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불교의 수행 전통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불교는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와 달리 수행을 하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현재 불교 수행은 각 종파에 따라 참선, 간경, 염불, 발원, 참회, 예불, 사경, 지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실천 되고 있다. 이러한 실천의 궁극적 목적은 수행을 통해 해탈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또한 불교수행은 단순한 깨달음이나 앎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바뀌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이 깨달음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정진하는 것이다.
“알에는 나비가 없으나 적절한 여건이 충족되면,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그 번데기에서 나비로 전환되듯이”
알에서 나비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치듯이, 중생으로부터 깨달은 자(아라한)가 되기 위한 과정(교육)이 필요하다. 그것이 ‘①파리얕티, pariyatti(교학, 배움) ② 파티팥티 paṭipatti(수행, 도닦음) ③ 파티웯떠paṭiveddha(꿰뚫음, 통찰, 통찰지)’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처음에 ‘pariyatti(교학, 배움)’를 다루고 있다면 제3편은 7가지 항목(4념처, 4정근, 4여의족, 5근, 5력, 7각지, 8정도)으로 이루어진 37보리분법을 중심으로 paṭipatti(수행, 도닦음)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전제가 초기불교에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다 알아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까 이런 여러 고민이 생길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초기불교 바람이 분다’라고 하여 초기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초기불교에 대한 순서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사찰에 가면 불자는 삼귀의를 한다.
붓당 사라낭 갓짜미 (부처님께 귀합니다.)
담망 사라낭 갓짜미 (가르침의 귀합니다.)
상강 사라낭 갓짜미 (승가의 귀합니다.)
이것이 불교를 받아 드리는 첫 걸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분이 ‘불자’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사에서 제일 처음 삼귀의 한 사람은 야사엄마와 아빠로 기록되어 있으며, 2500년 이상 전통적으로 전래되었다. 이 과정에서 삼귀의가 왜 중요한가를 이해한다.
삼보(三寶-Ti ratna)
붓다(Buddha)
부처님이라는 말은 붓다(Buddha) 곧 '깨달은 사람(覺者)'을 뜻한다. 초기불교에서 28분 의 부처님 명호가 나온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태어나신 부처님들이 무량하다고 하지만 초기경전은 석가모니 고타마 붓다께서 수기 받은 부처님으로 되어 있다.
스리랑카 등 상좌부불교 국가는 사찰마다 28분 부처님을 모신다. 관념수행 방법 가운데 붓다누싸디(부처님관찰 수행)이 스리랑카에서 핵심이다. 그래서 불자들이 항상 ‘나모 붇다야, 나모 붓닷싸(부처님께 귀합니다.)’라고 항상 칭한다.
다음은 부처님께 귀의하기 전에 ‘부처님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붇다에 대한 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자료는 5부 니까야이다. 붇다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대화는 ‘앙꿋다라니까야 살라경’에서 나온다. 붓다가 세타와(setavya) 도시로 걸어갈 때 외모교육에 뛰어난 분을 만났다. 그는 도나 브라흐문이었다. 붓다의 발자국을 봐서 이분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브라흐마나: 당신은 신입니까?
부처님: 신이 아니다.
브라흐마나: 간다르바 입니까?
부처님: 간다르바가 아니다
브라흐마나: 당신 악마입니까?
부처님: 악마가 아니다.
브라흐마나: 당신 사람입니까?
부처님: 사람이 아니다.
브라흐마나: 그럼 누구십니까?
‘브라마나여, 나는 이제 신, 간다르바, 악마, 사람도 아닙니다. 이들이라면 번뇌, 욕심, 성냄과 어리석음 등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저는 번뇌를 벗어났습니다.’ 붓다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비유를 하신다.
이와 같이 브라흐마가 생각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붓다는 자기를 붇다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올바르다고 한다. 번뇌가 남아있는 한 신으로 태어나거나, 하늘을 나는 간달바가 되거나, 야차로 가거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번뇌가 다하였고 파괴되었고 질기가 말라버렸다. 마치 아름다운 백련이 물에 젖지 않은 것처럼 나는 세상에 젖지 않나니 브라하문이여, 그럼으로 나는 부처이니라.
이와 같이 브라흐마가 생각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붓다는 자기를 붓다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올바르다고 한다.
또한 붓다는 자신이 특이한 인간이라고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우다이 존자 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생각해 보면 초기불교에서 붓다는 항상 인간으로 설명된 것이지만 신앙으로는 보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붓다는 물질적인 몸으로 병들고, 아프고, 괴로운 여러 고통을 느꼈다. 붓다를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쌍윳다 니까야』에서 붓다는 아플 때 준따 존자에게 칠각지(七覺支: bojjhanga)에 들어서 병이 났다고 한다. 붓다 몸은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다.
또한 『쌍윳다 니까야』에서 붓다는 자신이 신앙적·인간적 모든 방해를 벗어났다고 한다. 또 다른 특징은 제자들이 붇다에게 의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상가[승가]를 이용하지 않는다. 상가들이 나를 의지해야 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고 한다.
붓다는 ‘나에게 스승은 없다. 신, 인간인 가운데 비슷한 분도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이 붓다는 모든 것을 초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뜻하는 것은 신이나 구원자가 된 것이 아니다. 또한 다신교 (Pantheism)가 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니까야에서 나타난 붓다의 특징은 ‘God-Godhead’가 아니고 모든 것에 벗어난 훌륭한 인간이다.
이란에서 살았던 ‘Abul Atahiya’이란 작가가 붓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인들 가운데 고결한 사람을 보고 싶으면 스님 옷 입었던 부처님을 보세요.
그분은 인간들 가운데 가장 성스럽고 훌륭한 분입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붓다의 모습은 이런 과정에서 부처님이 인간이라는 명칭을 쓰지만 인간계를 초월한 존재로 나타난다. 이는 붓다의 십력으로서『맛지마 니까야』에 나타난다. 붓다의 십력(dasa-bala)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힘을 말한다.
1.처비처지력(處非處枝力) :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판별한다.
2.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여실하게 안다.
3.선정해탈지력(禪定解脫智力) : 사선(四禪), 팔해탈(八解脫), 삼삼매(三三昧), 팔등지(八 等持) 등을 여실히 안다.
4.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 중생의 근기(根機) 고하우열(高下優劣)을 여실히 안다.
5.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경향(意慾傾向)을 여실히 안다.
6.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안다.
7.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 어떤 수행에 의해 어떤 도가 나가는가를 여실히 안다.
8.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 중생의 숙명을 여실히 안다.
9.사생지력(死生智力) :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안다.
10.누진지력(漏盡智力) : 일체의 번뇌(漏)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중생심(衆生心)의 갖가지 번뇌, 성향, 수행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지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의 특징에 대한 관찰 수행
붓다와 담마, 상가에 대하여 항상 생각하는 것이 수념 (隨念, ānussati-아눗사띠) 이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하여 항상 생각하는 것을 ‘붓다눗사띠 (buddhānussati , 불수념)라 하고, 담마에 대하여 항상 생각하는 것을 ‘담마눗사띠 (dhammānussati , 법수념)’라 한다. 상가에 대하여 항상 생각하는 것을 ‘상가눗사띠 (saṅghānussati , 승수념)’라 한다.
부처님은 『앙굿따라 니까야』 「한 가지 법 품」에서 다음 과 같이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하나에 법이 있어, 그것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절대적인 역겨움과 탐욕이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깨달음 열반을 얻게 한다.
무엇이 그 하나의 법인가? 부처님에 계속해서 마음 챙김(붓다누싸띠)을 하는 수행이다. 비구들이여, 이 하나에 법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절대적인 역겨움과 탐욕이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깨달음 열반을 얻게 한다.‘
위 경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붓다의 특칭에 대한 관찰이 초기불교에서 나오는 수행방법이다. 특히 스리랑카에서 예전부터 알려진 수행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스리랑카의 문화가 융성했을 때, 마라(Mara,악마)에 의해 만들어진 붓다의 조각상을 경배하는 푸싸데와(Phussadeva)라는 승려가 살고 있었다.
그 승려는 붓다의 동상을 경배할 때마다, 강한 환희가 일어났다. 그는 그 환희를 지켜보다가 무상, 고, 무아를 깨닫고 아라한이 되었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기에 이해를 돕고자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푸싸데와 장로는 아침에 탁발을 하기 전에 매일 사원 주변에 있는 큰 불탑에 가서 그 곳 주위를 청소하곤 했다. 청소가 끝나면, 그는 불탑의 기반에 앉아서 붓다의 특성을 회상하는 붓다누사티 수행을 하였다. 어느 날, 그가 청소를 마치고 탑 아래 앉아서 붓다누사티를 수행하고 있을 때, 늙은 소 한 마리가 그 탑의 기반에 올라 왔다. 그 소는 기반 위를 돌아다니며 그 위에 냄새 나는 똥과 오줌을 누었다. 푸싸데와 장로는 다시 불탑의 기반을 청소했다. 하지만 탁발을 하러 가야할 시간이 되었기에 그는 더 이상 붓다누사티 수행을 할 시간이 없었다. 다음 날, 커다란 원숭이가 기반에 올리와서 똥과 오줌을 누며 더럽히면서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시 푸싸데와 장로는 불탑의 기반을 청소해야만 했고, 더 이상 붓다누사티 수행을 할 시간이 없었다. 세 번째 되던 날, 아주 추한 사람이 불탑의 기반 위에 올라 왔다. 비록 푸싸데와 장로가 그 곳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와 같이 추한 사람을 보지를 못했기에, 그의 마음에는 이 추한 사람은 마라(Mara,악마)가 위장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그 사람을 똑 바로 쳐다보며 물었다.’당신은 마라인가?’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에 마라는 대답했다.’그렇다. 나는 마라다’. ‘마라, 나는 당신을 만나서 대단히 기쁘오.’라고 장로는 말했다. 그는 마라의 출현에 화를 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실제 푸싸데와 장로는 마라를 만나서 대단히 기뻤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읽은 경전에 그대는 붓다를 여러 번 만났고, 그리고 아주 강력한 힘을 지녔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라, 나는 그대에게 청하니, 나를 위해 붓다의 모습을 만들어 주시오.’ 마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의 모습을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똑 같지는 않을 것이다.’ 마라가 붓다의 모습을 만들었을 때, 푸싸데와 장로는 커다란 기쁨이 넘쳤다. 그는 앉아서 마라가 만든 붓다의 모습에 경배를 올렸다. 그는 붓다의 모습과 특성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했다.
‘비록 마라는 번뇌로 가득 찼지만, 그는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 난 붓다의 이런 경이로운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붓다는 실로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계신다. 붓다는 진정 경이로운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환희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서 그가 이런 환희를 알아차림을 두고서 지켜보자, 바로 그 순간 그는 아라한이 되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붓다의 몸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아하기에 강력한 힘을 지닌 마라 조차도 그 모습을 정확히 만들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붓다의 몸이 우아함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붓다누사티를 실천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붓다의 우아한 몸을 경배하고 존경함으로 가득 찰 때, 환희는 일어날 것이다.
또한 붓다만 가지고 있는 9가지 공덕(특칭)이 있다. 붓다의 9공덕을 하나 하나 관찰함으로 붓다눗싸띠를 하게 된다.
1) 응공, 아라항(Araham) : 모든 번뇌로 부터 벗어난 분. 번뇌의 적을 모두 죽인 분. 번뇌와 번뇌가 있을 때 나쁜 습관을 모두 제거하신 분, 숨겨서도 악행을 하지 않았다.
2) 정변지, 삼마 삼붓도(Samma Sambuddho) : 모든 법을 바르게 직접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3) 명행족, 위짜짜라나 삼빤나(Vijjacarana Sampanna) : 지혜와 수행을 다 아시는 분. 지혜와 덕행을 함께 갖추신 분
4) 선서, 수까또(Sugato) : 잘 가시는 공덕을 지니신 분. 붓다가 가시는 것은 깨끗하여 허물이 없어서 적당 하시다. 적당한 성스러운 도로서 가시기 때문에 닙빠나(열반)에 집착 없이 가신다.
5) 세간해, 로까위두(Lokavidu) : 세간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
6) 무상사, 아눗따로(Anuttaro) : 위 없으신 분. 붓다보다 공덕이 더 큰 이는 없기 때문이다. 붓다의 지계 공덕보다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선정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지혜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번뇌의 벗어남의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자비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7)뿌리사 담마 사라티(Purisa Dhamma Sarathi) : 어리석은 자를 으뜸 되게 잘 다스리는 분. 거친이를 제도하여 잘 살게 하시는 분
8) 조어장부, 삿타데와마누상(Satthadevamanusam) : 모든 천인과 인간의 스승이신 분
9) 불, 붓도(Buddho) : 깨달으신 분. 존재의 실상을 깨달으신 분
10) 불세존, 바가와(Bhagava) :세상에서 가장 존귀 하신 분
담마(Dhamma)
담마(法)는 불교에서 다양한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45년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법이란 나쁜 곳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 주고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간다는 뜻이다. 법구경에서는 법을 따르는 자 법이 보호해 준다고 한다.
[쌍윳다 니까야]에 의하면 붓다는 당신이 알게 된 것에서 중생들을 위해 필요한 부분만 가르쳤다. 즉 열반에 필요한 것만 가르친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 속에서 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조가비처럼 안과 밖에 양적이 하얗다’고『디가 니까야』에서 언급된다.
『맞지마니까야』에 의하면 부처님은 법을 수행을 위하여 설하고 멈춤을 위하여 설하고 건너감을 위하여 설하고 열반을 위하여 설하신다.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알라와까 경」에서 ‘법을 잘 닦아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믿음이 여기서 인간의 으뜸가는 재화이며
법을 잘 닦아야 행복을 가져오느니라.
진리가 참으로 가장 뛰어난 맛이며
통찰지를 [구족하여] 살아야 으뜸가는 삶이라 부르느니라.”
주석서와 복주서 의 “‘법을 잘 닦는다.’는 것은 보시와 지계와 수행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은 이 법을 닦으면 인간의 행복(금생의 행복)과 천상의 행복(내생의 행복)과 궁극적으로는 열반의 행복(궁극적 행복)을 가져온다는 뜻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가운데서 보시(dāna)와 지계(sīla)는 인간의 행복과 천상의 행복을 얻는 수단이며, 수행 즉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되고 팔정도로 귀결되는 도닦음은 궁극적 행복을 얻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 셋은 대승불교의 육바라밀과도 배대 되는 것이다.
『대반열반경』에 나타나는 유명한 가르침은 부처님의 법을 강조하며, 법을 의지하여 머물러야 한다고 하셨다.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
앙굿따라 니까야『우루웰라 경』에 나타나는 세존의 성찰이다.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에 아직 아무에게도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과연 나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를 두고 진지하게 사유하셨다. 또한 『우루웰라 경』에서 세존께서는 자신이 의지할 자를 찾아서 신들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사문, 바라문을 포함한 신과 인간의 모든 세상과 모든 존재를 다 살펴보셨지만, 세존께서 구족한 계(戒)와 삼매(定)와 통찰지(慧)와 해탈을 보다 더 잘 구족한 자를 그 누구도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존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지으신다.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리라.”
붓다께서 최초로 법을 전개하시고 팔정도를 중심으로 중도를 천명하신 가르침을 『초전법륜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法을 근본으로 하셨다. 그리고 “법을 의지하여 머물러라.”고 하는 이러한 부처님의 태도는 부처님이 전법과 교화를 하신 45년간 내내 “법을 의지처로 삼고(法歸依), 법을 섬으로 삼아라(法燈明).”는 가르침과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自歸依)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自燈明).”는 가르침으로 이어지고 있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나를 보기 위해서 법을 행하라’는 붓다 말씀에 의하면 법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의『왁깔리 경』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썩어 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왁깔리여, 法을 보는 者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法을 본다. 왁깔리여, 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法을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에 의하면, 불자의 스승은 법과 율이라고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대반열반경』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난다여,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열반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반열반하고 계시지 않는 지금을 사는 우리가 뼈가 시리고 가슴이 사무치게 존중하면서 배우고, 궁구하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법(dhamma)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9가지 공덕(특칭)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9가지 공덕을 관찰하는 것이 ‘담마눗사띠’이다.
10. 스와카또 바가와다 담모 – 번뇌를 소멸하도록 바르고 훌륭하게 설하신 법,
11. 산딧티꼬- 수행하면 지금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법
12. 이깔리꼬 – 때와 기회를 기다리지 않아도 지금 당장 이로움을 주는 법
13. 에히빳시꼬- 와서 보라고 수행하도록 초대하고 권할 만할 법
14. 오바네이꼬- 자기 안에 머무르도록 수행하고 소지할 만한 법
15.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 법을 알고 본 여덟 부류의 지혜로운 성인들만이 각자 자신의 법으로만 알고 누릴 수 있는 가장 높고 고귀한 법
상가(saṃgha)
상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라 실천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상가의 정의는 ‘상한냐띠띠 상고(samhaññatiti saṅgho)’이다. 번뇌(탐, 진, 치)를 괴롭히고 죽였다는 의미로 쓰인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처음 법을 가르치는 대상자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 때 여러 스승님들을 생각하지만 그분들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신이 고행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5비구를 생각하신다. 안냐 꼰단냐, 왑빠, 받디야, 마하나마, 앗싸지 라는 다섯 비구 중 안냐 곤단냐가 석가모니 승단에 첫 스님이 되었다. 그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초기불교는 ‘마하상가’ 전통으로 지켜 왔다. 과거, 현재, 미래 사바세계 스님들이 ‘마하상가’로 해단하는 무량수 승단이다. 개인적으로 보시하는 거 보다 마하상가에 보시 올리며 무량공덕을 얻는다. 열반의 실현(nibbāna-sacchikiriyā)은 상가에서 최상의 목적지 이다.
상가는 경전에 두 가지 종류로 언급된다. 첫째 삼무띠 상가는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면서 매 순간 번뇌와 전쟁하는 삶을 살고 있다. 아무나 삼무띠 상가가 될 수는 없다. 비구, 비구니가 될 수 있는 율장에 따르는 계율과 계단이 있다. 거기에 맞게 되는 상가이다. 둘째 빠라맛타 상가이다. 이것은 출가자이든 재가자든 상관없이 네 가지 도와 과, 열반을 깨달은 성인(聖人)들의 모임이다.
상가에 대한 관찰이 상가눗사띠 라고 한다. 청정도론에서 상가의 공덕을 숙지하면 어떤 이익이 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실천 수행을 잘하는 승가의 공덕을 숙지하면 수행자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계를 의지하여 올곧아진다. 그러면 올곧은 마음이 장애들을 억압할 때 과정에 따라 어떤 한 순간에 선(禪)의 구성요소들이 일어나게 된다. 승가의 공덕은 심오하기 때문에 상가눗사띠 수행으로는 본삼매에 이르지 못하고 근접삼매에만 이르게 된다. 이렇게 상가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 수행자는 승가를 존중하고 승가에 순종한다. 그리고 믿음이 깊어진다. 희열과 기쁨이 커지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상가와 함께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상가의 공덕을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을 때 그의 몸도 상가가 운집한 포살 당처럼 예배를 받을 수 있다. 그의 마음은 승가의 공덕을 증득함으로 항상 열반을 향하여 있다. 계를 범할 대상을 만날 때도 마치 면전에서 승가를 대하는 것처럼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나타나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승가의 공덕을 계속 숙지하면서 수행하고 있으면 이번 생에 수승하게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다음 생에 선처로 갈 수 있다.
16. 수빠띠빤노 바까와또 사와까상고 – 탐, 진, 치를 제거하는 계, 정, 혜를 훌륭히 수행하는 상가
17. 우주빠띠빤노 바까와또 사와까상고- 몸과 입과 마음을 곧고 바르게 수행하는 상가
18. 냐야빠띠빤노 바까와또 사와까상고 – 고통의 소멸처인 닙바나를 위해 바르게 수행하는 상가
19. 사미찌빠띠빤노 바까와또 사와까상고- 다른이들의 존경에 합당하도록 수행하는 상가, 20. 야디당 짯따리 부리사유가니 앗타 뿌리사뿍갈라 에사 바까와또 사와까상고– 네 쌍으로 여덟 종류의 합당하도록 수행하는 상가
21. 아후네이요- 멀리서 가져온 귀한 보시물을 올리고 예경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상가
22. 빠후네이요- 소중한 손님들을 위해 각별히 준비 해둔 좋은 공양물을 보시 받기에 합당한 상가
23. 닥키네이요- 다음 생의 이로움을 믿고 기대하며 올리는 보시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상가
24. 안잘리까라니요- 이로움과 행복을 믿고 기대하며 두 손 모아 예경 올릴 만한 상가
25. 아눗따랑 뿌냑켓땅 로깟사- 온 존재들이 선업의 씨를 심기에 더 없이 좋은 텃밭인 상가
위 상가에 대한 10가지 공덕을 자주 관찰 하는 자는 무량한 공덕을 얻을 뿐만 아니라 열반을 성취한다. 청정도론은 ‘성스러운 상가에 덕을 계속해서 생각해야한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한테 축복이 함께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 · 법 · 승 삼보에 대하여 늘 생각하고 있으면 그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로 부터 벗어날 것이다.’고 한다. 삼보에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 불자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불교는 반드시 믿는 것만을 올바른 생각이라 하지 않고, 왜 믿어야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을 강조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불 · 법 · 승은 24가지 공덕을 가지고 있어서 믿고 따르는 것이 금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삼보에 확실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 어떤 문제도 신심이 흔들지 않는다. 우리가 삼보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존재에 의지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많은 오해를 일으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