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20년 뒤에는 당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더 후회를 할 것이다. 안전한 포구를 떠나 미지의 세계로 돛을 올려라."
군 복무 시절 훈련 나갔다가 우연히 들어간 화장실 문에 써 있던 글이다. 나중에야 마크 트웨인이 했던 말이란 걸 알았지만, 그 때의 가슴 뭉클한 느낌은 여전히 잊을 수 없다. 대학교 2학년이었나? 교정을 지나는 외제차를 물끄러미 쳐다 보다 문득 '내 삶에는 평생 영화처럼 멋진 일이 벌어지진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내 젊음이, 내 청춘이 정말 비참하다고 느꼈다. 중·고등학교 때 공부만 죽도록 해서 대학 가고, 군대 갔다가 졸업하면 취업해서 돈 벌고, 결혼하고 애 낳고, 은퇴하고. 눈에 빤히 보이는 인생의 청사진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 때부터 난 조금이라도 남과 다르게,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더 신나게 새로운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무전여행도 가고 그림도 그리고, 기타도 배우고 시도 읽고, 지루한 토익 공부대신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하며 온통 설레는 일들로 일상을 채웠다. 새벽에 눈을 뜨는 것 자체가 감사할 정도로 하루 24시간, 내 삶이 발가락 끝까지 환희로 가득 차는 걸 느꼈다. 놀랍게도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모든 일이 잘 풀렸고, 장래에 대한 확신도 생겼다.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선택하며 신나고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이 생각처럼 녹록치는 않았다. 전역 후 집에 가보니 말로 다 못할 불화가 벌어져 있었고, 너무나 힘들어하시는 어머니를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난 어머니를 돕기 위해 원하지도 않는 직장에 다니며 전혀 설레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야만 했다. 무미건조한 일상의 반복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 생활이 수개월 계속 되자 아무리 스스로 달래고 위로 해봐도 나는 점차 생기를 잃었다. 정말 충격적일만큼 '아무런 의욕도 목표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잠자는 시간마저 아까워서 새벽잠을 줄여가며 이것저것 신나는 일을 해댔던 내가 공부는커녕 여행도, 그림도, 기타도 모두 다 손을 놔버렸다. 느껴본 사람은 그 허무함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거다.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무력감. 자신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 한 번 허우적거릴 수 없는, 아니 허우적거리기 싫은 그 무력감 말이다. 만사가 다 허무했다.
하지만 한 가지, 그 와중에 내가 포기하지 않은 것은 ‘내가 지금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관찰이다. 심리 상담을 전공하며 가장 크게 얻은 습관 중 하나는 내 감정에 대한 성찰이었다. 무기력함에 빠져있으면서도 ‘내가 무기력해 있구나.’라는 걸 생각할 수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지냈지만 머릿속으로는 ‘무기력한 삶은 싫은데, 다시 신나고 가슴 설레는 삶을 살고 싶은데.’라고 틈만 나면 되뇌었다. ‘가슴 설레는 삶’이라는 건 마약과 같아서 한 번 느끼고 나면 그 느낌 없이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모두 고역이 된다. 무력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슴 설레는 삶’에 대한 열망은 점점 더 커져갔다. 다만 그 어떤 것에도 가슴 설레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고통은 심해지고 나는 모든 원망과 분노를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몰라 괴로워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이 원망스러운 상황에서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좋아하는 시집을 읽어도, 존경하는 사람의 글을 되뇌어 봐도, 도무지 예전의 감동은 없었다. 어쩌면, 이제 영영 다시는 어떤 것에도 설레지 않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만약 그렇다면, 진심으로 더 살고 싶지 않았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원망스럽고, 이 모든 부정적인 상황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눈물겹게도, 그렇게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다시 또 설레는 일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그 일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 일이 내게 찾아온 것이다. 예전에는 생각도 안 해 본 일이고 또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버티고 견디다 보니 이렇게 내게 찾아와 나를 살아있게 해 주고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 나를 살아있게 하는 일을 선택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결국은 찾아온다.
헤르만 헤세는 "신이 인간에게 준 유일한 숙제는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리 오래 산 인생은 아니지만 내 삶에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가슴 설레는 일을 할 때’였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는 지, 어떤 결과를 이루었는지가 아니라 가슴 설레는 일을 선택 하겠다는 다짐이다. 지금 가슴 설레는 일이 있다면, 주저 없이 그 일을 하라.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믿고 되뇌어라.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은 분명히 있고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
첫댓글 이 글은 직장 다니면서 함참 힘들어 하다가 다시 새로운 기회를 찾고 난 후 기쁜 마음에 썼던 겁니다. 무기력함 속에서도 '설레는 삶'을 간절히 바랐었고, 결국 그런 기회는 찾아오더군요. 전 그저 간절히 바랐을 뿐이었는데 말이죠. 한 7개월 전에 썼던 글일 겁니다. ㅎ 그 때 그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무기력해있었을까요? 아뇨, 아마도 다른 기회가 저에게 다가왔었을 겁니다. 제가 간절히 바랐으니까요.
아~ 설레임을 다시 찾은 세호님이 굉장히 부럽네요 ^^
모든 것을 놓게 되버리는 것... 그 후에 찾아오는 또 다른 가슴설렘... 그러한 설레임이야 말로 더 진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모든 것을 놓는다'는 것은 설레임을 위한 통과의례가 아닌가 싶네요..
용기있는 세호님!! 멋있음따!!
와! 대단히 잘 사시네요.
와 글이 너무 좋네요. 요즘 제가 딱 무기력증이 사실 조금 오고 있었는데..ㅠㅠ...
좋은 글이 많으니까, 쉽게 읽지는 못하겠고 아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