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장배경과 목회 이야기
1부 : 어린 시절 만난 하나님
* 첫 번 째 기도 응답
제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 한 것은 5살 이었습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사건은 초등학교 입학 바로 전 한번은 집으로 어머님 친구 분이 찾아왔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친구 어머님께 기다리시라 하고, 어머니를 찾으러 2층 상가 건물에 월세를 얻어 예배를 드리던 개척교회로 어머니를 찾으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어머니를 찾으러 갔다가 교회 문이 닫혀있었던 것을 보고 굳게 닫힌 교회 문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냥 돌아서 집에 가려다가 그 닫힌 교회 문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 어머니 친구분이 집에 와있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가 먼저 집에 와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집에 돌아갔더니 정말 어머니가 와있었습니다. 2층 상가 건물 교회 쪽문 앞에서 무릎 꿇고 어머니가 저보다 먼저 집에 와있게 해달라고 했던 그 당시 그 기도의 응답은 저의 생애 첫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시 갑자기 불안한 마음에 친구 집에 있다가 집으로 뛰어 왔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그 이야기는 정말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학창 시절에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교회로 찾아가 문이 닫혀있으면 창을 뜯고서라도 들어가 강대상 앞에 무릎 꿇고 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목회자가 되어 매일 밤낮으로 강대상 앞에 엎드리어 기도하니 하나님이 저를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 병아리를 제물로 드린 사건
초등학교 어린 시절 유난히 병아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서 매번 병아리를 사와 기르기 시작했습니다(그 당시 병아리 값 50원). 여러마리 키우다가 죽기는 했는데, 병아리를 너무 사랑해서 병아리에 대해서 소년 중앙이라는 책을 통해 병아리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병아리와 뽀뽀 하는 방법을 배워 하교 후 병아리에게 '뽀뽀'라고 외치면 병아리가 나에게 달려와 '뽀뽀'를 하도록 하면서 그 병아리가 닭이 되었습니다. 이 병아리와 평생을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출석하던 신광장로교회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하던 터라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이북 출신의 목사님이 어린 저에게 누렇게 뜬 얼굴로 설교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런 목사님께 저의 어머님은 제가 기른 닭을 가져다 드리자고 제게 물어 보셨습니다. 하교 후 제일 먼저 뽀뽀하던 그 닭을 말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수심이 가득했는지 밤잠을 설쳤지만 그 다음 날 목사님께 제가 사랑하는 닭을 갖다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안수 기도 받았던 기도 내용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최승목, 5대양 6대주로 다니며 복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평생을 굶지 않게 하시고....”
그 당시 다 자란 닭을 묶어서 끌고 갔는데, 강아지처럼 저를 얼마나 잘 따라오는지, 당시엔 닭도 강아지 같이 훈련이 가능하고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동안 기른 정에 닭과 헤어진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팠고, 더군다나 사랑으로 보살핀 닭이 죽는다는 것에 너무 가슴이 아파 그 닭을 노끈으로 묶어 목사님에게 가져다 드리는 동안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으로 가슴 아팠지만 그때의 선택은 저의 인생의 여러 선택 중 정말 아름다운 선택 중 하나였습니다.
그 한 마리의 닭이 나중에 이민 생활 가운데 85,000 마리의 축복으로 85,000배의 축복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 초등학교 3학년 때 성경을 가르침
저는 개척교회를 다녀서 어린 시절 교회학교가 없었습니다. 어른 예배를 함께 드려서 당시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고 앉아 있었습니다. 다만, 어린 나이에 나는 목사님의 설교를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절대로 어렵게 설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게 기억에 납니다.
교회학교가 있지 않았지만, 목사님 손녀 딸 2명, 그리고 저와 제 동생 이렇게 4명을 데리고 목사님 따님이 성경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대 예배가 끝나고 오후에 우리 4명을 두고 성경을 가르치셨는데, 가끔 씩 직장 때문에 주일에 교회를 빠지면 저는 그때마다 목사님 손녀 딸 2명(초등학교 1학년과 유아원)과 제 동생 이렇게 3명을 앉혀 놓고 제가 성경을 가르쳤던 기억이 납니다. 개척교회 다니면서 저에게 가장 유익했던 2가지 중 한 가지는 어른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설교에서 눈높이 설교와 쉬운 언어의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려서부터 경험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당시에 고급 헬라어가 아니라 시장 언어인 코이네라는 대중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영향력 있는 글과 언어는 고급언어가 아니라 대중적인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매우 어린 시절부터 저보다 어린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저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체육이나 예술은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영어도 조기교육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조기 교육이 없는지 어려서부터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성경 교사 교육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집안이 어려워져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수유리에서 공항동에 계시던 큰 이모집으로 잠시 이사를 가서 거기에 얹혀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공항동에 있는 교회를 약 1년간 다녔습니다. 난생처음으로 큰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정식 교회학교 교사에게 성경공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교회 대표로 초등부 성경시험 대표로 나가게 되어 학교 수업 후 매일 교회에 가서 밤늦게까지(집에 오면 밤 10시쯤 되었음)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때의 성경 암송 실력이 지금의 성경암송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와 신앙 철학과 사상은 어린 시절 교육하는게 중요하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제일 비싼 성경 구입
저는 어려서부터 성경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한 명이 하나님께, 한 명은 나라에 받치신다 하여 저는 최 목사라 하였고, 제 동생은 최 장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린 시절 하루에 100원씩 용돈을 모으면 제 동생은 간식을 사 먹고 저는 그 돈을 오랜 시간 모아서 당시 기독교 서점에서 가장 비싼 성경책 톰슨관주주석2 성경전서를 구입하여 그 성경책을 읽으며 각 성경구절마다 연결 성경구절 찾는 놀이가 제 어린 시절 제일 즐겨하던 놀이였습니다.
* 웅변대회 최우수 학생으로 수상 받기
공항동에서 1년이 채 못되어서 다시 수유리로 돌아와서 초등학교 6학년 다시 수유초등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내성적이고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하지 못했었습니다. 선생님에게 말을 잘 건네지도 못했고 수업중에 화장실 간다는 이야기도 못하는 저에게 당시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용기를 주려고 웅변대회 나가도록 담임선생님이 저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당시 후보로 나온 학생들은 대부분 웅변학원 출신들 이었습니다. 저는 웅변학원은 다니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원고를 써주시고 제가 연설한 것을 녹음기에 녹음해서 듣고 또 듣고, 부모님에 대한 효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외워서 이야기 식으로 연설을 이어 나갔습니다.
당시 대회에 참여한 모든 아이들이 모두가 소리를 높이 지르며 “이 연사 강력히 주장합니다.”라고 목청이 떨어지도록 소리를 내질렀지만 저는 차분히 '효'에 대해서 청개구리 이야기를 하면서 나중에 후회 하지 말고 지금 효도하자고 대화 하듯이 간절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웅변학원 근처에도 가보지도 못했기에 연사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냥 우리 삶에 있는 이야기, 그리고 내 이야기 외워서 상상하며 나누었는데, 또 부모 잃은 청개구리가 불쌍하고 슬프기도 해서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습니다.
사실 순위권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전교생 조회 시간에 제가 전교 1등으로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아! 나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생각한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의 그 사건은 평생 저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거나, 이야기 하는 데에 용기를 주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2부 강력한 성령체험
* 교회에서의 생활
중학교 때 의정부로 이사를 하게 되고, 의정부에서 감리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감리교 목회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저의 은사님이랑 함께 교회에서 먹고 자며 함께 생활했습니다.
저의 은사님의 어머님은 당시 저의 지역에 용하신 무당이셨고, 저의 영적 은사님은 신학교에 가신 후에 집에서 내쫓김을 당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 재가하에 저의 은사님이랑 함께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지냈던 것처럼 교회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은사님은 치킨집에서 일하셔서 늘 닭 튀김 냄새가 몸에 베어 있었습니다.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함께 라면을 끓여 먹이면 본인은 부스러기 면발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라면은 면발보다 국물과 짧게 끊어진 부분이 제일 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은사님과 함께 교회에서 잠자다가 도둑이 우리 은사님의 구두를 훔쳐 갔는데 구두 살 돈이 없어서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우셨던 분인데 제 동생이 농구를 하다가 농구공을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데, 문방구에 가서 농구공을 산 후에 몰래 숨어서 땅바닥에 농구공을 긁다가 그 농구공을 가지고 오면서 제 동생이 잃어 버린 농구공을 찾았다고 기뻐하던 분입니다. 제가 2001년도에 토론토를 갈 때에는 친정에서 받은 50만원 사모님이 아이를 낳고 몸조리하라고 받은 돈 전체를 저에게 건네주며 받지 않겠다고 한 저에게 이러면 내가 너무 서운하다고 하면서 저를 울면서 환송해 주셨던 분입니다. 그런 분과 함께 동거동락하며 교회에서 성장한 것은 제 인생의 아주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본인은 중국으로 가서 중국 대륙을 복음화 하고, 저는 미국에 가서 선진 신학을 공부하고 세계 복음화에 꼭 쓰임받으라고 축복 해 주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저는 평생 그분을 후원하기로 당시에 약속하고 2000년부터 해마다 그분을 찾아 뵙고 후원하며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은사님을 통해서 세워진 그 신학교를 통하여 중국 100여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화 되었습니다.
* 금식기도와 성령 체험
고등학교 때 어느 날 한 부흥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무당 중에 강신무와 학습무가 있는데, 공부해서 무당 되는 학습무도 있지만 귀신이 임해서 무당이 되는 강신무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의 과거를 귀신같이 맞추는 용한 무당을 강신무라 하였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라 했습니다. 공부해서 목사도 될 수 있지만, 이왕이면 성령 받아 능력 있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왕이면 능력 있는 목사가 되자 라는 마음으로 당시 교회 교육 전도사님과 강원도 홍천에 응답산 기도원이라는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10일간 금식 기도하고, 또, 이어서 10일간 미음을 먹으며 다시 기도해서 20일간 기도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당시 7일째 성경을 읽다가 기도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입을 제어할 수 없는 방언 기도를 하게 되고, 하루 종일 기도하다가 성경이 열리는 경험을 하고, 신비한 영적인 세계와 능력을 경험하고 내려왔습니다. 당시에 원장 선생님께서 “최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면 학생부가 부흥하고, 기도를 하면 기도 하는 대로 다 응답 될 것입니다.” 라는 축복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제가 맡았던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당시 교육부에서 가장 큰 부서가 되었습니다.
* 신유의 체험
10일간의 금식 기도, 또 다시 미음과 함께한 10일간의 기도 그렇게 20일간의 산기도 후에 저는 매일 마음이 뜨거워서 주체할 줄을 몰랐습니다. 당시 우리 집에서 친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는데 위암 말기였습니다. 저의 집에 오셔서 음식도 못 드시고, 매일 드러누워 계시면서 헛것을 보시고 다리는 구부러져서 굳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도 기도하면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먼저 할아버지의 구부러져 굳어져 있는 다리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굳어져 있는 이 다리는 펴져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지어다.” 큰 소리로 선포 기도를 했습니다. 이제 다리가 펴져서 일어 나시겠지? 생각하며 눈을 떴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 난 것입니다. 분명히 산 기도에서 무언가 모르는 강력한 체험도 하고, 기도하면 다 응답 된다고 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에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 째, 기도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구나. 둘 째, 교회에서 기도 안 하고 집에서 하길 정말 잘 했다. 교회에서 했으면 이게 무슨 망신 당할 뻔 했는가?’
그냥 포기하고 믿음 없는 할아버지께서 예수라도 믿으시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할아버지 앞에서 날마다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2달여가 지난 후, 할아버지가 갑자기 큰 소리를 외치며 일어서게 된 것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나는 우리 할아버지가 다리가 펴지고, 병이 낫기를 구했는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할아버지가 다리가 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이 들어가기를 원하셨던 것 이었습니다. 믿음이 들어가니, 치유도 일어나고, 믿음이 들어가니 먼저 영적인 구원이 오고 기쁨이 오고 병도 치유되어 진 것입니다. 이 것을 통해서 정말 큰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환자의 환부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넘어 환자의 믿음과 구원을 보신 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수 없는 신유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3. 군인교회 담임
* 군인 교회를 담임하면서
군대를 가기전에 아주 생생한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저의 은사님의 총을 들고 전쟁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전쟁을 마치고 나니 총이 나의 총이 아니라 은사님의 총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군대에 가면 교회를 맡게 될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당시 저는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교회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두들겨 맞았었습니다. 매주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는 장병이 1107야공단 130대대에 저 혼자였습니다. 당시 군목이 없어서, 나중에 그 교회를 담임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당시 성결대, 영남대 등 신학을 전공한 신학생들이 있었는데 제가 교회를 담임하고 매주 설교하고 군인교회를 목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단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했던 것 그 것 하나로 그 교회 선임군종에 의해 발탁 되었습니다.
1996년 너무나도 유명한 강릉 무장 공비 사건이 하필이면 주일날 일어났습니다. 당시 전 부대원 수색 작업을 하러 가는 날, 부대 장에게 가서 예배 드리고 가야 한다고 해서, 부대에서 명령 불복종으로 수색 작업 이후에 남한산성에 갈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제 인생이 전과자가 되고, 빨간 줄이 가는 줄 알고 낙담 하였지만, 수색 이후 40kg 군장 매고 일주일간 일과시간 연병장 도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군부대에서 정말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전 부대에 종교 점오를 요청을 공문발송해서 승인 받아 매주 목요일은 점오 대신 인원파악 후 예배를 드리게 하고, 일주일에 3회 경계근무를 서는 위병 근무자들 사랑의 차 돌리기를 하고, 민간 교회와 협연해서, 횡성 감리교회, 횡성 성결교회와 연결하여서 매주 주일 저녁 외부 찬양단이 와서 찬양 저녁 예배를 신설하고, 민간인 100개 교회에 군인 소식지 "짬밥“지를 발행하여서, 충현 교회, 충신 교회, 여의도 순복음 교회, 임마누엘 교회 등등 여러 교회들로부터 장병들을 위한 문서, 설교 테이프, 책자들을 기증받았었습니다.
* 쓰레기장 폭발 사건
군대에서 일등병에 1107야공단 130대대 일삼공 군인 교회 담임 군종이 되고, 당시 군종 참모 목사님이 계시지 않아서 제가 그 교회를 담임하고 목회를 하게 되었었습니다. 교회 올라간다고 매일 구타당하고, 심지어는 군 간부조차 우리 교회에 불상과 마리아상을 들여와서 함께 예배드리겠다고 하셨었습니다. 너무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어서 1군 사령부 군종참모 중령에게 연락을 해서 종교 탄압 탄원서를 올리겠다고 하였더니 우리 중대 고참들을 단체로 기합을 받게 돼서 그날 이후로 더욱 괴롭힘을 당하고, 저는 아예 교회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계속 사역을 보냈습니다. 한날은 소각장 사역에 보내서 빨리 청소를 하고 교회에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펑펑 울면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큰 굉음과 함께 “놀라지 마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쓰레기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려온 사이에 쓰레기 소각장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한참 멍하게 서 있는데 나를 그렇게 핍박하던 보급관과 한 고참이 뛰어 오더니 “너의 하나님이 살아 있기는 살아 있나 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잠시 기도 하러 올라간 사이에 소각장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만약 그때 기도하러 올라가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저 세상에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길래, 시멘트로 만들어진 소각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그 날 이후로 교회에 올라가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4. 필리핀 선교지에서 만난 하나님
* 필리핀 선교지에서
제대를 하고 나서 다시금 교회 일에 최선을 다하기 시작하면서, 의정부 연합 청년회에 가입하여 저의 교회를 외부적으로 알리고, 청년부를 새롭게 조직하고 청년들이 부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필리핀에 단기 선교를 두 달간 가게 되었습니다. 첫 해외여행은 저로 하여금 불안하기도 하고 들뜨게 하였습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정도 가면 바기오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 선교사님 댁에서 숙식을 해결하였습니다. 성결교 선교사님이셨던 그분은 참 영적이셨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식사하고 성경보고 12시까지 기도를 하셨습니다. 전 1시간 하기도 벅차 했었는데, 이분은 매일 빠짐없이 하루에 4시간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인생에 처음으로 매일 4시간씩 기도를 하면서 영적인 많은 체험들을 하는 귀한 시간들 이었습니다. 오후에는 근교 대학교에서 청강을 하고 밤에는 그 지역 공원에 가서 전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1998년 필리핀에서의 3달가량의 선교가 내 인생에 영적인 세계로 더 깊게 들어가는 시간들이었고, 선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들 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학교 학생 지도, 지역 교회 부흥회, 미전도 종족 전도, 교회 개척 및 설립 등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 필리핀에서 있었던 2달여 동안 매일 4시간씩 기도하게 되었고, 그 습관이 오늘 어디서든 매일 기도하는 습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당시 그러한 기도의 습관은 나에게 또 다른 영적인 세계의 깊은 현상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2013년 저는 선교사님을 저의 교회에서 초청하여 저의 집에서 한 달간 지내면서 안식월을 갖도록 하고 저의 교회에서 후원하였습니다.
5. 토론토 불꽃 교회에서의 이민 목회 시작
* 토론토 불꽃 교회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다가 2001년에 휴학을 하고, 토론토에 무작정 갔습니다. 이민 목회를 눈으로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갔습니다. 분당지역에 있는 불꽃교회(전용재 감독회장)에서 토론토에 토론토 불꽃 감리교회를 세우고 당시 부 목사님 이셨던 공성훈 목사님을 그곳에 파송 했습니다. 그 분과 함께 토론토 불꽃 교회를 섬기면서 이민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을 배우고,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목회를 하였습니다. 평일에는 일식당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토론토 엠마누엘 칼리지에서 청강을 하고 주말에는 토론토 불꽃 감리교회를 섬기면서 이민 목회를 배웠습니다.
토론토에서 기억에 남는 사건은 당시 공성훈 담임 목사님이 야외예배 다음주에 간다고 할 때, 기상 일보에 주일에 비올 확률이 70%가 넘는다고 했는데, 예배 중에 목사님이 기도함으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내 친구는 그 사건에 대해서 비난을 많이 했었습니다. 무식한 목사가 자연과학을 무시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당일날 비가 살짝 오다가 말고 날씨가 무척 맑았습니다.
토론토에서 이상하게 꿈을 꾸면 그 일이 당이날 일어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꿈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상이 칼융이 말한 동시성현상(syncrinicity)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의 근원은 원형(archetype)에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친구는 그러한 사건으로 신앙이 조금 더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토론토에서 일식당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당시 부장님이 꿈을 꾸면서 저에게 해몽을 요청해 왔었습니다. 부장님이 꿈속에서 3마리의 고양이가 집에 들어왔는데 마지막 고양이 한 마리는 부장님의 사모님이 문을 닫으면서 문틈에 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꿈인지 물어본 것입니다. 저는 부장님 가정에 좋지 못한 일이 3번에 걸쳐서 생기는데 마지막에는 사모님 때문에 생기다가 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기도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장님이 불편 해 하시면서 그것은 좋은일이 3번 생기는 꿈이라고 하시면서 기도나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갑자기 부장님이 저에게 찾아와 더 이상 본인을 위해 기도를 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 기도가 본인이 부자가 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몇 달 후에 그 부장님과 사모님이 저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부장님이 당시 만나고 있었던 분은 인도계 집시 점을 보는 사람으로 부장님의 돈이 부정해서 정결예식을 해준다고 하여 3번에 걸쳐 부장님의 전 재산을 가져 간것입니다. 마지막은 한국에 있던 재산 까지 다 빌려서 송금받다가 사모님이 친지 가족들에게 연락을 받고 알게 되어 그 인도계 점술인에게 돈을 가져다 주는일이 중지 되었지만 그녀에게 가져다 준 모든 돈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살다보면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주변에 생깁니다. 특별히 기도 하지 않으면 엉뚱한 일이 생기는 것을 너무 많이 목격됩니다. 한번은 제가 일식당에서 일본 된장국통을 나르다라 허리와 목을 다쳐서 꼼짝 못하고 침을 맞아도 낫지를 않고 고생하고 있을 때 찬송가 “예수가 함께 계시니”라는 찬양을 부르며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제 옆의 친구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라며 의아해 했습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하나님을 찾을 때는 찾지 못하다가 무릎을 꿇었을 때에 하나님이 찾아와 주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군대에서 만난 한 친구와 함께 토론토를 갔습니다. 그 친구와 함께 토론토에 함께 지내면서 어려운 생활 환경 가운데 은혜로운 체험들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 광림교회에서
토론토에서 사역을 마치고 신학교를 졸업을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광림교회에 부임 하였습니다. 광림교회 교육부 고등 2부를 맡으면서 목회의 조직과 시스템을 배웠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분당에 있는 광림교회 지성전인 광림 남 교회에서 기획을 맡아 청년부 교육부를 총괄하였습니다. 광림교회에서 기획, 행정, 조직과 무엇보다도 근면과 열정 그리고 생명 건 목회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새벽 별 보고 출근해서 새벽 별 보고 퇴근하면서 제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목회 현장 이었고, 많은 열매를 맺는 시간들 이었습니다.
광림교회에서 본당에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분당의 지성전에서 교육부 총괄을 하면서 평신도 선생님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기도하러 선생님들과 기도원에 올라가게 되었고, 선생님들의 사업체를 매주 심방 하여 예배를 드렸었습니다. 한 분은 명절에 시댁에 가서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게 해달라고 안수기도를 부탁해서 명절 새벽예배때 안수 기도를 해드렸는데, 시집에 가서 제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기절해서 앰브런스에 실려 응급실에 가게 되어서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기도의 응답받았다고 좋아했습니다. 또 한 분은 함께 예배드리다가 한국에서 제일 큰 유치원 프랜차이즈로 성장하게 되고 지금까지도 서로 기도의 동역자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 미국 이민, 85,000배의 축복
저의 아내는 미국에서 성장한 이민 1.5세입니다. 한국 YBM 영어 강사로 나왔다가 만나서 광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200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 주에 저의 처가 댁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서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장인어른께 기도 제목을 물어보았더니 이민 17년차에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어서 자기 땅에서 농사 짓는 꿈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이제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하고, 욥의 기도처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다가 이제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태초부터 있던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정한 땅을 정해 놓고 매일 예배를 드리고 땅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쯤 지나자 장인어른이 아침마다 땅을 돌고 구하는 기도에 대해서 불편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고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더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매일 돌던 그 땅 주인이 우리 집에 찾아와 그 땅을 가져가라고 갑자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뻤고 순진하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공짜로 준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비싼 가격으로 그 땅을 가져 가라고 해서 오히려 더 큰 낙심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 땅을 가서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커다란 창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창고 안에 어떤 곡식이 있는가 해서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 끝이 안보이는 닭들이 있던 것입니다. 닭 85,000 마리가 있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목사님에게 닭한마리 드렸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가자 우리 장인 어른의 친구분이 이민 17년 만에 연락이 와서 일산에서 땅 보상을 받고 1억을 보내겠다고 해서 보내 주시고, 나머지는 닭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 45에이커 (1에이커는 1,245평) 땅을 갖게 되었습니다.
* 개척교회의 기적들
미국 이민과 동시에 시작된 개척교회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이 많은 은혜와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은 개척교회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는데 몇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개척때부터 지금까지 고난주간 특별집회를 인도하는데 당시 미국 교회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주간 매일 교회건물을 사용하기 위하여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재가 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 목사님이 고난주간 특별 기도회에 참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영어도 잘 못하고 예배도 순전히 한국말로만 할 것이기에 너무 부담이 되어서 한국어로만 설교를 할 것이라고 했더니 괜찮다고 같이 기도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매일 새벽마다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던 미국 목사님이 성 금요일 새벽예배 때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설교 끝나고 저에게 한국말로 “십자가 앞에 내 모든 죄 사라져”라고 말하며, 허리 수술로 잘 걷지 못하던 분이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벽예배 때 제가 설교를 하는데 당일 저의 한국말 설교가 영어로 들렸다며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또 한번은 저의 고향 선배가 저의 교회에 참석을 했는데 왼쪽 두 번째 손가락이 절단되었다가 봉합수술을 하고 찾아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다시는 봉합된 그 손가락을 구부릴 수 없다고 하였다고 하여 낙심하며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저는 개척 처음부터 매주 예배의 마지막 시간을 치유의 기도를 합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이 말씀 선포와 가르치심 그리고 치유 사역 이었는데, 요즘 많은 교회들이 치유 사역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치유 사역을 꼭 마지막 시간에 합니다. 그런데 그날 그 고향 선배의 손가락이 신유 기도 후에 움직이기 시작해서 다시 기타를 치며 찬양하기까지 회복되었습니다.
개척 교회때 여러 가지 신유의 사건 외에도 제일 기억에 남는 사건 중 하나는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차에 기름 넣을 돈도 없을 때, 교회에서 울며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어떤 관광객이 우리 교회를 지나가다 문을 두드리고 저에게 목회 활동비로 쓰시라고 돈을 주고 갔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이 어려웠던 시간들이었지만 시작하면서부터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지역주민들에게 집에있는 인형과 장난감을 기부 받아 라오스에 보내어 유치원을 시작하게 하였고, 그것이 지금 커다란 학교가 되었습니다.
* 개척교회의 부흥과 찾아가는 목회
성도가 정말 지독히도 늘지 않았습니다. 개척 목회 20명을 넘지 못할 때, 저의 지역에서 30-40분 거리 캠브리지라는 도시에 하얏트 호텔에 한국인 청년들이 일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3주 동안 찾아가 만나고, 그곳 청년들을 매주 데리러 가서 함께 예배 드리고, 밥 해서 함께 나누고, 한국 학교를 통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이민 오는 분들이 한 분 한 분 계셔서, 영주권 수속, 학교 수속, 모든 행정적인 일들을 도우면서 교회가 차츰 안정적이고, 사람들이 한 분 두 분 천천히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교단 기준 자립교회가 된 이후 새로운 도전을 위해 그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 팜스프링스 한인 감리교회 부임과 성전 건축
2009년 가족을 모두 동부에 두고 엘에이 쪽으로 새롭게 개척하러 왔습니다. 무작정 토론토에 갔었고, 그리고 미국 동부에도 무작정 갔던 것처럼, 서부에도 아무런 연고 없이 그냥 교회를 새롭게 개척하러 갔습니다. 몇 달이면 교회가 개척되고 안정을 취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교회는 개척되지 않고 저는 노숙자 신세 직전까지 가며 너무 어려운 상황이 되어 더 이상 살 소망까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거의 수개월을 매일 하나님께 울며 4시간씩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2009년 8월 팜스프링스 교회로 새롭게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부임한 첫 주에 아이들 포함해서 19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오자마자 교회가 어렵지만 교육부 부터 신설하고, 교육 목사를 한명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국학교를 강화하고, 처음으로 VBS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거의 2달에 한번 씩 함께 선교지를 방문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노방전도하고 선교주민들과 함께 체육대회도 하고, 바비큐 파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13년 멕시코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8년간 뼈대만 세워 놓은 교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건축을 할 수 있도록 자재를 사주기로 하고, 그 교회 필요한 자재를 구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에 그 교회가 성전을 다 짓고 20여명 모이던 교회가 100여명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교인들과 교회 버스를 타고 축하해 주러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날 미국 한 교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빌려 쓰고 있는 미국교회에서 나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교회 건물을 구입 하라는 것입니다. 3.3에이커(3,800여평)에 건물 두 개를 가지고 있는 교회인데 저의 에게 매입을 의뢰했었습니다.
당시 저의 첫째 아들은 틱장애로 매우 힘들어하고 있던 때였는데 감사하게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모았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부전자전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십시일반 헌금을 하여 지금의 교회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여러 기독 언론사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팜스프링스 한인교회는 멕시코 교회를 지어주고, 하나님이 팜스프링스 한인교회를 지어주었다고 기사를 내주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