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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푯대를 향해 좇아감
(빌립보서 3:10-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향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바울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발견된 삶을 살고 있다. 내가 한국 사람으로 발견되면 한국 사람이고, 내가 미국사람으로 발견된다면 미국 사람이고, 내가 깡패로 발견된다면 깡패이다. 내가 아담 안에서 발견되면 아담이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면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종류의 인간으로 발견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생각하듯이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말하듯이 말하고, 그리스도가 살듯이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주관적으로는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가 물건을 얻으면 그 물건과 나는 별개이다. 물건은 물건이고 나는 나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은 만큼 살아지고 그리스도가 채워진다는 말이다.
구정물에 새 물이 들어왔다면 물이 들어온 만큼 구정물이 나갈 것이다. 마지막에 구정물이 다 없어지고 새 물이 채워져 새 물통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다. 점점 그리스도가 내 인생을 차지하고 종국에는 그리스도가 내 인생을 완전히 차지하면,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있게 된다. 이것을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그리스도를 얻고 싶어서 “나는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것에 잡히게 되어 있다. 사업에 잡히는 사람도 있고, 취미에 잡히는 사람도 있고, 돈에 잡히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잡혀 있듯이, 세상도 무엇인가에 잡혀서 자기가 걸어가는 것 같지만 잡힌 바 되어 끌려가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누구의 종이 되든 종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완전히 잡히면 그런대로 그 안에 행복이 있다. 돈에 잡힌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돈 버는 재미가 있다. 자기는 아무데도 잡히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 말은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바울은 무엇에 잡힌 바 되었는가? 바울은 전에는 율법과 종교에 잡힌 바 되었던 사람이다. 그것이 자기의 자랑이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에 있어서 특심의 열심을 가지고 바리새인 가운데 중심 인물인 것을 바울은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자기의 유대 종교를 흔든다고 생각한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다.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 그곳에 있을 만큼 바울은 그것이 전부였던 사람이다. 바울은 유대교가 자기의 행복이고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 바울은 '전에 내가 알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더러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예를 들어 우리 초등학교 시절에 흑백TV가 나왔다. 그 당시 김일이라는 레스링 선수가 있었는데, 만화 가게에 가서 그 레스링을 재미있게 봤다. 그때는 흑백TV가 전부였다. 모든 색깔이 흑백으로 보이던 시대였다. 그 후 컬러TV가 나왔는데, 컬러TV가 나온 후 흑백TV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배설물같이 되어 버렸다.
옛날 우리의 눈은 아무리 좋아도 모든 것이 흑백으로만 보였다. 옳으냐 그르냐, 좋으냐 나쁘냐, 잘했냐 못했냐,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이치이다. TV나 소설을 봐도 다른 무엇을 봐도 흑백으로만 본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 우리의 눈이 총천연색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처럼 옛날과 비교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 놀랍고 다른 세계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세상의 어떤 것이 그리스도만큼 길 수 있는가? 그리스도만큼 높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는 측량할 수 없다. 자기는 백 미터가 제일 길다고 생각했는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백 미터와 수 만 킬로미터가 비교할 수 없듯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다. 바울이 잡힌 바 된 것은 바로 우리 인생이 영원히 잡힌 바 되어야 할 그리스도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난 후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단순하게 예수 믿고 천당가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생을 통하여 사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표현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표이다. 그리스도를 봐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이 가져야 할 영원한 목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되면, 더 이상 세상에 잡힐 것이 없게 된다.
세상은 모두 비교이다. 이것보다 저것이 낫고 저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되면 비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헤엄을 치면 누가 잘하냐 못하냐가 있지만, 새의 세계는 이것과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물고기끼리는 비교하지만, 새와 물고기는 비교할 수 없다. 세계 자체가 다르다. 옛날에는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하는 차원이었지만,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된 차원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잡힌 바 된 이후에, 이제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전에는 자기를 사로잡는 것이 많았지만,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되니까 자기를 사로잡았던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다. 다시는 돌아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내 인생을 되돌아 봐도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늘 기웃거리는 인생이었다. 여기에 좋은 교회가 있을까? 저기에 좋은 교회가 있을까? 기웃거렸다.
우리 교회에도 '교돌이' 시절을 거쳐서 오신 분들이 많은데 나도 그랬다. 상대적으로 비교적 나을 뿐이지, 완전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된 이후에는, 더 이상의 것이 없게 되었고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으면 이런 세계에 오게 되었는가! 어떻게 이런 인격을 만나게 되었는가! 하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의심도 없고,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게 되었다.
물질의 세계는 처음이 제일 좋다. 새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좋은 차도 낡은 차가 되고, 아무리 좋은 물건도 점점 더 안 좋게 된다. 그리스도 이외의 세계는 다 똑같다. 아무리 좋은 친구도 처음에는 좋지만 그 사람을 깊이 알면 알수록 실망이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알면 알수록 측량할 수 없다. 어제 안 것과 오늘 안 것이 다르다. 얼마나 더 알아야 될지 모르겠다. 나는 그리스도를 알고 된 후 40년 이상 살면서 한번도 지루하다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좋아지고 더 좋아지는 세계에 살고 있다. 젊은 우리 양문회 형제들에게 '나는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좋다. 20대보다는 30대가 좋았고, 30대보다는 40대가 더 좋았고, 60대 때보다 지금이 낫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세상에 없는 이야기이다. 정말 그렇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측량할 수 없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젊어서 하던 일은 늙으면 못하는 게 많다. 운동이나 공부나 돈을 버는 것도 늙으면 힘이 없어서 못 한다. 어려서 좋던 것이 커서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인격이기 때문에 영원하다. 인격은 늙지 않는다. 육신은 후폐하지만 인격은 늙지 않는다. 성경에 '젊은 독수리처럼 날아간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육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인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일도 아니고 사업도 아니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일 때문에 실망할 때가 있다. 왜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하며 섭섭할 때도 있다. 일을 열심히 했는데 누가 내가 한 일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면 실족할 수도 있다.
여기서 구분해야 되는 것이 그리스도 일과 그리스도 자신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일을 그리스도 자신으로 착각해버리면, 열심히 일을 했는데 어느날 공허해진다. 일은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의 절대적 목적이 아니다.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리스도를 얻고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다시는 싫증날 일도 없고, 다시는 뒤돌아갈 일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지금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고 했다.
바울은 자기 앞에 그리스도가 항상 있다.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은 바로 자기 앞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지금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아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아가는 것이 내가 버리고 가야 하니까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떻게 버릴 수 있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점점 새롭게 오시니까, 새로운 주님이 날마다 오시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
생명의 세계를 보면 생명은 머물러 있지 않다. 생명은 늘 새것이 오면 비워지고 새것으로 채워진다. 새것으로 채워졌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비워야 한다. 새것이 또 오기 때문이다. 어제 내가 너무 충만한 간증을 했고 어제 깨달은 그리스도가 너무 놀라운 그리스도라 하더라도 나는 거기에 붙잡혀 있으면 안 된다. 오늘 지금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열 처녀 가운데 등불을 준비한 다섯 처녀처럼 늘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
처녀가 누구인가? 그리스도 앞에 있는 우리이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이다. 세상에 살면서 푯대가 없으면 소망이 없다. 공부할 때도 푯대가 있어야 하고, 사업할 때도 푯대가 있어야 열심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의 푯대가 아니다. 사업도 공부도 인생의 푯대가 아니다. 이것이 전부인 줄 열심히 달려갔는데, 마지막에 돌아보면 자기 자신이 열매가 아닌 빈껍데기로 발견된다. 인생의 유일한 푯대는 그리스도밖에 없다.
물건을 만들 때 그 물건에 대한 목표와 목적은 물건을 만든 사람이 정한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인생의 푯대를 정해 놓았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푯대이다. 이것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떤 형제가 생각났다. 그 형제는 병에 걸려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 형제를 업어다가 목사님 말씀하는 그 자리에 눕혀놨다. 그 형제가 인생의 푯대를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아무 소망도 없고 푯대 없는 20대 인생, 대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그런 일을 겪게 되었는데, 이 말씀을 듣고 난 뒤 이 형제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아! 내 인생에 푯대가 있구나! 하나님이 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나를 지으셨구나!' 그때부터 그 형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형제는 교회 안에 들어와서 지금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형제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누가 그 형제를 깨웠는가? 바로 이 말씀이 깨웠다. ‘내 인생에 푯대가 있구나! 하나님이 내 인생에 푯대를 만들어놓으셨구나!' 우리는 누가 시작했는지, 하나님을 모른다. 그런데 누가 시작했든지간에 내 인생을 시작하신 분이 있다. 우리는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경륜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나아가는 일직선과 같다. 불교의 세계관은 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계속 돌고 도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한 점에서 출발하여 다른 점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창세기라는 말은 '시작'이라는 뜻이다. 창세기는 시작이고 요한계시록은 열매 즉 마지막이다. 그래서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열매를 거둘 때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다. 그래서 이 창조 안에는 반드시 목표가 있다. 하나님 창조의 목표가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다.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완성된 그림이 들어 있다. 완성된 그림을 종이 위에 표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첫째 날을 시작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 사람이 들어 있다. 사람을 창조하기 위하여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일을 하신 것이다. 만약 목표가 없이 했다면 그것은 장난이다. 아이들에게 도화지와 크레용을 주면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색칠하다가 또 다른 도화지를 주면 또 거기에다 색칠한다. 그것을 보며 우리가 작품을 만든다고는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조금 크면 자기 생각을 가지고 뭘 만든다. 그런데 그 전에는 그냥 칠을 할 뿐이다. 그것을 장난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푯대가 없으면 이것 했다가 저것 하고, 저것 했다가 이것 하고 왔다갔다 한다. 물론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푯대가 없으면 인생은 꼭 장난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왜 지으셨는가? 사람 속에 모든 만물을 포함시키려고 지으신 것이다. 사람 속에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그래서 사람은 화성도 알 수 있고 태양도 알 수 있고, 물질 세계를 다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자가 무섭지만 사람은 사자를 훈련시켜서 다스릴 수 있다. 코끼리가 힘이 세지만 코끼리를 정복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이것은 사람 안에 만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바로 사람을 목표로 지어놓았다. 이것을 아담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아담은 무엇을 푯대로 창조되었는가? 그리스도를 푯대로 아담은 창조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격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아닌 그냥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분으로 찬양받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인격을 가지고 계신 분인지는 영영 알 길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푯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 속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이 생기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호흡이다. 호흡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더 발전하면 하나님 자신을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것이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아담의 갈빗대를 가지고 하와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갈빗대는 무엇인가? 바로 생명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줘서, 그 생명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당신 자신이 인격으로 표현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만물의 푯대는 아담이고, 아담의 푯대는 그리스도이다. 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푯대 없는 배, 선장 없는 배와 같다. 인생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이 세상에 아담이 없다면 만물은 혼란에 빠진다. 이 장소 안에, 이 방 안에 모든 물건이 다 있는데 만약 여기에 사람이 빠지면 마이크와 컴퓨터와 TV와 시계는 왜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이 들어오니까 모든 만물들에게 생기가 불어넣어진다. 이 물건들의 목적이 생기고 의미가 생기고 가치가 생긴다.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데, 정작 사람은 인생의 가치는 모른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이것은 왜 그런가?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는 원래가 그리스도다. 우리 인생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하나님 말씀 안에서 발견하면 푯대가 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 말씀을 배제하면 나는 푯대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열리면 아브라함의 부르심 안에 내가 있고, 야곱의 연단 안에 내가 있고, 모든 말씀이 바로 나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게 된다.
나는 옛날에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읽고 듣고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니까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를 창조하시는 말씀으로, 나를 부르시는 말씀으로, 나를 연단하시는 말씀으로, 나를 조성하는 말씀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이천 년 전의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를 말하고 있고, 나를 열어주시는 그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푯대 없는 인생이 되고, 푯대 없는 인생을 살다 보면 인생이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봄에 씨를 뿌릴 때, 열매를 목표로 씨를 뿌린다. 그런데 가을에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우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잎이 아무리 무성하면 무엇 하겠는가. 이 푯대가 완성되면 내가 사라져도 상관이 없다. 잎이 떨어져도 상관이 없고, 꽃이 시들어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이 푯대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육신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 간다.”(고후4:16)고 바울은 간증하고 있다.
가을에 호박이 익어갈 무렵 잎은 다 시들어간다. 노란 호박이 줄기에 달려 있는데 그 줄기도 바싹 말라서 딱딱해진다. 그런데 잘 익은 노란 호박이 그 줄기에 달려 있다. 모든 것은 다 후패하고, 모든 것은 다 시들어 가는데 거기에 잘 익은 노란 호박이 달려 있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열매 있는 인생이 된다면 우리의 육신이 후패하고 다 사라진다 해도 후회 없는 인생이 된다. 이 호박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래서 이 푯대가 있을 때만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우리는 '영원히 젊음을 가지고 살 수는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항상 젊기만 하다면 거기에는 열매가 없다. 물론 잎과 꽃도 필요하지만, 열매가 없는 인생은 비참하다. 우리 교회의 장자회 어르신들을 보면 마치 잎과 꽃이 떨어진 호박 같다. 그런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지난번에 말씀을 같이 교제하는데 얼마나 넘치시는지, 네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우리 장자회 아버지 어머니들을 보면 젊음의 힘과 패기와 열기는 없지만, 거기에는 열매가 있다. 아주 알찬 열매가 있다. 거기에는 섞여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헛된 생각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나 정결하고 하나밖에 없는지 모른다. 우리 장자회 어르신들을 보면 가을이 좋구나! 그렇게 느껴진다. 가을은 결실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아담의 푯대는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탄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 푯대가 혼란하게 되었다. 지으신 이를 위해서 창조된 인생이 지으신 이의 목표가 아닌 자기 목표를 세운 것이다. 그래서 성(城)을 쌓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창세기 6장의 네피림이 11장에 가면 집단적인 바벨의 시대가 오게 되었다. “뭉치자, 강해지자, 높이 오르자, 우리 이름을 빛내자.” 이것이 바벨의 정신이며 아담의 정신이다. 이것을 혼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세상은 바로 혼란 그 자체다.
사람들은 올라갔다가 허물어지고, 올라갔다가 허물어지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을 흥망성쇠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올라갔다가 허물어지고 올라갔다가 허물어지는 동안에 역사와 문화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사람은 높이 올라가다가 떨어지는 법이 없다. 내가 세운 목표는 올라갔다가 반드시 떨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하다보면 '아, 이게 아니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올라간다는 것은 점점 완성되어가는 것을 말한다. 열매로 익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것이 아니고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열매로 익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을 보라. 후퇴하는 법이 있는가? 없다. 생명은 후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의 목표는 완성이고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자기 인생의 목표가 되면 이것은 후퇴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는가? 반드시 그리스도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같은 유충인데 로얄제리를 먹느냐, 꿀을 먹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꿀을 먹으면 일벌이 되고, 로얄제리를 먹으면 여왕벌이 되도록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세상은 내가 더 높아지려고 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방해한다. 내가 높아지려는 그런 것이 없으면 사람들과 싸울 일이 없다. 9급 공무원 시절에는 서로 사이가 좋다. 그런데 계장 되면 내 편이 몇 명 떨어져 나가고 과장으로 올라가면 더 문제가 생긴다. 세상은 피라미드식이다. 맨 마지막 최정상에 올라가게 되면 대부분이 원수가 되고 만다. 이것이 세상이다. 왜냐하면 다 그렇게 되고 싶은데,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안 나가면 욕 먹을 일이 없는데, 모함하고 음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다 높이 올라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높이 올라간 일이 없다. 그래서 나를 흔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약의 번제단을 거쳐서 지성소로 간다는 말이다. 그 길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 방해하려고 들어오면 자기도 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는 아무도 올 수가 없다. 이 길은 세상이 모를 뿐만 아니라 넘어지지 않는 길이다. 세상은 푯대가 빗나갔다. 달려가는 사람도 그렇고 달려가지 못하는 사람도 푯대가 빗나갔다. 게으른 사람도, 부지런한 사람도 모두 푯대가 빗나가 있다.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도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향방 없이 열심히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푯대가 되지 아니하면, 어떤 것도 인생의 푯대가 될 수 없다. 사실 우리 인생의 푯대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내 배를 채우는 것이다. 내 필요를 채우는 것이 인생의 푯대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다른 푯대가 없을까 하고 찾아나서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싯다르타이다. 싯다르타는 왕자다. 다 누려봤지만 그 어디에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출가하여 인생의 목표, 인생의 푯대를 찾아보려고 한 것이다. 절에 가면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이 있는데, 소를 타고 인생의 길을 찾아나선 사람을 표현하고 있다. 전부 다 마음속이 공허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시니까 ‘그 그리스도가 내 목표다.’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찾아 나서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다. 이게 딱 맞으면 좋겠지만, 내가 찾는 그리스도는 나 만큼의 그리스도다. 내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아담이 찾는 그리스도는 도로 아담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해도 위대한 아담일 뿐이다.
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낼 때 배척했는가? 우리의 생각에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분이고 우리가 꿈에도 꾸지 못한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면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배척한다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이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기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것은 만물의 찌꺼기인 흙을 가지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만물의 찌꺼기인 흙을 보고 아! 이것이 그리스도다! 하고 알아볼 사람이 있겠는가?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더라면 사람들이 알 것이다. 그런데 만물의 찌꺼기인 흙을 가지고 지으신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하면 아무도 그를 받아들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찌꺼기인 흙이 아니면 당신 자신이 완전하게 나타날 수가 없다. 흙이 아니면 하나님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재료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이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어찌할 수 없는 사람,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 우리가 버리고 싶은 사람,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한 사람이다. 우리가 지음 받은 자라면 지으신 이가 푯대를 정하신 것이 맞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푯대는 거절하고 자기 푯대를 만든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내 푯대를 거절하고 하나님이 주신 푯대를 참으로 안다면, 얼마나 신속하게 주님에게 달려갈 것인가! 그런데 우리 안에 내가 가지고 있는 푯대가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내가 만든 푯대가 발목을 잡고 우리로 하여금 사슴처럼 신속하게 산을 넘고 계곡을 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결국 '내 푯대냐? 하나님의 푯대냐?' 하는 싸움이 되게 되었다. 이 싸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유태인들이다.
유대인들은 가장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마나 정성스럽고 완벽하게 구약의 제사를 드렸는지 모른다. 그들의 제사 법도는 너무너무 정확해서 조금이라도 틀리면 안된다. 그 제사의 법도와 윤리는 전부 다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추구했던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였는가? 모세 같은 사람, 다윗 같은 사람이다.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은 이 사람을 추구하고 있고 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모세는 사십 년간 우리에게 만나를 주었는데 너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했다. 이게 아담이다. 나는 매일 기도하고 성경 보고 금식하고 이런 일을 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그리스도를 원한 건 아니었다. 내 앞에 그 그리스도가 딱 보여지게 됐을 때, 나는 두 말도 않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질상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 말은 십자가에 못 박혀 뛰어내릴 수 없는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그 사람이구나!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구나! 저 사람이 바로 우리의 원형이구나! 저 사람이 인생의 원래 자리구나! 이렇게 우리 눈에 보여지면 우리는 이상하게 권세를 가지고 살게 된다. 어떤 권세인가? 인간이 만든 권세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권세다.
생명의 권세는 너무 당당하다. 개미가 코끼리 등 위에 올라가서 당당하게 걸어간다. 이건 생명의 권세다. 생명은 모두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아들의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으로 보이면, 우리는 존재로 세상을 이기게 된다. 우리 안에 다른 인생이 시작되고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난 다음에, 지금부터가 참 인생이구나! 비로소 나는 참 인생을 살게 되었구나! 그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의 고백인 것이다.
이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무엇을 소망하게 되는가? 유일한 소망은 부활이다. 이 부활은 내가 죽어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했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 하느냐"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 부활이다.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가 나타나는 것이 부활이다. 이것이 바로 이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소망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의 소망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첫째 부활'이라고 하면 숫자적으로 첫째라는 말이 아니고 '탁월하다. 무엇하고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려고 했다. 바울은 예수님을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이 첫 열매는 바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 것이다.
우리가 같은 그리스도를 누리지만 뛰어난 그리스도를 누리는 사람과 평범한 그리스도를 누리는 사람은 차이가 난다. 같은 상에서 밥을 먹지만 어떤 사람은 밥을 아주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밥맛이 없어서 밥을 입 안에 계속 물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첫째 부활, 둘째 부활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가난한 사람인가의 차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내 운명으로 발견되면 나는 가난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간헐적 단식을 하면 우리 세포가 가난해진다. 세포가 가난해지면 깨끗해지고 면역이 생긴다고 한다. 늘 먹고 배부른 상태에 있으면 밥맛도 없고 비만도 생기고 여러 가지 질병이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를 물질적으로 매우 부요하게 하면 하나님을 찬양할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자리가 내 자리로 발견되면, 냄새도 새로워지고 입맛도 새로워지고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그래서 아! 내가 이렇게 맛 있는 것을 맛이 없다고 했구나! 이렇게 알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백퍼센트 소화가 되고 백퍼센트 복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탁월한 삶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것을 주시지 않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외에 주신 것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 뛰어난 부활에 참여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들어온 하나님의 생명이 어떻게 부활에서 나오는가? 바울은 육신을 통해서 재배되어 나온 부활 생명을 갈망했다.
우리의 육신은 밭과 같다. 씨가 우리에게 떨어지면 그 씨를 재배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의 육신이다. 어떤 사람은 시시한 열매를 맺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 안에 이 씨가 떨어져서 우리 인생을 통하여 재배되면, 그것이 바로 부활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의 소원은 무엇인가? 그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바울은 이 부활을 소원하고 있다.
우리 안에 분명히 생명이 있는데, 이것이 왜 활발하게 부활하지 못하는가? 여러분은 이런 답답한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나는 많이 느낀다. 분명히 나는 좋은 것을 보았고 분명히 내 안에 놀라운 생명이 있는데, 이 놀라운 생명이 온전하게 표현되지 못할 때 너무너무 답답한 것이다. 내 안의 강이 터지고 뚝이 터져서 이 생명이 콸콸콸 쏟아지길 원하는데, 그것이 표현되지 못할 때 나는 너무너무 답답하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터져 나오면 얼마나 영광스럽게 터져 나오겠는가? 이것이 누구의 소원인가? 바로 하나님 아들의 소원이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게 나타나길 원하는 소원! 주님이 내 인생을 통하여 완전하게 껍데기가 터져서 그 안에 있는 부활생명이 나타나길 원하는 이 소원이 하나님 아들의 소망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소망을 향하여 쫓아간다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쫒아갈 것인가? 이것은 바로 십자가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자기 앞에 있는 그리스도와 자기를 날마다 바꾼다는 이야기다. 썩어질 것을 가지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바꾸는 것! 유한한 것을 가지고 무한한 것으로 바꾸는 것! 가치 없는 것을 가지고 영원한 가치와 바꾸는 것! 이것이 죽는 것이다. 죽는다고 해서 내 목숨이 죽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이 죽는 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십자가의 길! 이 길은 연합의 길이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길은 연합을 추구하는 길이다. 이것이 교회생활이다. 요사이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올 수 없는 생활이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에 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는가?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올 수 없는 그 예수를 확실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그 예수를 확실하게 안다면 우리의 문제는 원천적으로 하나도 없다. 아무 문제가 없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그 사람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사람은 모든 아담이 바라고 있는 그 사람이다.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그 사람이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더 끝나야 되겠는가? 끝난 자리가 바로 우리 인생의 자리다. 그 자리는 내 자존심이나 내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자유의지마저 없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에는 나라고 하는 게 하나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뜻밖에 없는 자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려올 수 없는 그 자리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려면 날마다 이 십자가의 길, 어린양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양의 길을 걷기 위하여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내 운명으로 보이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어린양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바라 볼 뿐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운명이 내 운명으로 확실하게 보이면, 우리는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 삶 외에는 다른 삶이 없다.
우리가 '형제들과 하나 되어야지. 사이좋게 연합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또 문제가 생긴다. '나는 포기했는데 너는 왜 포기 안 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다. 네가 포기하든지 포기하지 않든지 간에 나는 정해진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로 가는 것! 그 운명 안으로 들어가서 그 운명에 완전히 삼켜지면 우리 인생의 문제는 없다.
푯대를 향하여 쫓아간다는 말은 '추구한다, 추격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적을 패주시킨다는 뜻에서 나온 이야기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푯대로 해서 추구한다는 것은, 마라톤 선수가 앞에 있는 선수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뛰어가는 것과 같다. 죽을 힘을 향하여 앞에 있는 사람을 패주시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빨리 달려가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추격하기 위하여 죽을 힘을 향하여 달린다고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를 추격하기를 원하겠는가? 추격하지 않기를 원하겠는가? 예수님은 “너희가 나보다 더 큰일을 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내가 본 것보다 너희가 더 확실한 것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다. 계시가 더 발전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 목사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잘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니까 우리 목사님이 여태까지 달려온 그것을 우리가 받아서 더 발전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추격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런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 나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끊을 수 있다. 절제를 할 수 있다. 율법적으로 '이것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아니고, 참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푯대로 삼는다면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지금 생각하니까 잡다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정리됐는지 모르겠다. 주님을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지금보다 훨씬 더 정리가 될 것이다. 내 앞에 부르신 푯대가 있기 때문에,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이 아름답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푯대를 향하여 모든 것을 절제한다는 뜻이다.
푯대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계시다는 것이 축복이다. 이 그리스도가 없다면 오만가지 세상이 우리에게 달라붙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푯대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슴처럼 계곡도 넘고 산도 넘게 되었다. 우리가 영원히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