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왜 믿는가 하는 물음에 대답이 궁한 불자들이 많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절을 찾았는데도 막상 그 이유를 말하라면 머뭇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다름 아닌 일상에서 나타나는 고통의 해결이다. 물론 싣달다 태자의 출가도 四苦, 八苦의 해결을 목적으로 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
『대품반야경』법칭품 제 37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법문이 우리들을 해결의 장소로 인도해주고 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듣고 받아지니며, 염송하고 바르게 기억하며 생각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해주면, 이 사람은 지옥이나 축생·아귀도에 떨어지지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선남자·선여인은 바로 보살의 물러
나지 않는 경지(不退轉地)에 머물고 있는 까닭이며, 이 반야바라밀이 일체의 고뇌와 쇠퇴와 질병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존이시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 경권을 글로 쓰고, 수지·친근·공양·공경·존중·찬탄하면, 이 사람은 모든 공포를 여의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비유컨대 부채인(負債人)이 국왕에게 친근하여 좌우에서 모시면, 빚을 준 사람이 도리어 이 사람을 공양하고 공경하여 이 사람은 다시 두려워하지 않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왕에게 의지하는 믿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에서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거나 반야경을 예배·공양하면 고뇌가 없어지고 삼악도나 二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삼악도란 어떤 곳인가 ? 가장 혹독한 부자유의 고통이 있는 곳이 지옥이다. 거기에는 즐거움도 기쁨도 희망도 기대도 없는,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생명의
상태가 있을 뿐이다. 축생은 사육되는 〈주체성이 없는〉중생이다. 거기에는 이성이나 윤리가 없이 본능대로 행동하는 생명 상태가 있을 뿐이다. 아귀란 욕망에 지배된 탐욕의 상태를 말한다. 五欲의 끊임없는 추구로 만족을 모른체 다투고 있는 중생이다. 그리고 二乘이란 아만과 아집, 이기주의의 전형이다.
왜 반야바라밀이 일체의 고뇌를 없애는가 ? 반야바라밀 염송자는 불퇴전지에 머문다. 따라서 미한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줏대를 세워서 행동한다. 내생명 부
처님 무량공덕 생명의 확신에 흔들림이 없다. 왜 반야바라밀이 고뇌와 쇠퇴와 질병을 여의는가 ? 반야바라밀이 일체성취이기 때문이다. 내 속에서 부처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현대인은 일회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무의미한 사후 세계를 부처님이나 역대조사가 그렇게 역설할리 있겠는가, 바로 반야바라밀 염송이 삼악도의 고통을 없애고 자신을 반야바라밀 즉 열반의 세계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