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는 북위해서, 초서는 손과정의 서풍(書風)으로 썼다. 字의 크기는 약 1.8Cm이고 7호(毫) 겸호면상필(兼毫面相筆)을 사용했다.>
論語集註大全
논어집주대전
論語 : |
공자(孔子)가 제자들이나 당시 사람들과 논란(論難: 어떤 문제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져 논하는 것) 하고 힐문(詰問: 잘못된 것을 따져 물음) 한 말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
集註 : |
주자(朱子)가 서술한 주(註)를 명칭하는 것으로 송유십일가(宋儒十一家)의 주석(註釋)에서 좋은 점을 초출(抄出) 하고 논어 주소본(註疏本)에서 주(註)를 모아 자신의 학설을 덧붙여서 집주(集註)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大全 : |
명(明) 나라 성조(成祖)가 영락 년(永樂年) 중에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를 근간(根幹)으로 하여 국가에서 발간을 한 영락대전본(永樂大全本)이다. 이 영락대전본은 명나라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교과서로 채택했다. |
- 논어(論語)는 맹자(孟子)와 마찬가지로 편명(篇名)에는 뜻이 없다. 옛날 죽간을 말아놨을 때 제일 첫 번째 나온 글자 「子曰은 자주 나오므로 편명(篇名)으로 삼지 않고」그다음의 두 글자 또는 세 글자를 편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學 자를 제일 먼저 둔 것은 공자가 배움을 먼저 거론한 뜻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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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公冶長篇(공야장편) 17~ 20장(章)
此篇 皆 論 古今人物賢否得失하니 蓋 格物窮理之一端也라 凡 二十七章이라. 胡氏以爲 疑 多子貢之徒所記云이라.
이 편은 모두 옛날과 지금의 인물에 대한 현부(그 사람이 현명함과 현명하지 않음)와 득실(잘함과 못함)을 논평하였으니 격물 궁리(사물의 이치를 궁구함) 하는 한가지 일이다. 모두 27장이다. 호 씨(胡寅)는 아마도 대부분 자공의 문도(門徒)가 기록한 것인듯하다.라고 말하였다.
★ 공야장(公冶長) 이하는 당시 사람들에 대한 논평이고, 공문자(孔文子) 이하는 고인(古人)에 대한 논평이다.
★ 格物窮理의 격(格)은 궁구(窮究)의 뜻이 있고, 물(物)은 사물의 이치(理致)를 말하므로 격물(사물의 이치를 궁 구함)과 궁리(이치를 궁 구함)는 같은 말인데 겹쳐서 나온다. 아마도 주자가 주를 달고 수정을 할 때 미쳐 못한 것으로 보인다. |
[十七章]
子曰 臧文仲이 居蔡호되 山節藻梲하니 何如其知也리오。
자왈 장문중이 거채호되 산절조절하니 하여기지야리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장문중이 채(점을 치기 위한 큰 거북 껍질)를 간직할 집을 짓는데 기둥 끝 두공에 산을 새기고, 들보의 동자기둥에 마름풀(수초)을 그렸는데 어떻게 그가 지혜로울 수 있겠느냐.
★ 채(蔡)라고 하는 것은 한자 두 치 되는 큰 거북을 말한다. 채(蔡) 나라 지방에서 나오는 거북이 커다 그래서 한자 두 치 되는 큰 거북을 아예 채(蔡)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장에서의 채(蔡)는 살아있는 거북이 아니고 점을 치기 위한 거북의 껍질을 말한다. 채(蔡)가 잡히면 그 껍질은 당연히 천자의 나라인 주(周) 나라로 보내야 되는데 노(魯) 나라는 백금(伯禽)이 천자의 예(禮)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채를 천자(天子)에게 보내지 않고 노나라에서 쓴 것이다. 제후(諸侯)는 한자 되는 거북 껍질을 써야 되는데 한자 두 치되는 채(蔡)를 쓰는 것이 답습(踏襲) 되니 그 나라 대부(大夫)인 장문중이 간직한 것이다. 천자 나라에서 나 제후 나라에서 거북 껍질을 간직하는 집은 국가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단청(丹靑)을 하고, 개인 사가(私家)에는 단청을 할 수가 없는데 단청을 하는 것은 참람(僭濫) 한 짓이다.
★ 공자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 귀신에게 아첨할 때이다. 그래서 옹야편에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 백성(사람)의 도리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듯이 장문중은 점치는 거북을 집안에 두었기 때문에 지혜롭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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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蔡 : 큰 거북을 간직하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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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節 : 절(節)은 기둥 끝의 두공(斗栱)인데 두공에다 칼로 산을 새겨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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藻梲 : 들보 위의 짦은 동자기둥에 마름풀(수초)을 그려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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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 : 고문(古文)에서 知는 거성일 때는 “지혜롭다”이고 평성일 때는 “알다”의 뜻이다. 智는 나중에 만든 글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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臧文仲은 魯大夫臧孫氏니 名辰이라. : 장문중은 노나라 대부 장손 씨이니 이름은 “신”이다. ※ 辰은 본 음이 “신”이다. 십이지(十二支)에서만 “진”으로 발음하는데 그 이유는 申이 있어 발음이 중복되기 때문에 진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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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는 猶藏也요 : 거는 간직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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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는 大龜也라 : 채는 큰 거북이다. ※ 한서 식화지(漢書 食貨志)와 백호통(白虎通)에「천자(天子)가 점을칠때 쓰는 거북을 채라고 하는데 크기가 한자 두 치 이고, 제후(諸侯)는 한자, 대부(大夫)는 여덟 치, 사(士)는 여섯 치」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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節은 柱頭斗栱也라 : 절은 기둥 끝에 있는 두공(기둥 위에서 처마를 지탱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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藻는 水草名이요 : 조는 수초(마름풀)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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梲은 梁上短柱也니 蓋 爲藏龜之室而刻山於節하고 畫藻於梲也라. : 절은 들보 위에 있는 짦은 기둥이니 거북이를 간직하는 집을 짓는 데 기둥 끝의 두공에 산을 새기고 들보 위 동자기둥에 수초를 그리는 것이다. ※ 梲을 한문으로는 난쟁이 주를 써서 “두유주(侏儒柱)”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동자기둥”이라고 한다.
當時에 以文仲爲知어늘 孔子言其不務民義하여 而諂瀆鬼神은 如此하니 安得爲知리오 春秋傳所謂作虛器라하니 卽此事也라.
당시에 장문중을 지혜롭다고 여겼는데 공자는 “그가 사람의 의(道理)를 힘쓰지 않고, 귀신에게 아첨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춘추좌전에「쓸데없는 기물을 만들었다」라고 말하였으니 바로 이 일이다.
【章下註】
張子曰 山節藻梲하여 爲藏龜之室은 祀爰居之義로 同 歸於不知宜矣라.
장자(張載)가 말하기를 두공에 산을 새기고 동자기둥에 수초를 그려서 거북이를 간직하는 집을 지은 것은 원거(爰居: 바다 새)에 제사 지낸 뜻과 똑같이 지혜롭지 못한 데에 귀결(歸結)되는 것은 당연하다.
★ 祀爰居는 국어 노어(國語魯語)에『海鳥曰 爰居 止於魯東門外三日 臧文仲使國人祭之: 바닷새를 원거라고 한다. 노나라 동문밖에 바닷새가 3일 동안 앉아있으니 장문중은 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제사 지내게 하였다.』라고 했다. 내륙지방인 노나라에 바닷새가 날아온 것을 보고 신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허기(作虛器: 쓸데없는 기물을 만드는 것), 종역사(縱逆祀: 내가 지낼 제사가 아닌데 지내는 것), 사원거(祀爰居: 바닷새에게 제사 지내는 것) 이 세 가지는 모두 참독 귀신(諂瀆鬼神: 귀신에게 아첨함)이다. |
[十八章]
子張 問曰 令尹子文이 三仕爲令尹호되 無喜色하며 三已之호되 無慍色하여 舊令尹之政을 必以告新令尹하니 何如이닛고 子曰 忠矣니라 曰 仁矣乎잇가 曰 未知로라 焉得仁이리오。
자장 문왈 영윤자문이 삼사위령윤호되 무희색하며 삼이지호되 무온색하여 구령윤지정을 필이고신령윤하니 하여이닛고 자왈 충의니라 왈 인의호잇가 왈 미지로라 언득인이리오。
자장이 묻기를 영윤 자문이 세 번 사진(仕進: 벼슬에 나아감)해서 영윤이 되었는데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세 번 파출(罷黜: 파면당함)을 당하였는데도 노한 기색이 없으면서 전임 영윤의 정사를 반드시 그것을 가지고 신임 영윤에게 말해주었으니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길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자장이> 말하기를 인한 사람입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모르겠다. 어찌 인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崔子弑齊君이어늘 陳文子有馬十乘이러니 棄而違之하고 至於他邦하야는 則 曰 猶吾大夫崔子也라하고 違之하며 之一邦하야는 則 又曰 猶吾大夫崔子也라하고 違之하니 何如하니잇고 子曰 淸矣니라 曰 仁矣乎잇가 曰 未知로라 焉得仁이리오。
최자시제군이어늘 진문자유마십승이러니 기이위지하고 지어타방하야는 즉 왈 유오대부최자야라하고 위지하며 지일방하야는 즉 우왈 유오대부최자야라하고 위지하니 하여하니잇고 자왈 청의니라 왈 인의호잇가 왈 미지로라 언득인이리오。
<자장이 묻기를> 최자가 제나라 임금을 시해(弑害) 하였는데, 진문자가 말 10승(40 필)이 있었으나 버리고 제나라를 떠났고, 다른 나라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다”라고 말하고 그곳을 떠났으며, 또 다른 나라에 가서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다”라고 말하고 그 나라를 떠났으니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깨끗한 사람이다. <자장이> 말하기를 인한 사람입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모르겠다 어찌 인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 최자의 부인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제나라 장공이 최자를 다른 곳에 심부름 보내고 그 사이에 최자의 부인과 사통(私通)을 했다. 그래서 임금을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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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尹 : 다른 나라는 재상(宰相)들을 相이나 丞을 붙이는데 초나라는 재상을 영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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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仕 : 단순한 뜻은 출근하는 것인데, 출사(出仕: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나오는 것)의 뜻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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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尹은 官名이니 楚上卿으로 執政者也라. : 영윤은 관직의 명칭이니 초나라 상경으로써 정사를 집행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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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文은 姓鬪요 名穀於菟라. : 자문의 성은 “투”이고 이름은 “누오도”이다. ※ 穀는 (젖 먹일 누)이고, 於菟(오도)는 호랑이를 말한다. “투루오도(鬪穀於菟)”라고 한다.
其爲人也喜怒不形하고 物我無間하여 知有其國하고 而不知有其身하니 其忠盛矣라 故 子張疑其仁이라 然 其所以三仕三已하여 而告新令尹者가 未知其皆出於天理하여 而無人欲之私也라 是以로 夫子但許其忠하고 而未許其仁也라.
그 사람됨은 기쁨과 노함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없어서 그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자신의 몸이 있는 것은 알지 않았으니 그의 충성은 성대(盛大)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장은 그가 인하다고 의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 번 사진 하여 영윤이 되고, 세 번 파직당하면서 신임 영윤에게 정사를 말했던 이유가 그것이 모두 천리(천성)에서 나와서 사사로운 인욕이 없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는 단지 그의 충성만을 인정하였고 그의 인은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 鬪穀於菟(투루오도)에 대한일이 춘추 좌전(春秋左傳) 선공 4년(宣公四年)에 나온다.
遂滅若敖氏。初에 若敖娶於鄖하여 生鬥伯比라 若敖卒에 從其母하여 畜於邧이러니 淫於邧子之女하여 生子文焉이라 邧夫人使棄諸夢中하니 虎乳之라 邧子田 見之하고 懼而歸한대 夫人以告하니 遂使收之라 楚人謂乳穀하고 謂虎於菟라 故命之曰 鬥穀於菟라.
마침내 약오씨를 멸하였다. 그 이전에 약오(鬪若敖)가 운나라에 장가가들어서 투백비(鬪伯比)를 낳았다. 약오가 죽어서 <투백비가> 어머니를 따라서 운나라에서 성장하였는데 운자(운나라 임금)의 딸과 사통(私通)을 하여서 자문을 그곳에서 낳았다. 운부인(운나라 임금 부인)이 사람들을 시켜서 몽중의 늪지대에 버렸는데 호랑이가 젖을 먹였다. 운나라 임금이 본 사냥을 나갔다가 그것을 보고 두려워서 돌아와 부인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이윽고 사람을 시켜서 <자문을> 기르게 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은 젖을 일러 “누”라고 하고, 호랑이를 일러 “오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름을 붙이기를 “투루오도”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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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子는 齊大夫니 名杼라. : 최자는 제나라 대부이고 이름은 “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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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君은 莊公이니 名光이라. : 제군은 장공이고 이름은 “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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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文子 亦 齊大夫니 名須無라. : 진문자도 제나라 대부이고 이름은 “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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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乘은 四十匹也라. : 십승은 말 사십 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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違는 去也라. : 위는 떠나는 것이다.
文子潔身去亂하니 可謂淸矣라 然 未知其心果見義理之當然하여 而能脫然無所累乎아 抑 不得已於利害之私하여 而猶未免於怨悔也라 故 夫子特許其淸 而不許其仁이라.
문자가 자신을 깨끗이 하고 어지러운 곳을 떠났으니 깨끗하다고 이를 만 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과연 당연한 의리를 알고서 벗어던지고 얽매이는 바가 없을 수 있었던가? 아니면 사사로운 이해(이익과 손해)에 부득이(어쩔 수 없어서) 오히려 원회(원망하고 후회함)를 면치 못했는지를 알지 못하는 거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단지 그의 깨끗한 것만을 허여(許與) 하고, 그의 인은 허여하지 않은 것이다.
[十九章]
季文子三思而後 行이러니 子聞之 曰 再斯可矣니라。
계문자삼사이후 행이러니 자문지 왈 재사가의니라。
계문자는 세 번 생각한 뒤에 실행을 하니 공자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시기를 두 번 생각하면 옳을 것이다.
《논어 집해(集解) 해석》
계문자가 세 번 생각하고 난 뒤에 실행을 하였다고 말을 하니 공자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시기를 두 번만 생각하였어도 옳게 하였을 것이다.
★ 再斯可矣가 고려본(高麗本), 황본(皇本) 논어에는「再思則可矣」로 되어있고, 당나라 석경본(石經本)에는「再思可矣」로 되어있다. 斯는【斯 → 則 → 而】이 서로 통하므로 논어 집해(集解)와 다산(茶山)은 斯를 而로 봐서「再(두 번만 생각하였어) 而(도) 可矣(옳게 되었을 것이다)」로 해석했고, 주자(朱子)는 斯를 則으로 봐서「再(두 번 생각하) 則(면) 可矣(옳다)」로 해석했다.
★ 계문자는 양공 5년에 죽었는데 공자가 태어난 해보다 17년 전이다. 계문자가 이때까지 아주 충성스러우면서도 훌륭한 행실을 지니고 있다.라고 사람들이 평가해서 그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공자가 비평을 한 것인데 주자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보고 “세 번 생각한 뒤에 실행을 하였는데 공자께서 그 말씀을 듣고...”로 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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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思 : 세 번 생각하는 것은 익숙하도록 생각하는 것(熟思)이다. 옛사람들은 세 번을 좋아한다「일을 시작할 때 계획을 세우고(謨其始), 일을 하는 중간에는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고(思其中)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慮其終)」일이 잘못되는 것이 없다고 했다. |
每事 必 三思而後 行은 若 使晉而 求 遭喪之禮하여 以行 亦其一事也라.
일마다 반드시 세 번 생각한 이후에 행하였다는 것은 이를 태면 진나라에 사신을 가면서 초상을 만났을 때의 예를 찼아보고서 길을 떠난 것도 그 가운데 한가지 일이다.
程子曰 爲惡之人은 未嘗之有思하니 有思則爲善矣라 然 至於再則已審이요 三則私意起而反惑矣라 故 夫子譏之니라.
정자(伊川)가 말하기를 악을 행하는 사람은 생각을 가질 줄 모르니 생각을 가졌다면 선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 생각하는 데에 이르면 이미 자세한 것이고 세 번 생각하는 데에 이르면 사사로운 마음이 일어나서 도리어 현혹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꾸짖은 것이다.
【章下註】
愚는 按 季文子慮事如此하니 可謂詳審而 宜無果擧矣로되 而宣公簒立에 文子乃不能討하고 反爲之使齊하여 而納賂焉하니 豈非 程子所謂私意起而反惑之驗歟아 是以로 君子는 務窮理而貴果斷이요 不徒多思之爲尙이라.
내가(朱子) 살펴 보건대 계문자가 일을 따져보며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자세히 살펴봤다고 말할 수 있어서 으레이 잘못하는 거조(擧措: 말이나 행동 따위의 태도)가 없어야 된다. 그러나 선공이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하였을 때 문자가 바로 토벌하지 못하였고 도리어 <선공>을 위하여 제나라에 사신을 가서 뇌물을 바쳤으니 어찌 정자가 사사로운 마음이 일어나서 도리어 현혹당하게 된다고 말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는 이치를 궁구(窮究)하기를 힘쓰고 결단을 과감하게 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고 한갓 생각만 많이 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는다.
※ 이 부분이 주자가 옛일에 대한 고찰(考察)을 잘못했다고 비판받는 경우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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慮와 思의 차이 : 慮는 하나하나 따지며 생각하는 것. 思는 전후 좌 후를 둘러보고 생각하는 것.(일을 하는 도중에는 처리한 일이 있고, 해야 할 일도 있고. 현재하고 있는 일도 있는데 이걸 다 생각하는 것이 思이고, 일이 다 끝났을 때는 잘잘못을 따져보는 것이 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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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章]
子曰 寗武子 邦有道則知(智)하고 邦無道則愚하니 其知可及也어니와 其愚는 不可及也니라。
자왈 영무자 방유도즉지(지)하고 방무도즉우하니 기지가급야어니와 기우는 불가급야니라。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영무자는 나라에 도(道)가있을 때에는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우직(愚直: 지나치게 고지식함) 하였으니 그의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으나, 그의 우직함은 미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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寗 : 寧 자와 같다.
★ 愚는 어리석다가 아니다. 영무자는 위나라 성공(成公)이 즉위한 뒤에 대부가 됐다. 성공(成公)이 즉위했을때 국력이 약해서 진나라에 3년 동안 구금(拘禁)을 당했는데 그때 약은 사람들은 다 도망을 가는데 영무자는 갖은 고초(苦楚)를 겪으면서 성공(成公) 곁을 지켰다. 이것이 우직한 것이다. 그 뒤 성공(成公)이 위나라로 돌아와서 18년 동안 정치를 잘할 때가 도(道)가 있는 세상이어서 영무자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 다산은 知와 愚를「자신을 거두어들여서 내 몸을 온전히 갖는 것은 지혜(智慧)로운 것 [斂跡全身曰知]이고, 내 몸을 잊고 어려운 것을 무릅쓰고 하는 것은 우직(愚直)한 것이다. [忘身冒難曰愚]」라고 하였다. |
寗武子는 衛大夫니 名兪라. : 영무자는 위나라 대부이니 이름은 “유”이다.
按 春秋傳컨대 武子仕衛는 當文公成公之時하니 文公有道하여 而武子無事可見이요 此其知之可及也요 成公無道하여 至於失國이어늘 而武子周旋其間에 盡心竭力하여 不避艱險하니 凡 其所處 皆智巧之士 所深避而不肯爲者로되 而能卒保其身하고 以濟其君하니 此 其 愚之不可及也라.
춘추좌전을 살펴보건대 무자가 위나라에서 벼슬한 것은 위나라 문공, 성공 때에 해당된다. 문공의 도가 있을 때에는 영무자에게 일이 볼만한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지혜가 미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고, 성공이 도가 없을 때에는 나라를 잃어버리는 데에 이르렀는데 무자가 그때 일을 처리할 때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어렵고 험한 일을 피하지 않았으니 모두 그가 처리한 일들은 모두 지혜롭고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매우 회피하면서 행하려고 하지 않을 것들인데 끝내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 그 임금을 구제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그에 우직함을 미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 여기도 주자가 옛일에 대한 고찰(考察)을 잘못한 부분이다.(영무자는 성공이 즉위한 뒤에 대부가 됐는데 똑같이 성공 때의 일인데 주자는 문공과 성공 때로 놔누어서 본 것이다) |
【章下註】
程子曰 邦無道엔 能沈晦以免患이라 故 曰 不可及也라 亦有不當愚者하니 比干 是也라.
정자(伊川, 明道 불확실)가 말하기를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침회(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음) 해야 환란을 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무자의 우직함은>미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어리석음에 해당되지 않는 분들이 있으니 <상나라> 비간이 이러하다.
※ 출처 : 권경상 선생의 강의 내용을 요약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