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문서 최종수정) 2009-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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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캄보디아의 암흑기
캄보디아의 암흑기(The Dark Ages)는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으로, 이 시기의 캄보디아는 지속적으로 쇠퇴하며 영토를 상실해간다. 16세기에 잠깐 반짝 번영기를 맞이하지만, 이는 당시의 왕이 떤레 삽 호수(Tonle Sap lake) 동남쪽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고, 메콩 강(Mekong river)을 통해 아시아 다른 지역들과의 교역을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시기가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선교사들이 이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1594년에 있었던 태국의 로웩(Lovek) 수도의 정벌은 이 나라의 운을 다하게 만들었고, 이로부터 캄보디아는 이웃의 두 강대국, 즉 시암(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권력투쟁의 볼모가 되고 만다.
한편 메콩 삼각주(Mekong delta)에서 베트남의 정착정책은 결국 17세기 후반에 이 지역의 합병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캄보디아는 가장 비옥한 영토를 잃게 되었고, 바다로부터도 차단되게 되었다.(역자 주) 이러한 외세의 침탈은 19세기 전반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베트남이 크메르 영토 전체를 흡수키로 결정하여 거주자들에게 베트남 문화 이식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주1)
[역자 주]물론 현재의 시하눅빌이 있는 남부 해안을 통해 지형적으로는 바다와 접해있지만, 메콩 강을 통한 물류와 운송 등이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임.
(주1) Ross Marlay, Clark D. Neher (1999). Patriots and Tyrants: Ten Asian Leaders. Rowman & Littlefield. pp.147. ISBN 0847684423. |
목 차
- 1. 캄보디아의 생존투쟁 : 1432~1863
- 2. 태국과 베트남의 지배
- 3. 프랑스 보호령 : 1863-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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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캄보디아의 생존투쟁 : 1432-1863
15세기 중엽 앙코르를 포기하고 1863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될 때까지의 4세기 이상의 기간을 역사가들은 “암흑기”(Dark Ages)라 부른다. 이 시기는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정체되었으며, 시암(Siam: 태국)과 베트남이 캄보디아 왕국의 내정에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의 패권다툼에 거의 도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볼모로 붙잡혀있었다. 아마도 프랑스가 침략하여 식민지배라는 “생명 임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캄보디아는 양 국가 중 하나에 흡수되었을 것이다.(이 부분은 인용각주가 필요함)
인종적, 문화적 말살에 대한 두려움은 근현대 캄보디아 관념체계의 주요한 주제로, 1970년대 크메르루즈(Khmer Rouge)의 강도높은 민족주의와 학살극을 설명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1979년 캄보디아를 무력 침공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 PRK) 정권을 수립시킨 일은 베트남 침탈과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미 17세기부터 암암리에 시도되던 정책이다.
내부적 쇠퇴와 외세의 침탈과정은 급격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것이었다. 또한 15세기까지는 크메르제국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별로 눈에 띄는 요소도 아니었다. 앙코르 톰(Angkor Thom)을 상실한 후, 캄보디아 왕조는 시암에 대해 떤레 삽 북쪽 지역을 포기했고, 이후 16세기 후반의 반짝 수복을 제외하곤 두번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이 무렵 거대 기념물 조성에 대한 크메르인들의 열정은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대승불교나 힌두교적 “신왕숭배”와 같은 이전의 종교를 대신해 상좌부불교가 자리잡았고, 캄보디아인들은 태국의 종교, 문화적 세계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동화도 두 왕국 사이의 전쟁을 막진 못했다. 16세기에 태국이 버마와 분쟁을 치르는 동안, 캄보디아 군대가 몇 차례 태국을 침공을 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앙코르 지역을 포기한 후 일부 크메르 유민들은 남동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현재의 프놈펜에 -- 태국의 도움도 약간 받아 --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는 메콩 강과 떤레 갑 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크메르 지역 심장부와 라오스 왕국의 수로무역을 장악했고, 메콩 삼각주 지역을 통해 남지나해의 중국 연안 및 인도양과 연결된 국제통상로로 진출했다. 그리하여 이전에 내륙을 중심으로 하던 자신의 선조들보다, 외부세계에 대해 보다 개방적이며 무역을 부의 원천으로서 보다 많이 의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와 사회가 출현하였다. 명나라 시대(1368-1644)에 증대된 중국무역은 왕실무역 독점권을 가진 캄보디아 엘리트들에게 투자가치가 높은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16세기에 이 지역에 유럽인들이 출현한 것도 무역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앙코르 시대의 몇 안 되는 위대한 크메르 왕 중 한 사람인 엉 쩐(Ang Chan: 1516-1566)은 수도를 프놈펜에서 로웩(Lovek)으로 천도했다. 프놈펜 북쪽의 떤레 삽 제방을 따라 위치한 이 도시에 대해, 포르투갈과 스페인 여행자들은 믿을 수 없을만치 풍요로운 도시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거래되던 상품에는 진귀한 보석들과 금속, 비단과 면제품, 향, 상아, 칠공예품, (코끼리를 포함한) 가축들, (중국인들이 진귀한 약을 만들던) 무소 뿔 등이 있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 로웩에는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아랍 지역에서 온 상단들이 거주했다. 그리고 이 세기의 후반에 이르면 영국과 네델란드 상인들도 오게 된다. 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는 해적, 모험가, 혹은 상인들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바람잘 날 없는 세계주의”(Stormy cosmo-politanism)가 구가되었다.
이전의 채무에 대해 태국이 너무도 강력한 압박을 하게 되자, 당시의 왕 사타(Satha: 1576-1594 [그의 친위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 용병들이었다])는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에게 도움을 청한다. 캄보디아에 스페인 보호령을 세우고 왕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총독이 12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했지만, 이듬해 그들이 당도했을 때는 이미 로웩이 태국에 패망하고 난 후였다. 하지만 극도의 혼란을 틈타, 1597년 스페인은 사타 왕의 아들을 왕위에 앉힌다. 친-스페인 국가를 세우려는 이 바램은 의욕적으로 추진됐지만, 2년 후 동일하게 대단히 호전적인 말레이시아 용병들에 의해 스페인인들이 학살당함으로써 종말을 고하고 만다.
1594년 태국이 로웩을 점령함으로써 캄보디아 독립의 열망은 치명상을 입는다. 처음에 태국은 군인 총독을 이 도시에 발령하여 외세에 의한 정치적 통제를 시도했다. 캄보디아 역사서는 로웩의 멸망을 이후 결코 국력을 회복불가능하게 만든 대참사였다고 기록했다. 시암은 이후 300년의 대부분 시기 동안 캄보디아를 지배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907년에 앙코르와트(Angkor Wat)를 프랑스에 뺏기게 될 때까지 태국은 450년간 앙코르와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2. 태국과 베트남의 지배
![](https://t1.daumcdn.net/cfile/cafe/1328BD1249BF4BC5B6)
1650년 무렵의 동남아시아. 맥, 뜨린, 응우옌 베트남과
빤두랑가(Panduranga) 근처에서 명맥만 유지하는
참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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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Mac)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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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린(Trinh) 공국 (갈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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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Nguyễn) 공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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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파(Champa) | |
(지도제작) C Glassey |
태국의 로웩 점령은 캄보디아 국운 쇠퇴에 있어서, 이미 한 세기 반 전에 앙코르를 점령한 것보다 더욱 심각한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특히 쇠퇴에 영향을 끼친 큰 요인은 인재유출이었다. 태국의 정복자들은 수많은 크메르 농민, 숙련된 장인, 학자들, 불교의 승려들을 자신의 수도인 아유타야(Ayutthaya)로 끌고갔다. 이러한 방법은 동남아에선 흔한 일이었는데, 이 사건은 캄보디아로 하여금 예전의 위대한 영화를 수복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만들고 말았다.
로웩 남부 우덩(Odongk, Udong)에 새로운 크메르인들의 수도가 건설되긴 했지만, 그 통치자는 태국과 베트남에 조공관계를 유지함으로써만 생존이 가능했다. 속된 말로 태국은 캄보디아의 “아버지”였고,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어머니”였다.
15세기 후반 무렵 베트남 민족은 현재의 베트남 중부에 있던 참파 왕국(Champa)을 격퇴했다(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베트남은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영향으로 수 천명의 참파 유민들(짬족)이 크메르 영역으로 흘러들어왔다. 17세기 초반에는 베트남이 크메르인들이 살고 있던 메콩 삼각주 지역에 도달한다. 1620년에 크메르의 왕 쩌이 쩻타 2세(Chey Chettha II : 1618-1628)는 레 왕조(Le dynasty: 1428-1788) 시대 대부분에 걸쳐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우옌 공국(Nguye lords: 1558-1778)의 영주인 응우옌 풋 응우옌(Nguyen Phuc Nguyen)의 딸과 결혼한다. 3년 후 쩌이 쩨타는 쁘레이 노꼬(Prey Nokor: 현재의 호치민 시, 1975년까지 사이공Saigon으로 불림)에 베트남 무역관을 설치토록 허용했다. 17세기 말까지 이 지역은 베트남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캄보디아는 바다로부터 단절되었다. 외부와의 교역은 오직 베트남의 허가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캄보디아의 이웃국가들은 대내외적인 분쟁에 휩싸였고, 이는 그 사이에 끼어있던 캄보디아로 하여금 숨돌릴 틈을 주었다. 1672년까지 베트남은 오랜 내전에 돌입했는데[뜨린-응우옌 간 전쟁(Trinh-Nguyen War)], 결국 응우옌 공국의 승리로 끝났다. 응우옌 공국은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점진적으로 메콩 삼각주 지역의 캄보디아 영토 중 상당수를 병합해갔다. 다음 100년 간 베트남 식민통치자들은 그들의 끊임없는 팽창정책을 구실로 메콩 삼각주에서 공공연한 학정을 실시했다. 18세기 말까지 베트남이 통제력을 확대한 지역은 1980년대 베트남이 장악했던 지역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18세기에 베트남의 침입에 맞서 동맹군 역할을 해줄 것 같던 태국이 버마와의 새로운 분쟁에 말려들었다. 1767년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가 포위당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태국은 재빨리 수복을 했고, 캄보디아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금 주장했다. 태국은 군대와 함께 당시 태국 왕실에 망명 중이던 젊은 크메르 왕 엉 엥(Ang Eng: 1779-1796)을 보내 우덩의 영주로 앉혔다. 동시에 캄보디아 북부의 3개 도 대부분을 병합했다. 또한 서북부의 밧덤벙(Batdambang)과 시엠립(Siemreap)의 영주들은 태국 왕의 봉신이 되어 태국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다.
19세기에 캄보디아에 대한 태국과 베트남의 패권다툼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된다. 캄보디아 중부지역에서 꼭두각시 왕과 함께 일하던 베트남 관료들을 통해 베트남 문화를 캄보디아에 이식시키려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지배에 맞선 몇 차례의 저항군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40년부터 1841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벌어진 항전이다. 2년간에 걸친 전쟁 후, 캄보디아와 두 이웃국가는 캄보디아가 태국과 베트남의 공동조공국이라는 데 합의했다. 양국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영주 엉 두엉(Ang Duong: 1848-1859)이 등극했고, 캄보디아는 10년간 비교적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상태를 맞이했다.
크메르민족을 마구 대했다는 점에서, 태국과 베트남은 사실상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좌절은 1970년대의 캄보디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태국과 베트남은 캄보디아와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태국은 크메르 민족과 종교, 신화, 문학, 그리고 문학적인 면에서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방콕의 짜끄리(Chakri) 왕조 왕들은 캄보디아의 복종과 조공, 그리고 영토를 원했지만, 그 백성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바꾸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은 크메르 민족을 베트남 문화를 배워야만 할 오랑케(야만인)라 생각했고, 비옥한 크메르 영토에 대해서도 그들이 베트남 정착민들을 보내 합법적으로 이주 정착해야될 땅으로 생각했다.
3. 프랑스 보호령 : 1863-1953
19세기에 영국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에서 배제되었고, 동남아시아 내륙부에서도 견제를 받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에서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부에 대한 상업활동을 원했고, 베트남에서 발생한 카톨릭 개종자 박해도 시정하길 원했다. 이 카톨릭 개종자들의 안녕은 프랑스 해외정책의 대외적 명분이었다.
응우옌 왕조는 외교관계 주장에 대해 거듭된 거부의사를 밝혔으며, 민 망(Minh Mang: 1820-1841), 티우 뜨리(Thieu Tri: 1841-1847), 그리고 뚜 둑(Tu Duc: 1848-1883)과 같은 황제들의 가혹한 반-카톨릭 정책은 프랑스로 하여금 1862년의 군함 외교에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사이공을 포함하여 코친차이나(Cochinchina: 메콩 삼각주) 지역의 3개 도에 대해 프랑스가 지배권을 획득했다.
파리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캄보디아는 거점과 같은 곳이었다. 선교사들은 태국과 베트남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의 보호를 청하라고 설득했고, 결국 캄보디아이 엉 두엉(Ang Doung) 국왕은 프랑스 외교사절을 왕궁으로 초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태국은 엉 두엉 왕을 설득하여 1856년 프랑스 외교사절이 도착하기 이전에 만남을 거부토록 만들었다.
1859년부터 1861년에 걸쳐 이루어진 자연주의자 앙리 무오(Henri Mouhot)의 여행은 비교적 널리 알려졌는데,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 라오스의 왕국 루앙 쁘라방(Luang Prabang)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앙코르 유적도 다시 발견하였고, 이 왕국들의 부유함과 중국 남서부로 이어지는 메콩 강의 가치를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또한 이 발견은 캄보디아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지니고 있던 프랑스로 하여금 새로운 관심을 유발시켰다.
1863년 8월에 프랑스는 엉 두엉 왕의 후계자인 노로돔 왕(Norodom : 1859-1904)과 조약을 성사시켰다.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상주”(résident)란 용어를 사용하는 이 조약은, 캄보디아 공국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하는 것으로, 캄보디아 내에서 프랑스가 광물 탐사와 벌목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1864년 거행된 노로돔 왕의 대관식은 프랑스와 태국의 대표자들이 집전한 어색한 행사였다. 비록 태국이 프랑스의 영향력 팽창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캄보디아에 대한 태국의 영향력은 줄어든 상태였다.
1867년에 프랑스는 태국과 조약을 체결해 밧덤벙(바탐방)과 시엠립의 통제권을 양도하고, 대신 캄보디아의 다른 지역들에서 모든 종주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 서북지역의 상실은 노로돔 왕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반란세력 진압에 대해 프랑스 군대의 신세를 지고있는 형편이었다.
1884년 6월, 코친차이나의 프랑스 총독이 노로돔 왕의 수도인 프놈펜을 방문해, 프랑스와의 포괄적 내용의 조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노예제 폐지, 개인의 토지소유권 인정, 지방도시들에 프랑스 상주관 허용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프랑스 군함이 강변에 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로돔 국왕은 서명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지방의 엘리트들이 이 조약에 반대했는데, 특히 노예를 소유한 이들은 다음해부터 전국적인 반항운동을 전개했다. 비록 이 반란이 진압되고 조약도 비준되었지만, 일부 캄보디아인들은 수동적으로 저항했고 노로돔 왕 사후에 보완될 때까지 사실 상 이 조치는 잠정 보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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