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08
순조로운 죽음. 과연 그런 죽음이 있을까. 죽음 자체가 이미 순조로운 연속성을 끊어버리는 커다란 슬픔인데 그 슬픔과 단절 앞에서 순조로움을 찾는 것은 허망하다. 그러나 누구나 납득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는 죽음이라면 그나마 순조로운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먼저 죽고,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사람만큼 끝까지 살다 자연사하는 것. 그것이 순조로운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은 순서를 지키지 않는다.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사람보다 짧은 생을 살다 가는 경우도 많고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긴 생을 견뎌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 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분노를 느끼지만 그저 한탄하고 통곡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156명의 젊은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를 겪고 보니 더욱 그렇다. 이게 우리한테 진짜 일어난 일이었을까? 믿기지가 않는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을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60년 만에 다시 마주 선 그들
한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기록될까. ‘평생도(平生圖)’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평생도는 한 사람의 인생을 대표적인 몇 가지 의례를 중심으로 정리한 그림이다. 즉 돌잔치를 시작으로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回婚禮)까지의 기간 동안 인생의 마디마디에 일어난 큰 사건들을 그렸다. 예를 들면 혼례, 장원급제, 정승벼슬 등의 인생행로를 여섯 폭이나 여덟 폭의 병풍그림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평생도에 들어간 사건들은 크게 돌잔치, 혼례, 회혼례 등의 평생의례와 장원급제, 좌의정행차 등 관직생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관직생활 부분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사람들이 누리고 싶은 다섯 가지 복, 즉 오복(五福)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가르쳤다. 그중 수명, 부유함, 편안함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고 누리고 싶어 하는 복이다. 반면 남에게 선행을 베풀고 덕을 쌓아야 하는 유호덕과, 제명대로 살다 편안히 죽는 고종명은 그 이상이 너무 높고 다가가기 어려운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 귀(貴)와 다남(多男)을 넣었다. 이념이나 사상보다는 삶 속에서 직접 느낄 수 있는 복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장수하고 부자로 살며 편안하고 높은 벼슬에 올라 자식을 많이 낳는’ 오복 중에서 딱 한 가지만 고르라면 무엇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장수였다. 장수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단연 최고로 치는 복 중의 복이었다. 어느 정도로 살아야 장수했다고 생각했을까. 회혼수(回婚壽)였다. 결혼한 지 60년이 될 때까지 살아야 진짜 장수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결혼 60주년을 맞이한 노부부는 자손들과 친지들 앞에서 60년 전과 똑같은 혼례식을 올리면서 장수를 기념했다. 그 장면을 그린 것이 ‘회혼례도’이다. ‘회혼례도’는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평생도8폭병풍’ 중 마지막 그림이다. 전체 그림은 돌잔치로부터 시작해 혼인식, 삼일유가(三日遊街·장원급제자가 어사화를 꽂고 삼 일 동안 돌아다니는 행사), 한림겸 수찬행렬(翰林兼修撰行列·관원이 되어 백마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 관찰사부임, 판서행차, 정승행차, 회혼례로 끝난다.
‘회혼례도’의 구성은 회혼례가 치러지는 건물 내부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부감법으로 잡았다. ‘평생도8폭병풍’ 중 실내장면이 나오는 그림은 ‘돌잔치’와 ‘회혼례도’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실외장면이다. 큰 차일이 쳐진 대청마루 위에 초례청이 마련되었다. 혼례복을 입은 노부부가 혼례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섰다. 혼례상 뒤에는 모란병풍을 둘렀고, 앞에는 청화백자에 모란꽃을 꽂아 좌우를 장식했다. 혼례상 앞뒤로 붉은색의 초가 꽂힌 긴 촛대가 놓여 있다. 나이 든 신부는 붉은색의 화려한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썼다. 나이 든 신랑은 사모관대를 하고 목화를 신었다. 회혼례에서는 아들과 사위, 며느리와 딸들이 중방과 집사, 수모가 되어 혼례를 진행한다. 대청마루에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자손들일 것이다. 여인들 역시 붉은색이나 남색 치마에 흰색이나 노란색 저고리를 입고 족두리를 써서 축제분위기를 돋운다. 남자들은 대부분 검은색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다. 방안에 서 있는 여인들은 족두리를 쓴 것으로 보아 노부부의 자손인 듯하다. 마당에는 아낙네와 아이들이 서서 예식을 구경하고 있다. 대문 밖의 사랑채에는 이날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온 손님들이 앉아 있다. 하인들이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는데 정원에는 국화꽃이 만발했다.
회혼례가 치러지는 장소는 60년 전에 노부부가 혼례를 올린 곳이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6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고운 모습은 사라지고 두 사람 모두 백발이 되었고 허리도 구부정하다. 세월이 참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흘러가버렸다. 인생무상이다. 회혼례에서는 자손들이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리기도 한다. 자식들 또한 전부 성장하여 일가를 이루었지만 부모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일 뿐이다.
▲ 전 김홍도. ‘평생도8폭병풍’ 중 ‘회혼례도’. 비단에 색. 53.9×35.2cm. / 국립중앙박물관
오복 중 장수를 최고로 치는 이유
‘회혼례도’는 오복 중에서 최고로 치는 장수를 증명하는 그림이다. 회혼례는 자손들이 모두 무탈하고 관록이 풍성해야 치를 수 있기 때문에 장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60년 동안 온갖 복록을 다 누리고 살았음을 과시하는 작품이다. 벼슬한 사람이 회혼례를 맞이하면 임금으로부터 특별선물을 하사받는다. 옷과 잔치음식 그리고 방석과 지팡이 등 노인들에게 필요한 물품 등이다. 회혼례에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가친척과 지인들도 찾아와 축하를 건넨다. 그들은 병풍에 짤막한 시구나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어 축수를 기원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병풍을 만인병이라 한다. 장수하고 복록이 넘친 사람의 만인병에 축수 서명을 하면서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회혼례를 올릴 정도로 복 있는 사람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의 표현이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장수에 집착했을까? 그만큼 장수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의료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역병이나 천재지변, 가난이나 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태어나서 일 년을 넘기는 것도 힘들었다. 평생도의 첫 번째 그림이 돌잔치인 것만 봐도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인생이라는 긴 시간을 뚫고 지나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었겠는가. 일가친척들이 회혼례에 와서 서로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시를 지어 축원했던 것도 그 자리에 도착하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험난한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살아주었으니 박수를 보낸 것이다.
의도는 좋지만 평생도를 보면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우리 주변에서 건강하게 태어나 돌잔치를 치르고 성년이 되어 혼례를 올린 다음 장원급제를 하고 고위직공무원을 두루 거쳐 명예롭게 은퇴하고 백년해로를 하는 등 오복을 누린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평범한 사람의 ‘라이프 사이클’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건강하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자식이 속을 썩이고, 자식들이 잘되면 노후가 걱정되는 등 사람들은 누구나 남에게는 말 못할 고민들을 한 가지씩은 품고 산다. 단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만 좋아 보일 뿐이다. 만약 단 한 가지의 부족함도 없이 완벽하게 다 갖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 자체가 선물인지조차도 모르고 살 것이다. 결함이 있어야 채워지는 것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성희는 ‘조선후기 평생도 연구’(2001)에서 “평생도가 평범한 인간의 일생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유교사회에서 사대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부귀한 일생을 형상화해낸 것”이라고 정의했다. 현존하는 여러 폭의 평생도가 거의 비슷비슷한 패턴을 보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평생도는 사람의 인생에서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짜깁기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평생도는 한 인물의 사실적인 기록이라는 실증적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대신 자신과 자손들의 인생에 좋은 일들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길상적인 염원을 담은 그림이라는 해석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험하고 힘든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꽃길만 걷기를 바라는 축원이 담긴 그림이다. 그 축원은 역설적으로 인생길 위에는 꽃길보다는 자갈밭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 조건을 알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비록 평생도의 사건들이 한 사람의 생애에서 전부 실재했던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회혼례도’를 제작했던 마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회혼례는 ‘자손들이 모두 무탈’하고 관록이 풍성해야 치를 수 있다. 만약 자손을 먼저 보낸 부모라면 결코 치를 수 없었을 것이니 과연 몇 사람이나 회혼례를 올리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조선시대가 아닌 지금 다시 하게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