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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제사하고 양 경리(楊經理)의 사당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친히 약제(禴祭)106) 를 행하셨다. 이 뒤로는 무릇 같은 일로서 여러 번 보이는 것은 다 쓰지 않는다.
5월에 왕께서 《이충정주의(李忠定奏議)》를 강독하고 곧 명하여 의군정(議軍政)·교차전(敎車戰) 두 차자(箚子)를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에게 반시(頒示)하게 하셨다. 곧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공평하되 밝지 못하면 어진 사람을 어리석게 여기고 어리석은 사람을 어질게 여길 것이고, 밝되 공평하지 못하면 어진 줄 알더라도 등용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줄 알더라도 버리지 못할 것이니, 쓰고 버리는 분별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셨다.
6월에 고(故) 참의(參議)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항의신편(抗義新編)》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왕께서 조헌(趙憲)이 임진년107) 에 창의(倡義)한 일을 보고 감탄하여 마지않고 조헌의 사당과 칠백 의총(七百義塚)에 사제(賜祭)하고 다시 양남(兩南)의 감영(監營)에 명하여 조헌이 손수 고증한 《조천록(朝天錄)》과 일기(日記) 등 서적을 인쇄하여 금산(錦山)·옥천(沃川) 두 서원(書院)에 나누어 내리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 왕께서 각도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신칙하여 신역(身役)을 도피한 백성을 불러다 안주시키고 막 돌아온 자는 조세를 줄이고 요역(徭役)을 면제하여 소생시킬 방도를 다하도록 힘쓰게 하셨는데, 《시경(詩經)》 보우편(鴇羽篇)을 강독하고서 감흥(感興)하셨기 때문이다.
11년 을묘(乙卯) 춘정월(春正月)에 진주 부사(陳奏副使) 박문수(朴文秀)가, 고(故) 병사(兵使) 양무공(襄武公) 정봉수(鄭鳳壽)가 정묘년108) 에 적을 물리친 일을 말하고 또 명나라에서 내려 준 은패 표문(銀牌票文)을 바치니, 왕께서 한참 동안 감탄하고 정봉수를 치제(致祭)하고 그 후손을 등용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동지사(冬至使)가 가져온 문단(紋緞)을 경기영(京畿營)에 내려 곡물을 사서 저축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임자년109) 에 굶주린 백성을 진구(賑救)할 때에 경기의 곡물이 모자라서 고통받았으므로, 지난 여름 비가 내릴 때에 왕께서 말씀하기를, ‘인정은 비를 얻으면 해이해질 것이다. 이 풍년일 때에 미리 대비할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경기에 명하여 곡물을 저축하게 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문단을 내려서 도우셨다.
5월에 함경 감사(咸鏡監司)가 범월(犯越)한 백성 50인의 죄를 논하였는데, 왕께서 어사(御史)를 보내어 안사(按査)하게 하셨다. 연석(筵席)에서 하교하기를, ‘처벌을 너그럽게 한 잘못에 빠질지언정 사납게 하는 잘못에 빠지지 말라.’ 하고, 이어서 명하여 쓸 만한 문사(文士)·무사(武士)를 찾고 또 북쪽 변방의 징사(徵士) 이재형(李載亨)을 찾아보고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하셨다.
추8월(秋八月) 왕께서 처음에 희릉(禧陵)·효릉(孝陵)에 전알(展謁)하려 하셨는데, 이윽고 유사(有司)에게 말씀하기를, ‘밤에 평소처럼 선조(先朝)를 모시는 꿈을 꾸었다. 한 명제(漢明帝)가 원릉(園陵)에서 꿈을 꾸고 역(曆)을 살펴 달[月]을 점쳤으니 본받기 꼭 좋은 것이다.’ 하고, 드디어 명릉(明陵)에 거둥하셨다.
9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는데, 왕께서 친히 구식(救食)110) 하셨다. 유신(儒臣)이 고사(故事)를 아뢰어 면계(勉戒)하니,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왕께서 사학(四學)의 집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도성(都城) 안은 왕화(王化)의 근본인 곳인데, 학사(學舍)가 이러함을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할 수 없다. 봄이 되거든 수리하라.’ 하셨다. 일찍이 밤에 입직(入直)한 옥당(玉堂)에게 선찬(宣饌)하며 말씀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추운 밤이면 옥당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시고 어찬(御饌)을 거두어 내리셨다. 나는 밤에 찬선(饌膳)을 장만하지 않으므로 어주(御廚)에서 장만하여 내리니, 좌사(左史)·우사(右史)와 함께 먹고 마시도록 하라.’ 하셨다.
12년 병진(丙辰) 춘정월(春正月) 이미 죽은 서울 백성은 그 빚을 죄다 면제하고 공채(公債)의 기한은 15년으로 하며 사채(私債)의 기한은 20년으로 하셨는데, 대신(大臣)의 말을 따르신 것이다. 동래(東萊)의 선비들이 상소하기를, ‘임진년에 사절(死節)한 송상현(宋象賢)은 문사이고 정발(鄭撥)은 무사입니다. 한 사당에 같이 향사(享祀)할 수 없으니 나누소서.’ 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유응부(兪應孚)는 어찌 무사가 아니랴마는 육신사(六臣祠)에 같이 향사한다. 무사라 하여 그 절의(節義)를 낮출 수 없다.’ 하고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2월에 광릉(光陵)에 거둥하고 양주(楊州)의 민역(民役)을 1등(等) 감면하셨다.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고려왕의 후손을 등용하고 영유현(永柔縣)에 있는 악비(岳飛)의 사당에 비석을 세우게 하셨다. 곧 2품(品) 이상에게 명하여 각각 자목(字牧)111) 을 감당할 자 두 사람을 천거하게 하셨다. 신축년112) ·임인년113) 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영남(嶺南) 연해(沿海) 백성 중에 온 집안이 모두 죽은 경우에는 그 전조(田租)를 죄다 면제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무신년114) 에 사절(死節)한 사람 남연년(南延年)·이술원(李述原)의 자손을 등용하셨다. 감사(監司)·수령(守令)에게 하교하기를, ‘흉년에 전련(顚連)한 자는 감사·수령이 진구(賑救)할 줄 아나, 풍년에 전련한 자는 다시 마음쓰지 않아서 길에서 굶어 죽도록 버려두니, 한 지아비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하면 마치 저자에서 매맞는 듯하다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하셨다. 대신이, ‘편배(編配)되어 있는 중에 부모의 상을 당한 자를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는 것은 법에 그런 조문이 없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은 효(孝)로 다스리는 법인데 어떻게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지 않겠는가?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라.’ 하셨다.
6월에 양녕(讓寧)·효령(孝寧) 두 대군(大君)의 묘(墓)에 사당을 세우고 그 아래에 위전(位田)을 주고 묘지기를 두고 그 호역(戶役)을 면제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수령으로서 장오(贓汚)를 범한 자는 종신토록 금고(禁錮)하고 추천해 준 사람도 논죄(論罪)케 하기를 항령(恒令)으로 삼았다.
13년 정사(丁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다섯 가지 일을 묘당(廟堂)·방백(方伯)에게 신칙(申飭)하셨는데, 서로 삼가서 공경하기를 힘쓰고 자목(字牧)을 잘 가리고 법을 지켜 선량하기를 힘쓰고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제언(堤堰)을 수리하라는 것이었다.
2월 왕께서 연초부터 법강(法講)115) 을 열고 토론함에 게을리하지 않으셨는데, 마침 옥당(玉堂)이 많이 채워지지 않아서 오래 개강(開講)하지 못하게 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위에서 게을리하더라도 아래에서 오히려 권면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만학(晩學)이기 때문에 봄날이 따뜻하고 점점 길어짐에 따라 전에 공부가 부족하였던 것을 채우려 하나, 옥서(玉署)116) 의 문이 오래 잠겨 법연(法筵)117) 을 열 기약이 없고 한가할 때에 고문(顧問)할 사람이 없으니, 옛 기록에서 찾더라도 이런 일이 있는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인원을 갖추게 하여 날마다 경서(經書)를 지니고 강독(講讀)하셨다.
3월에 왕께서 팔을 앓아 손이 마비되셨는데, 오히려 황단(皇壇)에 친향(親享)하려 하시므로 뭇 신하가 힘써 말리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황은(皇恩)을 숭보(崇報)하는 것은 오직 수척(數尺)의 숭단(崇壇)에 있을 뿐인데, 내가 어찌 감히 작은 병 때문에 예(禮)를 그만두겠는가? 내 병이 굽히고 펴는 데에 방해되어 규(珪)를 잡고 광(筐)118) 을 받들 때에 실의(失儀)가 있을세라 두려우므로 한가할 때에 익혀서 대강 예대로 할 수 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셨다. 곧 정원(政院)에 명하여 육조(六曹)에 신칙하여 《대전(大典)》의 법을 수명(修明)하고 어기는 자는 찰추(察推)하게 하셨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고(故) 참판(參判) 조위(曹偉)가 원통하게 죽은 일과 고 좌윤(左尹) 곽재우(郭再祐)의 훈업(勳業)과 고 군수(郡守) 조종도(趙宗道)가 무용(武勇)을 세운 일을 말하고 모두 사시(賜諡)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다시 공홍 감사(公洪監司)에게 명하여 정충신(鄭忠信)의 사당을 세우게 하고 그 후손을 등용하셨다.
하6월(夏六月)에 날씨가 매우 더운데, 왕께서 오히려 강학(講學)을 그만두지 않으시고 밤 4경(四更)이 되어서야 파하므로 대신이 정신을 너무 피로하게 하신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의 한마음은 만화(萬化)가 근본으로 삼는 것인데, 어찌 날이 덥다 하여 게을리 하겠는가? 조종조(祖宗朝)에서 반드시 그러지 않았을 것이므로 내가 승지(承旨)를 시켜 옛일을 살펴보니 한더위에도 개강(開講)하였거니와, 한추위에도 개강하였는지는 살펴보지 못하였으나 추위와 더위를 어찌 가리겠는가? 더구나 한 달에 여섯 번 차대(次對)하셨으니, 더욱이 조종께서 근정(勤政)하신 성의(盛意)를 알 수 있다.’ 하셨다. 이 뒤로 말년까지 왕께서 끝내 여섯 번의 차대를 한 번도 거르신 적이 없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사직(社稷)에서 기우(祈雨)하려 하셨으나 때마침 왕께서 편찮으시므로 연신(筵臣)이 정성에 달려 있고 예(禮)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성탕(成湯)은 정성이 모자라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상림(桑林)에서 희생을 대신하였는가?’ 하고, 마침내 친히 행하셨다. 돌아오다가 금오의 문앞에 이르러 승지에게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셨다. 이틀 뒤에 다시 친히 태묘(太廟)에서 기우하실 때에 연(輦)을 타지 않고 일산을 펴지 않고서 묘문(廟門)에 이르니, 비가 내려 곤면(袞冕)이 다 젖었으나 밤새도록 공경히 제사하고 이튿날 환궁(還宮)하고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군병을 노문(勞問)하게 하셨다.
8월에 왕께서 건원릉(健元陵)에 거둥하고 현릉(顯陵)·목릉(穆陵)·휘릉(徽陵)·의릉(懿陵)·혜릉(惠陵)에 들러 전알(展謁)하고 재실(齋室)에서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한 다음 거가(車駕)가 돌아왔다. 이튿날 주강(晝講)을 행하고 군병에게 호궤(犒饋)하셨다.
9월에 명하여 공씨(孔氏)를 등용하게 하셨다. 처음에 왕께서 우리 나라에 사는 공씨가 선성(先聖)의 후손인 줄 모르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선성의 53세손 공소(孔紹)가 원(元)나라에서 벼슬하여 한림 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고려 말기에 노국 장공주(魯國長公主)가 공민왕(恭愍王)에게 시집올 때에 공소가 배종(陪從)하여 와서 그대로 동토(東土)에 살았는데, 동토에 공씨가 있는 것은 여기서 비롯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을 고강(考講)하고 분수(分數)가 같은 자에게 전정(前庭)에서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그 우열(優劣)을 겨루게 하셨는데, 승지(承旨)가 밤이 어두워 시권(試券)을 베낄 수 없다고 말하니, 왕께서 어좌(御座)의 촛불을 거두어 주셨다.
윤9월에 경기(京畿)·호서(湖西)·호남(湖南)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군보 미포(軍保米布)를 감면하셨다. 이때 육진(六鎭)에 기근이 들었는데, 특별히 노공미(奴貢米) 3천 석을 내리고 다시 영남(嶺南)의 저치미(儲置米) 2천 석을 더하고 어사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게 하여 마침내 유망(流亡)한 자가 한 사람도 없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친향(親享)하고 나서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윤순(尹淳)에게 말씀하기를, ‘옛사람은 나라의 융쇠(隆衰)를 반드시 음악에서 점쳤다. 이제 묘악(廟樂)의 번잡하고 촉급(促急)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셨다.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고 이 뒤로는 한추위와 한더위를 당하면 전례를 살펴서 품행(稟行)하라고 신칙하셨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과 삼사(三司)의 장관(長官)과 양국(兩局)의 대장(大將)과 팔도(八道)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명하여 각각 인재를 천거하게 하셨다.
11월에 금려(禁旅)는 병사 중에서 기예(技藝)를 시험하여 올리게 하고 항령(恒令)으로 삼으셨다. 이달에 왕께서 죄수를 살피고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선조(先朝)께서는 어선(御膳)을 진공(進供)한 데에 산 꿩·닭·노루·토끼가 있으면 반드시 금원(禁苑)에 놓아 주셨고 나도 본떠서 행하는데, 대개 그 소리를 듣고 차마 그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수도 그러한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 하셨다.
12월에 왕께서 대신에게 말씀하기를, ‘송(宋)나라의 이항(李沆)이 임금이 봉선(封禪)을 크게 벌이는 것을 염려하고 늘 홍수와 가뭄을 아뢰었으니, 참으로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내가 본디 학문이 없으나,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분별은 일념(一念)에 달려 있다는 것을 대강 들었고 또 세상 일을 겪은 것이 많으므로, 경들이 아뢰기를 기다리지 않고 늘 스스로 조심하며 밤마다 잠에서 깨면 오늘날 크게 벌이는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하셨다. 연신(筵臣)이 정문(程文)119) 의 폐단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소식(蘇軾)은 어질다. 득실(得失)은 도외(度外)에 두고 임금의 덕이 나아지지 않는 것을 근심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또한 위에 있는 자가 이끌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셨다.
14년 무오(戊午) 춘정월(春正月)에 관원을 보내어 고(故) 충신(忠臣) 김응하(金應河)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셨는데, 순절(殉節)한 해이기 때문이다.
하5월(夏五月)에 안동(安東) 사람이 사사로이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사당을 훼손하였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문정(文正)의 대절(大節)은 백세(百世)에 빛나는 것인데 감히 사사로이 그 사당을 훼손할 수 있는가? 난민(亂民)이니, 맨 먼저 앞장선 자를 형배(刑配)하라.’ 하셨다.
추9월(秋九月)에 고려의 충신 길재(吉再)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이어서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셨다. 이때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기진(李箕鎭)이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려 준 전토(田土)에 대나무를 심었으니 신하가 되지 않을 뜻은 확고하여 바꿀 수 없다. 죽은 자가 아는 것이 있다면 어찌 시호를 내린다 하여 영광스럽게 여기겠는가?’ 하매, 연신이 말하기를,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도 다 전조(前朝)의 충신인데 아조(我朝)에서 시호를 내렸습니다.’ 하니, 왕께서 윤허하고 명하여 세 사람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독(講讀)하다가 명례악편(明禮樂篇)에 이르러 유신(儒臣)에게 말씀하기를, ‘아!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하늘이 거서(秬黍)120) 를 내리고 땅에서 경석(磬石)이 나와 드디어 명신(名臣)·석보(碩輔)와 함께 제작한 것이 빛나서 볼 만하였다. 이제 세상이 바뀌고 풍속이 변하였을지라도 어찌 음악이 없다 하겠는가? 도리어 성률(聲律)을 아는 자가 없으므로 음절(音節)을 번잡하고 촉급하게 하니, 조종(祖宗)의 옛것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또, 여민락(與民樂)으로 말하면 예전에는 동궐(東闕)·서궐(西闕)을 왕래하고서야 일장(一章)이 끝난다 하였는데, 이제는 또한 그렇지 못하다. 아! 아깝다.’ 하고 한참 있다가 다시 말씀하기를, ‘우리 조정의 《오례의(五禮儀)》는 명나라의 《대명집례(大明集禮)》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사(朝士)에는 익숙한 사람이 없으므로 무릇 대례(大禮)가 있으면 홍려리(鴻臚吏)에게 일임하여 전도되고 변란(變亂)되었다. 예(禮)도 이러한데, 음악을 어찌 논하겠는가?’ 하셨다. 조금 뒤에 방백(方伯)·수령(守令)이 남형(濫刑)하는 것을 금하셨다. 경기·삼남(三南)의 대동미(大同米)는 그 반을 각 고을에 두라고 명하고 말씀하기를, ‘예전에 유사(有司)인 신하가 전곡(錢穀)의 수를 임금에게 아뢰지 않은 것은 임금이 넉넉한 줄 알고서 도리어 즐기고 사치하는 마음을 일으킬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늘 월말에 올리는 회요(會要)를 봄에 따라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찌 저축이 풍부하여 한문제(漢文帝)를 본떠 천하(天下)의 전조(田租)를 죄다 줄여 줄 수 있으랴마는 지금의 저축이 전조를 줄여 주기에 마땅하지 못하더라도 옮겨 나르는 비용을 덜 수는 있을 것이다.’ 하셨다.
11월에 명하여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고(故) 참판(參判) 정온(鄭蘊)에게 다 후사(後嗣)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고 고 부윤(府尹) 임경업(林慶業)과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매(李如梅)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12월에 대신이 이천(伊川)·곡산(谷山)에 도둑이 많다 하여 무신 수령으로 바꾸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다스리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문신과 무신에 관계되지 않는다. 더구나 도둑도 본디 양민(良民)이니, 인의(仁義)로 점차 교화하여 용사(龍蛇)가 적자(赤字)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옳은데, 어찌 잡아서 장살(杖殺)하기를 힘쓸 수 있겠는가? 먼저 두 부(府)에 신칙해야 한다.’ 하셨다.
15년 기미(己未)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한 다음 방백(方伯)·수령(守令)에게 신칙하여 종자와 소를 백성에게 도와 주어 전야(田野)를 널리 개간하게 하셨다. 종척(宗戚)의 복례(僕隷)가 서울 백성을 침탈(侵奪)하는 것을 금하고 백성 중에 가난하여 혼가(婚嫁)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가 돕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를 강독하다가 교사(郊祀) 때에 황제가 친히 희생을 살피고 백관(百官)을 서계(誓戒)하였다는 데에 이르러 감탄하며 말씀하기를, ‘사전(祀典)을 공경하는 것이 또한 이러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셨다. 대신들이 다 수백년 동안 행하지 않던 예를 반드시 시작할 것 없겠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禮)에 없는 예는 워낙 시작할 수 없겠으나, 예(禮)에 있는 것을 어찌하여 행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본디 친향(親享)이 있을 때에는 희생을 살피고 서계하는 것도 다 친히 행하는 것으로 하도록 명하셨다. 대왕 대비(大王大妃)에게 진연(進宴)하고 나이가 일흔 이상인 조사(朝士)와 여든 이상인 서민(庶民)의 자손에게 관가에서 밑천을 주어 각각 그 어버이에게 잔치하게 하셨다.
5월에 중종(中宗)의 원비(元妃) 신씨(愼氏)에게 단경(端敬) 이라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고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셨다. 이에 앞서 숙종(肅宗) 때에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장릉(莊陵)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를 청하고 또 신비(愼妃)의 위호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숙종께서 장릉의 위호만을 회복하고 신비의 일은 오히려 망설이시어 사당을 세우고 수호(守戶)를 두게 하셨다. 이해 봄에 왕께서 일에 따라 느낌을 일으켜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사당을 지키게 하셨는데, 얼마 안가서 사인(士人) 김태남(金台南)이 상소하여 신비의 위호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군심(君心)의 추향(趨向)은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한 무제(漢武帝)가 이재(理財)를 좋아하면 이재하는 자가 나아가고, 변방을 개척하기를 좋아하면 변방을 개척하는 자가 나아갔다. 이제 김태남은 중관이 사당을 지키기 때문에 이 상소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말을 채용하는 데에는 그 당부(當否)만을 볼 뿐이다.’ 하셨다. 드디어 백관(百官)이 함께 의논하라고 명하셨는데, 다들 김태남의 말이 옳다고 말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추8월(秋八月)에 왕께서 온릉(溫陵)에 거둥하셨는데,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신릉(新陵)이다.
16년 경신(庚申) 춘3월(春三月)에 왕께서 명릉(明陵)에 거둥하여 숙종조(肅宗朝)에 대보단(大報壇)을 건치(建置)한 일을 추사(追思)하고 감개하셨다. 회란(回鑾)할 때에 선무사(宣武祠)에 이르러 부앙(俯仰)하며 눈물을 흘리며 관원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친히 감황은시(感皇恩詩)를 지어 새겨서 벽에 걸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주역(周易)》을 강독(講讀)하다가 서합(噬嗑)121) 의 대상(大象)에 이르러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임금의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를 자세히 파고 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개 장차 몸소 행하려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예전 옥사(獄死)를 청리(聽理)하는 자는 살릴 방도를 찾았는데, 지금 옥사를 청리하는 자는 죽일 방도를 찾는다.」 하니, 이것이 어찌 만세(萬世)의 귀감(龜鑑)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어서 팔도에 신칙하여 모든 옥사를 상세히 살피고 삼가도록 힘쓰게 하셨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전록통고(典錄通考)》를 속찬(續纂)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윤허하셨다. 또 하교하기를, ‘창업(創業)하고 중흥(中興)한 임금은 관대한 것을 숭상하므로 국조(國祚)가 길이 이어졌으나, 계체(繼體)하고 수성(守成)한 임금은 가혹하고 각박함에 힘썼으므로 자손이 빨리 망하였다는 것을 이 글을 편집하는 자가 몰라서는 안 된다.’ 하셨다. 얼마 안되어 왕께서 계장(啓狀)에 자자(刺字)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고 경녈(黥涅)122) 이 지금도 아직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유척기에게 물으시매, 유척기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대명률(大明律)》을 따라 쓰는데, 《대명률》에 절도(竊盜)한 자는 자자한다 하였으므로 평의(評議)함에 있어서 그 글을 인용한 것이고, 실은 자자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법조(法曹)에 아직도 경녈하는 제구가 있어 이따금 팔에 자자하나 낯에는 자자하지 않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같이 받은 것이니 그 손상하는 것은 낯이나 팔이나 마찬가지이다. 한번 손상한 뒤에는 혹 스스로 새로워지더라도 어찌 여느 백성과 같아질 수 있겠는가? 경녈하는 제구를 빨리 불사르고 팔에 자자하는 법도 금하라. 율문(律文)에 견주어 인용하는 것은 공명(空名)이라 할지라도 장래 그 이름대로 할 자가 없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이 죄명을 없애어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5월에 대동미(大同米)·전조(田租)의 반을 줄였는데, 유사(有司)가 경용(經用)이 모자람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초의(草衣)하고 초식(草食)하기로 마음먹으면 어찌 경용을 근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아홉 곳의 영선(營繕)을 그만두게 하셨다.
6월에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시호(諡號)를 명의 정덕(明義正德) 이라 가상(加上)하고 태묘(太廟)에서 친향(親享)하고 돌아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다.
추7월(秋七月)에 뭇 신하가, ‘왕의 효제(孝悌)한 덕(德)과 무릇 당화(黨禍)를 없애고 역란(逆亂)을 소제하고 사전(祀典)을 닦고 백성을 어루만지신 일이 기록에서 찾아도 견줄 만한 것이 드물다’ 하여 여러 번 존호(尊號)를 청하였으나, 왕께서 굳이 사양하고 윤허하지 않으셨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받기를 권하시니, 왕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먼저 자성(慈聖)께 진호(進號)한 뒤에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하시매, 대비께서 허락하셨다. 드디어 대비의 존호를 현익(顯翼) 이라 올리고 왕의 존호를 지행 순덕 영모 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 이라 올리고 왕비의 존호를 혜경(惠敬) 이라 올렸다. 왕께서 인정전에서 책보(冊寶)를 받고 명정전(明政殿)에서 백관의 진하를 받으셨다. 이튿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공시(貢市)의 민폐(民弊)를 묻게 하고 각도에 신칙하여 민폐를 물어서 아뢰게 하셨다.
8월에 왕께서 친히 문묘(文廟)에서 석채(釋菜)를 행하고 물러가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서 과시(科試)를 설행(設行)하여 선비를 뽑고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한 달에 세 번 국자(國子)123) 에 가서 유생들과 회찬(會饌)하고 학업을 권과(勸課)하게 하고, 《주례(周禮)》에 있는 주(州)에서 승학(陞學)하는 법을 본떠 식년(式年)마다 각도에서 각각 오경(五經)에 능통한 선비 한 사람을 천거하여 태학(太學)에 들여보내어 인재를 만들어 내게 하셨다.
9월에 왕께서 제릉(齊陵)·후릉(厚陵)에 거둥하시는 길에 파주(坡州)에 있는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묘(墓)를 지날 때에 왕께서 교자(轎子)를 멈추고 식(式)124) 하여 경의를 나타내고 관원을 보내어 성혼과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묘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능에 배알하고 나서 드디어 개성부(開城府)에 거둥하여 만월대(滿月臺)에 나아가 문과(文科)·무과(武科)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고, 칙교(飭敎)하여 문사(文士)·무사(武士)로서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등용하셨다. 그 중에서 청현(淸顯)에 통하여 마땅한 자는 청현에 통하도록 하셨다. 성균관(成均館)에 이르러 알성례(謁聖禮)를 행하고 학사(學舍)를 두루 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터가 아름답다. 전조(前朝)에서 불(佛)을 좋아하고 유(儒)를 좋아하지 않아서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아깝다.’ 하고, 드디어 친히 ‘존성도(尊聖道)’라 써서 새겨 명륜당에 걸게 하고 《삼경(三經)》·《사서(四書)》 각 1부(部)를 내려 존경각(尊經閣)에 두게 하셨다. 다시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계유년125) 에 고도(故都)에 거둥하셨을 때에 시학(視學)하려 하셨으나 못하고 다만 양조(兩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면포(綿布)를 내리셨으니, 이제 또한 면포 1백 필(匹)을 내린다.’ 하셨다. 곧 선죽교(善竹橋)에 비(碑)를 세워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절의(節義)를 기리고 또 부조현(不朝峴)에 비를 세워 새 조정에 나와 벼슬하지 않은 사람 자손의 충정(忠貞)을 장려하고, 사효자비(四孝子碑)를 지날 때에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김업(金嶪) 등의 자손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게 하시고, 드디어 회란(回鑾)하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은거하여 뜻을 지키는 선비에게 하유(下諭)하셨는데, 나와서 조정에 오게 하고 조정에 나오는 자는 다 역마(驛馬)를 타게 하셨다.
17년 신유(辛酉) 춘정월(春正月)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게 하고 기보병포(騎步兵布)를 면제하고 가장 심한 고을은 부역과 공물도 모두 면제하셨다. 이때 관북(關北)도 기근이 들었는데, 모든 관동·관북의 방물(方物)·물선(物膳)·삭선(朔膳)을 가을 곡물이 익을 때까지 죄다 면제하셨다.
2월에 전 부제학(副提學)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는데, 그 출처(出處)에 본말(本末)이 있고 말이 없이 절조를 지키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신 것이다.
3월에 명하여 선비라 이름하는 자에게는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하지 말게 하시고 항령(恒令)으로 삼았다. 처음에 전 참판(參判) 이춘제(李春躋)가 그 아들의 관례(冠禮)를 치를 때에 서제(庶弟) 이하제(李夏躋)를 시켜 성찬(盛饌)을 장만하는 일을 맡게 하고 공경(公卿)·위포(韋布)126) 를 두루 청하여 잔치하였다. 그런데 잔치에 참여한 자가 많이 중독되어 죽게 되거나 죽지 않으면 또한 병들었으므로 뭇사람이 원망하여 격고(擊鼓)하고 이하제를 다스려 죽은 자와 함께 일세(一洗)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불쌍히 여겨 윤허하셨다. 그래서 뭇 원망하는 사람들이 추관(秋官)의 상형(常刑)으로는 승복(承服)받을 수 없다 하므로, 포청(捕廳)에 보내어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로 시행하여 아주 혹독하게 하였는데, 이하제가 마침내 포청에서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을 친히 시강(試講)하실 때에 명관(命官) 송인명(宋寅明)에게 말씀하기를, ‘이하제를 다스린 것은 효자(孝子)·자부(慈父)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傳)에는 「선비를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다.」 하였다. 이하제는 일찍이 강생(講生)으로서 이 뜰에 들어왔었는데, 도둑을 다스리는 율(律)로 다스렸다. 이 길이 한번 열려서 혹 뒷날의 본보기가 된다면 그 도도(滔滔)한 폐단이 어찌 내게서 비롯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셨는데, 대개 송인명의 아들도 잔치에서 죽었으므로 왕께서 언급하신 것이다. 곧 유사에 명하여 옥(獄)을 세척하여 그 불결한 것을 제거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이 통청(通淸)을 관장하는 법을 없애고 한림(翰林)의 천거를 권점(圈點)으로 하는 것으로 고쳤다. 왕께서 당습(黨習)을 매우 미워하여 말씀하기를, ‘당습은 다 신진(新進)인 선비가 조급히 부귀를 다투고 서로 무함하는 데에서 말미암는다.’ 하고 명하여 두 가지 천거를 폐지하게 하셨다. 그런데 일찍이 한림이 된 자들이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이 도당 회권(都堂會圈)을 행한 일을 인용하고 사관(史官)을 중히 여기는 방도가 아니라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관원이 제 직무에 따라 아뢰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당습을 미워하므로 익히 생각하고 살펴서 처리하였는데, 소관(小官)이 감히 방해하는가?’ 하고 드디어 상소한 신하들을 죄다 파면하셨다.
5월에 《오례의(五禮儀)》에 실린 궁전(宮殿)·문·다리의 옛이름이 달리 불리므로 예를 행함에 불편하다 하여, 전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바로잡게 하고, 글이 완성된 다음에 영남 감영(嶺南監營)에 보내어 간행(刊行)하게 하셨다.
6월 관동(關東)에서 백토(白土)를 파내는 일을 멈추게 하고 이어서 사옹원(司饔院)에 명하여 가을에 굽는 일을 그만두게 하셨는데, 어사(御史)의 말을 따른 것이다.
추7월(秋七月)에 광달문(廣達門) 밖에 태학생(太學生)을 불러 찬선(饌膳)과 술을 내려 먹이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선성(先聖)을 존경하고 근본을 힘쓰는 도리를 선유(宣諭)하게 하셨다. 이것은 숙묘(肅廟)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18년 임술(壬戌)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당의(黨議)의 분쟁(分爭)이 서원(書院)에서 많이 일어난다 하여 각도의 50년 이래 새로 창설한 서원을 철훼하라고 명하셨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기자(箕子)·공자(孔子)·주자(朱子) 삼성(三聖)의 영당(影堂)을 철훼하지 말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초야(草野)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윤허하셨다.
3월에 왕께서 친히 ‘공평하고 편파하지 않은 것은 군자의 공심이고 편파하고 공평하지 않은 것은 소인의 사의이다.[周而不比乃君子之公心比而不周寔小人之私意]’라고 써서 태학(太學)에 내려서 돌에 새겨 반수교(泮水橋)에 세우게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왕께서 하루 전에 재계(齋戒)하고 구식(救食)하고서 항령(恒令)으로 삼으셨다. 이때 여역(癘疫)이 매우 치성하여 사망이 많았는데, 왕께서 양의사(兩醫司)에 명하여 나누어 맡아서 치료하게 하고 온 집안이 죽은 자는 관(官)에서 거두어 묻게 하셨다.
6월에 강화(江華)의 외성(外城)을 쌓았는데, 유수(留守) 김시혁(金始㷜)의 청을 따른 것이다.
추7월(秋七月)에 이연덕(李延德)을 겸 장악원 정(兼掌樂院正)으로 삼아 아악(雅樂)을 고정(考正)하게 하셨다. 국가가 난리를 겪은 뒤로 아악이 산일(散軼)되어 생소관금(笙簫管琴)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황단(皇壇)의 악기(樂器)는 대부분을 속악(俗樂)으로 대체하였다. 또한 궁헌(宮軒)의 제도를 갖출 수 없었으므로 왕께서 개탄하여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민응수(閔應洙)에게 명하여 연경(燕京)에서 네 가지 악기를 사 오게 하셨으나, 곡보(曲譜)를 탄취(彈吹)할 줄 아는 자가 없었는데, 어떤 자가 이연덕이 음악을 안다고 천거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왕께서 또 세종조(世宗朝)의 보루각(報漏閣)을 회복하려고 이연덕에게 명하여 정교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최천약(崔天若)과 함께 강구(講究)하게 하셨다.
8월에 어떤 사람이 평양(平壤) 땅속에서 옛 규(圭)를 얻어서 바치고 말하기를, ‘이것은 기자(箕子)의 규입니다.’ 하였으므로, 왕께서 연신(筵臣)에게 물었다. 연신이 대답하기를, ‘은(殷)나라는 검은 빛을 숭상하였으므로 기자의 규도 검었을 것인데, 이제 검지 않고 푸르니 아닐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그렇다. 이것은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우리 나라에 내려 준 것인데, 임진년의 서수(西狩) 때에 잃은 것일 것이다. 황단에 제사할 때에 이 규를 잡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셨다.
9월에 경주(慶州)에 홍수가 나서 신라 헌덕 왕릉(憲德王陵)을 무너뜨렸는데, 왕께서 향축(香祝)을 보내고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수리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영남(嶺南) 백성이 관북(關北)으로 곡물을 나르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빠져 죽었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관북 백성을 위하다가 영남 백성을 죽였으니, 인(仁)을 온전히 하기 어렵기가 이렇구나.’ 하고, 도신에게 명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하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명하여 《병장도설(兵將圖說)》을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하게 하셨다.
11월에 왕께서 서울 선비가 태학(太學)에 들어가 거재(居齋)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명하여 상재생(上齋生)의 액수 1백 인에 맞추어 늘리고 회찬(會饌) 하루를 1점(點)으로 하여 50점에 차면 반시(泮試)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게 하셨다. 드디어 강제 절목(講製節目)을 만들어 태학에 명하여 준행(遵行)하게 하고, 이튿날 숭문당(崇文堂)에서 태학생을 소견하여 말씀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 당을 세우고 숭문이라 이름 붙인 것은 문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고, 이제 이 당에서 너희들을 만나는 것도 문을 숭상하는 뜻이다.’ 하셨다.
19년 계해(癸亥) 춘정월(春正月) 초하루 아침에 왕께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동조(東朝)께 진하(陳賀)하셨는데, 왕께서 즉위하신 뒤로 어머니로서 계신 지 20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3월에 명하여 《수교집록속편(受敎輯錄續編)》을 짓게 하셨다. 하교하기를, ‘이 뒤로 군무(軍務)가 아닌데 내가 혹 곤장(棍杖)을 쓰거든 후원(喉院)127) 에서 집주(執奏)하라.’ 하셨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여 술을 금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전에 술을 금하였으나 백성만 소요하게 하고 실효(實效)가 없었다. 내가 글을 만들어 경계하고 금령(禁令)을 만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내가 도류안(徒流案)을 보니 술 때문에 충군(充軍)된 자가 많았는데, 이것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다. 먼저 교화하지 않고 다만 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쾌하게 여긴다면, 백성이 어떻게 편안히 살겠는가?’ 하고, 들어주지 않으셨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를 불러 왕께서 말씀하기를, ‘대신(大臣)이 방금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구경(九經)128) 의 차서에 어진이를 높이는 것이 대신을 공경하는 것 위에 있으므로 먼저 경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고, 이어서 묻기를, ‘삼대(三代) 이후에 다시 삼대 같은 때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시매,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차이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어찌하여 행해지지 않는가?’ 하시매,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기품(氣稟)을 번거롭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제 선왕(齊宣王)은 맹자(孟子)를 대하여 재화(財貨)와 여색(女色)을 숨기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경에게 숨기겠는가? 나는 기쁨과 노여움이 나타나면 늘 중도를 잃는데, 스스로 병인 줄 알기는 하나 고치지 못한다.’ 하시매,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병인 줄 알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약이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것이 병인 줄 아셨으면 어찌하여 고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하시매, 박필주가 말하기를, ‘성의가 모자라면 스스로 속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말이 착하다. 내가 스스로 속인 지 이미 반생이 넘었거니와, 이제부터 뒤로는 스스로 속이지 않기를 힘쓰겠다.’ 하셨다. 박필주가 이어서 이재(李縡)·한원진(韓元震)은 여러 해 동안 배척하여 두지 말아야 할 것임을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는 내 잘못이다.’ 하고, 당장에 명하여 한원진은 삭출(削黜)하지 말고 이재는 정경(正卿)에 올리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태묘(太廟)에서 향사(享祀)하고 회란(回鑾)하다가 인조(仁祖)의 구궁(舊宮)을 바라보고 즉위하신 때로부터 천시(天時)가 3주갑(周甲)이 되었음을 느끼고 드디어 들를 것을 명하셨는데, 갑작스러워서 군진(軍陣)이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장위(仗衛)가 많이 질서를 잃었다. 장령 윤식(尹植)이 간(諫)하기를, ‘태묘를 나올 때에 명하지 않고 도중에서 명하셨으니, 뭇 신하가 말릴 것을 억제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억제한다는 것은 본정(本情)이 아니다. 그러나 말은 옳으니, 내가 받아들이고 거절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윤식을 통정(通政)의 품계에 발탁하셨다. 곧 향사 때의 뭇 신하의 제복(祭服)이 제도에 맞지 않는다 하여 유사(有司)에 명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살펴서 바로잡게 하고 또 의주(儀註) 가운데에서 절문(節文)이 번잡한 것을 친히 바로잡아 유사에 내리셨다.
윤4월(閏四月)에 왕께서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하고 명륜당(明倫堂)에서 시사(試士)하고 하련대(下輦臺)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셨는데, 왕께서 3시(矢)를 맞추셨다. 성종(成宗)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문형(文衡)에게 명하여 그 일을 적어 명륜당에 걸고 향관청(享官廳) 동쪽에 각(閣)을 세워 궁시(弓矢)·기복(器服)을 보관케 하셨다. 이튿날 태학생을 숭문당(崇文堂)에 불러 술을 내리고 음식을 차려 주셨는데, 음식은 모두 다섯 가지이고 술은 모두 세 번 돌렸다. 이에 앞서 왕께서 묘중(廟中)에서 일을 행할 때마다 음악의 장절(章節)을 묵묵히 셈하셨는데, 그 제1실(第一室)의 공덕(功德)을 나타내는 것을 혹 제5실에서 연주하기도 하고 제6실의 공덕을 나타내는 것을 혹 제9실에서 연주하기도 하므로 왕께서 매우 의심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에게 물으셨으나 연신이 대답하지 못하므로 드디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셨다.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대답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서 음악을 제정할 때에 신관(晨祼)과 삼헌(三獻)의 악장(樂章)에서 각각 인입(引入)·인출(引出)을 덜고 아홉으로 절(節)을 만들고 그 여덟 장(章)에서 목조(穆祖)부터 태종(太宗)과 원경 왕후(元敬王后)까지의 공덕을 두루 서술한 뒤에 제9장에서 통틀어 서술하여 마치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음악을 제정한 미지(微旨)이었습니다. 인조조(仁祖朝)에 이르러 뭇 신하가 묘악(廟樂)이 구성(九成)하는 뜻을 깨닫지 못하고 드디어 실마다 그 장을 하나로 하고 선묘(宣廟)의 악장을 추가하여 만들어서 그 아홉 장을 열 장으로 만들었고, 지금의 악사(樂師)가 또 그 이치를 몰라서 또한 한 장을 각각 한 실에서 연주하니, 이 때문에 공덕이 연주하는 실에 맞지 않습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그렇다. 선조(宣祖)의 악장을 이제 없앨 수 없으니, 태종실(太宗室)의 현미장(顯美章)과 원경후실(元敬后室)의 정명장(貞明章)을 합하여 한 시(詩)를 만들어 구성의 수를 어기지 않게 하라. 또 오늘 바로잡은 시말(始末)을 의궤(儀軌)에 상세히 실어서 뒷날의 빙고(憑考)로 삼으라.’ 하셨다.
5월에 왕께서 사직(社稷)에 비오기를 빌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다시 북교(北郊)에서 빌려 할 때에 근신(近臣)에게 말씀하기를, ‘비오기를 빌 때에는 연(輦)을 타지 않는 것이 고례(古例)인데, 일전에 원로 대신이 간절히 다투므로 애써 따랐으나, 이렇게 하고서 어찌 천신(天神)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보여(步輿)로 북교에 이르니, 제사가 끝나고서 비가 내렸다. 왕께서 한참 동안 한데에 앉았다가 돌아오셨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일로 말미암아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착한 사람을 등용하면 그 이로움이 크다. 한(漢)나라 조정에 급암(汲黯)129) 이 있을 때에는 회남(淮南)에서 감히 반란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하셨다.
9월에 뭇 신하가 동조(東朝)께 잔을 올려 수(壽)를 빌기를 청하였는데, 동조께서도 왕이 조정에서 뭇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기를 바라시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하셨다. 드디어 탄미절(誕彌節)에 뭇 신하에게 잔치를 베푸셨는데, 음악은 아악(雅樂)을 쓰고 술은 현주(玄酒)130) 를 쓰고 음식은 그 가짓수를 줄였다.
동10월(冬十月)에 엄흥도(嚴興道)에게 하대부(下大夫)를 추증하고 관에서 제수(祭需)를 주게 하셨는데, 예관(禮官)의 말을 따른 것이다.
20년 갑자(甲子) 춘정월(春正月)에 《소학선정전훈의(小學宣政殿訓義)》를 찬집(纂輯)하였다. 왕께서 유신(儒臣)들에게 말씀하기를, ‘《소학》은 내가 평생 동안 존신(尊信)한 글이다. 내가 세종조(世宗朝)의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를 본떠 음훈(音訓)의 사실(事實)과 선유(先儒)의 성명(姓名)·출처(出處)를 집해(集解) 아래에 나누어 풀이하여 보는 데에 편리하게 하고자 한다.’ 하셨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유신(儒臣)을 불러 친히 참증(參證)하시고 완성되고 나서는 찬성(贊成) 박필주(朴弼周)에게 보여 거듭 교정하게 하여 세상에 유행시키셨다.
하5월(夏五月)에 명하여 《속대전(續大典)》을 찬집(纂輯)하되 전가 사변율(全家徙邊律)을 없애게 하셨다. 이에 앞서 성종조(成宗朝)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였는데, 규모는 매우 바르나 조관(條貫)은 오히려 상세하지 못하므로 역대에서 증수(增修)하여 각각 한 서책을 만들었는데, 《전속록(前續錄)》·《후속록(後續錄)》·《전록통고(典錄通考)》·《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의 서책이 있었으므로 문호(門戶)가 번거롭고 많아서 고거(考據)하기에 불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고 아홉 당상(堂上)과 아홉 낭청(郞廳)을 차출하여 육전(六典)을 나누어 맡겨 번잡한 것을 삭제하여 간단하게 하고 날마다 전석(前席)에 인대(引對)하여 친히 감정(勘定)하셨는데, 전가 사변율에 이르러 탄식하여 말씀하기를, ‘범한 자는 죄가 있으나 처자는 무슨 죄인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없애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명하여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찬집하게 하셨다. 《오례의》도 성종조에서 이루어졌는데, 뒤에 손익(損益)한 것이 많으나 완성된 서책이 없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속찬(續纂)하게 하신 것이다.
9월에 왕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셨는데, 뭇 신하의 청을 따른 것이다. 왕께서 기사에 이르러 영수각(靈壽閣)에 참배하고 잠저(潛邸) 옛 동리의 나이 여든 이상인 부로(父老)를 소견(召見)하고 차등을 두어 미포(米布)를 내리셨다. 이튿날 기사의 신하들을 불러 선온(宣醞)하고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기해년131) 에 기사의 신하에게 잔치를 내리셨는데, 이제 다만 선온하는 것은 감히 동조(東朝)께 진연(進宴)하기보다 먼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께 진연하셨다. 왕께서 친히 사(詞)를 만들어 기쁨을 도우셨는데, 그 사에 ‘저 보각(寶閣)에 참배하고 궤장(几杖)을 받아 왔도다. 장락궁(長樂宮)에 기쁨을 받들어 예연(禮宴)을 크게 열었도다. 강릉(岡陵)에 송축(頌祝)하니 이것이 만세배(萬歲盃)로다.’ 하였다. 기쁨을 극진히 하고 파하여 물러나와 뭇 신하에게 말씀하기를, ‘어버이가 계시면 늙음을 말할 수 없으나, 영수각에서 받은 궤장을 동조의 좌우(座右)에 바치고 이 사를 노래하여 다만 색동옷을 입고 젖먹이 놀이를 하는 것을 갈음하였다.’ 하셨다.
21년 을축(乙丑) 춘정월(春正月)에 관서 어사(關西御史)가 돌아와, 영변부(寧邊府)에 육상궁(毓祥宮)에서 절수(折受)한 것이 있는데, 자못 민폐가 된다는 것을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다 일체(一體)인데, 더구나 선조에서 지성으로 사랑하고 돌보신 백성이겠는가? 폐지하라.’ 하셨다.
3월에 왕께서 대보단(大報壇)에 친향(親享)하려 하시는데, 뭇 신하가 말리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더 노쇠하면 몸소 행하려 하여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친향하셨다. 명하여 만동사(萬東祠)를 수리하고 면세전(免稅田)을 주게 하셨다.
하6월(夏六月)에 관동(關東)의 공삼(貢蔘)을 줄이고 속전(續田)을 주어 민역(民役)에 보태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하교하기를, ‘우리 동방의 도학(道學)·문장(文章)은 고려 포은(圃隱)132) 이 실로 창도하였으니,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근년 송경(松京)에 거둥하였을 때에 부조현(不朝峴) 두문동(杜門洞)을 표창하여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133) 의 여(閭)에 식(式)하고 비간(比干)134) 의 묘(墓)를 봉(封)한 일을 본떴는데, 이제 듣건대, 두문동의 후손에 장사꾼이 많다 하니, 등용해야 하겠다.’ 하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동조(東朝)께 잔을 올려 수를 비셨다.
22년 병인(丙寅) 춘2월(春二月)에 왕께서 문학신(文學臣)을 불러 말씀하기를, ‘옛사람이 글을 읽어서 방심(放心)을 되찾은 데에는 뜻이 있다. 내가 스스로 《소학훈의(小學訓義)》를 찬수(纂修)하고 늘 평소에 세종께서 동방의 성인으로서 예악(禮樂)을 제작하신 것을 몸소 생각하나, 이제 내가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는가? 오직 평소에 보고 들은 것과 계술(繼述)하는 뜻을 대략 적어서 스스로 경성(警省)하고 또 후세의 자손에게 보일 뿐이다.’ 하셨다. 드디어 날마다 편전(便殿)에서 인대(引對)하여 내편(內編)·외편(外編)을 지으셨는데, 계음식(戒飮食)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말씀하기를, ‘예전에 우리 선조(宣祖)께서 처음 대통(大統)을 이으셨을 때 궁인(宮人)이 도량을 시험하려고 음식을 짐짓 깨끗하지 않게 하였으나 성조(聖祖)께서 조금도 낯빛이나 말씀에 나타내지 않으시니 궁인이 황공하여 그만두었는데, 이제까지 궁중에서 아름다운 일로 전하여 온다. 내가 음식에 대하여 가린 적이 없는 것은 이어받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셨다. 서책이 완성되니 《자성편(自省編)》 이라 이름짓고, 이어서 뭇 신하에게 경계하기를, ‘이제부터 언동(言動)이나 정령(政令)이 《자성편》에 어그러지는 것이 있거든 《자성편》에 따라서 경계를 아뢰라.’ 하셨다. 얼마 뒤에 왕께서 유신(儒臣)을 소접(召接)하시는 것이 자못 드물었는데, 유신이 《자성편》을 인용하여 경계하니, 왕께서 칭찬하고 표피(豹皮)를 내리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땅에서 재물이 나는 것은 한정이 있는데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은 절도가 없다. 한번 사신이 갈 때에 광은(礦銀) 10만을 써서 왕공(王公)·대부(大夫)·서필(庶匹)에게 쓰이는 능라(綾羅)를 채웠는데, 이제는 궁벽한 초야(草野)에서도 능라를 쓰므로 한 나라의 재력을 다하여 한때의 사치를 돕고 있다. 아! 한탄스러워 견딜 수 있겠는가? 대저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 반드시 그보다 심하게 하거니와, 이번 절사(節使)에서 비롯하여 위로는 곤의(袞衣)부터 아래로는 조의(朝衣)에 쓰이는 능라를 일체 엄금하되 군용(軍用)은 이 제한에 넣지 않는다. 어기는 자가 있으면 서장관(書狀官)은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죄주겠다.’ 하셨다. 이날 밤에 승지(承旨)·옥당(玉堂)을 불러 말씀하기를, ‘내가 평소에 거친 베옷을 입고 흰 베로 만든 관을 쓰는 데에 뜻이 있어 궁중에서 먼저 하려 하였으나, 위로 자성(慈聖)을 받들기 때문에 감히 할 수 없었다. 이제 마침 느낌을 일으켜 자성께 평소의 뜻을 환히 아뢰니, 자성께서 기뻐하여 말씀하기를, 「검약(儉約)을 나타내신 것은 열조(列朝)의 성대한 일이다. 네가 뜻이 있으면 대저 무엇이 어려우랴? 화려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하셨다. 이제부터 궁중에서 상투를 높이지 않을 수 있고 소매를 넓히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옷이 땅에 끌리지 않을 수 있다. 아! 중외(中外)의 신서(臣庶)는 모두 이 뜻을 몸받아 백성으로 하여금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되게 하라.’ 하셨다. 왕께서 다시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 가운데에서 여섯 가지 말을 써서 좌우(座右)에 붙여 스스로 경계하셨는데,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好勝人]과 잘못을 가르쳐 줌에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것[恥聞過]과 변설에 능란 한 것[騁辯給]과 총명을 자랑하는 것[衒聰明]과 위엄을 돋우는 것[厲威嚴]과 강퍅을 함부로 부리는 것[恣剛愎]이었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우러러보게 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여섯 가지 병폐를 범하거든 경들이 경계해야 한다.’ 하셨다. 또 말씀하기를, ‘위징(魏徵)이 당 태종(唐太宗)에게 경계하기를, 「처음에는 간(諫)하는 자가 많았으나 이제는 간하는 자가 적다」 하였는데, 이것은 다름 아니라 듣기를 좋아하므로 간하는 자가 많았고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간하는 자가 적어졌다는 것이다.’ 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왕께서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詩經)》 관저편(關雎篇)을 강독(講讀)하실 때에 유신에게 말씀하기를, ‘이(理)와 의(義)는 천하 만세(天下萬世)의 공물(公物)이다. 제자와 스승 사이라도 반드시 구차하게 같이할 것 없는데, 더구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구차하게 맞추는 것이 옳겠는가?’ 하셨다. 처음에 왕께서 관저편을 문왕(文王)이 지은 것이지 궁중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궁중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이 말씀이 있었다. 왕께서 벼 베기를 보려 하셨는데,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대저 친경(親耕) 뒤에는 적전(籍田)은 백성에게 맡겨서 경종(耕種)하는데, 구곡(九穀)을 심지 않았고 제물로 바친 적도 없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신(神)을 속일 수 있는가? 이제부터 구곡을 심어서 제물을 채우라.’ 하셨다.
9월에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최석항(崔錫恒)·정해(鄭楷)·권익관(權益寬) 등의 벼슬을 추탈(追奪)하였다. 처음에 왕께서 전 대사헌(大司憲) 박필주(朴弼周)를 불러다가 벼슬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올리고 치도(治道)를 자문하셨는데, 박필주가 수차(袖箚)를 바쳐 우선 신축년135) ·임인년136) 의 역적들의 죄를 바르게 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침음(沈吟)하다가 말씀하기를, ‘반드시 대신과 익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삼사(三司)에서 아뢰기를, ‘조태구는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꺼리는 마음을 남몰래 품고 ‘모혐(冒嫌)’이라는 두 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졌을 때에는 차자를 올려 역적 유봉휘를 구하되 충적(忠赤)이라고 칭찬하였고, 대리(代理)하라는 명이 있었을 때에는 대간(臺諫)의 말을 업신여기고 북문(北門)으로 불쑥 들어왔습니다.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하였을 때에는 예전에 양옥(梁獄)137) 을 캐지 말게 한 일이 있다는 말을 감히 아뢰었고, 백망(白望)의 공초(供招)가 나왔을 때에는 죽게 된 가운데에서도 살길을 찾는다는 말을 핑계 삼았습니다. 그 전후의 흉언(凶言)은 한 번 굴러서 유봉휘의 상소가 되고 두 번 굴러서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이 되고 세 번 굴러서 무신년138) 에 역적들이 임금을 헐뜯고 욕하게 되었습니다. 조태구는 관작(官爵)을 추탈하소서.
신축년의 건저(建儲)는 우리 경종(景宗)께서 숙고(肅考)의 유의(遺意)를 몸받고 자성(慈聖)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손수 써서 면대하여 주신 것이므로 처분이 광명(光明)한데도, 유봉휘는 바쁘고 갑작스러워 정밀하지 못하였으며 시켜서 독촉하였다 하였고, 종사(宗社)를 부탁한 데가 있어 팔역(八域)이 함께 기뻐하는데, 유봉휘는 인심이 의혹하여 오래 되어도 정해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무인신례(無人臣禮)’라는 넉 자로 말하면 이는 한(漢)나라 어사(御史)가 폐립(廢立)을 탄핵한 말인데, 경묘(景廟)께서 마침내 사속(嗣續)이 없으실 것을 그만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자손의 번창을 바란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병환을 숨겼다는 논의가 비롯된 까닭입니다. 유봉휘는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였다.
또 논하기를, ‘이광좌(李光佐)가 무옥(誣獄)을 꾸며낸 것은 백망의 공초에서 죄다 드러났고, 역적 김일경이 교문(敎文)을 지은 뒤에 본병(本兵)에 발탁하여 의망(擬望)하여 마치 공로를 갚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잠(李潛)의 흉언을 역적 김일경이 무릉(茂陵)에 견주었는데, 이광좌가 답습하여 포증(褒贈)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윤태징(尹泰徵)·이사성(李思晟) 등은 모두 이 광좌가 끌어들여 길러 낸 자인데, 무신년에 난을 일으킨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최석항이 무옥을 주장한 것은 조태구와 흉심(凶心)을 같이한 것이고, 무옥이 이루어지고 나서는 반드시 역적 목호룡을 녹훈(錄勳)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청(淸)나라에 주문(奏聞)하고 위세를 빌려 위협하려 하였습니다.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를 늦추어 지레 죽게 만든 것으로 말하면 캐어 물을 길이 끊어지게 한 것이고, 대리를 전선(傳禪)에 견준 것은 말의 뜻이 흉참(凶慘)합니다.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교문의 지의(指意)는 김일경과 서로 안팎이 되고, 정책 정책 국로(定策國老)139) 이니 문생 천자(門生天子)140) 이니 아뢴 것은 당(唐)나라 환관(宦官)이 어두운 임금을 옹립한 일을 인용한 것입니다. 또 김일경이 지은 교문에는 접혈(蹀血)141) 이라느니 행배(行盃)142) 라느니 하는 따위 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시끄러이 퍼뜨리도록 버려두었습니다. 모두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이광좌와 조태억은 시율(施律)이 지나치게 많다 하여 따르지 않으셨고, 정해·권익관은 헌부(憲府)에서 아룀에 따라 추탈하셨다.
명하여 생원(生員)·진사(進士)는 복두(幞頭)·난삼(襴衫) 차림으로 방방(放榜)하게 하고 드디어 정제(定制)로 삼으셨다. 이에 앞서 왕께서 중국 진사과(進士科)의 복두·난삼·대련화(戴蓮花)·문희연(聞喜宴) 등의 제도를 회복하셨으나 난삼은 그 복식을 몰랐다. 그런데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고(故)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늑(金玏)이 명나라 신종(神宗) 때에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갔을 때 황제가 복두·난삼과 《대학연의(大學衍義)》 1부(部)를 내려 주자, 김늑이 돌아와서 복두와 난삼을 안동(安東)의 학사(學舍)에 보관하였는데, 《대학연의》에는 어보(御寶)와 진적(眞蹟)이 있다고 이제 병조 정랑(兵曹正郞) 권만(權萬)이 말합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권만은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후손이 아닌가? 예전에 우리 중묘(中廟)께서 재추(宰樞)와 함께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상화연(賞花宴)을 하셨는데, 파하고 나서 내시(內侍)가 수진(袖珍)143) 《근사록(近思錄)》을 주워 중묘께 바치니, 중묘께서 하교하기를, ‘이것은 권벌의 수중물(袖中物)일 것이다.’ 하고, 명하여 돌려주게 하셨다. 이는 또한 천년에 한번 있을 만한 드문 성사(盛事)이다. 아! 정원(政院)은 영남 감영(嶺南監營)에 공문을 보내어 두 서책과 의관(衣冠)을 두 신하의 후손을 시켜 가지고 오게 하라.’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권만과 김늑의 손자 김홍운(金弘運)이 가지고 왔는데, 이때 왕께서 편찮으셨으나 굳이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아 두 사람을 소견(召見)하고 말씀하기를, ‘유학(儒學)하는 선비를 대접할 때에는 한 고조(漢高祖)가 양다리를 뻗고 앉은 것을 본떠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명나라의 옛 물건은 더욱이 존경해야 할 것임에랴?’ 하셨다. 드디어 명하여 《삼경(三經)》과 《근사록》·《대학연의》를 내리게 하고 유사(攸司)에 신칙하여 복두·난삼은 그 복식을 알아보고 김홍운에게 돌려주게 하셨다. 그래서 생원·진사의 의관은 죄다 명나라의 제도를 회복하였으나, 대련화·문희연은 의논이 같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동10월(冬十月)에 제주(濟州)에서 지실(枳實)을 바쳤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듣건대, 관에서 탱자나무를 세어 백성에게 그 열매를 내라고 요구하므로 백성이 혹 나무를 흔들어 절로 말라 죽게 한다 하니, 어찌 딱하지 않은가? 제주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바치지 말게 하라.’ 하셨다. 11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친경(親耕)·관예(觀刈)는 다 사전(祀典)을 중하게 여기기 위한 것인데, 임금이 갈고 백성이 거두는 것과 백성이 농사짓고 임금이 베는 것은 다 불편하다. 기성(箕城)144) 의 정전(井田)은 복고(復古)하기 어려우나, 이 기회에 왕성(王城) 동쪽의 적전(籍田)을 유제(遺制)를 본떠 정형(井形)으로 만들고 공전(公田)의 하나에서 거두어 제물(祭物)로 바치고 그 나머지 여덟 구역은 죄다 그 세(稅)를 면제하면, ‘우리 공전(公田)에 비가 내리고 드디어 우리 사전(私田)에도 미친다.’는 시(詩)가 천년 뒤에 다시 읊어질 수 있을 것이다. 태상(太常)145) 을 시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아뢰게 하라.’ 하셨다.
12월에 명하여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정분(鄭苯) 등의 벼슬을 회복하게 하셨는데, 숙묘(肅廟)께서 육신(六臣)의 벼슬을 회복시키신 일에 감동되셨기 때문이다.
23년 정묘(丁卯) 춘정월(春正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강성(康聖) 이라 올리고 왕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바치고 진하(陳賀)하셨는데, 대비의 주갑(周甲)이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태묘(太廟)에서 쓰는 비단은 무늬가 없는데 내 의장(儀仗)에는 오히려 무늬가 있으니, 어찌 불면(黻冕)146) 을 아름답게 하는 뜻이겠는가? 홍양산(紅凉傘)은 무늬를 없애고 일산(日傘)은 명주로 하고 그 밖의 의장도 이를 본뜨라.’ 하셨다.
3월에 왕께서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동조(東朝)께서 우연히 집상전(集祥殿)의 구장(舊藏)을 찾다가 한 옥대(玉帶)를 얻어 내게 주셨다. 곧 선묘(宣廟)께서 두르시던 것이고 숙묘 을해년147) 에 이 띠를 두르시고 조참(朝參)을 행하셨는데, 이제 문득 얻었으니 기이하다.’ 하셨다. 이튿날 드디어 옛 옥대를 두르시고 선원전(璿源殿)에서 분향(焚香)하고 이해 가을에도 이 띠를 두르시고 근정전(勤政殿)에서 시사(試士)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금원(禁苑)의 관풍각(觀豊閣)에 나아가 벼심기를 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이것은 사람을 쓰는 것과 같다. 재주가 맡길 만하더라도 참설(讒說)로 이간하면 마른 땅에 벼를 심고 추수가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충직한 말이 있더라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면 노숙한 농부를 멀리하여 버려두고 자기 지혜대로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학문하는 것과 같다. 강학(講學)하지 않는 것이 아닐지라도 때때로 사이가 끊어지면 논밭에 물 대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셨다. 다시 하교하여 무격(巫覡)·음사(淫祀)를 금하고 말씀하기를, ‘태학(太學)에 예전에 이목(李穆)이 있었거니와, 내 이목(耳目)에도 이목 같은 자가 있는가?’ 하고, 경조(京兆)·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무리는 법조(法曹)에 보내어 형벌을 주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 신하들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늘 당 현종(唐玄宗)처럼 초년과 만년이 아주 달라질세라 염려한다. 겨울에 피는 꽃이 늦도록 향기를 피우더라도 때때로 시들면 마침내 연꽃이 진흙에서 나와도 물들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셨다. 곧 일 때문에 말씀이 자못 불평하셨는데, 이윽고 뉘우치고 말씀하기를, ‘《자성편(自省編)》이 완성되었을 때에 내가 신하들에게 경계하여 이 편으로 규면(規勉)하게 하였고 당시에 교정(校正)한 자와 편차(編次)한 자도 지금 경연에 있는데 한 사람도 감히 간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은 본디 내가 스스로 반성할 것이다. 또한 어찌 서로 권면할 도리가 없겠는가? 모두 문비(問備)하라.’ 하셨다. 이에 앞서 국릉(國陵)으로 봉표(封標)한 땅에 매장하지 않은 것은 매장을 금하고 이미 매장한 것은 옮기되 사대부가 이미 매장한 것은 논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承旨)가 아뢰기를, ‘봉표한 곳이 여든인데 사대부가 범장(犯葬)한 곳이 이미 서른이나 됩니다. 국조(國祚)가 길어서 장차 몇백대가 될는지 모르니, 여든 곳도 오히려 적은데, 더구나 쉰 곳이겠습니까? 사대부가 범장한 것도 옮기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한 광무(漢光武)는 스스로 해를 넘길는지 어찌 알겠느냐고 하였으나 향국(享國)이 오래 이어졌고, 진 시황(秦始皇)은 반드시 만세토록 전하려 하였으나 2세(世)에서 드디어 망하였다. 국조가 길고 짧은 것은 오직 백성을 보전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명산(名山)이 많고 적은 것을 말하겠는가? 참으로 쉰 곳을 죄다 쓴다면 또한 이미 많거니와, 어찌 반드시 그 봉표를 넓혀서 해가 백골(白骨)에 미치게 해야 하겠는가?’ 하셨다. 이때 음동추(蔭同樞)인 자도 초헌(軺軒)을 탈 수 있었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번영(繁纓)148) 은 작은 물건인데도 부자(夫子)가 아꼈거니와, 조정의 등위(等威)가 문란해서는 안 되니, 경조(京兆)의 아윤(亞尹)이나 동돈녕(同敦寧)을 지낸 자가 아니면 초헌을 타지 못하게 하고 항령(恒令)으로 삼으라.’ 하셨다.
8월에 음옥(淫獄)이 있었는데, 왕께서 하교하기를, ‘주남(周南)의 교화는 강한(江漢)에 미쳤고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가 도헌(都憲)이었을 때에는 남녀가 길을 달리하였는데, 내가 임어(臨御)하여서는 교화하지 못하여 음풍(淫風)이 방자하게 행해지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학교의 정사(政事)가 폐기되어 《소학(小學)》의 가르침이 해이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태학(太學)·사학(四學)과 외방(外方)의 향교(鄕校)·서원(書院)은 다 《소학》을 강습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고 교관(敎官)이 동몽(童蒙)을 가르치고 수령(守令)이 백성을 가르칠 때에도 반드시 《소학》의 도리로 하라.’ 하셨다. 이때에 왕께서 춘추가 높으므로 지기(志氣)가 쇠퇴하고 정사가 게을러질세라 염려하여 더욱 분려(奮勵)하여 다스리시고, 또 뭇 신하가 성심(聖心)이 향하는 바에 따라 변경하는 데에 힘썼다. 하교하기를, ‘선유(先儒)는 한 문제(漢文帝)가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지 못한 것을 비평하였으나, 사람마다 전장(典章)을 가벼이 의논한다면 한 가지 일은 경장(更張)되고 온갖 폐단이 어지러이 일어날 것이다. 아! 조정의 신하들은 내가 분려하는 것은 다만 구장(舊章)을 수거(修擧)하려 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하셨다.
9월에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고려의 왕릉(王陵)을 두루 살펴 무너진 것은 수리하고 범경(犯耕)하는 자는 법으로 다스리게 하셨다. 명하여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벼슬을 회복시키셨는데,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의 전례와 같이 한 것이다. 이에 앞서 국법에 대왕(大王)의 적손(嫡孫)은 대(代)를 한정하지 않고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지 않게 하였으며, 지손(支孫)은 9대에 한하게 되어 있었는데, 경종(景宗)임인년149) 에 조정에서 그 댓수를 줄일 것을 의논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시기에 이르러 명하여 한결같이 구전(舊典)을 따르게 하셨으나, 비변사(備邊司)에서 강정(講定)한 영식(令式)에 이르기를, ‘댓수를 한정하는 가운데 조금 사대부 모양이 있는 자는 군역에 충정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비로소 이를 듣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지금 신하들이 현직(顯職)에 올라 조정에서 벼슬하면 그 선대의 적손도 수령(守令)인 자가 감히 군역에 충정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대왕의 적손을 어찌 사대부 모양이 있고 없는 것으로 취사(取捨)할 수 있겠는가? 매우 부당하다.’ 하고, 종부시(宗簿寺)를 시켜 외방(外方)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신칙하게 하고 빨리 이 한 구(句)를 없애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예기》에 형벌은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 하였는데, 지금은 아침에 금달(禁闥)에서 시종(侍從)하다가 저녁에 영어(囹圄)에서 결장(決杖)당하니, 예(禮)로 부리는 도리가 어디에 있는가? 이제부터는 장오(贓汚)에 관계되는 것 밖에는 무릇 시종에 대한 평결을 의논할 때에 장률(杖律)은 속형(贖刑)으로 논하라.’ 하셨다.
24년 무진(戊辰) 춘정월(春正月)에 명하여 무신(武臣)을 전강(殿講)할 때에는 병서(兵書)로 하고 그 연한(年限)·강규(講規)는 모두 문신 전강의 예(例)대로 하고 항령(恒令)으로 삼게 하셨다.
2월에 숙종(肅宗)의 진용(眞容)을 다시 그려 왕께서 친히 영희전(永禧殿)에 모셨다. 돌아오다가 경희궁(慶熙宮)의 경현당(景賢堂)에 이르러 일을 감독하는 신하들을 불러 제사에 쓰고 난 음식을 내리고 헌가(軒架)를 연주하여 위로하였으며, 친히 사(辭)를 만들어 태강(太康)을 경계하고 신하들에게 명하여 화답(和答)하게 하시고 한밤에야 파하였다. 이튿날 입직(入直)한 유신(儒臣) 김상철(金尙喆)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아조(我朝)의 음악을 쓰는 절도는 조하(朝賀)·진연(進宴)이 아니면 궁정(宮庭)에서 거행한 적이 없습니다.’ 하니, 왕께서 손수 써서 비답(批答)을 내리고 말을 내려 장려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명하여 광화문(光化門)의 구종(舊鐘)에 각(閣)을 짓게 하셨는데, 세조(世祖)의 봉호(封號)가 있기 때문이다.
추8월(秋八月)에 왜(倭)가 바친 증주(繒紬)·채릉(彩綾) 7백여 필을 호조(戶曹)·삼군문(三軍門)·경기 감영(京畿監營)과 시전(市廛) 백성에게 나누어 내리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용비(冗費)를 줄이셨다.
25년 기사(己巳) 춘2월(春二月)에 명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찬집(纂輯)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와 의종 황제(毅宗皇帝)를 대보단(大報壇)에 아울러 향사(享祀)하였다. 이에 앞서 숙종(肅宗)갑신년150) 에 북원(北苑)에 제단을 쌓고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여 임진년에 재조(再造)하여 준 은혜에 보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사(明史)》를 보시니, ‘숭정(崇禎)151) 병자년152) 정월에 의종 황제가, 우리 나라가 포위당하여 원조를 청하니 총병(摠兵) 진홍범(陳洪範)에게 명하여 각진(各鎭)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구원하러 가게 하였다.
이해 3월에 산동 순무(山東巡撫) 안계조(顔繼祖)가 아뢰기를, 「조선이 이미 지키지 못하여 피도(皮島)·철산(鐵山)도 위태로우니 진홍범과 심세괴(沈世魁)가 있는 두 진(鎭)에 신칙하여 피도를 굳게 지키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안계조에게 협력하여 바로잡도록 꾀하지 못하였다 하여 매우 꾸짖었다.’ 하였다. 왕께서 그래서 느껴 울고 말씀하기를, ‘정사(正史)가 선조(先朝) 갑신년에 나왔으면 의종 황제도 아울러 제사하였을 것은 틀림없다. 또 더구나 우리 동방의 봉전(封典)·국호(國號)는 다 고황제가 내려 준 것으로서 예우(禮遇)가 융숭함이 전대(前代)보다 훨씬 더함에 있어서랴?’ 세 황제를 아울러 제사하는 것은 우리 국가가 숭보(崇報)하는 예(禮)로도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빨리 거행하게 하셨다. 왕께서 친히 향사(享祀)하셨는데, 바야흐로 울창(鬱鬯)153) 을 부어 제사를 시작할 때에 흰 구름 한 줄기가 북쪽에서 일어나 굼틀굼틀 제단 위에 머무르고 바람이 솔솔 불어 영우(靈雨)를 가져다 조금 부리더니 제1위(第一位)에 작헌(酌獻)이 끝났을 때에 바람이 고요해지고 구름이 개어 달과 별이 밝고 빽빽해지니, 제사에 참여한 뭇 신하가 서로 함께 감탄하여 ‘감응(感應)이 빠르다.’ 하고, 처연(悽然)히 신주(神州)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켰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선무사(宣武祠)·무열사(武烈祠)와 강도(江都)의 충렬사(忠烈祠)·남한(南漢)의 현절사(顯節祠)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좌의정(左議政) 조현명(趙顯命)이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장망(長望)154) 하여 차제(差除)하고 홍문록(弘文錄)155) 도 한림 소시(翰林召試)156) 와 같이 하여 서로 무함하는 폐단을 그치게 하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를테면 물을 막는데 동쪽에서 막으면 서쪽에서 터지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법을 고쳐서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옥당(玉堂)은 임금이 강학(講學)할 때에 도움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소시할 수 없다.’ 하셨다.
8월에 왕께서 친정(親政)하실 때 양전(兩銓)에 신칙하여 공도(公道)를 넓히게 하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정사(政事)와 학문은 다만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구분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남을 위하면 공평하더라도 사사로울 것이고 오직 남만 구제하면 명예를 바란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있는 힘을 다하면 군자(君子)가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셨다.
9월에 신칙(申飭)하여 사대부의 혼취(婚娶)에는 반드시 친영(親迎)하고 국혼(國婚)에서 사혼(士婚)까지 다 동뢰탁(同牢卓)에 유밀과(油蜜果)를 금하게 하셨다.
12월에 왕께서 하교하여 학문을 권하기를, ‘학문의 도리는 변변치 못한 자를 어질게 할 수 있고 능하지 못한 자를 능하게 할 수 있는데, 세상에서 자포 자기(自暴自棄)하기를 좋아하여 거울을 어둠에 던지고 구슬을 모래에 던지니, 무슨 까닭인가? 아! 진신 대부(搢紳大夫)와 학교의 선비들은 스승이 없다 말고 네 학문에 부지런하라.’ 하셨다.
26년 경오(庚午)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풍속을 바루는 데에는 유(儒)를 숭상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하여 관원을 보내어 고(故) 찬성(贊成) 정제두(鄭齊斗)·박필주(朴弼周)와 고 찬선(贊善) 김간(金榦)에게 치제(致祭)하게 하고 전 집의(執義) 민우수(閔遇洙)·박필부(朴弼傅)를 통정계(通政階)로 발탁하셨다. 이때 여역(癘疫)이 치성하여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상번군(上番軍)이 많이 죽었는데, 왕께서 두 영문에 명하여 도와서 장사지내게 하고 그 과처(寡妻)·고아(孤兒)는 그 고을을 시켜 어루만져 돌보게 하셨다.
2월에 연경(燕京)에 사신 갔다가 돌아온 자가 송(宋)나라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의 상(像)을 바쳤다. 왕께서 육진(六鎭)의 오국성(五國城)에 송제릉(宋帝陵)이 있다 하여 그 아래에 사당을 세워서 문천상·육수부(陸秀夫)를 아울러 향사(享祠)하고자 하여 대신(大臣)에게 물으셨으나, 대신이 불편하다 하니, 드디어 명하여 그 상을 와룡사(臥龍祠)에 배향(配享)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셨다.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물색하는 규례를 폐지하였다. 이에 앞서 생원·진사의 회시(會試)에서 탁명(坼名)할 때에는 고관(考官)들이 먼저 합격한 봉미(封彌)를 보고 그 중에서 문벌과 문망(文望)이 있는 자를 가려서 뽑아 장원(壯元)에 놓고 생원의 셋째와 진사의 여섯째는 세상에서 말하기를, ‘이 차서에 있는 자는 명이 없어 일찍 죽는다.’ 하므로 또 시골의 천한 선비를 가려서 채웠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공(公)인가 사(私)인가?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는 도리가 이러해서는 안된다. 이제부터 영구히 폐지하고 범하는 자는 용정률(用情律)로 논하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였다. 처음에 숙종(肅宗)께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여러번 뭇 신하에게 명하여 여러 가지로 의논하게 하셨으나, 호포(戶布)·결포(結布)·유포(游布)·정전(丁錢) 등 갖가지 의논을 서로 고집하여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시고서 양역청(良役廳)을 두고 당상(堂上) 두서너 사람을 가려서 맡겨 정신을 쏟아 강구하게 하셨으나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폐지하였다.
이해 4월에 왕께서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사서(士庶)를 불러 묻기를, ‘백성의 폐단 중에 양역의 폐단이 크니, 일찍 고치지 않으면 어떻게까지 될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 성고(聖考)께서 반드시 바로잡으려 하셨으나 뭇 신하가 마침내 덕음(德音)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내가 매우 개탄하여 병을 견디고 임문(臨門)하였다. 유포(游布)·구전(口錢)은 그것이 행할 수 없는 것인 줄 알고 있거니와, 호포·결포는 어느 것이 편리하고 어느 것이 불편한가? 이 밖에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셨는데, 사서(士庶)가 다 대답하기를, ‘호포가 편리합니다.’ 하고 결포가 편리하다고 한 자도 열 중에서 두셋 있었다. 왕께서 뭇 신하에게 물으셨는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박문수(朴文秀)가 대답하기를, ‘호포는 경비(經費)의 수를 감당할 수 없으니 호전(戶錢)이라야 합니다. 대호(大戶)는 1백 문(文)으로 하고 중호(中戶)는 50문으로 하고 소호(小戶)는 30문으로 하면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잗단 것은 나라의 체모가 아니다.’ 하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쓸데없는 고을을 없애서 경비에 보태려 하였으나 전하께서 어렵게 여기시고 신하들도 어렵게 여기므로 그 차선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호포를 근본으로 세우고 모자라는 것은 어염(魚鹽)으로 채우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호포는 결포만 못합니다. 결포는 전조(田租)와 아울러 세(稅)를 내므로 관에서 거두기 쉽고 백성이 소요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왕께서는 오히려 결정하지 못하고 비국 당상(備局堂上)들에게 명하여 비변사(備邊司)에서 직숙(直宿)하면서 편의한 것을 강정(講定)하게 하셨으나 달이 지나도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조현명(趙顯命)이 홍계희(洪啓禧)가 세운 균역의 방책을 아뢰니, 왕께서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다가 마침내 그 말을 따라서 국중(國中)의 양역(良役) 1필(匹)을 죄다 면제하고 따로 균역청(均役廳)을 두어 어염·결전(結錢)·선무포(選武布) 등의 세를 전관(專管)하게 하였다. 또 저치 상정미(儲置常定米)와 외읍(外邑)의 은여결(隱餘結)을 보태어 경비를 채우고 균세사(均稅使)를 팔도에 보내어 어염세(魚鹽稅)를 바로잡고 은여결을 살펴 내게 하고 드디어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우고 신칙하여 이 뒤로는 변경(變更)을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게 하셨다. 말년에 이르러 왕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기를, ‘균역의 논의를 창도한 자의 자손이 번창한 뒤에야 균역이 실효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하셨다.
9월에 왕께서 문묘(文廟)에 거둥하여 작헌(酌獻)하고 시사(試士)하셨다. 곧 온양(溫陽)의 온천에 거둥하셨는데, 환후를 목욕하여 요양하기 위한 것이다. 지나는 길에 있는 유현(儒賢)·명상(名相)·충절인(忠節人)의 묘에 다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도과(道科)를 설행(設行)하여 선비를 뽑고 호서(湖西) 백성의 조세를 감면하시고 드디어 회란(回鑾)하였다.
27년 신미(辛未) 춘2월(春二月)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정덕(貞德) 이라 가상(加上)하였다. 왕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셨다. 각도의 방물(方物)을 멈추고 의장(儀仗)·연여(輦輿)를 새로 고치지 않았는데, 자교(慈敎)에 따른 것이다. 북관(北關)에 기근이 들었는데, 명하여 관동(關東)·영남(嶺南)의 곡물 3만 석을 전선(戰船)·병선(兵船)에 실어 바다로 북관에 날라 옮기고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구(賑救)하게 하셨다.
3월에 왕께서 대보단(大報壇)에서 희생을 살피셨다. 이달 19일이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순국(殉國)한 날이기 때문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음악을 멈추게 하셨다. 왕께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구경(九卿)을 거느리고 후원(後苑)의 영화당(映花堂) 앞에 이르러 북향하여 사배(四拜)하셨다. 이어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고황제(高皇帝)·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승하한 날에도 망배례(望拜禮)를 행하되 상례(常例)로 삼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에 수성 절목(守城節目)을 반포하였다.
28년 임신(壬申) 하5월(夏五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수창(壽昌) 이라 가상(加上)하고 왕의 존호를 장의 홍륜 광인 돈희(章義弘倫光仁敦禧)라 가상하고 왕비의 존호를 장신(莊愼) 이라 가상하였는데, 왕께서 황단(皇壇)에서 신명에게 감통(感通)하신 덕(德)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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