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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온배움터의 가치와 정신을 같이 가진 또다른 배움터의 창립이 7월 17일 강원도 홍천에서 있었습니다. 그 뜻이 우리의 뜻이라 여기며 여기 글을 올립니다. 긴 글이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일독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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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누리움터의 삶과 얼"
최철호(밝은누리)
사람이 하늘땅을 터전으로 살아온 이래 오랜 세월 이어온 큰 가르침이 있습니다.
모든 고대문명, 동서양 종교와 철학이 동일하게 깨달은 진리입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생명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낱 생명이 지닌 한계를 자각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아가 겪는 제한된 경험을 넘어 온생명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는 은총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늘과 맺는 관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규정하거나 독점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욕망, 집단 이익, 명예와 권력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오만입니다. 첫 깨달음과 가르침을 배반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욕망입니다. 권력과 부를 거룩한 종교상품으로 치장하여 사치스럽게 탐닉하는 사교집단이 되어버립니다. 종교로 가장한 거대한 이익집단과 사교집단들이 만들어 내는 거짓입니다.
반면, 사람이 지닌 능력에 대한 환상에 빠져 하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으면, 아집과 오만으로 생명을 경시하는 문명을 낳습니다. 다른 생명을 자기 이익을 위해 함부로 대하는 병든 문명입니다. 아집에 갇혀 오만해지면 다른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감수성을 잃게 됩니다. 사랑은 돈에 지배되는 상품이 되고, 지배를 위한 환각도구가 됩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삶을 어리석게 여기고, 폭력과 죽임의 힘을 찬양하고,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강력한 군사력만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환상에 빠져 오직 부국강병을 향한 경쟁에 함몰됩니다.
지식은 다른 생명을 지배하는 경쟁도구와 권력이 되고, 자본과 권력에 복무하는 학문을 탐닉합니다. 훌륭한 개별 학문 성과들이 집결되는 곳은 더욱 강력한 군사력과 패권을 키우는 곳이고, 생명조작과 생명정보 통제 등 은밀한 지배 전략이 작동하는 곳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칠 줄 모르는 자본의 자기 파괴적 증식과 함께 갑니다. 관계 맺는 마지막 한 명까지 경쟁상대로 대하게 하는 질서는 결국 자기 자신도 온전한 생명으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죽임의 질서입니다. 모든 생명을 상품관계로 만들어 버립니다. 돈으로 모든 생명을 지배하는 폭력입니다. 모든 관계가 상품화 된 곳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가장 값싼 상품입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생명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고통당하는 생명을 구원하고 해방하여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 삶을 요청합니다. 정치 사회 교육 등 모든 삶을 관통하는 실천윤리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늘 뜻과 성품을 받아 삽니다. 하나님을 모신 삶입니다. 사람은 하늘 명을 품고 태어나 그 뜻을 따라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삶을 삽니다. 생명에 깃든 명을 깨닫고 서로 일깨우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삶입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배움 숲에서 서로 살리며 삽니다.
하늘 땅 사람은 모든 생성변화의 기본 작용이자 토대입니다. 사람은 생명 근원인 하늘에서 생기 받고, 생명 토대인 땅에서 삽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 흙 물 바람이 어우러져 사람이 살기 좋은 터에 마을이 생깁니다. 사람은 마을이라는 관계를 통해 사회주체로 확장됩니다.
참된 세계화는 마을에서 시작되고 세계화를 통해 도달하는 곳 또한 마을입니다.
마을은 가족 관계에 함몰되거나 국가라는 허상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관계입니다.
마을 없는 가족은 자기집착과 이기심을 강화하는 토대입니다.
가족은 한 생명이 사람으로 성숙하는 가장 근원되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가족이기주의는 그 어떤 이기심 보다 더 강력하게 참 사람됨을 방해합니다.
마을 없는 국가는 몸에서 괴리된 허상에 길들여지게 하는 뿌리 깊은 원인입니다.
삶에서 괴리된 학문을 탐닉하고, 실제 삶에 쓸모없는 기술을 숭상합니다. 몸과 마을이라는 삶의 구체적 토대에서 괴리되어 생명 감수성을 잃고 폭력과 전쟁이 일상화되는 문명을 만들게 됩니다. 거대한 자본이 투여되는 학문과 과학기술들이 결국 전쟁과 제국, 자본증식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현실입니다. 이 죽임의 질서와 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서로 돕고 나누며, 먹고 입고 살고 즐기는 삶을 스스로 일구는 마을공동체들이 스스로 주체로서 연대하는 것이 새로운 생명문화의 관계 양식입니다. 생명평화는 몸과 마음에서 시작되어 마을공동체로 확장됩니다. 몸과 마을에서 증언되는 생명평화는 지구 곳곳에 있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돕는 삶을 끝없이 갈망하며 확장됩니다. 다양한 생명들이 곱게 어울리는 것이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을 향한 끝없는 갈망은 생명평화를 구현하는 동력입니다.
철학 종교 역사는 얼 밝히는 공부입니다.
하늘땅이 사귀며 이루는 생성변화 이치를 깨닫고 통찰하며, 이를 바탕으로 자기를 비롯한 모든 생명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키웁니다. 삶의 구체적 맥락과 연관시켜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은 관념 유희에 빠지거나 다른 생명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무기가 됩니다. 우리 몸과 얼의 바탕이 되는 역사를 이해하고 미래 희망을 역사에 담아내는 능력을 키웁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얼빠진 삶이 됩니다. 얼빠진 사람은 죽임의 권세, 자기집착, 과도하고 부당한 경쟁, 거짓되고 부당한 힘에 지배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체념합니다. 오히려 지배받는 것에서 안정을 느끼는 얼빠진 병을 앓게 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창조성과 주체성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생명으로 사는 것은 죽임의 권세에서 해방된 삶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하늘 뜻을 깨닫는 얼나, 참된 나로서 스스로 주인 되어 사는 삶입니다.
우리 겨레는 찬란한 고대문명을 개척하며 대륙문화를 선도한 역사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소중한 역사를 잊은 채 뿌리 깊은 사대주의 역사관과 문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고려 말부터 지배층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사대주의 역사관과 문화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문제 자체를 인식하기 어려운 깊은 정신 질병이 되었습니다.
주체로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제국의 영향 속에서 분단과 전쟁, 냉전을 겪어 온 우리는 아직도 얼빠진 정신의 고통과 허망한 갈등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기회주의적 처신이 삶의 현실적 지혜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조와 정절을 지키는 줏대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겨레 역사와 얼을 알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국수주의라는 또 다른 망령을 불러들이려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민족주의, 애국심이라는 것을 이용해 국가권력을 탐닉하고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지배자들의 간교한 술수를 주의하되, 주체적 자각, 지조와 정절로 겨레의 역사와 얼을 지키고 인류와 온생명의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그 삶의 가치와 얼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하늘을 모신 존재로서 참된 나, 얼나로 살아야 한다는 생명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는 기본 되는 성찰이자 실천입니다. 하늘 뜻을 받은 생명임을 깨닫고 서로 살리는 생명평화를 구현하는 출발입니다.
서양학문 중심의 과도한 사대문화와 사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배울 것은 그들이 말하는 대안이 아니라, 그들이 앞서 만들어낸 산업문명과 자본지배 문화의 폐해를 분석하는 정교함과 정직한 반성입니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전 세계에 강요했던 문명이 생명평화를 담보할 수 없는 죽임의 문명이라는 양심 있는 고백은 우리에게도 유익한 내용입니다. 주체로서 성찰하지 못하고 헛된 환상으로 조급하게 내몰렸던 우리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를 총체적으로 성찰하는 냉철함과 정교함이 필요합니다.
삶과 문명의 대안은 주체적 창진성으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사회 진보와 개혁 방향을 제시하려는 지식인들은 이 지점에서 매우 신중하고 정직한 자기 성찰을 거쳐야 합니다. 서양 학자들이 제시하는 관념을 익히느라 소중한 젊음을 바쳐온 젊은 지식인들은 그 지식이 내용의 진보성과 무관하게 그저 시장질서에 편입된 지식상품으로 유통되며 자본증식에 복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혀 다른 삶과 사상 맥락에서는 오히려 지배를 강화하는 담론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문화 사회 운운하며 이 엄정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창백한 지식인의 무지이거나 비겁함입니다. 다문화, 다원성 담론으로 세계 곳곳의 소외되었던 문화와 삶을 존중하려는 자들이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소외 되었던 자기 문화와 주체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개화기의 사대적 지식인들의 마음의 질병이 다시 진보와 개혁의 이름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관념은 삶에서 시작되어 삶을 해석하고 더 나은 삶을 추동하는 것으로 돌아올 때, 살아있는 관념이 됩니다. 이론이 실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이론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대안은 이 땅 생명들이 주체로서 우리 삶에 내재된 창조성을 동력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땅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쳐온 과도한 유학 중심의 사대문화와 사상도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중화사대문화와 일제식민사관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겨레 고대역사와 사상 문화를 발굴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하늘땅 생명이 창조되었던 태곳적 기억을 간직한 겨레 문화와 말글에 담긴 얼을 소중하게 배우고 이어갑니다. 말글에는 겨레의 얼이 담겨 있습니다.
통치자들의 지배윤리로 전락해 관념화 되어버린 유학 본래 가르침을 분별하고, 부당하게 소외된 노장과 묵가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배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륙의 다양한 사상을 합류시켜 새로운 사상을 창조했던 송대의 신유학은 조선왕조 500년 운명과 함께 그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그 거대한 문명 전환기에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매우 강력한 창조적 영감과 실천윤리를 제시하며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유불선을 통합하며 서학의 문제의식을 주체적 자각과 창진성으로 꽃피운 동학을 비롯한 실천적인 사상운동들도 망국의 아픔을 변혁의 희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문명을 개벽하는 웅장한 전망을 품고 신음하는 백성과 뭇 생명을 구하는 구체적인 실천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제 강점기 만주를 중심으로 끈질기게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은 잊을 수 없는 현대사의 근간입니다.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교육입국운동은 지식인들의 무수한 변절과 친일 명분이 되었지만, 명동학교와 오산학교 운동 등에는 계승해야 할 매우 중요한 역사가 있습니다. 대안적 가치를 구현하는 교육운동은 새로운 가치를 실천하고 자립과 자치를 구현하는 마을공동체의 삶에 터할 때 생명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명동학교는 명동마을을 토대로 가능한 것이고, 오산학교는 용동마을에 터해 가능했습니다. 교육 해방 평화라는 것은 메마른 제도나 추상 관념이 아니라 마을이라는 구체적인 삶에서 선취되고 증언되는 살아있는 사건입니다.
몸을 닦는 것은 마음을 닦는 것과 함께 이뤄질 때 온전합니다. 말과 글을 익히고 활용하는 것과 무예를 익히고 수련하는 것은 모두 몸과 마음의 예술입니다. 예술은 몸과 삶에 터해 만들어 내는 모든 고운 어울림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이듯 문무와 예술은 하나의 배움입니다. 하늘땅의 사귐과 생성변화의 이치를 토대로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 철학이고 수신입니다.
하늘땅에서 가장 근본 되는 삶이 농사입니다. 농사는 하늘땅살이 입니다. 숭고한 생명 살림이며, 하늘 땅 사람이 어울리고 서로 살리는 아름다운 예술입니다. 자기 몸이 터한 흙에서 자란 곡식을 먹고 그 땅에서 맺힌 씨알을 먹는 삶이 건강한 삶입니다. 우리 몸을 살리고 남은 똥과 오줌은 흙으로 돌아가 거름되어 흙 생명을 살립니다. 우리는 다시 그 생명을 먹고 살아갑니다. 농사는 하늘 땅 사람이 하나인 것을 깨닫고 배우고 익히는 지극히 숭고한 삶입니다. 농, 생산, 살림에 토대한 삶이 모든 삶과 학문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통과 소비는 생산을 토대로만 존재합니다. 유통과 소비가 생산을 지배하는 현실은 생명을 경시하는 문명임을 스스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기술은 삶의 실제 필요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삶의 실제 필요와 소통되지 않는 고도의 기술이라는 것은 결국 권력과 자본의 필요를 채우는 허상입니다. 과학은 삶의 실제 필요를 해결하는 능력을 토대로 다양한 사건들을 일반화를 통해 이해하고 예측하려는 노력입니다. 수학은 정교한 추상 관념인 수로써 하늘땅 생성변화 이치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예술이자 철학입니다.
가르치고 기르는 일의 목적은 배우는 이가 지닌 주체적 창진성을 북돋고 이끌어주는데 있습니다. 가르치는 이들이 이미 그런 생명력으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참된 가르침과 배움은 죽은 지식, 생기 없는 관념, 체념을 조장하는 지혜, 관습적 삶을 거부합니다. 모든 지적 혁명은 생기 없는 관념에 도전하는 것이며, 지루한 삶에 새로운 생기를 부여하는 도약입니다.
지식과 관념을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몸으로 익히게 돕습니다. 생기 없고 쓰이지도 않는 지식을 대량으로 주입시키고 입시와 취업을 위한 부당한 경쟁으로 생기를 잃게 만드는 교육은 병든 문명의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추상능력은 더 좋은 삶을 추동하는 이성의 기능입니다. 모든 관념과 사상은 추상작업을 거친 것입니다. 모든 과학의 설명체계는 특정한 형이상학과 우주론에 토대합니다. 광범위한 일반원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우주론과 철학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모든 과학이 지닌 한계와 추상적 일반화의 불가피성이 있습니다.
삶과 경험의 통전성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관념과 지식체계는 추상과정에서 배제되고 생략된 삶과 경험의 통전성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재해석 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삶에서 생성된 관념을 다시 삶으로 귀환시켜 다양한 삶에 역동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수학은 하늘땅에 담긴 수적 아름다움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창출해낸 지성의 도구입니다. 하늘 땅 사람 관계에서 도출되는 셋 하나는 동서양 고금이 동일하게 깨닫고 해석해 낸 가장 기초되는 수의 원리입니다. 동서양 종교와 철학이 동일하게 구성해 낸 신에 대한 가장 근본 되는 이론적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늘땅은 수적 아름다움으로 물들어 있기에 일상생활의 수량적 측면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출발입니다. 그러나 수량적 추상 작업은 어디까지가 진정한 인과관계인지 우연적 일치에 불과한 것인지 추측할 수는 있지만, 결국 시간을 배제한 결과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진성이란 새로운 가치에 터 해서 현재 문제와 씨름하는 것이며, 이성의 모험으로 낡은 문명의 관습적 해답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과 결과에만 만족하고 관습적 방법을 안전하게 반복하려는 것은 생기 잃고 쇠퇴하는 문명의 징표입니다.
지식이 범람하는 정보화 사회에서 단지 많이 알고 배운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은 의미 없는 배움입니다. 어떤 관념이든 그것이 생성되었던 삶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현재 자기 삶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념을 다양하게 연관시키고, 자기 삶의 현실, 꿈과 필요에 주체적으로 연관시켜 새로움을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과거 지식은 현재 속에서 현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살아있는 의미를 갖습니다. 모든 사유는 현실을 기반으로 생성됩니다. 문학이나 역사 등은 현실을 파악하고 현재 삶을 개척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과거 사건이나 성현들과 교류하는 곳은 바로 현재입니다. 현재는 단순한 시점이 아닙니다. 과거에서 오는 영향과 미래를 향한 주체적 선택이 동시에 이뤄지는 살아 꿈틀거리는 과정입니다.
관념은 삶의 역동적 흐름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고, 삶에 새로운 역동성을 부여할 때 살아 있는 관념이 됩니다. 경험은 통전적이지만, 모든 지식은 추상적이고 부분적입니다. 학문들 간의 관계가 단절된 채 이뤄지는 지식은 오히려 생명에 위협이 되는 괴물을 만들게 됩니다. 삶과 경험이 통전적이라는 엄연한 사실은 지식과 교육이 통전적이어야 함을 규정합니다.
일반화는 매우 중요하지만, 일반 진리를 발견하려는 이해 작용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사실에 뿌리박고 있어야 합니다. 일반화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연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념 없는 경험은 맹목이고, 경험 없는 관념은 독단입니다.
일반성을 상실한 구체성은 맹목이고 구체성을 상실한 일반성은 독단입니다.
모든 관념과 지식에 통전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삶이며 생명입니다. 모든 다양한 학문은 이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관념, 지식, 교육, 학문의 비극적 분절화를 극복하는 공통 기반입니다.
관념을 생성하고 연관시켜 새로움을 창출하고, 관념의 효력과 아름다움을 친근하게 느끼는 감각이 중요합니다. 창진성이 발현되는 정신은 삶을 전체로서 통찰하고, 하나의 관념 체계와 다른 관념 체계와의 연관성을 포착하는 안목을 갖습니다. 추상과 일반화를 통한 이해력, 구체적인 사실들을 분석하는 능력, 실천력을 겸비한 정신입니다.
주체적 창진성을 구현하는 간결하고 소박한 심미적 정신능력은 품격이라는 정갈한 삶의 감각입니다. 내용을 알차게 하고 형식을 정교하게 하면서 동시에 내용과 형식의 어울림을 갈망하는 감각입니다. 그것은 몸으로 체득하는 것으로서 철저한 자기규율 속에서 시간과 재료, 삶을 낭비하지 않고, 항상 최선의 과정과 결과를 선호합니다. 예견된 목적을 달성해 내는 능력입니다.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드러나지만 직관적 판단력, 숙련된 능통함, 연관시키는 통찰, 내적 자기규율이라는 공통된 자질을 겸비합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정신의 가치는 지조와 정절을 지키는 줏대 있는 삶의 의지와 실천력입니다. 이는 정신의 궁극적 도덕성이자 진리에 터한 용기입니다. 지조와 정절을 지키며 줏대 있는 삶으로 뜻한 바를 이루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의지와 실천력은 여러 한계로 인해 연약하지만, 생명의지의 원천인 하늘을 공경하는 삶 속에서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의지와 실천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에 주어진 하늘 뜻을 깨닫고, 내적 자기규율을 증진하는 공부를 통해, 수많은 변수와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이루어내는 능력입니다. 타협하거나 방심하지 않고 중용을 지키며 목적을 달성하도록 추동하는 힘입니다. 결과와 그 효과를 예측하고, 유효한 전망을 설정할 수 있게 합니다. 예측 능력, 선견지명은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최상의 재능이며, 참된 배움과 익힘으로 갈고 닦는 가운데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참된 가르침과 배움을 위해 근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기관입니다. 학교들이 획일적 교육과정으로 졸업시키는 것은 생기 없는 교육의 전형입니다. 사람을 국가나 자본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이용하는 병든 문명에서 이뤄지는 반생명 현상입니다. 어느 학교나 세워진 이유와 필요에 따라 고유하고 독자적인 교육 과정,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한 교육개혁운동은 국가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결국 입시와 취업, 자본에 종속된 교육이라는 근원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러한 교육의 고유한 독자성은 다른 어딘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려는 내용을 삶으로 구현하고 그 가치로 삶을 추동해 가는 공동체 삶에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대안적 가치를 삶으로 구현하고 증명하며 또 다른 생기 있는 관념을 창출하고 연관시켜 내는 공동체 삶 자체가 결국 밝은누리움터의 고유한 교육 내용과 과정을 생성시키는 토대이며 능력입니다.
사람이 하늘땅을 토대로 살아 온 이래,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나 공감되어 오던 교육 이상이 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을 기르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내적 자기규율을 증진시키고, 경외심에 토대한 경건한 마음을 기르는 것입니다. 늘 더 나은 삶을 향한 지적 열정과 도약을 멈추지 않는 삶입니다. 경건한 마음은 현재 삶에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며, 온 생명으로 사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득한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오늘이라는 사건 속에서 영원한 생명이 움튼다는 생명사건의 경이로움을 깨닫는 삶입니다.
<밝은누리움터>는 농촌과 도시에서 생명평화를 구현하는 마을공동체를 회복하고, 먹고 입고 살고 즐기는 일상생활 속에서 서로 살리는 삶을 만들어가는 농도상생(農都相生) 마을공동체 운동을 토대로 세워진 배움터입니다.
1991년 청년학생 교육과 지도력 훈련으로 시작되어, 2001년 서울 북한산 <인수마을>, 2010년 강원도 <홍천 생명평화마을>, 2012년 경기도 군포 <수리산마을>, 2014년 경기도 양평 <지평마을>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을공동밥상, 마을신문, 지역NGO, 다양한 품앗이 등을 통해 삶의 실제 필요를 함께 해결하고 사라져 가는 ‘마을’의 가치와 의미를 회복하고자 힘씁니다. 각 마을은 공동육아, 품앗이, <마을배움터>를 통해 초등 이전까지 교육하고, 중등이후 과정은 <밝은누리움터(생동중학교+삼일학림)>에서 함께 교육합니다.
밝은누리움터는 청소년 청년 성인이 함께 하는 배움터입니다. 삼일학림은 학년 구분 없이 과목선택 학점제로 운영합니다. 하늘땅살이(농사), 집짓기(건축), 만들기(생활기술), 얼밝히기(철학,종교,역사), ᄆᆞᆷ살림(수신,양생), 고운울림(생활예술) 등이 필수과목입니다. 다른 나라말글, 수학, 과학, 사회, 경제 등은 선택과목입니다. 배우고 싶은 과목 개설을 요청하거나, 배우는 이가 스스로 기획하고 익힌 후 학점을 부여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역사와 문명 전환이 동시에 일어나는 큰 변혁기를 살고 있습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허망하게 울려 퍼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는 소리는 이미 우리 시대를 깊게 지배하고 있던 소리입니다. 우리 삶과 문명을 근원에서 성찰해야 함을 깨우치는 사건입니다. 큰 전환일수록 분별력이 중요합니다. 이전 시대의 과제는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지만, 전환시대의 과제는 현실을 변혁하는 것입니다. ‘학습과잉-사유빈곤-생명피폐’가 함께 전개되는 기이한 현상은 한 문명의 생명력이 소진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교육시장 상품으로 전락한 학습, 대입과 취업을 위한 경쟁 도구가 되어버린 교육은 진리를 향한 열정과 성찰, 참된 사유능력을 키울 수 없습니다. 배우는 이들의 고유하고 다양한 생명력을 시들게 합니다. 배움과 삶이 괴리되어 끊임없이 불안이 조장되고 창조성과 주체성을 훼손합니다. 참된 배움은 삶과 관념이 순환하며 생명력을 높이는 것이고, 다양한 생명들과 더불어 사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 믿습니다.
<밝은누리움터>는 생명기운이 더욱 힘차게 약동하게 돕고 가르칩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함께 커 가는 배움 숲입니다. 하늘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임을 자각하고, 주체적 창진성을 신명나게 구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하늘 땅 생명들과 더불어 사는 힘을 키우고, 평화를 위해 함께 실천합니다. 삶의 자기규율을 증진하는 배움과 익힘, 일상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기술을 배우고 익힙니다.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도 이뤄져 하늘 땅 생명들이 서로 어울리는 아름답고 밝은 누리로 움트라는 명받아, 함께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움터입니다. 온 누리에 하늘 영광과 평화가 꿈틀거리고 움트는 사건 속에 참된 삶, 참된 배움과 익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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