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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31> 화폐 이야기 (10) 한국의 돈 100원 주화 ③ /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군사력과 이순신 장군의 25전 25승 무패 ⓐ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명종 원년)-1598(선조 31년)} 장군의 ‘25전 25승 무패’ 기록은 대학생 씨름선수가 초등학생을 상대로 25전 전승을 했다는 그런 전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앞에서 일본의 역사를 살펴본 것이다.
로마(로마 왕국-로마 공화국-로마 제국)는 전쟁으로 날이 새고 전쟁으로 날이 저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일본이 그러했다. 무사계급이 존중받고, 사무라이 정신이 강조되면서 일본의 군대는 점점 더 커져 갔다. 특히 일본 중세(中世)의 막부시대(幕府時代), 그것도 ‘전국시대(戰國時代)’ 100년간(1467-1568년)은 일본의 군사력이 팽창 상태에 이르렀다. 거기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야욕(野慾)을 불태우며 더욱 군대를 키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을 정복한 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까지 삼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관백(關伯), 즉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태정대신) : 조선의 경우 영의정에 해당되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왕 같은 권세를 가졌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겉으로는 전국시대를 끝내고 평화정책을 썼으나, 군대를 더 키우는 한편,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여 전쟁 물자를 준비했다. 또 포르투갈의 카톨릭교 선교를 허용하고, 조총을 수입했다. 당시 일본 정치권력과 상류층이 기독교 선교를 조총 수입의 조건으로 삼은 것은 일본 기독교 선교의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전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당시 최신 총기인 조총(鳥銃)을 수입하다가, 어느 사이에 자체 생산하여 30만 정을 보유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전체가 보유한 조총 숫자보다 많은 것이었다. 그러니 육전에서 조선의 활이 일본의 조총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조선군은 172,400명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동원 가능했던 숫자는 7-8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개전 당시 육군만 158,700명, 수군이 60,000명이었고, 정유재란 때에 일본군은 14만 명(조선에 잔존 2만 명 포함)이었다. 특히 조선 육군은 그마저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즉 훈련되지 않은 군인들이었다. 그러니 육전(陸戰)은 붙었다 하면 우리가 패배했다. 그리하여 1592년 4월 14일[사실은 일본군이 절영도{絶影島 : 현재의 영도(影島)}에 상륙한 4월 13일이 개전일임] 개전되어 18일 만인 5월 2일 수도가 함락되었다. 그야말로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인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축구로 치면 휘슬을 분 지 10초 만에 한 골 먹은 꼴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공격한 일본군은 정규군이 아니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민은, 몸을 낮추고 지지자들을 넓혀가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협력관계이면서도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 1543-1616}의 존재였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규군을 일본 내에 남겨두었던 것이다.
일본 수군의 군선(軍船)은 개전 당시 700여 척이었으니, 그 후 보충된 것을 감안하면 1,000척이 넘었을 것으로 본다. 각 해전 기록에 나타난 침몰 또는 나포된 일본 군선을 합해보니 700척이 넘었다. 이는 일본 군선과 수군이 임진왜란 동안에 이순신 장군에 의해 거의 모두 궤멸(潰滅)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8년 만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인조 13년) 12월 9일-1637년(인조 14년) 1월 30일}의 청나라 군대와 임진왜란의 일본 군대를 시뮬레이션으로 가상대결시켜 보면 일본의 절대 승리로 나왔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군대와 일본에 남은 정규군을 합한 일본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나라는 당시 세계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은 당시 군사대국이었다.
융성했을 때 중국 명(明)은 당시 세계 GDP의 3분의 1을 차지한 세계 최대 경제강국이었으나, 임진왜란 즈음 명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1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계 최대 군사강국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일본에 남은 정규군과 조선을 침략한 군대를 합한 일본군을 상대로 해서 이길 수 있는 나라는 없을 정도였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지만, 만일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중국(명) 공격과 승리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만큼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군사력은 막강했다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을 못해서 근질근질한 다이묘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로 기울어지는 민심을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것. 이런 것들도 임진왜란을 일으킨 그의 목적 중의 하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8. 18 병사)는 조선에 대한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확신하고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이름을 듣도 보도 못한 이순신{李舜臣, 1545년(명종 원년)-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 전사}에 의해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임진왜란의 조선 수군 승리 요인을 무기‧장비 면에서 볼 때 거북선[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것은 3척]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붕에 철침이 꽂혀 있어서 적병의 접근이 불가능하고, 14문(좌우 각각 6개, 선수 용두에 1개, 선미에 1개)의 대포[일본은 처음에 대포가 없었으나, 육전에서 빼앗은 조선의 대포나 포르투갈로부터 수입한 대포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주력 전선인 세키부네는 대포를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했음]를 쏘며, 선수(船首)에 장착된 충각장치(衝角裝置)를 앞세우고 돌격하여 적선에 구멍을 내거나 파괴하여 적선을 침몰시키는데다, 무시무시한 형상의 용머리에서 포탄을 쏘거나 불과 연기를 뿜는 거북선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임진왜란 해전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역할을 한 것은 주력 전선(戰船)인 판옥선(板屋船)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군선(軍船) 비교는 이전 글(‘옹달샘 <23>’)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조선의 주 전선(戰船)이었던 판옥선은 일본의 주 전선인 세키부네{關船(관선)}보다 더 크고 우리나라 바다에서 더 효율적이어서 승전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또 일본이 가지고 있지 못한 조선의 대포도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전반으로 볼 때 조선은 훨씬 더 불리했다. 무기‧장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지도력이었는데, 이것이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임박한 1591년(선조 24년) ① 58세의 박홍(朴泓, 1534-1593)을 경상좌도(경상도 동부지역) 수군절도사, 즉 경상좌수사(경상좌수영 본영 : 동래, 즉 부산 수영), ② 52세의 원균(元均, 1540-1597)을 경상우도(경상도 서부지역) 수군절도사, 즉 경상우수사{경상우수영 본영 : 거제도 서쪽 가배량(加背梁)}, ③ 47세의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전라좌도(전라도 동부지역) 수군절도사, 즉 전라좌수사(전라좌수영 본영 : 여수), ④ 31세의 이억기(李億祺, 1561-1597)를 전라우도(전라도 서부지역) 수군절도사, 즉 전라우수사(전라우수영 본영 : 해남)로, ⑤ 57세의 최호(崔湖, 1536-1597)를 충청수군절도사, 즉 충청수사(충청수영 본영 : 보령)로 파견했다.
‘역사의 가정법’은 부질없는 일이기는 하나, 만일 이순신이 일본군의 침입의 길목인 경상좌수영을 맡았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뚫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조정이 이순신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25전 25승 무패’ 전적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상세하게 남긴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덕분이다. 날짜는 음력이다. 지명(地名)의 현재 위치에 대한 이견(異見)이 있는 것도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4월 14일- 1595년 7월)
A. 제1차 출정(1592년 5월 4일-5월 9일)
1) 옥포해전(玉浦海戰, 1592년 5월 7일) : 적선 26척 격침, 4,080명 전사 / 아군 피해 없었음.
▲첫 번째 전투 옥포해전(1592년 5월 7일) 전투상황도
옥포(玉浦)는 지금의 경남 거제시 옥포동이다. 그 앞바다에서 그 날 정오경에 옥포해전이 벌어졌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1540-1597)은 충청‧전라 방면에 대한 옥포의 전략상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구원을 요청했다. 원균의 수군은 초기 해전에서 70여 척의 전선(戰船)을 잃고, 단 6척{판옥선 4척, 협선(挾船 : 주 전선인 판옥선의 부속선으로서 소형선) 2척}만 남아 있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 1534-1593)은 첫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패했다고 하나,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 육군은 쉽게 육로를 뚫은 것이다. 박홍은 평양으로 피란한 선조(宣祖)를 호위하러 가던 중에 좌위대장(左衛大將)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다급한 선조는 그에게 우위대장(右衛大將)‧의용도대장(義勇都大將)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1593년 지금의 평안남도의 성천전투(成川戰鬪)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경상우수사가 아주 엉뚱한 곳에서 전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선조는 그러한 박홍에게 병조참판을 추증했다.
원균의 초기 해전 패배도 일본 육군의 길을 열어준 꼴이 되었다. 그나마 이순신 덕분에 원균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곡창지대 전라도는 유린당하지 않게 되었고, 왜군의 기세를 주춤거리게 했던 것이다.
옥포해전은 경상우수영 해역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수행한 그의 첫 해전이자 첫 승전이었다. 이순신‧원균 연합함대 91척{판옥선 29척(이순신 23척+원균 6척), 협선 17척(이순신 5척+원균 2척), 포작선(鮑作船 : 원래 해물을 채취하는 아주 작고 빠른 배) 46척(이순신}은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등당고호), 1556-1630}가 이끄는 50척을 포위하듯 좌우로 공격하여, 적선 26척 격침, 4,080명 전사의 전과를 올렸다. 나머지 적선은 줄행랑을 쳤고, 아군의 피해는 1명 부상이었다. 이 옥포해전은 개전(開戰) 이래 육전‧해전을 통틀어 조선의 첫 승리였다.
2) 합포해전(合浦海戰, 1592년 5월 7일) : 적선 5척 격침 / 아군 피해 없었음.
합포(合浦)는 지금의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합포동이다. 그 앞바다에서 벌어진 합포해전에서 이순신‧원균의 연합함대 92척(1척 추가되었음)은 적선 5척을 격침시켰다. 이 날(1592년 5월 7일) 수도 한성(1952년 5월 2일 함락)을 버린 선조(宣祖)와 대신들은 평양(平壤)으로 파천(播遷)했다.
3) 적진포해전(合浦海戰, 1592년 5월 8일) : 적선 11척 격침, 2,840명 전사 / 아군 피해 없었음.
적진포(赤珍浦)는 지금의 경남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이다. 이순신‧원균 연합함대 92척은 지금의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남포리인 남포(藍浦)에서 밤을 보낸 후 이튿날인 5월 8일 적진포 앞바다에서 기습공격하여 적선 13척 중 11척(대형선 9척, 중형선 2척)을 격침시켰다. 1592년 5월 9일 이순신 함대는 여수의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귀환함으로써 제1차 출정을 마무리했다.
1592년 5월 23일 조정은 이순신에게 종2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서(陞敍 : 벼슬을 올려줌, 즉 승진)했다.
조선의 관리는 18품계로 나눈다. 순서는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정9품, 종9품이다. 이 18품계{品階 : 직품(職品)과 관계(官階)}를 크게 당상관(堂上官)과 당하관(堂下官)으로 나누고, 당하관은 다시 참상관(參上官)과 참하관(參下官)으로 나누었다. 당상관(堂上官)은 조정에서 정사(政事, 국정)를 볼 때 당(堂), 즉 대청에 올라가 의자에 앉아 정사를 논하고 결정할 수 있는 고급 관리이고, 당하관(堂下官)은 그럴 수 없는 하급 관리이다.
당상관(堂上官)은 문신(文臣)으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무신(武臣)으로는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이다. 당상관 중에서도 정2품 이상만이 될 수 있는 판서(判書), 정승{政丞, 또는 의정(議政)이라고도 함}에게는 ‘대감(大監)’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그 부인의 경우, 1품관의 부인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라는 호칭이 붙고, 2품관의 부인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 붙는다. 당상관이라도 종2품, 정3품에게는 ‘영감(令監)’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그 부인의 경우, 남편이 종2품 당상관일 때는 ‘정부인’, 남편이 정3품 당상관일 때는 ‘숙부인(淑夫人)’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당하관(堂下官)은 문신으로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 무신으로는 정3품 어모장군(禦侮將軍) 이하이다. 당하관에게 붙이는 호칭은 모두 ‘나리’(순우리말)이다. ‘나으리’는 틀린 표현이다. 그 부인의 경우는 아주 복잡하게 세분된다. 정3품 당하관의 부인은 ‘숙인(淑人)’, 종3품의 부인도 ‘숙인(淑人)’, 4품관의 부인은 ‘영인(令人)’, 5품관의 부인은 ‘공인(恭人)’, 6품관의 부인은 ‘의인(宜人)’, 7품관의 부인은 ‘안인(安人)’, 8품관의 부인은 ‘단인(端人)’, 9품관의 부인은 ‘유인(孺人)’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집에서는 김해 김씨 어머니의 경우에는 ‘顯妣儒人金海金氏 神位(현비유인김해김씨 신위)’라고 쓴다. 顯(현)은 ‘존경의 의미’이고, 妣(비)는 ‘돌아가신 어머니’라는 뜻이며, 孺人(유인)은 ‘그 남편의 지위가 9품관’이라는 뜻이고, 金海金氏(김해김씨)는 ‘본관과 성씨’이며, 神位(신위)는 ‘자리’를 의미한다. 요즘 누구나 대개 ‘孺人(유인)’을 쓰는 것은 양반제도가 사라진 현대에는 누구나 적어도 9품관 벼슬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품계에서 당하관(堂下官)은 참상관과 참하관으로 나누는데, 참상관(參上官)은 문신으로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 무신으로는 정3품 어모장군(禦侮將軍) 이하에서 종6품까지로서 당(堂), 즉 대청에 올라 정사를 논하고 결정할 수는 없지만, 정사(국정)에 참여하는 관리이고, 참하관은 7품에서 9품까지의 관리로서 조회(朝會)에 참여할 수 없고, 실무적인 일을 맡는 하급관리이다.
수군절도사는 품계로는 정3품이다. 이순신은 승전으로 정3품(正三品)에서 종2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서(陞敍, 승진)되었다. 이는 당하관에서 당상관이 되어 당(대청)에 올라 임금과 정사를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가선대부가 맡을 수 있는 직책은 많은데, 오늘날로 치면 차관(次官), 서울부시장, 도지사 등도 그 중의 하나이다.
1592년 5월 9일 이순신과 원균 함대는 각각 본영으로 귀환했다.
B. 제2차 출정(1592년 5월 29일-6월 10일)
4) 사천해전(泗川海戰, 1592년 5월 29일) : 적선 13척 격침, 2,600명 전사 / 이순신 등 부상.
▲네 번째 전투 사천해전(1592년 5월 29일) 전투상황도
이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12일 완성)이 등장했다. 1592년 5월 29일 이순신은 제2차 출정에 나섰다. 제1차 출정 때와는 달리, 협선과 포작선을 제외하고, 거북선을 포함한 전선(판옥선) 23척만으로 출정하여, 노량 앞바다에서 원균의 전선 3척과 합세했다. 이순신‧원균 연합함대 26척은 사천(泗川)으로 향하는 적선 1척을 추격하여 격파했다. 그 적선은 사천 앞바다에 적 함대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셈이었다. 이순신은 지형을 잘 이용하는 전술을 잘 펼쳤다. 지난 옥포해전에서는 포위작전(包圍作戰)을 펼쳐서 승리했으나, 이 사천해전에서는 반대로 유인작전(誘引作戰)으로 적선들을 흩어지게 하기 위해 18척과 원균의 3척을 뒤에 남겨놓고, 이순신의 대장선을 포함한 5척만 장사진(長蛇陣)을 펼치고 들어갔다. 당시 ‘일자진(一字陣)’은 오늘날의 가로 줄 형태인 ‘횡렬진(橫列陣)’이고, ‘장사진(長蛇陣)’은 오늘날의 세로 줄 형태인 ‘종렬진(縱列陣)’ 진법(陣法)이다. 적선이 밀집해 있는 곳을 향하여 5척만이 장사진의 일렬로 공격하는 것은 전혀 병법에 맞지 않는 전술이었다. 이를 본 적장 구루지마 미치유키{來島通久(내도통구), ?-1592)는 이순신의 내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대장선이 포함된 소규모의 돌격대를 보고 비웃었다. 원균도 못마땅하고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좁은 포구에서 웅크리고 있던 적선이 달려 나왔다. 그러자 이순신의 5척은 달아났고, 어느새 거북선을 앞세운 주 전선(戰船)인 판옥선들이 나타나 일제히 공격했다. 특히 거북선의 모습과 그 돌진을 본 그들은 당황했다. 거북선의 돌진에 의해 파괴되어 침몰되거나, 거북선과 판옥선에서 발사된 대포에 의해 적선 12척이 모두 격침되었고, 적 수군 2,600명이 죽었다. 적장은 간신히 달아났다. 사천해전은 치열했다. 이순신 장군도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고, 거북선 제작 책임자인 나대용(羅大用, 1556-1612)과 거북선 제작을 도운 이설(李渫, 1554-1598)도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큰 피해 없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5) 당포해전(唐浦海戰, 1592년 6월 2일) : 적선 21척 격침,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 전사, 2,820명 전사 / 아군 피해 불명.
당포(唐浦)는 지금의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포구이다. 당포해전은 당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원균 연합함대 26척은 삼천포 앞바다를 거쳐 통영의 사량도(蛇梁島)에서 밤을 보내고, 1592년 6월 2일(양력 7월 10일) 척후선(斥候船)의 정보를 따라 당포 선창에 정박해 있는 일본 함대 21척(대형선 9척, 중형‧소형선 12척)을 향했다. 적이 조총으로 맞섰지만, 사천에서 적에게 공포감을 준 거북선을 앞세우고 현자총통(玄字銃筒)‧천자총통(天字銃筒)‧지자총통(地字銃筒)을 쏘며 돌진했다. 거북선이 왜장선 안타케부네{安宅船(안택선)}을 들이받았다. 당시로서는 무시무시한 충각장치(衝角裝置)에 부딪힌 왜장선에 구멍이 났다. 아군은 왜장선에 화포와 화살을 집중적으로 발사했다. 삽시간에 왜장선이 혼란에 빠졌다.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가 중위장(中衛長) 권준(權俊, 1541-1611)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첨사(僉事) 김완(金浣, 1546-1577)과 군관 진무성(陳武晟, 1566-?)이 배에 올라 적장의 목을 베었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을 보면 일본 수군은 오합지졸(烏合之卒)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전술(前述)한 바대로 당시 왜군은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된 매우 우수한 군인들이었고, 그 용맹함과 난폭함이 육전(陸戰)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해전에서는 워낙 뛰어난 이순신 앞이라 오합지졸로 보였을 뿐이다. 이순신은 거북선이 대포를 쏘면서 돌진, 충돌하는 등 왜군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주는 전법을 계속 썼으나, 적군이 경험하여 대비하고 있는 전법은 바꿈으로써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러니 일본 수군은 연전연패(連戰連敗)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진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전선 단 3척으로 이순신 함대와 합세한 선배 원균은 아군의 피해를 내지 않고 연전연승하는 이순신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작전을 보면서 한편으로 감탄하고, 또 한편으로는 비참함과 질투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감정이 훗날 이순신을 모함(謀陷)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당포해전에서 가메이 고레노리‧구루지마 미치유키 연합함대 21척이 모조리 격침되었고, 2,820명이 전사했다. 그런데 이 해전에서 죽었다는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구정자구), 1557-1612}는 일본 기록에 의하면 그 해전에서 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포해전에서 죽은 왜장은 사천해전의 구루지마 미치유키{來島通久(내도통구), ?-1592}라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구루지마 미치유키가 율포해전(栗浦海戰, 1592년 6월 7일)에서 패배한 후 자결했다고도 한다. 옛날의 전투, 그것도 해전에서는 이런 신상 파악의 문제는 있을 수 있다.
6) 제1차 당항포해전(唐浦海戰, 1592년 6월 5-6일) : 적선 26척 격침, 2,720명 전사 / 아군 피해 불명.
제1차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은 지금의 경남 고성군 당항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제1차 당항포해전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선 25척도 합세했다. 이순신‧이억기‧원균 연합함대 51척(이순신 23척, 이억기 25척, 원균 3척)의 총지휘는 이순신이 맡았다. 이 제1차 당항포해전을 보면 이순신은 이미 삼도수군통제사나 다름이 없었다. 이억기는 조선 왕의 종친으로서 당시 31세였다. 그는 지휘관으로서는 아주 어린 나이였으나,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았고, 종친 냄새도 풍기지 않았고, 겸손했으며, 이순신과 같은 급의 수군절도사였으나, 연장자이자 선배인 이순신을 깍듯이 모시 듯했고, 이순신을 존경하여 최선을 다해 도우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세 장군이 연합하는 것이므로 이순신은 당포 앞바다에서 충분한 전략회의를 했다. 거제도 주민의 첩보를 따라 1592년 6월 5일 안개가 걷히자 연합함대는 달아나는 적선까지 섬멸하기 위해 전선 4척을 당항포 어귀에 숨겨두고, 일본 전선 26척(대형선 9척, 중형선 4척, 소형선 13척)이 정박해 있는 당항포로 진격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거북선을 앞세우고 대포를 쏘며 돌격하지 않고, 넓은 바다로 끌어내기 위하여 유인작전(誘引作戰)을 펼쳤다. 왜냐하면 패배한 왜군이 육지로 도망하여 우리 백성들에게 피해 주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백성의 안위를 자식처럼 늘 염려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민정신(爲民精神)은 세종대왕과 같았다. 또 한 번 왜선은 박살이 났다. 이순신은 배 한 척을 일부러 남겨두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패잔병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다 그 배에 오른 이튿날 새벽 이순신은 첨사(僉使) 이순신(李純信, 李純信, 1554-1611)에게 처치하게 함으로써 왜의 배 26척 모두와 수군 2,720명을 섬멸했다.
7) 율포해전(栗浦海戰, 1592년 6월 7일) : 적선 3척 격침, 4척 나포 / 아군 피해 없었음.
율포해전은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율포(밤개)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제1차 당항포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이억기‧원균 연합함대 51척은 웅천(熊川 : 지금의 창원시 진해시 웅천동) 앞바다의 증도(曾島)에 진을 치고 있다가, 율포(栗浦) 쪽으로 가는 왜선 7척(대형선 5척, 소형선 2척)을 발견하여 3척(대형선 2척, 소형선 1척)을 격침시키고, 4척(대형선 3척, 소형선 1척)은 나포했다.
제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의 전선은 피해가 없었고, 전사 11명, 부상 47명이었다고 한다. 1592년 6월 10일 전라좌수영으로 귀환함으로써 제2차 출정을 마무리했다.
C. 제3차 출정(1592년 7월 6일-7월 13일)
8)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7월 8일) : 적선 59척 격침, 14척 나포, 8,980명 전사, 장수 2명 전사, 장수 1명 자살 / 아군 피해는 19명 전사, 116명 부상, 전선 피해는 없었음.
▲여덟 번째 전투 한산도대첩(1592년 7월 8일)에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펼쳤던 학익진(鶴翼陣)
▲학익진(鶴翼陣)이 펼쳐진 여덟 번째 전투 한산도대첩(1592년 7월 8일) 전투상황도
한산도(閑山島)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속해 있다.
세계 3대 미항(美港) 하면 첫째가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이다. 영어로는 ‘네이플스(Naples)’이다. 이탈리아어 나폴리(Napoli)는 헬라어 ‘네오 폴리스(Neo Polis)’에서 유래되었다. ‘신도시(New City)’라는 뜻이다. 고대 헬라인(그리스인)들이 강했을 때 여기를 식민지로 해서 세운 도시였다. 둘째가 호주의 시드니(Sydney)이다. 필자는 시드니를 여러 번 가봤고, 마지막은 올림픽이 열린 2000년이었다. 미항다운 항구이다. 셋째는 2016년 제31회 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이다. 세계 4대 미항이라고 하면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이다. 이 외에도 세계에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나 캐나다의 밴쿠버(Vancouver) 같은 미항급 항구들이 많다. 이런 항구들은 인공미가 가미되어 아름다운 미항들이다.
그런데 손질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미항이라면 통영(統營)이 세계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것이 오히려 부적절하다. 통영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아예 거기로 이사를 간 화가들도 있다. 음악제에 오는 외국인들도 통영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리아스(rias)식 해안이 만들어내는 통영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작품 중의 작품이다.
동쪽 거제도(巨濟島), 북쪽 내륙에 연결된 통영시(統營市) 사이에 있는 한산도와 그 주변 바다는 아름답기 그지없으면서도 복잡하다. 지도를 봐도 복잡한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들이 배를 타고 한두 번 보고서 어찌 복잡한 지리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한산도에서, 그것도 속을 헤아릴 수 없는, 신출귀몰하는 이순신을 상대로 임진왜란 최대의 해전을 벌였다는 것은 일본 수군의 큰 불행이었다.
한산도해전은 특히 ‘한산도대첩’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7월 8일)’은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년 2월 12일, 9차례 접전하여 승리)’과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 제1차(1592년 10월 5일-10일 격퇴하여 승리), 제2차(1593년 6월 19일-29일 전원 전사, 성 함락, 패배), 이 중에서 제1차가 진주성대첩임}’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이기 때문이다. 행주대첩은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의 지휘 아래 1만이 못되는 병력으로 왜군 3만여 명의 9차례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했다. 그런데 진주(晉州)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장군(시호는 충무공)과 수많은 의병(義兵)들에 의해 수행된 진주성대첩의 제1차전은 조선의 승리였으나, 제2차전은 성이 함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군의 비참한 옥쇄(玉碎)의 결과로 끝났기 때문에 ‘대첩{大捷 : 대승(大勝)}’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성이 함락되어 왜군에 붙잡힌 병사와 백성들은 불에 태워졌다. 하지만 제2차 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 육전(陸戰)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피해를 입은 왜군도 전의(戰意)를 상실하여 곡창지대인 호남(湖南)으로 공격할 수 없었고, 또 이 전투에 영향을 입은 수도 한성의 왜군들이 남하(南下)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순신은 새로운 대규모의 일본 수군이 공격해오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1592년 7월 6일 제3차 출정에 나섰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24척(거북선 3척, 판옥선 21척)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선 25척, 도합 49척의 연합함대는 동진(東進)하여 노량(露梁 : 지금의 경남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 합세하여 56척의 연합함대를 이루었다.
새로 보낸 일본 수군은 제1진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협판안치), 1554-1626}의 73척(대형선 36척, 중형선 24척, 소형선 13척), 제2진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구귀가륭), 1542-1600}의 40여 척, 제3진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등가명), 1563-1631}의 많은 병선[숫자가 명확하지 않음]이었다.
원래 세 함대가 연합함대를 이루기로 했으나, 제1진의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혼자서 전공을 세울 욕심으로 제2, 3진이 도착하기 전에 전투를 개시해버렸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휘하 장수는 와키자카 사헤에(?-1592), 와타나베 시치에몬(?-1592), 마나베 사마노주(?-1592)이었고, 수군 1만 명과 전선 76척의 대함대였다.
1592년 7월 7일 이순신‧이억기‧원균 연합함대 56척이 고성(固城)의 당포(唐浦)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함대 73척이 견내량(見內梁 : 지금의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서 현재 거제대교로 연륙되어 있음)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조선 수군의 주 전선 판옥선(板屋船)은 일본 수군의 주 전선 세키부네{關船(관선)}보다 선저(船底)가 넓고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다가 좁고 수심이 얕으며 암초가 많은 견내량에서 싸우는 것이 불리했다[옹달샘 <23> 참고]. 또 육지 가까운 곳에서 싸워서 이긴다 하더라도 패잔병들이 육지로 도망치기가 수월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순신은 5, 6척의 판옥선만 공격하는 체하며 적선들을 유인하여 한산도 서쪽 바다로 이끌어냈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그들이 패하면 당시 무인도였던 한산도로 기어 올라가 굶어죽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순신의 ‘유인작전(誘引作戰)’과 ‘학익진(鶴翼陣)’ 전술은 한산도대첩의 주요 승리 요인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인 것이다.
적선들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모든 아군 전선에서 북을 치며 선수를 되돌리고, 역사상 어느 해전에서도 없었던, 마스게임을 하는 듯이 이상한 대형을 이루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이었다[위 첫 번째 그림 참고]. 이는 이순신이 기존 ‘정자진(丁字陣)’을 응용한 것이었다. ‘정자진’은 ‘일자진(一字陣)’(가로 열)과 ‘장사진(長蛇陣)’(세로 대형)을 조합한 것이다. ‘학익진’은 ‘정자진’ 중에서 제1열 ‘일자진’(가로 열)을 둥글게 함으로써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대포를 동시에 쏘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정자진’ 중에서 제2열 ‘장사진’(세로 열)을 역(逆) V자로 해서 제1열의 포격을 받아 적진이 흐트러졌을 때 적진 속으로 돌격하거나, 제1열을 대신할 수도 있게 한 것이다. ‘학익진(鶴翼陣)’은 글자 그대로 꼭 ‘학이 날개를 펴고 두 다리를 쭉 뻗은 모습’이다. 아군 전선이 달아나는 척하다가 북소리와 함께 선수를 돌렸고, 다시 호각소리와 함께 학익진을 이루었다. 제1열 전선들이 일제히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을 한꺼번에 쏟아 부으며 적선을 격침하거나 불사른 배가 66척, 베어온 적의 수급(首級)이 86급, 익사하거나 칼과 창에 찔려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서양화 기록화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의 해전’
학익진의 결점은 선수(船首)를 앞으로 하여 전진하다가 배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을 때 선제공격을 받는 점이다. 일본 수군의 주 전선 세키부네{關船(관선)}와는 달리, 선저(船底)가 평평하고 넓은 판옥선은 순식간에 포격 자세로 배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학익진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위 그림은 적의 조총 사거리(射距離)보다 먼 위치까지 학익진을 펼치고 들어가다가 일제히 배의 방향을 바꾸어 대포를 발사하여 적선들을 불태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대규모 해전에서 어떻게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이, 왜적을 궤멸시켰는가를 보여준다. 또 세키부네가 돛을 올려놓고 있는 것은 불리하면 달아나겠다는 뜻이고, 조선 판옥선이 두 개의 돛을 다 내리고 있는 것은 선체의 흔들림이 없게 하여 포 사격을 정확하게 하기 위함이고, 단번에 적선을 격파하겠다는 의지이다.
적군의 피해는 전선 73척 전부(59척 격침, 14척 나포), 8,980명 전사에 장수 와키자카 사헤에(?-1592), 와타나베 시치에몬(?-1592) 전사, 마나베 사마노주(?-1592) 할복자살이었다. 이 해전에서 살아남은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비롯한 400명은 한산도로 도망하여 13일 동안 해초를 먹으며 연명하다가 구조되어 패잔병으로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그의 기일(忌日) 전 13일 동안 해초를 먹는 것을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
아군 피해는 19명 전사, 116명 부상이었고, 전선 피해는 없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형편없는 장수가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직전신장), 1534-1582}의 죽음 후 두 세력 간에 후계자 싸움이 벌어졌었다. 그것이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 1537-1598}와 시바타 가츠이에{柴田勝家(시전승가), 1522-1583}의 일전(一戰)인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이다. 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승리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수 7명을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칠본창(七本槍, 7자루의 창)’으로 일컫는다. 그 중의 첫째가 조선에 가장 악랄한 짓을 했던 가토 키요마사{加藤清正(가등청정), 1562-1611}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협판안치), 1554-1626}도 그 한 명으로서 매우 용맹한 장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4일째인 1592년 4월 28일 탄금대전투(彈琴臺戰鬪)에서 ‘북방의 영웅’이자 ‘조선의 희망’이었던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 군무를 총괄하던 임금의 특사) 신립(申砬, 1546-1592 : 권율의 맏사위)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였다. 이후에 그는 수군 장수로 활동했으나, 모든 일본 수군 함대가 계속 이순신 함대에 의해 연패하자 상부의 명령에 의해 다시 육전(陸戰)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벌어진 전투가 1592년 6월 5-6일의 ‘용인전투(龍仁戰鬪)’였다. 이 전투의 조선 육군의 총지휘는 전라도관찰사인 이광(李洸, 1541-1607)이었고, 전라방어사 곽영(郭嶸, ?-?)과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1537-1599)이 지원했다. 조선군은 50,000명이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협판안치), 1554-1626}의 일본군은 기병 1,600명이었다. 그런데 그의 야간 기습공격에 의해 조선군이 대패하여 패주(敗走)했다. 그런 그가 1592년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 의해 대패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거지꼴이 되어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는 다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진주성을 초토화했다. 또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 1월)에서 다시 일본 수군의 장수로서 출정하여 1597년 7월 14-16일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조선 수군에 대패를 안겼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전투를 총지휘한 원균{元均, 1540(중종 34년)-1597(선조 30년)},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명종 16년)-1597(선조 30년)}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1536-1597)가 전사했다. 또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597년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벌어진 제1차 울산성전투(蔚山城戰鬪)에서 궁지에 몰려 자결하려던 일본의 최고 장수 가토 키요마사{加藤清正(가등청정), 1562-1611}를 구출해내기도 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런 용맹한 적장이었다. 이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우리의 이순신 장군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꼴이었다. 훗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글에서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欽崇)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茶)를 함께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라고 했다.
9) 안골포해전(閑山島大捷, 1592년 7월 10일) : 적선 42척 격침, 250명 전사 / 아군 피해 없었음.
▲아홉 번째 전투 안골포해전(1592년 7월 10일) 전투상황도
1592년 7월 10일 이순신‧원균의 연합함대는 가덕도(加德島)로 향하던 중 안골포(安骨浦 : 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과 청안동 사이에 있는 포구)에 일본 수군의 전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2진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구귀가륭), 1542-1600}와 제3진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등가명), 1563-1631},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등당고호), 1556-1630 :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장수}가 이끈 연합함대 42척이었다.
이순신은 이억기 함대를 먼 바다에 대기하게 했다. 안골포는 수심이 앝아 조선의 주 전선 판옥선(板屋船)이 전투하기에는 불리했다. 이순신은 적선을 넓은 바다로 끌어내려고 배 몇 척만 들어가서 유인했으나, 여러 번 당해본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전술을 바꾸었다. 적은 숫자의 전선이 번갈아 들어가서 대포를 쏘고 나오게 했다. 그러자 마침내 왜선이 맞서며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도 이순신은 학익진으로 적을 공격했다. 일본 수군은 25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남은 자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 이순신은 적선을 불태우거나 격침시키지 않고, 일부러 남겨두었다. 밤이 되자 달아났던 일본 수군들이 멀쩡히 남아 있는 자기들 배로 돌아왔다. 이를 기다리던 이순신이 야음을 틈타 적선에 대포를 쏘게 했다. 적선 42척 전부가 불타고 격침되었다. 일본 수군 250명이 전사했다.
1592년 7월 13일 세 함대는 제3차 출정을 마무리하고 각각 자기 본영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조선 육군은 여전히 패배를 거듭했다. 제1차 평양전투(平壤戰鬪, 1592년 5월 13일) 패배에 이어, 명나라 군대와 연합한 제2차 평양전투(平壤戰鬪, 1592년 7월 15일), 제3차 평양전투(平壤戰鬪, 1592년 8월 1일)에서도 패배했다.
한산도대첩 후 이순신 장군은 정2품 중에서는 가장 상계(上階)인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했다. 정2품은 요즘으로 하면 장관인 판서(判書)에 오를 수 있는 품계(品階)이다. 그리고 1593년 한산도에 조선 수군 전체의 본영(本營)인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신설하고,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겸 초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된다. ‘통영(統營)’이라는 지명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인 말이다.
1603년(선조 36년)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인 이경준{李慶濬, ?-? : 고려의 이색(李穡)의 7세손}이 삼도수군통제영을 지금의 통영(統營)으로 옮기고, 세병관(洗兵館) 등 통제영 건물들을 세웠고, 1895년(고종 32년) 폐지될 때까지 292년간 폐지될 때까지 208명의 통제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패배 흔적을 지우는 동시에 한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세병관만 남겨두고, 관아 100여 동(棟)의 건물들을 다 헐어버렸다. 지금은 세병관과 1987년 복원된, ‘일본이 항복했다’라는 뜻의 수항루(受降樓)만이 있다. 나라가 잘 살게 되면 이런 역사유적지를 속히 완전 복원해야 하는데…. [다음 호에 계속 / 2013.12.30.(월). 조귀채]
첫댓글 요즘 제가"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독서를 하고 있는데요.책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고난의 역사가 가슴이 답답했었는대요.
이순신장군의 글을보니 가슴이 뻥뚤립니다요....ㅎㅎ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봐도 글을 답답하게 썼는데도요?
어느 시점에 가면 이런 스타일로 쓰지 않을 겝니다.
이 글 처음 부분의 틀린 부분을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경상우수영 본영 : 통영 → 경상우수영 본영 : 거제도 서쪽 가배량(加背梁)
[※초기 경상우수영 본영이 거제도 서쪽 가배량이었다가, 한산도대첩 후 삼도수군통제영이 한산도에 설치되었고, 1603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지금의 통영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 글 한산도대첩 서술에서 전투 장면 기록화(記錄畵)와 한 단락의 설명을 추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