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으로 인해 복음전도를 통한 내면적 신앙의 전파보다 교육이나 의료사업 등 간접적 선교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초기의 개종자들도 실존적 감화나 성령체험 같은 내면적 신앙보다는 현실 구원적이고 도덕적인 의식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900년 초 기독교인들은 기존의 신앙행태로는 그 실망과 좌절을 극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일제의 정치적 탄압에 의해 곧바로 교회의 말살로 직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시기에 마침내 회개의 기도소리는 1907년 평양에서 절정에 이른다. 평양사경회의 실제적인 지도자는 길선주장로였다. 첫날부터 성령에 사로잡힌 평양사경회는 집회가 계속될수록 더욱 고양되었다. "마지막 집회가 끝나고도 7백여 명이 기도를 하려고 남았다. 순간 이 운동의 물결은 숭실, 광성 등 미션계 학교 학생들을 통해 전도운동으로 전개되었고, 특히 여자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은 여성들은 자신들의 가족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평양 대 부흥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새벽기도의 시작이다.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의 토착적 신앙형태로 1907년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또한 성경공부 기도회 강화로 교회 급성장 계기 마련 등이다. 평양 대 부흥 운동은 당시의 한국교회의 영적인 위기 상황과 맞물려 교회의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활로의 모색이었다. 이는 적극적이며 신비 체험적인 한국인의 신앙 정조와 일치된 부흥운동이었다. 그 후에 한국교회의 신앙의 성숙과 양적 팽창은 모두 회개운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평양 대 부흥운동 그 뜨거운 열기는 나라 전역에 '하나 되자'는 일치감을 확산시켜 주었다. 이러한 일치감은 지역감정이 해소될 가능성을 보여 줬으며 이후 교파연합운동 활성화 되는 토대도 마련하게 된다. |
출처: 한마음 원문보기 글쓴이: steph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