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 시인의 시집 [환절기의 판화]가
2009년 9월, 도서출판고요아침에서 나왔다.
이송희 시인은
1976년 광주에서 태어나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제3회 오늘의시조시인상을 수상하였고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와 조선대 국문과에 출강중이다.
다음은 '시인의 말' 전문이다.
"지나 온 길이
가야 할 길보다 더 길어 보인다.
벽에 걸린 모자에 어느덧 먼지가 쌓이고
자꾸만 바닥을 덮으며 발자국을 지우는 낙엽
허공을 밟고 선 꿈자리, 온몸을 뒤적이며 나는
떠나간 이를 부른다.
내 손짓 끝나는 날까지
그리움으로 쓴다."
다음은 유성호 한양대 교수가 쓴 '근원적 기억과 현실 감각의 깊은 결속'이라는 해설에서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 우리 시대에 씌어지는 가편(佳篇)들은 여전히 자기 확인과 표현에 대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시는 주체 부정의 방향을 취하기보다는, 경험적 주체와 시적 주체가 통합된 자기 기억의 속성을
오랫동안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시는 다양하게 펼쳐지는 개별 현상을 통해
시인 자신의 존재 근거이자 궁극적 귀의처가 되는 일종의 '근원(根源, origin)'을 상상하는 속성을
지속적으로 심화해왔다. 결국 좋은 시란,
이러한 근원적 자기 기억을 구체적 형상으로 환기함으로써, 인간의 존재 형식에 대한 질문을
간단없이 생산해내는 언어적 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시집은, '상처'와 '통증'에 관한 노래이면서, 동시에 구체적 삶에 대한 긴장과 균형의 시선을
잃지 않고 있는 귀한 실례라 할 것이다.
... 이번 시집에서 한결같이 어둑하고 아팠던 자기 기억들을 토로한다....
오히려 그것은 그동안 치러온 시간의 경험들을 가장 원초적인 형식으로 복원하면서도,
그것을 현재의 삶과 연루하고 매개하는 적극적 행위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기억'은 주체의 적극적, 창조적, 조절적 기능의 일환으로서, 통일되고 일관된 주체를 구성하는
기능을 가지게 된다....
... 삶의 종요로운 경험의 일부를 자신의 언어를 통해 남기는 일이 시인들에게 부여된
남다른 특권이라면.......일견 자유시적 발상에 가까운 다양한 경험과 주제로 짜여져 있는 듯 보이지만,
이송희 첫 시집은 근원적 기억과 현실 감각의 결속이라는 구심적 원리에 의해 일관되게 짜여진,
근래 정형시단의 한 수확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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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자리 / 이송희
물렁한 뼈들이 차가운 몸을 섞는 밤
맨 처음 내 울음을 기억한 별 하나가
하늘 숲 어둠을 젖히고
내 안에 눕는다
몸속에 남아 있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매 순간 덧대며 조심스레 문지르고
통증을 걸러낸 뒤에
새 살 돋듯 만난다
마개를 여는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질
너무 오래 두어서 다 삭은 마음을
겨울 밤, 물구나무 세워
시원하게 쏟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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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을 열며 / 이송희
색색의 계절들이 마른 몸을 섞고 있다
떨어져 헤진 기억과
남루한 일상들
시간의 단추를 풀어
속내를 들춰 본다
발자국 문양들이 어지럽게 선(線)을 긋고
희미한 그림자를 가둔
푸른 벽이 출렁인다
맨 살을 도려내며 번진
투명한 이파리
무작정 나섰던 먼 길이 몸을 굴려
빛바랜 무늬를 새기는
그 한나절에
까칠한 모래의 말이
혀끝에 감긴다
다닥다닥 붙은 그늘을 쪼갠 바람
척추를 곧게 세우고
처진 몸을 늘인다
구겨진 마음 한 벌이
햇볕을 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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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 / 이송희
깜빡깜빡
마른 입술에 신호가 켜진다
모래 속 묻힌 말(言)은
휜 몸으로 떠올라
어딜까
필름을 돌려서
파란 불꽃 터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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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겨울 / 이송희
잔설을 밀어 내자
긁힌 상처 드러난다
오래된 침묵의 길, 욕창의 등줄기
그 거친 능선을 오르는
호흡이 가파르다
캄캄한 길 위에서
부딪혀 우는 바람
갈변한 생각들이 너나없이 몸을 섞고
볼가진 뼈들을 감싸며
불안한 듯 꿈을 꾼다
어긋난 틀니로 으깨먹은 밥알들
돌처럼 단단한 배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휘청거리는 깊은 밤
근육이 풀리듯 얼었던 길들 녹아
뚜욱 뚝 물 떨어지는 새벽의 하늘가에
아버지, 주름진 시간이
불그스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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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깎으며 / 이송희
그녀가 쓰던 낡은 연필을 깎습니다
무수한 사랑을 고백하던 숲길과
기적을 불러 모으던 강물 같은 노래들
그 숱한 날들 뒤로 저무는 그림자를
꼿꼿이 세우고 닳아진 결을 다듬습니다
어둠을 밀어낸 만큼 선명해지는 자리들
이정표처럼, 나 몰랐던 길 꼼꼼하게 일러주던
그녀의 여린 마음을 외면하고 돌아서던 날
새하얀 꽃물이 터지면서 대지가 젖습니다
슬픔이 깊을수록 길은 더 아득해져
떠나간 시간들을 붙잡아 두는 것인지...
머물던 생각 하나가 그늘을 비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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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 시인은 나의 고향과 근거리인 화암에서 살고 있다.
내 고향의 옛이름은 상대곡(上大谷) 또는 상대실(上大室)이었다.
현재 지명은 등촌인데, 화암과는 내 걸음으로 산책하듯 걸어서 삼사십 분 거리다.
제4수원지 윗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본래 화암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부터 살게 되었다고 들었다.
여하튼, 나의 탯자리 부근에 또 한 시인이 살고 있으니
반갑고 흐뭇한 일이다.
나는 오늘의시조시인회의(구, 오늘의시조학회)에서 시상하는
오늘의시조시인상(구, 젊은시조시인상) 제1회 수상자이다.
그런데 내 뒤를 얼른 따라온 이송희 시인이
제3회 수상자가 되었다.
이송희 시인은 시조동인 '우리시'의 결성 초기부터 활동하였다.
이지엽 시인에게서 시를 배우-대학 제자-면서 스승의 장점을 슬기롭게 받아들여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나간 재원이다.
삼십대 중반에 이미 문학박사이기도 하다.
현재 조선일보 호남판에 매주 호남지역의 시인을 소개하는 '이송희 시인의 호남의 시와 시인'을 쓰고 있는데
2009년 8월 17일에는 '시간의 강을 거슬러 생명의 근원을 찾다'라는 제목으로
나와 나의 시 <고인돌의 노래>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서로 바쁜 관계로 인터뷰를 하지 못 하고
대신 이메일로 설문지를 보내왔고, 그 답을 역시 이메일로 보냈더니
그 내용을 참고로 성실한 글을 써주어서 고맙게 생각한다.
앞으로 학문과 창작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