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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으로 환대를 받으며 간 꽃길이 아니었다.
콧수염을 깎고 농민복을 걸치고 신변의 위협을 받으며 간 길이었다.
남과북을 넘고 좌와우를 설득해 민족이 통일되는 것, 그것이 그가 평생 염원한 꿈이었다.
전연수 교수 / 경북대 사학과
여운형은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여운형이 설득당한 것처럼 보여지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여운형이 이 이후에 남한에 내려와서 끊임없이 좌익 3당의 합당보다 좌.우 합작운동 그리고 좌익정당의 합당 좌익블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좌익의 독자적 진출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보다는 우익과 연대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데 그리고 합법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입법위원회에 참여해서 활동공간을 넓히려고 하는데 이런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많은 활동을 해 나갔다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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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익의 충돌은 거세져 갔다.
이때 여운형은 좌우익 모두에게 테러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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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여운형선생은 숱한 테러를 겪는다. 자택은 물론 자녀들에게까지 미행이 붙는등 나날이 악화일로를 걷는다.
테러를 접한 경찰은 조사대신 여운형 선생에게 서울을 떠날것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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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로부터 병문안을 받고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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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각 / 당시 여운형의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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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협박과 미행등으로 결국 여운형은 자녀들을 북으로 보내기에 이른다.
남쪽에서 여운형의 가족은 생명을 보장받지 못했다.
그러나 몽양 여운형선생 자신은 끝까지 서울에 남았다.
47년 7월 19일 아침
여운형은 친구에게 편지 한통을 주었다.
편지는 죽음을 예견한 듯 했다.
<여운형의 유고편지중에서>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는 미국은 반대로 가려하고 있소.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 친애하는 김선생!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업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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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혜화동 로터리
여운형의 차 앞으로 트럭한대가 돌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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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 몽양의 제자
7월 19일 오후 1시쯤 몽양선생님이 탄 차가 명륜동 일가 숙소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왔습니다.
그때 길이 포장이 안돼서 길이 나빴어요.
그래서 속도를 못내고 10마일 정도...
막 꼬부라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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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범퍼를 딛고 선 암살자는 뒷좌석에 앉은 여운형의 심장을 겨냥해 두발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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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북을 오가고 좌.우를 안기위해 동분서주한 그는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동족에게 살해됐다.
그의 수첩에는 못다이룬 일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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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선생의 암살을 보도한 '일요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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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찰은 22살의 한지근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제2 저격조가 동원된 조직적인 암살이라며 네명의 범인들이 나타난 것은 공소시효가 끝난 74년 그들은 경찰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한지근’만을 데려갔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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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인터뷰
김ㅁㅁ / 여운형 암살 지휘자
“옳은일 하는데 여러사람 희생시킬 필요가 없지.”
“경찰도 여기 그랬잖아.”
“범인인줄 알고 있었다고 하잖아.”
“김일성을 다섯 번 만나고 김일성과 타협한 것이지, 좌익계통의 통일에 대해서.”
“아들, 딸까지 자기 죽기전에 이북으로 보냈어.”
첫댓글 세나토리움님~ 참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