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희극
세상이 각박해졌다. 인정이 메말랐음일까. 믿을 사람이 없는 불신사회가 되어간다. 많은 교회당과 사암을 이웃하여 살건만 세상은 나날이 악착스러워진다. 어느 날 코로 들어간 흡기가 다시 나가지 않으면 추풍에 낙엽 지듯 저승길로 간다. 맞이할 죽음 앞에서 세월의 의미를 숙연히 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저승길, 오직 내가 살아온 시간만이 그 길을 동행한다. 성장이 끝나는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 삶은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자식들 등록금 준비하듯 죽음을 미리 준비해 두자. 이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지혜다. 짐이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행동은 더 자유로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있고, 또 애써 짊어지려고 하는가.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살덩이조차 거북하다. 나그네가 이렇듯 많은 짐을 지고 가도 좋은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보다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진정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환상幻想 세계에 산다. 죽음이 없다면 깨달음 또한 없을 것이다. 죽음이 예시하는 바는 삶을 바로 보게 하는 위대한 가르침이다. 호흡을 청산한 무덤 속에서 삶은 비로소 흔적을 드러낸다. 숨을 쉬는 동안은 공기의 고마움을 모른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나서는 공기 에게 감사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이 가슴속을 서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저토록 의젓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음은 눈물겨운 희극이다. 무엇을 구하여 지키고 무엇을 버려 비울 것인가. 내려놓는 마음도 구하는 마음만큼 즐거움을 선사하는가. 지혜로운 이가 지닌 마음 거울은 무엇을 반영하는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지내온 일생을 회고하면서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한다. ‘좀 더 베풀면서 살 수 있었는데’ 라며 나누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좀 더 쌓은 다음에 베풀겠다고 미루었기에 그렇다. 참 어리석게 살았다는 생각을 한다. 젊어서는 어리석음을 모를 만큼 어리석었다. 풍요롭지 않다고 여겼고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여겼다.
‘내가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성급한 행동을 했을까’ 하고 후회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좀 더 참을 수 있었다. 좀 더 여유를 가졌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참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격언이 아니더라도 나를 조금만 낮출 수 있었어도 후회 없는 삶이 가능했을 것이었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 하며 여유롭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 내가 힘들었던 만큼 나로 인한 다른 사람들까지 힘들게 살도록 했던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 한 발 물러서는 지혜가 아쉬웠던 과거가 엊그제다.
첫새벽 숲을 거닐면서 여명이 숨어있는 샘물을 마시는 모습을 상상한다. 신선같은 삶이다. 어둑한 변두리를 하염없이 거니는 그 여윈 조바심. 창백한 비애. 검정 샘물에 부서지는 별 그림자. 별은 죽지 않았다. 고요히 마음에 그것을 느끼면서 살고 싶다. 별은 나와 상관없는 우주 공간의 물질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잔영이다.
세상은 변하고 흘러가며 목숨이라는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간다. 그리고 어떤 깃털 같은 이유로 우리는 죽는다. 석양은 부자의 저택에서나 양로원의 창에서나 똑같이 반사된다. 봄이 오면 요양원 응달에 쌓였던 눈도 녹는다.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는다. 지구는 시간이 뿜어내는 맥박을 따라 잘 돌고 있다. 이렇게 계절을 바꾸고 원심怨心도 씻어 내리며 흐른다.
죽을 때가 되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숨을 몰아쉰다. 죽음에 이르러 더 성숙한 시각에서 되돌아보면, 다시는 안 그러리라 해도 그 다시는 다시 오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인다. 움직인다고는 하나 마음뿐이다. 먼지에서 먼지로 돌아가는데 어찌 불생불멸을 참구參究하는가.
죽음은 생의 마감이 아니라 반환점을 도는 도정이다. 탄생의 맞은편에서 한 차원 수승한 세계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과정이다. 두려워한다거나 기피하고 싶다고 비켜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탄생하는 생소함처럼 미확인 세계로의 진입일 뿐이다. 그래서 태어날 때와는 달리 웃으면서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어야 생에 대해 달관했다 할 것이다.
죽음을 어두움이라 할 만큼 삶이 밝은 것은 아니다.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 삶이 밝거나 아름다우면 죽음 또한 밝거나 아름다운 세계로 흘러가는 전환점이다. 나는 미리 생각해 둔대로 살지 못하고 살아지는 대로 생각하며 살았다. 세월이 더하기를 할수록 삶은 자꾸 빼기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았다.
죽음을 기억하면 더욱 풍요로운 현재가 된다.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면 변화를 수용하는 삶이 된다. 마침내 시공을 초월하는 삶이 된다. 날이 밝으면 인생을 새롭게 사는 기분으로 하늘을 쳐다본다. 언제부턴가 내가 뿜어 낸 숨이 되돌아올 순간을 짚어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