밑에서는 유리의 원료가 되는 규사와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점토를 채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채취가 중단되었으며 모래 채취 기구들이 버려져 있다." - 무안문화원
"저동(苧洞)마을의 입향조는 하동 정씨 鄭時哲(1704-1786, 자-세용, 호-운천)이다. 공은 함평 자풍에서 세거하다 1700년대 중반에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웃 노인들을 초청하여 극진히 모셨고 부모의 사후에는 3년간 시묘생활을 하여 주변에 효성의 本이 되었다. 후에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그의 이러한 효행이 유림들의 추천을 받아 현재 충효단에 향사되고 있다. 이후 이 마을에 함평 이씨, 광산 김씨, 진주 강씨 등이 들어와 살고 있다. 참고로 무안에서 하동 정씨의 집성촌은 이 마을을 포함하여 동암4리 영해촌이며 현경면 평산리 평산마을에 몇 가구가 살고 있다." - 무안문화원
운남면 연리 운남동을 거쳐 저동마을로 들어와 하동 정씨 세장산碑 앞을 거쳐왔다. 양파 모종들이 모판에서 자라고 있다.
청정해역 탄도만을 뒤로하고 삼면이 비옥한 토지로 둘러싸인 인심 좋고 살기 좋은 우리 마을은 약 400년 전부터 마을 전체가 모시풀을 재배하여 모시지라 불렸으며 이후 저동(苧洞)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형성은 조선 숙종 때 河東 정씨 鄭時哲(1704-1786)이란 분이 가까운 함평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형성되었으며 현재는 하동 정씨, 함평 이씨, 광산 김씨, 진주 강씨 등이 서로 도우며 열심히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의 주요 유적지로는 1906년에 세워진 충효사가 있으며 약 700~800년 되는 팽나무를 마을 수호신으로 삼아 매년 보름 정월이면 당산제를 모셔왔으며, 팽나무 한 부위에 물이 고여 이 물을 마시면 만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부락민은 물로 인근 주민까지도 떠다 마셨다고 한다. 우리마을에서는 군에서 지원하고 주민들의 피나는 노력과 각향 각지에서 애향심을 가지고 협조해 주심에 힘입어 마을회관과 주민 편의시설이 완공 보게됨에 우리는 윤리도덕과 효친사상, 상부상조의 깊은 뜻을 천추만대에 이어가리라. 2009년 8월 28일 저동마을 주민 일동
서해랑길은 저동마을회관 옆 골목으로 나가 들녘으로 이어진다
저동앞들 농로를 따라 탄도만 해안으로 나간다.
서해랑길은 저동앞들을 거쳐 앞쪽 탄도만 해안으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탄도만 저동방조제로 나가 제방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시점 1.7km, 종점 17.8km, 조금나루해수욕장 8.2km 지점이다.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곳은 무안군 운남면 내리, 중앙은 신안군 선도, 오른쪽은 무안군 망운면 탄도이다.
왼쪽은 신안군 선도, 그 오른쪽 앞은 망운면 탄도, 중앙 맨 뒤는 해제면 창매리, 오른쪽은 망운면 송현리 조금나루이다.
왼쪽에 망운면 송현리 송현마을, 그 오른쪽에 유종마을과 성동마을, 그 오른쪽에 용동마을, 맨 오른쪽 구릉은 운남면 하묘리 두곡마을이라고 가늠한다.
제방길을 따라 운남면 하묘리 두곡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탄도만 해안 제방길에서 남쪽 내륙을 바라보니 운남면 하묘리 팔학마을이 가늠된다.
"팔학마을의 형국이 학과 관련이 있는 마을인 팔학은 운남 면소재지에서 77번 국도를 따라 망운 방면으로 1㎞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형성되었다. 행정구역명은 운남면 하묘 3리 팔학마을로 도림동, 팔학, 참삯골로 이루어졌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모양이 학이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해서 ‘팔학동’이라 불렀다고 하기도 하고 다른 의견도 있다. 예전에는 마을 주변에 아름드리 참솔나무가 울창히 자라고 있었는데 그 소나무 위에 학이 살고 있어서 팔학동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앞이 학의 목, 마을 중앙이 학의 몸통, 마을 동쪽과 서쪽 주변이 학의 날개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 8마리의 학이 날아와 살고 있었다. 조선시대 영광군 고잔면에 속해 있을 때는 팔학교라 했다가 무안군 망운면으로 편입되면서 팔학동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앞에 칠면초가 자라고 있고, 뒤쪽에 조금나루해수욕장이 길게 이어져 있으며 오른쪽은 망운면 송현리 일대이다. 중앙 왼쪽 뒤에 해제면 창매리와 그 왼쪽에 신안군 지도가 가늠된다.
운남면 연리에서 하묘리로 넘어왔다. 오른쪽 뒤에 운남면 내리가 바다로 돌출하여 곶(串)을 형성하였다.
하묘리 서쪽 탄도만 해안의 제방길을 따라 두곡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제방길에서 해안을 벗어나 앞에 보이는 축사 위 언덕으로 이어간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소먹이로 사용되는 곤포사일리지들이 널려 있다. 곤포사일리지에 '소풀'이라고 쓴 것이 마음에 든다. 중앙 뒤에 보이는 마을은 운남면 하묘리 팔학마을이라고 가늠한다.
대형 축사 앞을 거쳐 언덕으로 올라간다.
대형축사 앞으로 가면서 뒤돌아보면 하묘리 둔전(芚田)마을이 보인다.
"둔전(芚田)마을은 하묘2리에 속하는 마을로 운남면소재지에서 망운면 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은 동아실, 산중, 새터, 둔전, 와우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지형은 태극혈로 물과 산이 태극 모양으로 조화를 이루며 마을을 감싸며 돌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이씨들이 살았으나 현재는 살지 않고 남원에서 살던 김해 김씨 김상경(자-익충, 호-수진제. 1574-1646)이 부친의 묘지를 이곳에 잡으면서 김해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무안지망집의 기록에는 김상경이 천품이 뛰어나고 외모가 탁월할 뿐 아니라 조선조 대학자 하서 김인후의 자랑스러운 제자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한다. 또한 자라서는 경서와 군서를 섭렵하여 지략에 막힘이 없었고 식견이 풍부하여 말에 있어서 논리가 분명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동마을에 있는 충효사에 배향되고 있으며 무덤은 마을 뒤 松下山에 있다.
문헌을 통해서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영광군 망운면 屯田村으로 나온다. 1912년에 무안군 망운면 芚田洞으로 그리고 1917년의 자료에도 무안군 망운면 하묘리 芚田洞이 기록되어 있다. 특기할 사항은 조선시대에는 마을 이름이 屯田이고 일제 강점기 때는 芚田으로 한자 표기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 차이를 주민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다. 주민들은 ‘조선중엽까지 ‘金山’으로 불러왔으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여 ‘臥牛亭’이라 고쳐 부르다 ‘구스통(들샘)’, ‘장오래(쇠고예)’로 바뀌어졌으며 현재는 소가 먹는 풀밭이란 의미의 ‘芚田’이라 부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을 주변에 소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구스통이라는 소가 물을 먹는 샘인 갈샘(들샘)이 있으며, 소의 고삐를 끌고 가는 형국인 장오래가 있고 동편에 나있는 소의 뿔이라는 동각동 등이 있다. 또 다른 유래는 와우정을 왜우정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비를 만난 곳이라 해서 왜우정(倭雨亭)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변하여 와우정으로 했다고 한다." - 무안문화원
언덕에 김해 김씨 묘지가 있다.
"하묘리(荷苗里)는 운남면소재지에서 망운면 방면으로 1㎞ 가량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모습이 연꽃을 닮았다 하여 하묘리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망운면 소속이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곡리, 팔학동리, 도림동, 둔전동, 금산을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두곡, 둔전, 팔학, 원하묘, 신촌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 영광군 망운면에 두곡리, 둔전촌, 하묘촌이 나온다. 이어 1912년의 자료와 1917년의 자료에는 망운면 두곡리, 하묘리, 팔학동, 도림동, 금산리, 둔전동 등이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운남면 하묘리 두곡, 둔전, 팔학, 하묘, 신촌으로 나온다. 두곡마을 입구와 배나무정 등 하묘리 능선의 전체에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둔전마을에 김해 김씨 제각인 경헌재가 있다. 두곡마을에 김해 김씨 열부비가 있다." - 무안문화원
모종밭의 양파 모종을 양파밭에 옮겨 심어야 한다. 오른쪽 국도77호선 아래는 하묘리 동쪽 신촌마을일 것이라고 가늠한다.
운남면 하묘리 황토밭, 고구마와 콩 수확을 끝내고 양파 모종을 심을 것이다. 하묘리 서쪽 해안이 망운면 송현리로 이어진다.
운남면 하묘리 두곡마을로 이어간다.
"두곡(頭谷)은 하묘1리에 속하는 마을로 두곡과 샘건너, 꽃회사 마을로 이루어졌다. 두곡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운남과 망운의 경계 지점으로 망운에서 운남으로 들어오는 첫머리에 마을이 있다 해서 머리실(頭谷)이라 붙인 이름이다. 두 번째는 마을의 지형이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마을에는 지금도 동각골, 兩角洞 등 소의 뿔과 관련된 지명이 있고, 옆 마을인 둔전은 풍수지리로 봤을 때 와우정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소와 관련이 깊은 마을들이기 때문이다." - 무안문화원
운남면 하묘리 1063 지역으로, 시점 3.9km, 종점 15.6km, 조금나루해수욕장 6.0km 지점이다.
대형 축사 앞을 거쳐 언덕을 넘어 두곡마을로 들어온 길을 두곡마을에서 뒤돌아보았다.
두곡마을 위 언덕의 수확을 끝낸 콩밭에 차량이 거름을 뿌리고 있다. 이 밭에 양파 모종을 심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양파 모종 심기를 끝낸 양파밭에 스프링쿨러가 돌아가며 물을 뿌리고 있다.
운남면 하묘리 두곡마을길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건너편에 조금나루 모래밭이 길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국도77호선 공항로 서쪽 운해로를 따라간다. 지난 번 21코스 때 동쪽 운해로를 따라가지 않고 이 길을 걸었었다.
운해로에서 망운면 송현리 송현마을과 조금나루해수욕장, 그 왼쪽에 신안군 선도, 중앙 뒤에 신안군 지도가 가늠된다.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는 운남면 내리, 그 오른쪽 뒤는 신안군 선도라고 가늠한다.
운남면 하묘리에서 망운면 송현리로 넘어왔다. 지난번 21코스 때 오른쪽 목화농장 입구에서 왼쪽 국도77호선 지하통로를 통하여 운해로 동쪽으로 나갔었다. 이번에는 서은길을 따라서 황토골 명품시래기 방향으로 이어간다. 여기에서부터는 도로명이 운해로에서 서은길로 바뀐다. 서은길은 망운면 송현리 성동마을로 이어진다.
망운면 송현리 서은길의 농업회사법인 (주)지아이엘 앞을 통과한다.
망운면 송현리 서은길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운남면 내리와 그 왼쪽 뒤의 신안군 고이도, 맨 오른쪽의 신안군 선도가 조망된다.
왼쪽 국도77호선 공항로 오른쪽 서은로를 따라 황토골 명품시래기 앞을 거쳐 이곳으로 왔다. 왼쪽 도로표지판 뒤쪽 아래가 '꽃회사' 마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도로표지판 뒤로 보이는 산이 도대봉이며 그 왼쪽부터 청계만 해안이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양각동으로 불렸던 곳에 육종연구소인 꽃회사(flower company)를 설립하여 꽃씨를 채취했던 곳을 지금도 꽃회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꽃회사가 설치되었던 자리는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부분으로 등성이께로 난 도로에 서서 보면 양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육지의 폭이 좁은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꽃을 채종하기에는 최적지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재배했던 꽃은 다년생 화초로서 금계국으로 부르기도 하고 천일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제는 무안 지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특히 꽃회사 마을 아래에는 황금어장인 청계만이 연결되어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하묘마을에 커다란 포구가 형성되었다. 이 포구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운남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를 비롯한 상당부분의 화물을 실어 나르는 곳이었다." - 무안문화원
국도77호선 공항로 송현교차로가 앞쪽에 보인다. 그 오른쪽 운해로의 송현리사거리 용동마을회관 앞이 21코스 종점이다.
망운면 송현리 서은길을 따라 중앙에 보이는 송현보건진료소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에 보이는 마을이 송현리 성동마을이다.
"송현리(松峴里)는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면 쪽으로 2㎞ 가량 떨어져 있으며 좌우로 바다와 접해 있다. 이 지역은 소나무가 우거진 재(峙) 주변에 있다 하여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 하였는데 두모, 용동, 원송현, 성동 등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때는 영광군 망운면 지역이었다. 이후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유종리, 성동리, 두모리를 합하여 송현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1789년 호구총수에 영광군 망운면 斗毛村, 儒宗洞, 所落只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망운면 斗牟리, 儒宗리, 松峴리, 星洞으로 표기되었다. 이어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망운면 송현리, 유종리, 송현리, 성동, 두모리로 그리고 1987년에는 망운면 송현리 두모, 용동, 송현, 성동, 유종동으로 나온다. 원송현 마을에 당산제 제단을 포함하여 효자각과 2기의 비가 있다." - 무안문화원
송현보건진료소 앞 양파밭에서 여인들이 양파 모종을 심고 있다.
망운면 송현리 조금나루길 옆에 송현보건진료소가 자리하고 있다.
송현보건진료소 앞에서 국도77호선 송현교차로와 그 뒤쪽 운해로 송현리사거리를 가늠하였다. 송현리사거리 용동마을회관 앞이 서해랑길 21코스 종점이며 22코스 시작지점이다.
송현보건진료소 앞 조금나루길에서 북쪽을 조망하였다. 앞에 성동저수지, 그 뒤 왼쪽 탄도만 해안에 송현리 낙지공원, 탄도만이 동글게 돌아가고 왼쪽 뒤의 산은 해제면 창매리 중매산이라고 어림한다.
앞에 성동마을 버스정류소가 보인다. 조금나루길 왼쪽 송현교회 있는 쪽은 성동마을, 조금나루길 오른쪽은 유종마을이다.
"성동(星洞)마을은 조금나루길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 있다. 마을의 형성은 유종동 마을보다 늦었다. 최초의 입향조는 김해 김씨로 250여 년 전에 들어왔다. 원래의 마을 이름은 풍수적 지형을 바탕으로 서은동(鼠隱洞)이라 하였는데 마을의 지형이 쥐가 숨어있는 형국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실지로 맞은편 마을인 운남면 하묘1리 두곡마을이 고양이 형국(족제비형국이라고도 한다)으로 상극을 이루고 있다. 이런 이름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부르기 좋게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실지로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 처음으로 星洞이란 지명이 나온다.
성동마을에서는 한때 우환이 계속적으로 발생해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이유는 마을의 풍수적 지형에서 비롯된다. 즉 주민들은 고양이가 노려보는 형국의 지형적인 약점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을 앞 공유지 백호등이라 부르는 곳에 소나무로 조성된 비보 숲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공유지가 개인 소유로 바뀌고, 이후 소유자가 경지정리를 이유로 비보 숲을 베어버리고 농지로 만들자 그때부터 마을에 우환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실지로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성동 출신 마을 이장들이 어려운 일을 겪었다. 해서 지금까지 송현4리의 이장은 유종동에서 맡는다고 한다." - 무안문화원
조금나루길 오른쪽, 성동 버스정류소 뒤의 마을이 유종(儒宗)마을이다.
"성동(星洞)은 송현4리에 속하는 마을로 조금나루길을 사이에 두고 성동과 유종동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儒宗洞은 조금나루길 오른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서해바다를 등지고 형성되었다.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선비 儒자를 쓰는 마을 이름이다. 실지로 이 마을은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금성 나씨로 300여 년 전에 들어왔다. 마을이 분지형으로 물의 흐름이 마을을 안고 돌아가며 마을 앞에 소류지가 있다. 마을 뒤의 능선은 중구등이라 하는데 망운면에서는 가장 높은 지대다. 그곳에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태풍에 고사되었다. 동쪽으로 새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儒宗洞으로 나오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과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는 儒宗里로 나온다." - 무안문화원
왼쪽에 송현교회, 쉼터정자 뒤에 송현4리마을회관이 있다. 송현교회가 있는 자리를 문랫등(물렛등)이라 하였다고 한다.
"1997년에 폐교된 망운 서초등학교 입구에 ‘문랫등(文來燈)’ 또는 '물렛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현재는 교회가 들어서 있지만 과거에는 밭이었다. 물레는 솜이나 털 따위의 섬유를 자아서 실을 만드는 수공업적인 도구로 시골에서는 중요한 재산목록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文來라는 지명대로 학교가 들어왔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 물렛등에는 고인돌로 여겨지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물렛(문랫)돌이라 하는 것으로서 한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마을에 우환이 연이어 일어나고서부터는 신성시 여기는 돌이 되었다. 물렛돌은 물레가 돌아가면서 내는 소리와 물렛틀이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데 가롯대 위에 놓여지는 넓적한 돌이다." - 무안문화원
송현4리는 조금나루길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성동마을, 북쪽은 유종동마을로 나누어진다.
송현보건진료소 앞에서 조금나루길을 따라 성동 버스정류소, 송현4리마을회관 앞을 거쳐왔다.
앞에는 망운면 송현리 남쪽 해안, 건너편은 오른쪽 운남면 내리에서, 연리 저동을 거쳐 왼쪽 하묘리로 이어지는 해안과 마을들, 오른쪽 맨 뒤에 대박산이 가늠된다.
건너편은 운남면 내리 해안이며 왼쪽 뒤에 대박산이 가늠된다.
효자는 이웃어른에게도 효도하나니 이는 인륜도덕의 근본이니라. 송현 노인정을 건립함에 솔선수범으로 물심양면 협찬하여 경로효친의 정신을 앙양함은 물론이요 장래에 우리 마을의 충효애향정신에 교훈이 되었기에 그 성의를 높이 찬양하여 각석명기하나이다. 건립 1984년 12월, 중수 1987년 11월
조금나루길에서 송현길을 따라 송현마을회관 앞으로 왔다. 송현마을회관은 원송현마을회관이라고도 한다.
"송현(松峴)은 원송현 마을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송현3리에 해당한다. ‘솔애기’ 또는 ‘송악’으로 불려지다가 현재의 이름인 송현으로 바뀌어졌다.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쪽으로 3㎞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우회전하여 다시 2㎞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송현은 송림이 많은 고개 밑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솔고개’ 또는 ‘솔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지금은 밭을 경작하기 위하여 소나무를 많이 없애버려 마을 뒤는 민둥고개가 되었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소나무는 과거에 울창했던 소나무 숲을 연상케 한다. 실지로 마을 앞 조금나루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성인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감쌀 수 없는 크기의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림자만 해도 200평이 넘는다는 나무였다. 그런데 일제 말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강제로 송진 채취를 하게 되어 이 소나무도 그때 피해를 입어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이 소나무를 일본인들이 자를 때 소나무가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소나무는 인근 바다에서 고기잡는 어부들의 등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으며 마을 이름을 ‘松峴’이라 하는 원인 제공을 하기도 하였다." - 무안문화원
건너편에 조금나루해수욕장, 그 뒤쪽에 풍력발전기가 보이는 운남면 내리, 왼쪽 뒤 산봉이 솟은 곳은 신안군 고이도일 것이다.
오른쪽 운남면 내리에서 왼쪽 망운면 연리로 이어지는 해안이 길게 이어져 있고, 중앙 뒤에 솟은 산은 대박신일 것이다.
운남면 연리에서 하묘리로 이어지는 해안과 왼쪽 뒤는 청계면 도대봉일 것이라 추정한다.
운남면 하묘리에서 망운면 송현리로 이어지는 해안과 그 너머 톱머리해안을 가늠한다. 오른쪽 뒤의 산은 청계면 도대봉이다.
송현정자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면 송현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로는 조선시대 중엽 김해 김씨의 김진관(1640-1703)이 인조반정 (1623년 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의 혼란함을 피해 1657년 충남 서천에서 이 마을로 이주해 왔다. 조금 지나서 신창 맹씨의 맹윤창(1655-?. 자-지승)이 현재의 마을 뒤 '뒷등' 또는 '도둑골'이라 부르는 곳에 터를 잡았다가 도둑이 많아 살지 못하고 이 마을로 이주해 살았다. 해서 지금도 이 마을의 대표적인 성씨가 김해 김씨와 신창 맹씨이다.
마을 뒤 '진작몰' 또는 '솔마루'라 부르는 곳에는 당산제를 모시는 단이 있다. 이 당산제는 입향조가 마을에 정착할 때 심었던 팽나무가 神木이 되어 그 나무 아래서 지낸다. 원래는 정월 초사흘에 지냈는데 현재는 정월 보름에 지낸다. 제를 지낼 때는 제관을 뽑는데 뽑힌 제관은 궂은 일을 보아서도 안 되며 비린 것을 먹어서도 안된다고 한다. 이렇게 정성을 드림으로써 마을에는 평화가 오고 전염병이 들지 않으며 풍년이 온다고 주민들은 굳게 믿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마을 농악대가 있어서 전국대회에 마을 단일팀으로 출전까지 하였으나 현재는 젊은이들이 없어 그 맥이 끊어짐을 아쉬워하고 있다. 마을 뒤에 교회가 있었으나 현재는 성동의 문래등으로 옮겨갔다. 마을 첫들머리에 신창 맹씨 세장비가 있다. 1996년에 세운 비로 맹씨의 유래와 이 마을 입향조 맹윤창 공의 사적을 기술하였다. 옆에는 1969년에 세운 ‘학송맹공실행비’가 있다. 조금 지나면 김해 김씨 입향조인 ‘통훈대부김진관유허비’가 1986년에 세워졌다. 이어 1945년에 세워진 효자각이 있다. 효자각 안에는 ‘임하김효자비’라는 비석이 있다." - 무안문화원
송현마을 앞 해안에 방파벽이 조성되어 있는데 벽화와 짧은 글이 적혀 있다.
정자에서 약 10여 분 동안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으뜸 '元'을 쓴 '원송현경로당(元松峴敬老堂)' 표지판이 붙어 있는 집이 있다. 아마도 예전의 경로당이었던 듯하다.
해안길 '송현길'을 따라 조금해수욕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건너편에 조금나루해수욕장과 조금나루유원지, 풍력발전기가 있는 운남면 내리, 왼쪽 뒤에 산봉이 솟은 곳은 신안군 고이도.
송현마을 앞 해안길 '송현길'을 따라 건너편 왼쪽의 조금나루유원지와 조금나루해수욕장으로 이어간다.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야만 비옥한 땅이 된다."
조금나루통합수산과 대진수산이 자리하고 있다.
송현회관 표석과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송현길에서 조금나루길로 나와 조금나루해수욕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조금나루를 왼쪽으로 돌아서 오른쪽으로 나온다.
조금나루방파제로 이어지는 해안에 모래사장이 아름다웠는데 모래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송현마을 앞에는 조금나루라는 이름의 해수욕장이 있는데 예전의 명칭은 십리에 걸쳐 모래사장이 뻗어 있다 해서 '명사십리'였다. ‘조금’은 潮水가 가장 낮은 때인 ‘음력 매달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을 이르는 말로 그 유래를 보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을에서 이 나루를 건너려면 물이 제일 많이 빠질 때인 조금에 가서야 건널 수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하나는 조금이 되면 물이 빠져 마을 앞 섬인 탄도와 선도를 건널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 번째는 조금이 되면 칠산바다 등 인근 서해안에서 고기 잡는 배들이 이 나루로 들어와 어구를 손질한다든지 필요한 물품을 망운장에서 구입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금나루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건해풍을 막아주는 방파제였다. 해서 정월 보름이 되면 모든 주민들이 삽을 들고 나와 '해모가지'라 부르는 곳의 제방 보수공사를 하였다. 왜냐하면 방파제 밖의 물이 안쪽으로 넘어와 안쪽의 물과 합쳐지면 마을에 피해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정성을 다해 울력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 나루가 학 형국이라 명당 자리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선도 사람이 몰래 묘를 쓴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沙頭穴에 해당되어 주민들이 정착하여 살 곳은 못된다고 한다.
이 나루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백년초 선인장과 해당화가 많이 있었으며 드넓은 모래사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유원지가 되면서 사람의 왕래가 잦아지자 민간요법에 선인장과 해당화가 좋다는 말이 퍼지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또한 모래톱이 형성된 이유는 조류의 변화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마을 뒤 구랫골의 납싹(납짝)바위의 영향으로 조류에 변화를 주어 생긴 일이다. 사실 이 나루에 둑이 생기고 인위적인 시설물이 들어서면서 모습이 달라지고 있는데 한쪽에선 이미 모래의 유실이 가속화되어 뻘과 자갈들이 드러나고 있다." - 무안문화원
오른쪽 운남면 하묘리에서 왼쪽 망운면 송현리로 이어지는 해안선이 길다. 해안 너머 동쪽은 망운면 피서리 톱머리해안이 있을 것이며 맨 오른쪽 뒤의 산봉은 청계면 도대봉이다.
오른쪽 송현마을 송현길에서 조금마루길로 나와 왼쪽 조금나루유원지를 지나서 조금나루방파제로 향하면서 뒤돌아보았다.
방파제 뒤 바다 너머는 운남면 내리 해안이다.
건너편은 운남면 하묘리 해안으로 팔학마을, 둔전마을, 두곡마을이 해안 뒤에 자리하고 있다.
망운면 송현리 송현마을 해안이 길게 이어져 있다. 송현마을과 조금나루는 썰물 때만 이어졌으나 이제 제방으로 이어져 있다.
맞은편 오른쪽 운남면 내리에서 왼쪽 운남면 연리로 이어지는 해안이 펼쳐져 있다. 중앙 왼쪽 뒤 뾰족한 산봉은 대박산, 왼쪽 맨 뒤 뾰족한 산봉은 압해도의 금산, 오른쪽 풍력발전기 뒤의 산봉이 있는 곳은 신안군 고이도일 것이라 추정한다.
왼쪽 풍력발전기가 있는 곳은 운남면 내리, 그 오른쪽 뒤는 신안군 선도, 중앙 맨 뒤는 신안군 지도, 오른쪽 조금나루선착장 뒤는 무안군 망운면 탄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