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론과 벙개
2023, 08 03, 젊은이: 마50100
프랑스 젊은이들은 열여덟의 나이에 철학 전반에 학력검증고사(바칼로레아)를 치르고, 이를 통과한 젊은이들은 아무 대학에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진학할 수 있다. 이 바칼로레아의 철학 교재에는 프랑스 문교부가 지정한 교재는 없다. 단지 문교부는 개념들과 철학자들을 나열해서 다루라고 제시하면, 철학교수들은 자기의 의향대로 참고 교재를 편성하기에, 참고 교재의 수는 매우 많다. 그 중에서 베르제즈와 위스망의 저술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다. 참고교재 만큼이나, 고교생들이나 입문자를 위한 철학소사전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소사전들 중에서 1990년부터 문명(la civilisation)을 더 이상 다루지 않고, 문화(la cuture)를 중심으로 다룬다고 한다. 문명은 서구와 타 지역 사이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으로 여기며, 문화는 각 터전과 삶의 위상들에 따라 다른 문화들이 많이 있으며, 이 문화들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풍토와 터전에 인간성을 잘 발휘하는냐에 관심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로서는 앵글로색슨의 문명을 따라잡는 교육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면서, 열여덟에 철학교육의 필수성을 등한시 하고 있다. 조선조에서 출세간(出世間)에는 필수적인 유학교육이 있었다. 그 교육이 공리공담이라고 여겨 뒷전으로 미루었고 산업사회의 필요성에 따라서 돈을 버는 삶을 위주로 교육제도가 재 편제되었다. 과거의 교육은 세간에 나서면 공익에 또는 평천하를 이루는 노력을 하라고 가르쳤기에, 관직에 들어가면 청렴해야한다고 가르쳤지만, 요즘을 개처럼 돈을 벌고 정승처럼 쓰자는 이상한 목소리가 더 크다는 것이 현실이다. 위기를 조장하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술수와 야비함이 넘치는 것은, 전통의 유학에서 말하는 청백리 정신도 불교에 말하는 탐만치에 대한 경계도 구닥다리로 여기면서 산업사회에서 자본제국의 마름 또는 마름의 패거리들의 사회를 만들고 있다.
산업사회의 활동 또는 적응은 제도 속에 개인의 삶을 예속시키거나 적어도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조바심 같은 것이 있다. 이 조바심에서 잠시 혼 줄을 놓으면, 뒤처지는 것 같아서, 우울증과 히스테리가 성행하는 것도 산업사회의 조직화에 일원이 되기 위한 아등바등 거리는 형국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조직화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는 찰나의 무의식은 이미 훈육과 예속에 익숙하여, 달리 사는 타인의 삶을 배제하거나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는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 산업사회에서 들어가지 못한 느슨한 인간이거나 부적응의 인간을 격리시키는 정책을 보아왔다. 이런 사회에서 살면서, 오랜 전통에서 우리의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과 현재의 삶의 토대가 되는 것을 배척하는 가운데, 현실적으로 불평등은 심화되고, 오랜 삶의 영역에 대해 비하하는 것을 넘어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탐만치에 빠진다. 탐욕과 오만이 마치 젊은이의 야망이나 인간의 본성을 성취하려는 욕망처럼 여기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면서도 눈먼 돈을 먼저 보는 자가 임자라는 것이다. 세시 풍속도를 만든 것은 앞세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젊은이들도 풍토 속에서 젖어 있다. 사악한 것은 사악하다고 말하는 것도 젊은이의 힘이다. 이들은 달리 산다는 것은 달리 말하는 것, 달리 글쓰기, 달리 행동하기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아니라 문화라고 하는 것은, 말하기와 글쓰기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게다가 달리 말하기와 달리 보기는 말과 글과 차이와 또 다른 차원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우선 입말과 쓴글이 각각의 나라만큼이나 문화풍토가 다르다는 것이다. 입말은 소리의 진동이고 쓴글은 판위에 쓰여진 자료들이다. 소리는 지나가지만, 쓴글은 바꾸어도 과거의 글은 그대로 남는다. 그 글은 글자 또는 단어의 결합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글자와 단어가 따로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상층론자는 그것들이 항상 같은 영향과 명령을 보내는 것으로 착각한다. 삶에서 글자와 단어는 그 결합하는 문장과 단락, 절과 장에 따라 다르다. 삶의 풍토에서도, 현실적 평면에서도 마찬가지의 관계들이 있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과 만나는 장면, 그 인간이 또 다른 인간들과 만나는 장면은 결합과 배치가 다르다. 그 조직화에 따라 사회의 여러 모습들이, 동아리 또는 모임들이 다르다. 쓴 글의 차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입말과 말투는 또 다르다. 그 지나가는 소리에서 공통으로 여기는 소위 표준말(입말)도 있고, 각 개인이 가진 고유한 방식의 말투도 있다. 입말의 우선성을 두고 열여덟까지 공통의 기반으로 여러 학문들의 줄기(기둥)들 만을 맛보았다. 그 줄기에 어떤 가지와 잎들이 있는지를 찾는 것이 청년기라고 가르치는데, 나로서 그 잎들을 만들어가거나, 줄기 자체를 다른 줄기들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삶은 하나의 기둥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기둥들의 다발(다양체)에서 출발한다.
열여덟에 이르기까지의 일반적 교육은 세계가 거의 비슷하다. 그 다음은 자기의 몫이다. 입말과 말투, 쓴글과 자료, 풍토와 터전은 달라진다. 각자는 자기의 문화라는 터전을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라는 또는 외국문화들이 각자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는 자기 삶의 양식을 만든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각각이 풍토와 터전 위에서 자기 방식의 말투와 쓰기를 갖는다. 이런 방식이 통용되는 벗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 전통에서 지음지기(知音知己)를 소중히 여긴다. 이런 벗은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노력에서 이루어진다. 그 벗을 만드는 것을 우리는 열(說)락(樂)당(堂)을 형성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풍토를 만들고 터전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누구나 안다. 그럼에도 삶에서 꾸준히 자기 방향을 만들어가는 것은 소중하다. 생산하고 소비하고 재생산하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벗이 생긴다. 그 벗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입말과 다른 말투를 사용할 수 있다. 달리 만나는 것을 낭만주의 기질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놀이의 한 방식일 뿐이다. 우리가 문화라는 거대한 용어에서, 좁혀서 스포츠라는 영역에서 보자, 마라톤, 자전거타기, 축구, 농구 등등에서 각각은 고유한 방식의 신체적 활동이 있다. 문화의 영역만큼이나 많은 스포츠의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을 좋아하여 마라톤대회나 축구장에 모인 팬덤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선수들이 있고 구경꾼이 있고, 게다가 동아리에서 연습하는 팀원들도 있다. 문화라는 의미에서 구경꾼으로 남지 말자는 의미에서, 달리 말하기처럼 달리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함께 노력하는 가운데 놀이(le jeu)가 다른 이들 또는 다른 편들과 시합을 하면서 ‘경기’라고들 한다. 놀이가 중요하다. 놀이를 노름으로 만들어서는 벗을 만들지 못한다. 놀이를 실천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리크레이션(la récréation)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기분 전환 또는 오락 정도로 생각한다. 사실 단어 그대로 다시 창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놀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놀이가 “다시 창조”하는 것이다.
문화는 놀이에서 다시 창조하는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창조하는 것은 개인의 관심사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나라에서도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기존의 억압 질서나 부패질서에 저항하는 것, 새로운 개선의 항쟁을 하는 것, 보다 더 몇을 단두대의 이슬로 보내는 혁명을 실천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 문화의 새로운 창안과 창달은 흥미 있게도 각 종교가 각자의 입말과 말투가 있다는 것이다. 힌두교, 불교,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등은 각각의 입말과 쓴글이 있다. 그리고 각 신앙자들은 각각의 말투들이 있다. 삶의 터전을 바꾸고 풍토를 만들려는 노력이, 놀이 또는 재창조의 방식으로, 여러 말과 글로서 표출된 것이다.
어느 말투는 하늘나라에 알라가 마호멧이 있고, 어느 말투에는 예수와 바울이 재창조하는 곳이 있고, 어느 극락에는 싯달다와 수보리가 있다고들 한다. 우리나라에는 환이 있고 하늘에는 선녀와 환웅이 있다고도 한다. 젊은이에게 말하지만 당신들이 예닐곱일 때 산타클로스 할배가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짝지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열여덟에도 하늘나라에 비슈누가 또는 짜라튜스트라 있다고 하면 친구들 사이에 조롱거리가 된다. 예수 옆에 박달라 마리아가 있다고 하면 웃음거리이다. 들루즈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견해(doxa, 독사)라고 하는데, 그 동아리들 속에서 자기 독사를 진리라고 하며, 달리 터전을 만드는 이들에게는 이런 패거리들의 이야기를 파라독사(paradoxa)라 부른다. 그 동아리나 패거리 속에서 재미있게 살겠다는 노력하는 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구경하면서도 그 패거리의 일원이라는 팬덤 속에 빠지지 않는 것은 열여덟 나이부터이다. 루소가 자연 속으로 또는 산 속으로 산보 나가보라고 하는 것은 파라독사들 중에서 새로운 말투 새로운 글투를 만드는 가장 흥미로운 영역이 젊은이 당신 자신의 노력하는 행동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나이가 바로 열여덟이다. 저항, 항거, 항쟁, 혁명은 기존의 입말을 쓰는 이들에게는 배제되고, 무화되고, 악마화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당신들의 삶에서는 새로운 삶의 영역이다. 이런 삶이 ‘셋’이라는 벗을 이룰 때, 세상의 변화는 하늘에서 번개가 치듯이 올 것이다. 그 번개는 한 번도 같은 모습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뿐이다. ‘셋’의 벗으로부터 각각의 연결고리에서 만나는 이들의 종합은 아홉인데, 평생을 살면서 아홉이 이어진 벙개가 이루어지는 날이 있을 때, 하늘의 번개와 같이, 땅에도 벙개가 실현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벙개도 번개처럼 과거의 어느 혁명과도 동일하지 않은 벙개일 것이다.
문명의 우월이 아니라, 문화의 창달은 벙개를 이루는 젊은이의 삶에 노력에서 일어 날 것이다. 2천 5백여년전에 중국의 공자가 열락(說樂)이라 한 이야기는 어느 종교의 파라독사보다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문화 또는 재창조라는 놀이는 여전히 가까이 있다. 당신으로부터 열락당으로... 이것이 낙천주의이다. 낭만주의도 비관주의도 허무주의도 문화론의 레크레이션에는 속하지 않는다.
(3:27, 56R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