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好人 우리 아버지 (2)
아버지는 형제는 모두 오남매이시다. 맨 위로 큰 고모님, 그리고 장남이신 아버지, 아래로 두 분의 숙부와 막내 고모이시다. 아버지 혈육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이제 여든을 넘기신 막내 고모님만 남으셨다. 고모님은 오래된 우리 가족의 역사를 알고 계시고, 게다가 사랑과 정이 유난하여 조카들에게까지 고마우신 분이다. 그 옛날에 한식조리 교육을 받으시어 팔순의 연세에도 음식 솜씨가 장난이 아니시다. 그 모든 것이 연고지가 가까운 곳에 계시어 더 살가운 혈육이시다.
삼복더위라 전화 안부를 드렸다. 이즈음 모든 대화의 단골 내용에는 꼭 코로나가 들어있다. 나는 궁금한 것이 전세계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 이어지고 있는 두렵고 무서운 코로나와 총을 쏘고 폭탄을 터트리고 피난을 가셨던 6.25전쟁 중 무엇이 더 무서우시냐고 여쭈어보았다.
고모님은 열 세 살의 나이로 6,25를 겪으셨다. 총을 쏘고 폭탄이 터져 많은 사람이 죽어 무서웠지만, 6.25가 터진 후 전염병 ‘장질부사’가 돌아 동네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한 때 기차길 옆에 있던 어떤 집(이 집은 한때 우리 집이기도 했다) 가족은 두 명이 남고 모두 죽었다. 사람은 죽어 넘어져 있는데, 전염병이 든 가족은 수습할 힘도 염두도 못내고, 동네 사람들은 염병에 전염병이라 병이 옮을까봐 무섭고 두려워 아무도 다가가지도 나서지도 않았다. 고모님보다 나이가 열일곱이 더 많았던 우리 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가 시신을 수습하고 묻어 드렸다. 여러 구의 시신을 만지고 묻으셨는데도 신기한 것은 우리 식구들은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고 모두 살아 남았다. 아버지 나이 삼십세에 하신 일이다. 간담까지 서늘해지는 아름답고 거룩한 미담이다. 그런 분이 내 아버지 최정산 비오님이라니 한없이 존경스럽다. 내 나이 현재 아버지의 두 배를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상황에 나라면 아버지처럼 할 수 있었을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망설여지는 대목이다.
나 어릴 적 여름 더위도 오지게 더웠다. 어른이나 아이나 헉헉대며 한여름을 견뎌냈다. 그 와중에도 어떤 어른은 술 까지 드시고 하필이면 기차 길 위에 가서 누우셨다. 술김의 행보가 무사할 리가 없다. 큰 사고로 이어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시신도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동네사람들은 당연히 잘 나서지도 거두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라! 쉬운 일은 아니다. 하필이면 우리 집은 기차 길에서 가까이 있었다. 나서는 분이 없으니 우리 아버지는 과거 전력상 그리고 거리상 가깝다는 이유로 유족들이 달려오면 그 망가진 시신을 거두어 또 장사지내도록 도우셨다.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 일이 있는 날 밤엔 우리 아버지는 영락없이 심한 가위에 눌리셨다. 칠흑의 캄캄한 밤 허공에 대고 괴기한 헛소리를 비명과 신음소리와 함께 질러대셨다. 그 때 나는 그런 일을 하시는 아버지가 정말 싫었다. 업도 아니고 돈 되는 일도 아닌데......, 그런 일을 하시고 오신 뒷면 아버지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덮치는 듯 무섭고 두려웠다. 우리 아버지는 양선하시고 두려움과 겁이 많으신 분이셨다. 그런 분이 그런 일을 하시다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 동네 연령회장님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능력이 되고 좋아서가 아닌, 사람을 좋아하시고 좋게 대하시려는 인정과 연민으로 하셨던 것이다. 'ㅌㅈ성당'에서 일할 때 연령회원 헬레나 자매님은 ‘시신에서 향기가 난다’고 했지만, 나의 아버지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좋아서 하신 것도, 하느님께 등 떠밀려 하신 분도 다 같이 훌륭하고 아름답다. 아니 오히려 능력이 부치는데도 감당하셨으니 하느님께 더 큰 사랑과 어여쁨을 받으셨으리라. 여기에 함께 사실 때 별로 세상 복과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 나이 스무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물려받은 것은 가난한 살림에 장남과 가장이라는 부담뿐이었다. 두 분의 숙부와 고모의 결혼, 작은 아버지의 수술, 할머니의 병환과 사망 우리 가족의 건사등 참으로 안식 없는 세상을 사셨지만, 이제는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품 안에 평안하게 계시리라고 여긴다. 병원에서 누우신 채 원목 신부님께 세례를 받으신 것이 전부이고, 근사하게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시지 못했지만 사십년 넘게 신앙생활을 삼심년 넘게 수도생활을 하는 이 수녀 딸보다 더 그리스도인이셨다. 2년여 병환으로 자리 보전하시다, 1997년 돌아가시어 삼일장을 치를 때, 가까이 멀리서까지 찾아오신 수많은 조문객들이 그 증거다. 아버지의 일생이 마지막으로 만개하는 꽃과 같은 날이었다. 아버지의 자녀임을 잊지 말고 살아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