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사람 : 예수와 사람의 아들의 수수께끼(월터 윙크)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제4부 참사람 : 부활절 이후의 말씀들
바울의 편지들 속의 참사람
바울은 "사람의 아들"이란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1) 여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의 편지를 읽을 이방인(비유대인) 독자들은 그런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독자들은 그런 표현이 매우 서툴고 골치 아픈 그리스어 번역이라고 볼 뿐만 아니라, 그 말이 팔레스타인 상황 속에서 갖는 의미와는 친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 참사람이라는 원형적 실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안트로포스(anthropos)'라는 단어를 사용한 방식이 참사람이란 뜻과 마찬가지인 것을 보아 분명하다. 키르쏘프 레이크와 포우크스 잭슨이 지적한대로, 바울은 "그리스어에 너무 정통해서, Barnasha라는 아람어('사람의 아들'이란 뜻)을 ho huios tou anthropou[그리스어로 '그 사람의 그 아들'이란 뜻]라고 차마 그런 불가능한 번역을 못하고, 그 대신 ho anthropos라는 관용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바울과 또한 후대의 신약성서 기자들이 "사람의 아들"이 차지하는 어의학적 영역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은 편지들 속에 나타난 "사람의 아들"과 병행하는 구절들의 수로 알 수 있다;
누가 12:8-"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비교; 로마서 10:9-"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누가 6:22-"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비교; 베드로전서 4:14-"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마가 2:10-"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비교; 에베소서 1:7-"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가 10:45-"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비교; 에베소서 5:2과 디도서 2:13-14-"사람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대체됨, 갈라디아 2:20에는 "하느님의 아들"로 대체됨. 디모데전서 2:5-6에는 정확히 같은 표현 "곧 사람(anthropos)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 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주셨습니다."
이에 더하여, 바울은 참사람의 집단적인 차원을 옹호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발전시켰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삶이라는 이미지다.
A. 속사람
바울과 그의 동반자들은 '안트로포스(anthropos)'라는 단어를 8번 정도 사용하였는데, 이는 복음서들에서 "사람의 아들"이란 말에 연속될 뿐만 아니라, 나중에 영지주의자들이 좋아한 말을 창조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엡 4:24). 인간 존재의 핵심에서 이처럼 철저하게 새로운 내향성-역사 속에서 앞을 향해 살아가는-에 대한 인식은 그 시대에 이룩한 가장 중요한 혁신적 사상 가운데 하나다. 이런 인식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개인의 인격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의견 속에서 상세히 설명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 속에서는 이런 인식이 아직 새로 등장하던 직관이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롬 6:6).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골 3:9-10). "그 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엡 3:16-17). 이 마지막 본문은 이런 속사람, 즉 베드로전서 3:4에서 "당신들의 속에 감추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 것이 발전 중임을 보여준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똑같은 사상이 에베소서 4:13에,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참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라고 표현되었다.
바울이 사람의 아들을 속사람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마태 9:8에서 거꾸로 제공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마태가 중풍병자를 고치는 이야기를 끝내면서, "무리가 이 일을 보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런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라고 한다. 시리아어 번역본에서는 여기에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인 내향적 성격은 심지어 사회적으로 더욱 급진적이다. 시편 80편과 다니엘서 7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집단적 참사람으로 언급했다. 에베소서는 이제 그것을 모든 인간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한다. 이리하여 에베소서 2:15-16에서는 그리스도가 "이 둘[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15:47-49에서는 제1 아담과 제2 아담을 비교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 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 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여기서 후자는 의심할 바 없이 복음서들의 승천한 참사람을 암시한다. "두 번째 아담"은 물론 "사람의 아들"의 익살적인 표현이다.
새로운 아담=두 번째 아담=아담의 아들=사람의 아들이라는 유형은 로마서 5:12-21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첫 번째 아담과 그의 타락한 상태에 통합되어 있거나, 아니면 두 번째 아담 및 구원받은 사람들과 친교를 이루고 있다. 바울보다 더 심오하게 "속사람"의 집단적 차원을 이해한 사람은 없다. 그는 그 속사람이 하나의 참사람으로서 인류를 품어 안고 있다고 보았다.
B. 그리스도의 몸
이들 속사람, 새로운 하늘의 혹은 영적인 인간, 혹은 참사람에 대한 몇 가지 언급들은 여러 차례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로 보충되고 있다. 이들 말씀들 속에는, 역시 참사람의 집단적 차원이 뒷받침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고전 12:27). 요한1서 3:2은 에베소서 4:12-13에 메아리를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 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고전 15:49).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그저 여러 개인들의 오합지졸 같은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유기적인 통일체, 한 영역, 현재적 존재의 차원, 생성되어가는 질적 특성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인간화시키는 체제와 연루되어 공범이 되는 일, 가령 지배체제에 의해 파괴된 법률제도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른 분, 곧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 분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롬 7:4). 전에는 하느님의 약속에서 배제되었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이다"(엡 3:6). 믿는 사람들은 유기적으로 서로 잘 들어맞는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그 지체들이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롬 12:4-5). 한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인종적인 결과와 기관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 12:13). 이리하여 서로 다른 지체들은 전체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서로 다른 역할들을 하도록 요청된다(고전 12:27-31). 인간의 계획을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참사람이 집단적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들만으로는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940년대에 베를린에서 비유대인들에 의해 강제 추방에서 구출된 유대인들에 대한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한 사람의 유대인을 구출하기 위해 평균 12명의 비유대인들이 협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사회적이다. 개성화(자기실현)는 개인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한 교회가 아니며, 단지 한 인류가 아니라 한 몸이다.
에두아르트 슈바이처는 묻는다; 어디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을까? 요한은 포도넝쿨과 가지들이라는 집단적 이미지를 발전시켰으며(요한 15:1-11), 또한 예수의 몸이 성전을 대체한다는 생각(요한 2:21)을 피력했는데, 요한은 바울과는 독립적으로 이런 주장을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믿는 사람들을 모두 그의 존재 안으로 통합한다는 바울의 사상은 초대교회의 다른 곳에서도 다른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포도넝쿨이란 주제는 시편 80:16에서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사람의 아들로 표현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에 대한 집단적 차원은 요한과 바울이 발전시키기 이전에도 깊은 전역사(prehistory)가 있는 것이다.
C.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똑같은 육신적 관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암시된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롬 3:24),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세례를 받으며(롬 6:3), 하느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으며(롬 6:1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롬 6:23). 이제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가는데(고전 1:4),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 생명의 근원이다(고전 1:30). 모두가 아담 안에서 죽듯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고전 15:22). 이런 말씀들이 여러 번 나온다. 그리스도 안으로 통합되는 것은 너무도 생명유지에 필요하기에, 믿는 사람들은 이미 다른 차원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 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엡 2:6). 믿는 사람들은 이미 참사람의 실재에 참여하고 있다.
개인주의적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에 대한 그런 유기체적 이해를 진지하게 파악하기 위한 범주들을 사실상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이 살아 있는 존재인 그리스도 속으로 통합됨으로써 "구원"된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 속에 참여함으로써 살아간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남김없이 자기(the Self)가 되었다.
동시에, 개인은 이런 집단적인 그리스도를 한 사람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로 경험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고 계신다"(고후 13:3). "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후 13:5, 여기 "당신들"은 공동체와 개인들을 포함한다). 믿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성령의 내주하는 성전이다(고전 3:16; 6:19; 고후 6:16). 바울은 '안트로포스(anthropo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그의 해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 우리의 몸을 새로운 내적 성전으로 삼아 옛 외적 성전을 대체하는 것 등, 이것들보다 참사람의 개인적/집단적 면모들을 더욱 잘 나타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개인적/집단적 실재는 천국이나 죽은 뒤의 삶을 위해 유보해두기보다는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
1) 이 장에서 나는 "바울"을 바울 자신은 물론 바울을 따르는 자들도 표현하기로 한다. 나는 에베소서는 그의 추종자에 의해, 그리고 골로새서는 반반의 가능성(바울 자신 혹은 그의 추종자들)으로 써진 것으로 여긴다. 나는 목회서신들(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등 3개 서신들)은 포함하지 앟는데, 그것들은 나중에 바울 계통의 학자들이 쓴 것으로 바울의 정신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