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이해란
결국
분별하지 않음을
뜻한다.
사람을 볼 때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영리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으로
나누지 않고
다 같은 존재로 보는 것이며,
꿀은 달고 맛이 좋지만
다른 무엇은 쓰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음식을 먹어도
흡수하고 배설할 때는
모두 같은 것이 된다.
그것이 하나인가, 여럿인가?
이 유리잔은 큰가?
작은 컵에 대해서는 그렇다.
주전자 옆에 놓이면 그렇지 않다.
우리의 욕망과
무지, 분별심은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왜곡한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하는 세상이다.
주전자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다만 우리가
이런저런 식으로
느낄 뿐이다. (.....)
모든 존재의 밑바탕에
있는 같음을 보라.
그들 모두가
참으로 동등하며,
참으로 비어 있음을 보라.
그러면 겉으로 보이는
차이점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음에도
집착하지 마라.
왜 설탕은 달고
물은 아무런 맛이 없는가?
원래 성질이
그러할 뿐이다.
생각과 고요함,
아픔과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생각이 그치기를
바라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다.
때로는 생각이 있고,
때로는 고요함이 있다.
우리는 둘 다
본래 일시적이며
불만족스럽고,
영원한 행복의 원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계속 근심하면서
“괴롭다.
생각을 멈추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그릇된 이해는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간혹 생각이
곧 괴로움이며
우리에게서
현재를 빼앗아 가는
도둑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멈추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낮은 밝고 밤은 어둡다.
이것이 그 자체로 괴로움인가?
우리가 괴로워지는 것은
지금 있는 현실을
다른 상황과 비교하며
지금과 다르기를
바랄 때뿐이다.
궁극적으로
현실은 있는 그대로 있다.
비교하니까 괴로워지는 것이다.
-아잔 차, <아잔 차 스님의 오두막> 중에서
카페 게시글
[아잔차 스님]
[아잔 차 스님의 오두막] 바른 이해
山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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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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