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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를 생각해 보라!
사도행전 7:17-19
스데반은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 그들이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가를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분이요, 조상들과 유대인들이 그토록 간절히 대망해 왔던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려고 했습니다. 동시에 이 예수를 배척하는 것은 지나온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자행했던 죄악을 답습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도 깨우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스데반이 사용했던 방법이 ‘표상’, 혹은 ‘예표’입니다.
‘표상’, 혹은 ‘예표’라는 단어는 기독교 교리와 신앙에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표상’이라는 말은 훗날에 일어날 일을 미리 그림자로 보여주거나 예고하거나 상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표상의 목적은 장차 일어날 일을 마음으로 미리 그려볼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구약성경 전체의 교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표상’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가리키는 표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표상들로 구성된 거대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표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의 ‘표상’은 다양한 형태를 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요셉이 형들에게 모진 배척을 받았던 일,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 그리고 그가 해낸 모든 일, 그것은 예수님의 비상한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를 읽어보면 장차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어떤 것인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표상’은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의 레위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레위기에 기록된 이 모든 제사법들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며,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구약의 제사법들이 오늘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레위기에 제시된 제사와 예물과 의식들은 모두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레위기를 그냥 읽으면 별로 와 닿지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레위기를 읽으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풍성한 구원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마침내 애굽에서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그 땅에서 나가게 된 의미심장한 날 밤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각 집의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라는 명령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이 피를 다 바른 후에 죽음의 사자가 애굽 전역에 두루 다닐 때,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은 지나감으로써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고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지 않은 집은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는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가 살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아닙니다. 그 집의 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던 집의 사람들만 살았습니다. 여기에는 애굽 사람들도 있었고, 다른 민족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자손이라도 이것을 우습게 여기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집의 장자는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완벽한 표상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의 피에 씻음을 받으면 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표상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표상에 관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그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표상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계시된 진리와 구원의 권유를 받지 못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떠나서는 결코 예수님에 관해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교훈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권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이 성경은 우리가 잘 알듯이 6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약 40여명의 저자들에 의해 1600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상당수가 각기 다른 시대에, 때로는 수많은 세월의 격차를 두고 살았던 이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같은 메시지로 일관합니다. 수많은 표상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리킵니다. 표상들이 많고 다양할 뿐 아니라, 기록된 시기와 저자가 각기 다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동일한 대형을 가리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예수님을 정점으로 표상들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표상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한 지점을 가리키는지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로 관통하는 거대한 메시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로 관통하는 거대한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은, 성경은 그저 인간들이 기록한 평범한 책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책이라는 것을 뚜렷이 입증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서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인간들이 어찌 예언할 수 있겠습니까? 살았던 시대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동일한 주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에는 한 가지 대답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표상들이 의미하는 목적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입니다. 이 열쇠를 간직한 채 구약성경을 다시 읽어보면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계획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표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본문으로 돌아와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모세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요셉에 이어서 세 번째의 인물로 바로 그 모세를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설교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스데반의 이러한 의도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모세의 중요성과 의미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모세가 그들이 배척하는 그 예수의 표상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라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대 민족의 정치․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불과 얼마 전에 나사렛 예수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스데반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그 교회를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교훈을 뿌리 뽑으려고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스데반은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낸 모세를 조상들이 배척했을 때와 똑같은 무지와 맹목을 답습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구약의 표상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표상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모세 자신이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날을 앞두고 이렇게 예언했는데, 신명기 18장 1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이 예언을 듣는 순간부터 위대한 선지자가 오실 날을 기다렸습니다. 신약시대에 살던 유대인들도 이 선지자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고 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혔을 때 인용했던 말씀도 바로 모세의 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스데반도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그리고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야곱의 자손 일흔다섯 사람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경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온 땅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양식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는 요셉이 총리의 지위에 올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힘입어 슬기롭게 가뭄을 헤쳐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자손 일흔다섯 사람은 요셉의 초청과 배려로 애굽에 내려와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풍족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애굽에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심히 많아졌습니다. 최초에 일흔다섯 명이 내려갔는데, 430년이 지났을 때 20세 이상의 남자만 약 60만 명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자손이 약 200만명 이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의 숫자는 민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430년 후 그들이 출애굽 할 때는 인구가 28,570배로 증가한 거대한 민족으로 번성하였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인구 증가는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심히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던 그때를 가리켜 스데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러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 이스라엘 자손이 거대한 민족으로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큰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아예 민족의 씨를 말려버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절망의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에서 깨달아야 하는 교훈은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시대와 지역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전체를 놓고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현실에만 몰두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의 현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현대인들은 오직 자신들이 어떻게 되는 것만 중요하고,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는 사실상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현대의 과학적 발견을 지나치게 자부하는 나머지 과거를 송두리째 무시합니다.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줄기차게 말하지만 실상은 과거로부터 진지하게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잘못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이 구절은 바로가 요셉에 관한 정보를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 요셉에 관한 이야기의 본질을 몰랐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누구인지는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애굽의 왕이 되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과거에 일어난 일은 다 그게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우리 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이든 분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다양한 표현들을 알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의 노인들은 ‘구세대’요, ‘고지식한 인간들’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심하게 표현해서 ‘노망’이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젊은이들은 ‘신세대’요, ‘생각이 트인 인간들’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만 바라봅니다. 애굽의 새 왕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편협한 역사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얻게 되는 큰 유익 가운데 하나는, 자기와 관련된 역사만 중요하다는 편협한 생각을 씻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 뒤에도 장구한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도 성경에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이 지혜가 여러분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입니다. 역사의 한 시점에 서서, 과거로부터 흘러오는 물줄기와 미래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본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둘째는, 역사를 오로지 인간 활동의 무대나 영역으로만 이해를 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문제는 과거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미래에 대해서도 눈을 감습니다. 역사의 종말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오로지 눈앞의 사건, 즉각적인 결과, 찰나적인 쾌락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 한 문장 안에 역사에 대한 인간의 좁은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의 새 왕은 자신과 자신의 계획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전역을 둘러보니 풍요로운 땅에 낯선 민족이 큰 규모를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분자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인구가 갈수록 증가하자 바로는 그들의 존재가 자기 왕국에 위협이 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들이 성가신 존재들이 되었구나. 제거해 버리자. 말살해 버리자.”
그러나 바로는 그 노예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아예 관심도 없었습니다. 요셉에 관해서도 알지 못했으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역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앞에 있는 시급한 현안을 처리하는데 골몰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재앙이 그와 그의 권력과 그의 모든 군대에게 닥쳤습니다. 이것이 바로의 가장 크고 심각한 잘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세상의 역사 안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굽에 새 왕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세속적인 역사의 시각으로 본다면 애굽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적 역사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인간의 계산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숫자로 증가한 것이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즉위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탄압하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계획하신 필연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어떤 박해나 탄압도 받지 않고 평안한 삶을 누렸다면 그들이 출애굽 할 생각을 했겠습니까? 결코 그들은 애굽을 떠나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계획하신 역사의 시간표 속에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그때가 가까웠음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즉위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극심하게 탄압함으로써 그들이 애굽에 대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원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한 마디로 세상 역사를 철저히 당신이 계획하신 그 계획에 따라 진행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오늘의 현대인들이 잊고 있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계획에 따라 흔들림 없이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사도행전 7장 6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였고,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였으며,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간 족장들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족장들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앞날의 사건들을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모두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미래까지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처음과 끝을 다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장차 한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그의 자손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작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나님이 세우신 원대한 구속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세계는 이 방향으로 계속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역사에서 인간의 행위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좀 더 깊이 성찰하는 순간, 역사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역사를 지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교훈이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 그리고 모세의 이야기에 담겨 있습니다.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때가 정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에 무슨 일을 하실 것을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정하신 때가 되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개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일정 기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 애굽에서 구출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셨고,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위대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인간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새로 즉위한 어리석은 애굽 왕은 앞날이 자신의 손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성가신 작은 민족이 실제로 어떤 민족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자신의 권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말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단순히 힘이 없는 보통 남자와 여자들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배후에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안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그를 덮친 재앙은 전적으로 그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가장 발달된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인간이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는 동안 내내 하나님을 잊고 살며, 우리 자신의 역사를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거대한 구속의 역사를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오늘의 지구촌에서는 수많은 타락과 범죄와 살인과 전쟁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두운 죄악의 현상들은 오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대와 상황은 달랐어도 타락과 범죄와 살인과 전쟁은 아담 이후로 끊이지 않고 있어 왔습니다. 노아의 때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로 죄악이 땅에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한 모두가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면 정신을 차렸습니까? 그 후로도 인간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바벨탑 사건과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사건들이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에 의한 죄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에서 계속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외치는 인간들이 하는 일이란 그 역사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오직 인간의 이기적인 활동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역사에서 개입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셋째는, 인류가 안고 있는 최종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이루어 가시는 목적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의 새 왕은 요셉을 몰랐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함으로써 그들의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아예 작심하고 그 일을 감행함으로써 하나님과 대립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사람은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 가시는 목적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목적은 절대 확실하며 가차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 말씀은 모든 상황을 여기까지 주관해 오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야곱을 비롯한 일흔다섯 명을 애굽으로 이주시키셨습니다. 그리고 430여년 동안 그들이 그 땅에서 번성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때가 가까웠을 때 하나님께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을 세우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기 위한 계획을 진행하십니다. “때가 가까우매”라는 말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너무 확실할 뿐만 아니라 가차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롯의 사위들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농담으로 여겼던 것처럼, 이 세상은 항상 자신의 지혜와 이성으로 현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때’에 관한 이야기들을 비웃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주관해 오시는 역사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어김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 확실하며 아무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하나님이 친히 정해 놓으신 그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피상적인 현상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것은 모르더라도 이것만은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씩 실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두신 목적지를 향해 시간이 꾸준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확실하며 가차 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복을 주시려는 데 있습니다.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감독관들에게 채찍을 맞아 가며 밀짚도 없이 벽돌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도와줄 사람도 없고, 기댈 곳도 없고, 어떤 소망도 없는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개입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복 주시려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신음에 눌리던 애굽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사실들을 한 마디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것이 복음이 제시하는 복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애굽 왕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계획하신 것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지나왔던 세월 속에 몹시 후회되고 부끄러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죄가 책에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이 다 소멸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지은 모든 죄를 당신의 망각의 바다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알게 모르게 지었던 모든 죄들을 기억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한없이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바라보시면서 이제 당신의 은혜로 아무 공로 없이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선언해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후로 여러분 앞에는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영광이 임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영광 가운데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세상이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 그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정하신 목적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벌하시기로 작정해 두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앞선 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병거도, 말도,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바로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홍해까지 뒤쫓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바다가 갈라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길을 육지와 같이 건너갔습니다. 바로와 그의 군대도 뒤를 따라 건너왔으나 바다가 다시 합쳐지면서 그들을 삼키고 괘멸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라는 말씀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시간표대로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때가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더욱 악해져간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이 점점 더 악해져 가는 현상들을 볼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기 백성들에게 한없는 복을 주시고, 원수들에게는 영벌의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크고 넓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어렵지 않게 지극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각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한쪽에 속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해 있든, 아니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의 백성에게 속해 있든, 둘 중에 하나입니다. 중간지대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 속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해 있습니까? 모세도 두 갈래 길에 선 적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영화를 누길 수 있는 길이 한쪽으로 나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속하는 길이 다른 한쪽에 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히 11:25). 그것이 전부입니다. 바로와 같은 새 왕은 잠시 승리를 거두는 듯하나 잠시일 뿐이고 끝은 파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셔서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만을 의지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