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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오재집(玉吾齋集) 송상기(宋相琦)생년1657년(효종 8)몰년1723년(경종 3)자옥여(玉汝)호옥오재(玉吾齋)본관은진(恩津)시호문정(文貞)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의 문인
玉吾齋集卷之十八 / 附錄 / 神道碑銘 幷序 [右議政李宜顯撰] *李宜顯 1669 1745 龍仁 德哉 陶谷, 陶叟 文簡
盖當我肅廟之世。玉吾齋宋公。以淸名雅德。爲一時領袖。及上登遐。兇賊猖獗。又力扶宗社。謫窮海以卒。終以誠節著。易曰。王臣蹇蹇。匪躬之故。公眞其人哉。公諱相琦。字玉汝。恩津人。恩津之宋。遠有代序。有諱愉。當恭定王時。退歸湖西之懷德。築雙淸堂。隱而不仕。子孫世居之。五代而諱柟壽。林川郡守。壽秩嘉義。於公爲高祖。曾祖諱希遠。成均學諭贈吏曹參判。祖諱國銓。贈吏曹判書。考諱奎濂。禮曹判書。有恬退節。贈左贊成。諡文僖。贊成公聘安東金氏同知光燦女。淸陰先生孫也。公幼穎異尤悟。學夙就。人稱奇童。同春先生常曰。此兒名位。不在吾下。肅廟初年。羣兇竊祊。尤庵先生,母舅文谷金公。俱竄嶺海。公痛慨時事。斂跡自修。嘗於塲屋。能辦柴中行事。尤庵喜曰。吾門有人。贈二詩。期勉甚至。庚申更化。自懷德入京師。以詞賦屢魁頖試。名聲藹鬱。甲子。擢文科。汾崖申公晸擧手曰。得一大提學。當爲公朝賀也。分隷承文院。故事。玉堂參下。世號南床。其選尤艱。於公翕然無異辭。遂拜弘文著作。因地震上箚。請正君心講聖學恢言路節經費嚴宮禁警百僚。皆切中時病。是時。後宮張氏專寵。逆宗杭附之。深被上眷。私。有可憂之漸。箚中及之。歲首又箚。論陰陽消長之理。請益加儆於幽獨隱微親褻便嬖之間。盖有爲而言。冀悟上意。公文辭贍蔚。學識尤淹博。勉戒君德。誠實懇到。㝡得體。館中凡有封奏。輒屬草於公。羅良佐誣辱尤庵遠配。公論褫其黨之營救者。陞博士。有雷異。箚請恐懼修省。又以宮禁爲戒。趙師錫素有奧援。當置相。上四却其剡。以師錫爲相。李公秀彦疏論忤旨。時又越格。特除杭提擧。公並箚論之。上怒駕他事。特罷。薦入史局。爲檢閱。金公萬重。白師錫疑謗。上震怒。下吏迫問。促命承旨取公筆書傳旨。公抗聲曰。史筆不可與。上爲之動容。已還玉堂。師錫旣相。其徒表裏應和。盡逐文谷以下諸名公。以李公選最剛正而方出入銓長。擬尤噎媢。嗾鷹犬搏噬。公疏斥情狀。陞副修撰。時杭寵日盛。國言愈不可遏。朴公世采以銓長造朝。請毋偏厚以防疑。上不平。謂諸宗猜克流謗。命根究罪之。朴公遂出城。領相南九萬。右相呂聖齊入對。請勉留朴公。因及顯廟過待楨柟事。上怒轉激。栫棘兩相。褫朴公職。公連上四箚力爭。仍登對切諫。上終不聽杭辭。特遣史官傳批。公又疏言之。時嬖張得外勢益煽。坤極之傾在不日。公夙夜憂歎。隨事挫抑。及以張母乘轎事有過擧。公箚請焚轎。且言府夫人乘屋轎。而又許後宮母乘。等威無辨。昔袁盎却愼夫人坐。其敢以賤女擬府夫人乎。主時論者素嗛公。使其客旁緣前事。劾罷之。己巳。拜校理。是時。羣小外畏淸議。稍爲前却態。上惡其反覆而斥之。召入鑴,積黨。朝著一變。公亦革職。大歸鄕里。亡何。上廢中宮。立張氏爲后。尤庵,文谷。次第被禍。公悲憤忼慷。杜門流涕。越六年甲戌。上大悟。盡黜兇黨。復中壼位。雪尤庵,文谷寃。公始特除掌令。轉副校理,司諫。是時。希載謀害坤聖事發將誅。大臣南九萬。以希載張氏同氣也。曲護而脫之。公疏言上本源未澈。致士禍繼作。今宜痛加懲毖。且極論希載事。以爲不可戰萬口一辭之公論。使綱常斁絶。又言尹鑴誣逼慈聖。向來兇黨。敢爲伸理。請追褫其職。上優批。亟從鑴事。褒以所論正當。兼弼善移應敎。侍講筵。必反復陳戒。上頗傾聽。又箚陳十二條。縷縷千百言。明白剴切。掌令金灝請毁禁苑新構。上從而不改。公言之愈力。遂撤去。請令該曹抄選經術士。以備顧問。亦允。後來李公喜朝諸人。由蔭塗登簉。實公言爲之兆也。爲養出刺忠州。公以文學進。人疑不𡢃吏事。及任。劇剸理沛然。世亦信其通才。還爲輔德,校理。疏陳民事。歸重於立大本淸化源。嘉納。拜舍人。時請冊東宮於燕未準。罪其使。極擇他使。公膺命以往。屢製呈文。辭理明確。虜中亦稱好文字。快許之。復命。加階拜承旨。又祈養得韓山。諫臣言文雅負重望。不可去朝。遂拜大司成。公前在韋布。參斥尹拯疏。拯徒惎之。上怒罪其人。褫拜承旨,禮,吏二曹參議兼承文副提調。文苑極選也。出爲忠淸監司。嚴黜陟厲法禁。一道肅然。還爲大諫,大成,工,戶,刑三曹參議。俱不赴。辛巳。丁母夫人憂。制訖。拜承旨副提學。時有旱灾。疏言應天以實之道。仍陳恤民祛奢和朝廷數事。爲全羅監司。朝議惜其出。旋除吏議。俄擢拜大提學。自下大夫直掌文柄。國朝以後。不數人。公文望最高。羣議以爲非公莫可。遂擧授之。拜大司憲。端宗復位。撰進附纂實錄。上追思神皇再造恩。設壇以祀。有司請名以泰壇。公言不可借用古圜丘名。宜從禮經文。以大報爲號。上亟稱義理允叶。命以此定行。上寢疾久。疏請淸心省慾。仍戒庇護近習時不靖之輩。敲撼銓地。上頗入其言。又臺臣之好盡言者。爲人所構陷。旣經査辨。猶靳收錄。公疏言之。上責以嘗試。乃自劾下鄕。屢拜諸曹參判兩司長。俱辭。又懇辭文衡得褫。拜忠淸監司,淸州牧使。朝議盖爲便養。而以贊成公篤老不赴。間聞有傳禪之敎。將入朝爭繳。及還寢。疏陳治心之方。己丑。遭贊成公喪。去喪。拜工曹參判。轉都承旨大司憲。兼世子賓客。疏陳正心克己之要。以朱子訓爲證。上歎其至論。擢拜漢城判尹。是時。李墪以提學主試。旣承牌入闕。無端還出。夜深始到。人有見其歷抵擧子家者。而擧子果中第。因此衆口喧騰。諫臣疏斥。仍及試塲不嚴狀。公實以承旨參試。不免略陳墪事。適李公健命筵白試塲事。以丹鳳門不閉爲言。羣小遂以門事持。公謂承旨主檢察。諸疏蜂起。盖借此掩覆墪事。而亦恨公直陳。欲乘機擠之也。上燭其情嚴却之。慰諭公備至。拜吏曹判書。公困於羣咻。三辭而褫。自後凡九入銓。激揚淸濁。甄拔淹滯。善類恃賴。而異論者患爲己不利。輒肆中傷。不得久於位。文衡。纔褫旋授者再。褫則授提學。十數年不離詞垣。公爲文。積厚而用周。尤長於應卒。高文大冊。多口占立成。絶無瑕點。農巖金公。每推爲不可及。累掌國試。絀浮敦實。文風爲之丕變。間爲知敦寧,禮刑工判,參贊,都憲。用都監勞。加正憲。久管惠局。再長戶部。理賦裕民。裁度得宜。屢判金吾。斷讞以公。無骫法。景廟卽位。又用勞陞崇祿。周流舊踐。聖上進登。儲貳兼左賓客。拜判敦寧。景廟素有疾。至是命世弟聽政。朝廷齊籲請寢。久不許。又七請入對而見阻。公議諸大臣陳箚後。奉承翌日大臣聯箚上。而泰耈北門事出。賊鏡疏繼入。禍機焱發。公卽日出江上。兇徒以定策聯箚爲大案。先栫棘諸相。名以唯諾。一倂削黜諸宰而獨漏公。公陳疏自首。上批勿辭。保護東宮。居數日。拜兵曹判書。亡何。有妖䆠尙儉變。東宮至欲辭位。慈聖又下敎。辭旨痛切。泰耈,錫恒輩。獨見而封還。公聞變馳進城外。及是。不勝驚惋。詣闕肅命。見泰耈問之。耈噤不言。稱病徑出。公追聞慈敎凡再下。而耈輩諱之。乃抗疏曰。臣於罷出後。得聞慈敎中有締結宮人䆠寺者依律處置之敎。而賓廳啓。則曰一宮人締結䆠寺。此大違慈旨。慈敎旣云兩宮人。而終不囚推。任其自斃。有司之臣。顯有緩忽之意。臣切駭然。耈卽陳疏。倡謂矯誣慈旨。公批追下而有再次慈敎語。於是中外益知慈敎果再下。而爲耈,恒輩刪沒之也。耈疏旣上。賊臣弼夢,聖時等。繼請公極邊遠竄。配康津月餘。虎龍急書上侵不敢言之地。羣兇得此起大獄。魚肉廷紳。貳極有朝夕凜凜之憂。公恫念王室。悲不能自止。有詩曰。銅闈若得平安信。九死南荒定不寃。翌年夏。感疾。終於鵩舍。噫。立朝必主大節。論人當觀晩暮。夫士平居。大言激昂。臨變故際。畏懦縮朒。以至虧名喪義者滔滔焉。又其少時飭勵操秉。立名譽於世。年邁氣涸。隤弛放倒。判若二人者。亦多有之。此無他。無學以殖之也。若公蚤燭瑤華之睽。憂深黃裏之變。入告出箚。赤心炳然。及夫丑寅之交。事尤有不忍言者。乃以七袠之年。直當虓虎之吻。衛翼聖儲。蹈禍而不悔。雖摧敗困㞃於瘴海之濱。尙使兇肚逆膓。憚懾而不敢肆。數三載間。离明無霣。未必非公一疏之力。則折亂萌扶國祚之功。亦自有不可誣者矣。觀乎此則公之崇植彝倫。益勵晩節者。又何如也。噫其偉矣。然苟無其本。亦何以臻玆。盖公少居尤,春二先生鄕。自幼出入薰炙。優游涵泳於古聖賢書。所蓄固深厚。而修之於家。內行克備。二尊人淹疾積年。扶護諸節。久益不懈。居喪哀毁踰禮。幾滅性。以赴國哀。未及先妣喪。終身茹痛。每語必涕泣嗚咽。嗚呼。孝者百行之源。而公旣盡之。則無異乎終樹大節。如彼其毅然也。若其金精玉溫之質。氷淸蘗苦之操。恬雅和夷之度。明遠通透之識。固皆人人之所誦道。其大旣揭。姑可略也。公以癸卯六月一日卒。春秋六十有七。歸櫬公州三美川先塋下。與夫人合窆。後三年乙巳。爲聖上元年。特復公官爵。遣禮官賜祭于家。夫人漆原尹氏。生員宣績女。生一男五女。男必煥牧使。女適副率李夏坤,生員李天紀,尹得恒,副提學徐命彬,府尹閔通洙。必煥娶觀察使李寅炳女。生男載福,載禧。女適佐郞崔鳳興。李有子錫杓大司成,錫心次。李有繼子德容。尹有繼子選東。徐有子來修。閔有子百善。餘幼者。與外孫女適人者。不盡錄。銘曰。宋著東望。歷載悠綿。雙淸之後。赫世多賢。有偉宗伯。名駕疏錢。繄篤慶毓。公乃應期。溫溫其質。炯炯其儀。蚤整翽羽。人仰九苞。朝陽祥噦。百鳥驚啁。値時孔艱。羣陰塞霄。虹暈彗射。逼我坤倪。正色枝柱。若潦於堤。立名崇義。終始一說。陳忠格非。委曲痛切。寧考晩際。灼知三俊。詞苑粉黼。銓地衡準。纔卸旋任。首尾廿稔。士革浮華。朝絶倖冒。理財折獄。談笑而了。導窾批郤。入而無厚。寔謂通才。宜左宜右。聖王陟方。兇慝孽牙。宗祊大策。適爲禍囮。殺機蹶張。箝網橫羃。爰曁椓人。施手貳極。肆其舚舑。絶國之脉。公聞血涕。亟馳而入。瀝肝爲辭。以抗欻翕。翼儲是急。曾不竦戁。跡屈志颺。何有編竄。其氣嶷嶷。折彼之角。言雖不用。功在扶倫。晩途樹立。軼類超羣。盖公弱歲。二老是繩。維學之力。遇難奮騰。諒由培壅。匪適襲取。偉哉我公。允稱忠甫。末俗翦翦。義路如綫。叔譽之觀。非公誰歸。有來千禩。尙挹餘徽。鬱彼公山。有屹桓楹。銘以好辭。永俾世程。
옥오재집 제18권 / 부록(附錄) / 신도비명 병서 〔神道碑銘 幷序〕 우의정 이의현(李宜顯)이 지었다. [이의현(李宜顯)]
대개 우리 숙종(肅宗)께서 재위(在位)하던 때에 옥오재(玉吾齋) 송공은 맑은 명성과 전아한 덕으로 한 시대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흉한 도적들이 창궐함에 이르러 공은 또 종묘사직을 힘껏 지탱하다가 외진 바닷가로 귀양 가서 삶을 마쳤으니 끝내 참된 절의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주역》에 말하기를 “왕의 신하가 국가의 어려움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공은 참으로 그러한 분이시다.
공의 휘(諱)는 상기(相琦), 자는 옥여(玉汝),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멀리 대대로 가계가 이어져 송유(宋愉)는 공정왕(恭定王) 시기에 호서의 회덕(懷德)으로 내려와 쌍청당(雙淸堂)을 짓고 숨어 지내며 벼슬하지 않았으니 자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5대를 내려와 송남수(宋柟壽)는 임천 군수를 지내고, 수직(壽職)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렀으니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 송희원(宋希遠)은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조부(祖父) 송국전(宋國銓)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송규렴(宋奎濂)은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히 지내는 것을 좋아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찬성공이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동지(同知)를 지낸 김광찬(金光燦)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손녀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고 이해력이 뛰어나 학문을 일찍 성취하니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동춘 선생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이 아이의 지위가 내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숙종 초년(初年)에 여러 간흉(姦凶)들이 정권을 장악하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과 공의 외삼촌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공이 모두 멀리 외진 곳으로 유배되었다. 공이 당시의 일에 통분하여 세상에서 자취를 거두고 조용히 학문을 연마하였다. 일찍이 과장(科場)에서 시중항(柴中行)의 고사에 힘쓰니 우암께서 기뻐하며 말씀하기를 “우리 집안에 사람이 있구나.”라고 하고, 시 두 수를 주어 기대와 격려가 대단하였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자 회덕에서 상경(上京)하여 사부(詞賦)로써 여러 차례 반시(頖試)에서 장원을 차지하니 명성이 자자하였다. 갑자년(1684, 숙종10), 문과에 급제하였다. 분애(汾厓) 신정(申晸)이 손을 들어 올리면서 말하기를 “대제학 한 사람을 얻었으니 나라의 경사이다.”라고 하였고, 승문원(承文院) 벼슬에 임명되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례에 옥당(玉堂)의 참하(參下)는 세상에서 남상(南床홍문관 정자)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 뽑히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런데 공에 대해서 다들 흡족하게 여겨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홍문관 저작랑(弘文館著作郞)에 임명되었다. 지진 발생을 계기로 소차(疏箚)를 올려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할 것, 성인의 학문을 익힐 것, 언로를 넓힐 것, 국가 재정을 절약할 것, 궁중의 법도를 엄하게 할 것, 모든 관료들을 경계할 것 등을 청하니 모두 당시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당시 후궁 장씨(張氏)가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역모를 도모한 종실 이항(李杭)이 여기에 붙어 임금의 사랑을 많이 받아 걱정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있었으므로 소차에서 언급하였다. 연초(年初)에 다시 소차를 올려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이치를 논하고, 남들 모르게 홀로 있거나 편폐(便嬖)를 가까이 할 때에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고 요청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언급하여 임금께서 깨달으시기를 바랐던 것이다.
공은 문사(文辭)가 넉넉하고 학식이 더욱 해박하여, 임금의 덕을 권면하고 경계할 때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가장 적합한 체제를 얻었으므로 관각(館閣)에서 상소할 일이 있으면 곧 공에게 쓰도록 하였다. 나양좌(羅良佐)가 우암을 무고하다가 먼 곳으로 귀양 가게 되었는데, 공은 그 무리 가운데 나양좌를 구호하려던 사람들을 논박하여 교체시켰다.
박사(博士)에 올랐다. 우레가 치는 재이(災異)가 발생하므로 소차를 올려 항상 마음가짐을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수양(修養)하고 성찰(省察)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 궁궐의 엄격한 단속을 경계하였다. 조사석(趙師錫)은 본래 궁중(宮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재상을 결정할 때 임금께서 네 차례 천거(薦擧)를 물리치고 조사석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수언(李秀彦) 공이 소차를 올려 이 문제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렀고, 당시에 또 격식에 어긋나게 특별히 이항을 제거(提擧)에 임명하였다. 공이 소차를 올려 이 두 가지에 대해 논하니 임금께서 화가 나 다른 일을 핑계로 공을 파직하셨다.
사국(史局)에 천거되어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 김만중(金萬重) 공이 조사석이 의심스럽다며 비방하는 내용으로 아뢰니 임금께서 진노하여 옥리(獄吏)에게 취조하게 하고, 승지를 재촉해 공의 붓을 가져다가 전지(傳旨)를 쓰게 하셨다. 공이 대항하는 소리로 말하기를 “사관의 붓은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감동을 표하였다.
이윽고 옥당으로 돌아왔다. 조사석이 재상이 되자 그의 무리들이 안팎에서 호응하여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공 이하 여러 이름난 분들을 모두 쫓아냈다. 이선(李選) 공은 가장 굳세고 바른 분으로 당시 이조 판서의 의망(擬望)에 오르내리니 저들이 더욱 시기하여 매와 개 같은 앞잡이들을 사주하여 헐뜯었다. 공이 소장을 올려 그 실상을 들어 배척하였다.
부수찬(副修撰)에 올랐다. 당시 이항에 대한 총애가 날로 두터워져 공론이 분분하여 막을 수가 없었다. 박세채(朴世采) 공이 이조 판서의 신분으로 조정에 나가 지나치게 아끼지 말아서 의심을 막아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임금께서 탐탁지 않아 하며 여러 종친이 시기하여 비방을 퍼트린다고 판단, 끝까지 조사하여 처벌하라고 지시하였다. 박세채 공이 마침내 도성 밖으로 나갔다. 영상 남구만(南九萬)과 우상 여성제(呂聖齊)가 임금을 뵙고 박공을 힘써 만류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현종(顯宗) 때 이정(李楨)과 이남(李柟)을 지나치게 대우한 일에 대해 언급하였다. 임금의 진노가 더욱 격해져 두 재상을 위리안치하고, 박세채 공의 관직을 교체하셨다. 공이 연달아 네 차례에 걸쳐 차자를 올려 힘써 간쟁하였으며, 임금을 뵙고 간절히 간하였으나 임금께서 끝내 들어주지 않으셨다. 공이 사직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사관을 보내셔서 비답을 전하고, 공이 다시 소장을 올려 말하였다.
당시 총애 받던 장씨는 외세(外勢)를 얻어 더욱 선동(煽動)하였으므로 중전의 위태함이 코앞에 닥쳐왔다. 공은 밤낮으로 근심하고 한탄하며 사안에 따라 제지하고 억눌렀다. 장씨의 어미가 덮개 있는 가마를 타는 잘못을 저지르자 공이 차자를 올려 그 가마를 불사르자고 요청하였다. 또 “부부인(府夫人)이 덮개 있는 가마를 타는데 후궁의 어미가 탈 수 있도록 허락한다면 위계의 변별이 없게 됩니다. 옛날에 원앙(袁盎)은 신 부인(愼夫人)의 자리도 물리쳤는데, 감히 천한 여인을 부부인에게 비기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당시 여론(輿論)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본래 공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사람을 시켜 이전에 있었던 일을 핑계로 탄핵하게 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15), 교리에 임명되었다. 당시 여러 소인들은 밖으로 맑은 의론을 두려워하여 조금 물러서는 태도를 취하였다. 임금께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태도를 미워하여 물리치고,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의 무리를 불러들이니 조정이 크게 변하였다. 공도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금께서 중궁을 폐하고 장씨를 왕비로 세우셨다. 우암과 문곡은 차례로 화를 입었다. 공은 비분강개하여 문을 닫아 걸고 눈물을 흘렸다.
6년이 지난 갑술년(1694)에 임금께서 크게 깨달아 흉악한 무리들을 모두 내쫓고, 중전의 지위를 회복하였으며, 우암과 문곡의 원한을 씻어 주셨다. 공이 처음 장령(掌令)에 특별히 임명되었다가 부교리(副校理), 사간(司諫)으로 옮겼다. 당시 장희재(張希載)가 중전을 해치려고 모의한 일이 발각되어 장차 죽게 되었는데, 대신(大臣) 남구만이 장희재가 장씨의 형제라는 이유로 간곡히 보호하여 벗어나게 하였다. 공이 소장을 올려 “임금께서 본원(本源)이 맑지 않아 사화(士禍)가 잇달아 발생하니 지금 마땅히 통렬하게 징계하고 경계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장희재의 일을 자세히 논하여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공론과 맞서서 강상(綱常)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윤휴가 대왕대비를 무고로 핍박하였는데 지난번 흉악한 무리들이 감히 변명하였으니 청컨대 그의 관직을 추탈(追奪)하소서.”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넉넉한 비답을 내려 윤휴의 일을 의견에 따라 서둘러 처리할 것이며 의론이 정당하다고 칭찬하셨다.
필선(弼善)을 겸하고 응교(應敎)로 옮겼다. 강론하는 자리에서 임금을 모실 때에는 반드시 반복하여 경계할 것을 아뢰었는데 임금께서 경청하셨다. 또 소차를 통해 열두 가지 조목을 말씀드리니 자세한 수많은 말이 명백하고도 절실하였다. 장령 김호(金灝)가 금원(禁苑)에 새로 지은 건물을 헐자고 요청하였는데 임금께서 허락하셨으나 고치지 않았다. 공이 더욱 강력하게 말씀드리자 마침내 철거하였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경술(經術)을 갖춘 선비를 선발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자고 요청하니 임금께서 또한 윤허하셨다. 뒤에 이희조(李喜朝) 공 등 여러 사람이 음관으로 조정에 나온 것은 실상 공의 말이 계기가 되었다.
부모 봉양을 위해 충주 목사로 나갔다. 공은 문학으로 조정에 나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행정(行政)을 잘하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부임하여 많은 일을 신속히 처리하니 세상 사람들이 온갖 일에 능통한 인재라고 믿게 되었다.
조정으로 돌아와 보덕(輔德)과 교리(校理)가 되었다. 소장을 통해 백성의 상황을 아뢰었는데 큰 근본을 확립하고 교화의 근원을 맑히는 데 주안점을 두니 임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당시 청나라에 동궁(東宮) 책봉을 요청하였으나 비준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담당한 사신을 처벌하고 다른 사신을 엄격하게 골랐다. 공이 명령을 받고 가서 여러 차례 바칠 글을 지으니 말의 이치가 명확하였다. 오랑캐들도 좋은 문장이라고 칭찬하고 흔쾌히 허락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아뢰니 품계가 올라가고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 또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갈 것을 청하여 한산 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문장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으니 조정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간신(諫臣)이 말하므로 마침내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공이 이전에 벼슬하지 않았을 때 윤증을 배척하는 소장에 참여하였으므로 윤증의 무리들이 미워하였다. 임금께서 노하여 그들을 처벌하고, 승지와 예조ㆍ이조의 참의(參議) 겸 승문원 부제조 등에 임명하시니 문원(文苑)에서 엄격하게 뽑은 것이다.
외직으로 나가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 상벌을 엄격하게 하고 법령을 분명하게 적용하니 충청도가 질서정연하게 다스려졌다. 조정으로 돌아와 대사간(大司諫), 대사성, 공조와 호조와 형조의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신사년(1701, 숙종27)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승지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소장을 올려 하늘에 실질로써 응답하는 도를 말하였다. 그러면서 백성을 구휼하고 사치풍조를 제거하며 조정의 화목을 이루는 것 등 몇 가지 일에 대하여 아뢰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되었다. 조정의 논의가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므로 곧바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대제학에 뽑혔다. 하대부(下大夫)의 반열에서 곧바로 문형(文衡)을 맡은 일은 개국 이래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공은 문망(文望)이 가장 높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 마침내 공을 들어 임명한 것이다.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단종(端宗)이 복위(復位)되므로 《단종실록부록(端宗實錄附錄)》을 지어 올렸다. 임금께서 명나라 신종(神宗)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냈다. 유사(有司)가 이름을 ‘태단(泰壇)’이라 하자고 요청하였다. 공은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마땅히 《예경(禮經)》의 글을 따라 ‘대보(大報)’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임금께서 의리에 진실로 부합한다고 칭찬하고 이 이름으로 정하게 하셨다.
임금께서 오랫동안 병을 앓으셨다. 소장을 올려 마음을 맑히고 욕심을 줄여야 한다고 요청하면서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을 비호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였다. 당시 바르지 못한 무리들이 이조를 뒤흔들었는데, 임금께서 자못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셨다. 또 대각(臺閣)의 신하 가운데 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함정에 빠졌다가 이미 조사하여 시비가 가려졌는데도 그를 관적에 수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이 소장에서 이 문제를 말하였는데, 임금께서 이미 그 능력을 시험해 보았다고 책망하셨다. 이에 공은 스스로 탄핵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여러 차례 육조(六曹)의 참판과 대사헌,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또 간절히 문형을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충청 감사와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조정의 논의는 대개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아버지 찬성공이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임금께서 자리를 물려준다는 명령을 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차 조정에 나가 논쟁하려 하였다. 그 명령이 환수되자 소장을 올려 마음 다스리는 방법을 아뢰었다.
기축년(1709, 숙종35)에 찬성공의 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공조 참판에 임명되고 도승지(都承旨), 대사헌으로 옮겨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하였다. 소장을 올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이기는 요점에 대해 아뢰면서 주자(朱子)의 가르침으로 증거를 삼으니 임금께서 그 지극한 논의에 감탄하셨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셨다. 당시 이돈(李墪)이 제학(提學)으로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이미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에 들어온 뒤에 마음대로 나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그가 응시자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응시자가 과연 합격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말이 시끌시끌하였고, 간신(諫臣)이 소장을 올려 논척하면서 과시장(科試場)의 엄숙하지 못했던 상황을 언급하였다. 공은 승지로 시험 관리에 참여하였으므로, 이돈의 일에 대해 대략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이건명(李健命) 공이 경연에서 과시장의 일을 아뢰면서, 단봉문(丹鳳門)이 닫혀 있지 않았었다고 말하였다. 여러 소인들이 드디어 단봉문에 관한 일로 공을 물고 늘어져 승지가 과시장의 검찰(檢察)을 주관하는 것이라며 여러 사람의 소장이 벌 떼처럼 올라왔다. 대개 이 말을 빌미로 이돈의 일을 덮고, 또한 공이 곧이곧대로 아뢴 것을 원망하여 기회로 삼아 공을 죄에 밀어 넣으려는 것이었다. 임금께서 그 실상을 밝게 살펴 엄하게 물리치고 공을 극진히 위로하셨다.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공은 여러 사람들의 비난으로 곤경에 처했으므로 세 번 사양하여 교체되었다. 그 뒤로 모두 아홉 번에 걸쳐 이조 판서가 되어 청탁(淸濁)을 구별하여 등용하였으며 오래 한 관직에 있던 사람들을 뽑아 추천하니 착한 무리들이 공을 믿고 의지하였다. 그러나 다른 논의를 견지한 자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할까 걱정하여 중상모략을 일삼으니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문형은 교체되었다가 곧바로 다시 임명된 경우가 두 번이고, 교체되면 제학에 임명되었으니 십수 년 동안 사원(詞垣)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의 문장은 많은 공부의 축적을 통해 여러 문체에 두루 능하였다. 속작(速作)에 더욱 뛰어나 조정의 중요한 문장들을 입으로 불러 곧바로 완성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금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매번 자신은 미칠 수 없는 경지라고 추대하였다. 여러 번 나라의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부화(浮華)한 글을 물리치고 질실(質實)한 문장을 우대하니 문풍이 크게 변하였다. 그 사이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예조ㆍ형조ㆍ공조의 판서, 참찬,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도감(都監)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오랫동안 선혜청을 다스리고 두 번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조세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함에 있어 재량(裁量)이 마땅하였다. 여러 차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어 판결을 공정하게 하고 법을 어그러뜨림이 없었다.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국장도감의 공로를 인정받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예전에 역임했던 관직을 두루 맡았다. 성상(聖上영조(英祖))께서 왕세제가 되시자 좌빈객(左賓客)을 겸하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 경종은 본래 병을 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셨다. 조정의 신하들이 일제히 그 명령을 거둬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또 일곱 차례 입대(入對)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차자를 올린 뒤에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 공론(公論)이었으므로 다음 날 대신들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조태구(趙泰耈)의 북문(北門)의 일이 발생하고,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의 소장이 이어서 올라와 재앙의 기미가 활활 타올랐다.
공은 그날 강가로 나왔다. 흉악한 무리들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실시하자고 연명으로 올린 차자로 큰 죄안을 삼아 먼저 여러 재상들을 가시 울타리가 둘러진 집으로 귀양 보냈다. 동조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여러 재신(宰臣)들을 모두 관직에서 내쫓았는데 공만 거기에서 빠졌다. 공이 소장을 올려 사실대로 아뢰자, 임금께서 사직하지 말고 동궁을 보호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며칠이 지나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요사스러운 환관 박상검(朴尙儉)의 변란(變亂)이 일어나자 동궁께서는 심지어 세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려 하셨다. 왕대비가 또 하교(下敎)하시니 그 말씀의 뜻이 애통하고 간절하였는데, 조태구와 최석항(崔錫恒)의 무리들이 자기들만 본 뒤에 봉하여 돌려보냈다.
공은 변란 소식을 듣고 성 밖으로 달려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견디지 못해 궁궐에 들어가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다. 조태구를 만나 왕대비의 하교에 대해 물었으나, 조태구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은 채 병을 핑계로 서둘러 나가 버렸다. 공은 왕대비의 하교가 모두 두 차례 내려졌으나 조태구 등이 숨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들었다. 이에 소장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벼슬에서 쫓겨난 뒤에 왕대비의 하교 가운데 ‘한통속이 된 궁녀와 환관을 법에 의거하여 처벌하라.’라는 말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빈청에서 올린 계에서는 ‘한 궁녀가 환관과 한통속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왕대비의 하교와 크게 어긋납니다. 왕대비의 하교에서 이미 ‘두 명의 궁녀’라고 하셨는데 끝내 죄수를 가두지 않아 멋대로 자살하게 만들었으니 책임을 맡은 신하가 분명히 소홀히 하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신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조태구가 즉시 소장을 올려 “왕대비의 전교를 거짓으로 꾸몄다.”라는 말을 처음 주장하였다. 공의 소장에 대해 비답이 내려왔는데, “왕대비의 전교가 두 번 내렸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왕대비의 전교가 과연 두 번 내려왔는데, 조태구와 최석항의 무리가 숨겨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조태구의 소장이 이윽고 올라가자 적신 박필몽(朴弼夢)과 윤성시(尹聖時) 등이 연이어 공을 외진 곳으로 멀리 귀양 보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강진으로 유배되고 한 달 정도 뒤에 목호룡(睦虎龍)의 급서(急書)가 올라와 감히 말하지 못할 것까지 침범하였다.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이것을 기회로 큰 옥사를 일으켜 조정의 신하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니 왕세제께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두려움에 떨며 걱정하셨다. 공이 왕실의 상황에 비통한 마음을 그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세제께서 평안하단 소식 듣는다면 / 銅闈若得平安信
거친 남쪽에서 아홉 번 죽어도 원망 않으리 / 九死南荒定不冤
이듬해 여름 감기에 걸려 유배지에서 운명하였다. 아, 조정에 나가서는 반드시 대절(大節)을 주장하고, 사람을 논할 때는 마땅히 만년(晩年)의 행적을 살펴야 한다. 대개 선비가 평소에는 큰소리치며 격앙되다가도 변고를 만나면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명예를 훼손하고 의리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다. 또 젊었을 때는 몸가짐을 엄숙하게 하고 지조를 지켜 세상에 명예를 세웠다가, 세월이 흘러 기운이 떨어지면 기절(氣節)이 풀어지고 행동에 절제가 무너져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된 경우도 많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학문으로 배양함이 없기 때문이다.
공의 경우는 일찍 요화궁(瑤華宮)의 고립을 알아 황리(黃裏)의 변을 깊이 근심하였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아뢰고 나와서는 차자를 올려 변치 않는 붉은 마음이 밝게 빛났다.
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의 일은 더욱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 있다. 이에 70의 나이로 포효하는 호랑이 앞에 정면으로 맞서 왕세제를 보호하다가 재앙을 당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장기(瘴氣)가 가득한 바닷가에서 기운이 꺾이고 심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히려 흉악한 반역의 무리들을 두렵게 만들어 감히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2, 3년 동안 왕세제께서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으신 것은 공이 올린 소장의 힘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어지러운 조짐을 잘라 버리고 국운을 붙들어 지탱한 공로 또한 속일 수 없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공이 인륜을 높이 세우고 만년의 절의에 더욱 힘쓴 것이 또 어떠한가. 아, 위대하도다.
그러나 진실로 근본이 없으면 또한 어떻게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대개 공은 젊어서 우암과 동춘 두 선생의 고을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며 가르침을 받아 옛날 성현의 책 속에 무젖도록 노닐어 축적한 바가 깊고 두터웠고, 집안에서 수양하여 가정에서 지켜야 할 행실을 온전히 갖추었다. 양친(兩親)께서 오랫동안 병을 앓으니 수발을 들고 간호하는 모든 행동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나태하지 않았다. 상중(喪中)에는 예법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여 건강을 해쳐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다. 국상(國喪)에 달려갔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평생 애통해하였고, 그 일을 말씀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였다. 아아, 효(孝)는 모든 행실의 근원인데 공이 이미 극진히 하였으니 끝내 수립한 큰 절의(節義)가 저와 같이 굳센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밀(精密)한 금과 온윤(溫潤)한 옥 같은 자질, 맑은 얼음과 쓴 황벽 같은 지조, 한아(閒雅)하고 온화한 도량, 멀리까지 밝게 알고 사물을 관통하는 식견 등은 진실로 다 사람마다 칭송하니 그 큰 것을 이미 말하였기에 이제 생략한다.
공이 계묘년(1723, 경종3) 6월 1일 타계하였으니, 춘추 67세이다. 공주의 삼미천 선영 아래로 관을 모셔와 부인과 합장하였다. 3년이 지난 을사년(1725, 영조1), 성상(聖上영조(英祖)) 원년(元年)에 특별히 공의 관작(官爵)을 회복하고, 예관을 보내 집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부인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생원 윤선적(尹宣績)의 따님이다. 1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 필환(必煥)은 목사(牧使)이다. 딸들은 부솔(副率) 이하곤(李夏坤), 생원(生員) 이천기(李天紀), 윤득항(尹得恒), 부제학 서명빈(徐命彬), 부윤(府尹) 민통수(閔通洙)에게 시집갔다. 필환은 관찰사 이인병(李寅炳)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이재복(李載福)과 이재희(李載禧)를 낳았고, 딸은 좌랑(佐郞) 최봉흥(崔鳳興)에게 시집갔다. 이하곤의 아들 이석표(李錫杓)는 대사성이고, 차남은 이석심(李錫心)이다. 이천기는 양아들 이덕용(李德容)을 두었다. 윤득항은 양아들 윤선동(尹選東)을 두었다. 서명빈의 아들은 서내수(徐來修), 민통수의 아들은 민백선(閔百善)이다. 나머지 어린 아이들과 시집간 외손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은진 송씨는 우리나라 명망 있는 가문으로 / 宋著東望
대대로 유구하게 이어져 / 歷載悠綿
쌍청당 이후로 / 雙淸之後
세상에 빛나는 어진 분 많았지 / 赫世多賢
걸출하신 종백께서는 / 有偉宗伯
소전보다 명성 높았네 / 名駕疏錢
아 돈독히 경사를 길러 / 繄篤慶毓
공이 때 맞춰 태어났네 / 公乃應期
부드럽고 온화한 자질이며 / 溫溫其質
밝게 빛나는 모습이로다 / 炯炯其儀
일찍이 깃을 가지런히 하니 / 蚤整翽羽
사람들이 봉황처럼 우러르네 / 人仰九苞
아침 해 뜨는 동산에서 상서롭게 우니 / 朝陽祥噦
온갖 새들이 놀라 지저귀네 / 百鳥驚啁
대단히 어려운 시절 만나니 / 値時孔艱
많은 음흉한 이들이 하늘 가렸네 / 群陰塞霄
무지개 무리 뜨며 혜성의 빛 찌르니 / 虹暈彗射
우리 중전을 핍박하였네 / 逼我坤倪
엄정한 낯빛으로 지탱해 내니 / 正色枝柱
큰 비를 막는 제방 같았네 / 若潦於堤
명분을 세우고 의리를 숭상하여 / 立名崇義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말씀이었네 / 終始一說
충심 아뢰고 그릇됨 바로잡음에 / 陳忠格非
정성스럽고 간절하였지 / 委曲痛切
선왕도 만년에는 / 寧考晩際
분명하게 삼준인 줄 아셨네 / 灼知三俊
사원을 빛나게 하고 / 詞苑粉黼
이조에서 공평한 인사 행하였네 / 銓地衡準
물러나면 곧바로 다시 맡기니 / 纔卸旋任
이십 년의 세월이었네 / 首尾廿稔
선비들의 부화한 문풍 고쳐지고 / 士革浮華
조정에 요행으로 나오는 관리 끊어졌어라 / 朝絶倖冒
재무를 다스리고 옥사를 판단할 때 / 理財折獄
담소하는 사이에 완료되었네 / 談笑而了
틈과 틈 사이로 솜씨 발휘해 / 導窾批郤
두께 없는 칼이 들어가는 듯 / 入而無厚
참으로 사리에 통달한 재주라 / 寔謂通才
모든 면에서 합리적이었네 / 宜左宜右
성왕께서 돌아가시니 / 聖王陟方
흉악한 자들이 이빨 드러냈네 / 兇慝孽牙
종묘사직의 커다란 방책이 / 宗祊大策
마침 재앙의 미끼 되었도다 / 適爲禍囮
살육의 조짐이 팽배하고 / 殺機蹶張
재갈과 그물이 널리 펼쳐졌네 / 箝網橫羃
이에 내시와 더불어 / 爰曁椓人
왕세제께 손을 뻗쳤네 / 施手貳極
그 혀를 날름거리며 / 肆其舚舑
나라의 명맥을 끊으려 하자 / 絶國之脉
공이 듣고 피눈물 흘리며 / 公聞血涕
내달려 궁궐로 들어가 / 亟馳而入
정성 쏟아 소장 지어 / 瀝肝爲辭
성한 기세에 대항하였네 / 以抗欻翕
왕세제 보호가 다급하니 / 翼儲是急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도다 / 曾不竦戁
몸은 힘들어도 뜻은 드날렸으니 / 跡屈志颺
귀양 따위를 어찌 마음 쓰랴 / 何有編竄
그 기운 높고 높아 / 其氣嶷嶷
저들의 뿔을 꺾었어라 / 折彼之角
말은 비록 쓰이지 못했지만 / 言雖不用
인륜을 부지한 공로 있었도다 / 功在扶倫
만년에 수립한 바가 / 晩途樹立
다른 어떤 이보다 뛰어났도다 / 軼類超群
대개 공은 어릴 때부터 / 蓋公弱歲
우암과 동춘을 본받아 / 二老是繩
학문의 힘으로 / 維學之力
어려움을 만나 더욱 분발하니 / 遇難奮騰
진실로 북돋운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 諒由培壅
갑자기 취한 것이 아니라네 / 匪適襲取
위대하다 우리 공이여 / 偉哉我公
진실로 충성스럽다 일컬을 만하네 / 允稱忠甫
말세의 풍속은 천박하여 / 末俗翦翦
의리를 실처럼 가벼이 여기네 / 義路如綫
숙예가 관찰한다면 / 叔譽之觀
공이 아니면 누구와 돌아갈까 / 非公誰歸
천년 세월 지나도 / 有來千禩
남긴 아름다움 느끼리라 / 尙挹餘徽
울창한 저 공주의 산에 / 鬱彼公山
우뚝한 빗돌이 있도다 / 有屹桓楹
아름다운 말로 명을 써서 / 銘以好辭
영원히 세상의 표준이 되게 하노라 / 永俾世程
[주-D001] 왕의 …… 아니다 : 이 내용은 《주역》 〈건괘(蹇卦) 육이(六二)〉에 보인다.[주-D002] 송유(宋愉) : 1388~1446.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 은진 송씨가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宋村洞)에 정착하여 ‘회송(懷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이곳에 거주하면서부터이다.[주-D003] 공정왕(恭定王) : 조선의 제3대 왕 태종(太宗, 1367~1422)을 말한다. 정식 시호는 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다.[주-D004] 송남수(宋柟壽) : 1537~1626.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로(靈老), 호는 송담(松潭)이다.[주-D005] 송희원(宋希遠) : 1565~1623.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의백(毅伯)이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묘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宋村洞)에 있다.[주-D006] 송규렴(宋奎濂) : 1630~1709.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도원(道源),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다. 회덕의 미호서원(渼湖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주-D007] 김광찬(金光燦) : 1597~166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회(思晦)이다.
[주-D008] 시중항(柴中行)의 고사 : 시중항은 송(宋)나라의 관리로, 자는 여지(與之)이며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소희(紹煕) 원년(1190)에 진사에 합격하여 무주 군사추관(撫州軍事推官)에 임명되었다. 송 영종(宋寧宗) 때 한탁주(韓侂胄)가 정권을 잡고 자기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제거하려고 하면서 도학(道學)을 인정(人情)에 어긋나는 위학(僞學)으로 지목하여 금지시키고, 도학의 주요 인물인 주희(朱熹)의 관작을 삭탈하고, 채원정(蔡元定)을 좌천시키는 등 조정의 정사(正士)들을 모두 축출시켰다. 이에 시중항이 말하기를 “어려서부터 정씨의 《주역》을 배웠으니 만일 위학이라고 한다면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自幼習易, 讀程氏易傳, 未委是與不是偽學, 如以爲偽, 不願考校.〕”라고 하니 사론(士論)이 그의 말을 장하게 여겼다.”라고 했다. 《宋史全文 卷29》
[주-D009] 우리 …… 있구나 : 이 내용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02에 수록된 〈답송옥여(答宋玉汝)〉의 “또 항간의 말을 듣고서 지난가을 과장에서 시중항의 일에 힘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석실 선생의 가법이 아니겠는가. 우리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매우 경사스럽게 생각한다.〔又聽於道說, 知去秋場屋, 得辦柴中行事, 此豈非石室先生家法耶. 甚慶吾門之有人.〕”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다.[주-D010] 반시(頖試) : ‘반시(泮試)’와 같은 말로 성균관의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수학하는 유생들에게 보인 시험이다.[주-D011] 신정(申晸) : 1628~1687.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동(伯東), 호는 분애(汾厓),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저서에 《분애집(汾厓集)》 등이 있다.[주-D012] 참하(參下) : 7품 이하 종9품까지를 일컫는 말이다.[주-D013] 지진 …… 청하니 : 이 내용은 《옥오재집(玉吾齋集)》 권5의 〈옥당우재진계차(玉堂遇灾陳戒箚)〉에 보인다.[주-D014] 후궁 장씨(張氏) : 숙종의 빈(嬪) 희빈(禧嬪) 장씨(?~1701)를 가리킨다. 본관은 인동(仁同), 아버지는 장형(張炯)이며,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어려서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년(숙종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88년 소의(昭儀)로 있을 때 뒤에 경종이 되는 왕자 이윤(李昀)을 낳았다. 이듬해 1월 숙종이 이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으로 승격되었다. 1690년 이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립되었다. 1694년 서인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의 폐비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고,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복위를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1701년 인현왕후가 병으로 죽자, 궁인, 무녀 등과 함께 인현왕후를 무고(巫蠱)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주-D015] 이항(李杭) : ?~1701.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진 조선의 종실(宗室)이다. 할아버지는 인조(仁祖)이고, 아버지는 숭선군(崇善君) 이징(李徵)이다. 희빈(禧嬪) 장씨(張氏)와 친하였고, 숙종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휘둘렀다. 1689년(숙종15) 왕비 민씨가 폐위되고 장씨가 왕비에 오른 뒤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서 폐비사건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1701년 신사(辛巳)의 옥이 일어나 희빈 장씨가 사사되고 평소 장씨 일가와 친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결국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주-D016] 연초(年初)에 …… 요청하였으니 : 이 내용은 《옥오재집(玉吾齋集)》 권5의 〈옥당신원진계차(玉堂新元陳戒箚)〉에 보인다.[주-D017] 나양좌(羅良佐)가 …… 되었는데 : 나양좌(1638~1710)의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현도(顯道), 호는 명촌(明村)이다. 《승정원일기》 숙종 13년 3월 19일 기사를 참고하면 나양좌가 윤증(尹拯)을 변호하고 송시열을 비방하다가 멀리 유배 조치되는 내용을 볼 수 있다.[주-D018] 조사석(趙師錫) : 1632~1693.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공거(公擧), 호는 만회(晩悔)ㆍ만휴(晩休)ㆍ향산(香山)ㆍ나계(蘿溪)이다.[주-D019] 이정(李楨)과 이남(李柟) : 인조(仁祖)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장남과 둘째 아들로 복창군(福昌君, ?~1680)과 복선군(福善君, ?~1680)을 가리킨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남인 허견(許堅) 등의 추대를 받고 역모를 꾀하였다는 김석주(金錫胄) 등의 공격을 받았다. 복평군(福平君)과 함께 유배, 사사(賜死)되었다.[주-D020] 원앙(袁盎)은 …… 물리쳤는데 : 한 문제(漢文帝)가 신 부인(愼夫人)을 사랑하여 늘 황후와 같이 앉게 하였는데 중랑장(中郞將)이었던 원앙이 존비(尊卑)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간하고 신 부인을 자리에서 끌어내려 앉게 했던 일을 말한다. 《漢書 卷49 袁盎傳》[주-D021] 장희재(張希載) : ?~1701.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숙종의 후궁인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오빠이다.[주-D022] 김호(金灝) : 1651~1695.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여습(汝習), 호는 심락재(尋樂齋)이다.[주-D023] 이희조(李喜朝) : 1655~172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주-D024] 임금께서 …… 말하였다 :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옥오재집(玉吾齋集)》 권7의 〈사예조참판……대보단명소(辭禮曹參判……大報壇名疏)〉에 보인다.[주-D025] 조태구(趙泰耈)의 북문(北門)의 일 : 조태구(1660~1723)의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덕수(德叟), 호는 소헌(素軒)이다. 1720년(숙종46) 우의정이 되었다. 1721년(경종1)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을 비롯해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 등이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을 하게 하자, 소론의 영수로서 최석항(崔錫恒), 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대리청정을 환수(還收)시켰다. 이어 김일경(金一鏡) 등으로 하여금 노론 사대신을 역모죄(逆謀罪)로 몰아 사사(賜死)하게 하는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뒤, 소론 정권을 수립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북문의 일은 조태구가 경종을 만나 대리청정 명령을 환수해 달라고 요청한 일을 말하는데 이와 관련된 기록은 《경종실록》 1년 1월 20일 기사에 자세하게 보인다. 또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11월 6일 기사에 “북문으로 잠입했다는 것은 곧 고 상신 조태구가 선인문으로 들어와 임금을 뵌 일을 가리킨다. 당시 대행 대왕께서는 진수당에 계셨으므로 조태구가 가까운 선인문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임금을 뵙고 요청한 일에 대해 임금의 허락을 받은 것은 곧 대리청정을 환수하는 것이었다.〔北門潛入云者, 卽指故相臣趙泰耉, 自宣仁門入來請對事也. 其時大行大王, 御進修堂, 泰耉由宣仁門取近而入, 其所入對得請事, 乃是聽政還收之事.〕”라는 기록이 있다.[주-D026] 박상검(朴尙儉) : 1702~1722.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환관으로 궁궐에 들어가 소론의 거두 김일경(金一鏡)과 친하게 지냈다. 김일경을 비롯한 소론에서는 경종이 노론의 뜻에 따라 뒷날의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자 김일경은 박상검과 결탁하여 왕세제를 제거하려고 하였다.[주-D027] 최석항(崔錫恒) : 1654~172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구(汝久), 호는 손와(損窩)이다. 신임옥사 때 좌참찬으로서 경종으로 하여금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철회하게 하였다.[주-D028] 박필몽(朴弼夢) : 1668~1728. 본관은 반남, 자는 양경(良卿)이다. 1721년(경종1) 김일경(金一慶), 이명의(李明誼), 이진유(李眞儒) 등과 함께 연명으로 상소하여, 왕세제(王世弟)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한 노론 사대신의 죄를 성토하여 신임옥사를 유발하였다.[주-D029] 윤성시(尹聖時) : 1672~1730.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계성(季成)이다. 1721년(경종1) 소론의 소장세력으로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과 신임옥사를 주도하였다.[주-D030] 목호룡(睦虎龍)의 …… 침범하였다 : 목호룡(1684~1724)의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1722년(경종2) 소론에 가담,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 정인중(鄭麟重), 김용택(金龍澤), 이천기(李天紀) 등 60여 명이 경종을 시해(弑害)하려는 역모를 꾸몄으며 자신도 가담했었다고 고발, 모두 투옥되었다. 이로 인해 왕세제를 세운 소위 건저(建儲) 사대신인 이이명(李頤命),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建命), 조태채(趙泰采) 등이 차례로 사사되었다.[주-D031] 세제 : ‘동위(銅闈)’는 세자(世子)를 가리킨다. 한대(漢代)에 태자의 궁문을 동룡문(銅龍門)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여기서는 왕세제인 연잉군을 가리킨다.[주-D032] 요화궁(瑤華宮)의 고립 :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곽 황후(郭皇后)를 폐(廢)하여 요화궁에 두었던 일을 말한다. 이 일은 여이간(呂夷簡)과 염문응(閻文應)이 주도하였다. 뒤에 인종이 후회하고 복위시키려 하자 이들이 또 주도하여 폐후를 살해하였다. 《宋史 卷242 仁宗郭皇后列傳》 여기서는 기사년(1689, 숙종15)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켰던 일을 가리킨다.[주-D033] 황리(黃裏)의 변 : 《시경》 〈녹의(綠衣)〉에 “초록 옷이여, 초록 옷에 황색 안감이로다.〔綠兮衣兮, 綠衣黃裏.〕”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초록은 간색(間色)이고 황색은 정색(正色)인데, 천박한 간색으로 웃옷을 만들고 귀중한 정색으로 속옷을 만들었으니, 둘 다 제자리를 잃었음을 말한다.”라고 하였고, 또 “장공(莊公)이 총애하는 궁첩(宮妾)에게 빠져, 현명한 부인 장강(莊姜)이 지위를 잃었으므로 이 시를 지어 풍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고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중전이 된 일을 가리킨다.[주-D034] 걸출하신 …… 높았네 : ‘종백(宗伯)’은 예조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예조 판서를 역임한 제월당 송규렴을 가리킨다. ‘소전(疏錢)’은 소광(疏廣)ㆍ소수(疏受)와 전약수(錢若水)를 가리킨다. 한 선제(漢宣帝) 때 소광이 태부(太傅), 조카 소수(疏受)가 소부(少傅)였는데 5년간 재직하다가 조카와 함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약수는 송(宋)나라 신안(新安) 사람으로 자(字)는 장경(長卿)이다. 송나라 때 한 고승(高僧)이 전약수를 보고 “이 사람은 급류에서 용감히 물러날 사람이다.”라고 했는데, 뒤에 전약수가 40의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전하여 관도(官途)에서 한창 득의(得意)했을 때 미련 없이 물러나는 비유로 사용되는데, 송규렴이 중년에 벼슬에서 물러난 것을 기려서 한 말이다.[주-D035] 봉황 : ‘구포(九苞)’는 봉황의 아홉 가지 깃털 색깔이다.[주-D036] 아침 …… 우니 : 송상기가 조정에 나가 직언(直言)함을 말한다. 《시경》 〈권아(卷阿)〉에 “봉황새가 우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나무 자라났네, 해 뜨는 저 동산에서. 오동나무 무성하니, 봉황새 소리 어울리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 菶菶萋萋, 雝雝喈喈.〕”라는 말이 나온다.[주-D037] 무지개 …… 찌르니 : 무지개 무리와 혜성은 모두 불길한 징조로, 여기서는 소인들의 횡행을 의미한다.[주-D038] 삼준(三俊) : 강(剛), 유(柔), 정직(正直)의 덕을 가진 인재를 말한다. 《서경》 〈입정(立政)〉에 “능히 삼택과 삼준을 기용하였다.〔克用三宅三俊〕”라고 하였는데 전(傳)에서 “능히 강, 유, 정직의 삼덕을 갖춘 사람을 등용하였다.〔能用剛柔正直三德之人〕”라고 풀이하였다.[주-D039] 틈과 …… 듯 : 업무 처리에 유능함을 나타낸 말이다.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는데, 소 잡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 문혜군을 감탄하게 하였다. 포정이 소 잡는 도(道)를 말하면서 “두께가 없는 칼을 두께가 있는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에 있어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以無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라고 하였다. 《莊子 養生主》[주-D040] 진실로 …… 아니라네 : 송상기가 만년까지 절의를 지킨 것은 어려서부터 꾸준한 학문적 수양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지 한 순간의 마음가짐이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주-D041] 숙예(叔譽)가 …… 돌아갈까 : 이의현이 송상기의 인품을 본받고 싶다는 표현이다. 숙예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숙향(叔向)을 가리킨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진나라 대부 조 문자가 숙예와 함께 구원(九原)에 가서 무덤을 구경하였는데, 조 문자가 ‘여기 죽은 자들을 만일 살릴 수 있다면 내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꼬.〔死者, 如可作也, 吾誰與歸.〕’라고 하였다. 숙예가 ‘양처보(陽處父)와 구범(舅犯)이다.’라고 하자, 조 문자는 이들의 결점을 열거하고 ‘나는 수무자(隨武子)를 따르겠다. 그는 군주를 이롭게 하면서도 자기 몸을 잊지 않았고, 자기 몸을 돌보면서도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라고 했다.”라는 말이 있다.[주-D042] 빗돌 : ‘환영(桓楹)’은 제후를 장사 지낼 적에 나무를 깎아 돌비석과 같이 네 개를 만들어 하관(下棺)하는 데 쓰는 도구로, 전하여 비석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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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려서부터 정씨의 《주역》을 배웠으니 만일 위학이라고 한다면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自幼習易, 讀程氏易傳, 未委是與不是偽學, 如以爲偽, 不願考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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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죄를 니가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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柴中行
南宋文学家
柴中行,字与之,人称“南溪先生”,南宋著名文学家,馀干(今江西万年县南溪乡营里村)人。文公之子,后周世宗第十三代裔孙。绍熙元年(公元1190年),第进士,授抚州军事推官、江州教授,累迁西京转运使、湖南提刑、崇政殿说书、知赣州。时韩侂胄禁道学,运司移檄,令自言非伪学。中行奋笔曰:“自幼习读程氏易传,如以为伪不愿考校。”士论壮之。屡迁知赣州,告老归里二十七载,与弟中立、中守讲学南溪书院。饶鲁、汤干、汤巾、汤中、汤汉皆出其门下。汤汉尚建环溪书院于饶州安仁(今江西余江)之汤源,迎之讲学其中。理宗即位,以右文殿修撰主管南京鸿庆宫,未几,又以权贵人谓真德秀为真小人,凡所荐士尽行斥逐,于是绝仕进之意,于公元1225年遁迹与缑之北里(宁海北郊)。著有《易系集传》、《书集传》、《诗讲义》、《论语蒙童说》等书,宋史有传。
目录
1 人物简介
2 人物经历
3 主要诗作
人物简介
生于南宋淳熙乙未年五月初一日(公元1175年),卒于南宋嘉熙丁酉年四月二十日(公元1237年)。
人物经历
柴中行,字与之,余干人。绍熙元年进士,授抚州军事推官。权臣韩侂胄禁道学,校文,转运司移檄,令自言非伪学,中行奋笔曰:“自幼读程颐书以收科第,如以为伪,不愿考校。”
调江州学教授,母丧,免,广西转运司辟为干官,帅将荐之,使其客尝中行,中行正色曰:“身为大帅,而称人为恩王、恩相,心窃耻之。毋污我!”摄昭州郡事,蠲丁钱,减苗斛,赈饥羸。转运司委中行代行部,由桂林属邑历柳、象、宾入邕管,问民疾苦,先行而后闻,捐盐息以惠远民。嘉定初,差主管尚书吏部架阁文字,迁太学正,升博士。转对,首论主威夺而国势轻;次论士大夫寡廉隅、乏骨鲠,宜养天下刚毅果敢之气;末论权臣用事,包苴成风,今旧习犹在,宜举行先朝痛绳赃吏之法。谓太学风化首,童子科覆试胄子舍选,有挟势者,中行力言于长,守法无秋豪私。迁太常主簿,转军器监丞。
出知光州,严保伍,精阅习,增辟屯田,城壕营砦、器械糗粮,百尔具备,治行为淮右最。又条画极边、次边缓急事宜上之朝廷,大概谓:“边兵宜如蛇势,首尾相应。草寇合兵大入,则邻道援之;分兵轻袭,则邻郡援之。援兵既多,虽危不败。”又言:“淮、襄土豪丁壮,往者用兵,倾赀效力者,朝廷吝赏失信,宜亟加收拾,亦可激昂得其死力。”
迁西京转运使兼提点刑狱。中行谓襄阳乃自古必争之地,备御尤宜周密。时任边寄者政令烦苛,日夜与民争利,中行讽之,不听。天方旱,尽捐酒税,斥征官,黥务吏,甘澍随至。官取盐钞赢过重,课日增,入中日寡,钞日壅。中行揭示通衢,一钱不增,商贾大集。改直秘阁、知襄阳兼京西帅,仍领漕事。江陵戎司移屯襄州,兵政久驰。中行白于朝,考核军实,旧额二万二千人,存者才半,亟招补虚籍。自是朝廷以节制之权归帅司。重劾李珙不法以惩贪守,时扈再兴有功以厉宿将,上关朝廷,下关制阃。
迁江东转运司判官,旋改湖南提点刑狱。豪家习杀人,或收养亡命,横行江湖,一绳以法。华亭令贪虐,法从交疏荐之,中行笑曰:“此欲断吾按章也。”卒发其辜。入为吏部郎官。以立志启迪君心,言好进、好同、好欺,士大夫风俗三敝。选曹法大坏,吏缘为奸,中行遇事持正,不为势屈,由是铨综平允。
擢宗正少卿。上疏谓:“陛下初政则以刚德立治本,更化则以刚德除权奸,今者顾乃垂拱仰成,安于无为。夫刚德实人主之大权,不可以久出而不收,覆辙在前,良可鉴也。”又曰:“朝廷用人,外示涵洪而阴掩其迹,内用牢笼而微见其机,观听虽美,实无以大服天下之心。曩者更化,元气复挽回矣。比年欲求安静,颇厌人言,于是臣下纳说,非观望则希合,非回缓则畏避,而面折廷诤之风未之多见,此任事大臣之责也。”
兼国史编修、实录检讨。孟春,大雨震电,雷雹交作,边烽告急,至失地丧师,淮甸震汹。中行亟奏内外二失,朝廷十忧,大要言:“今日之事,人主尽委天下以任一相,一相尽以天下谋之三数腹心,而举朝之士相视以目,噤不敢言。甚至边庭申请,久不即报,脱有阙误,咎当谁执?”
调秘书监、崇政殿说书。极论“往年以道学为伪学者,欲加远窜,杜绝言语,使忠义士箝口结舌,天下之气岂堪再沮坏如此耶?”又谓:“欲结人心,莫若去贪吏;欲去贪吏,莫若清朝廷。大臣法则小臣廉,在高位者以身率下,则州县小吏何恃而敢为?”又论内治外患,辨君子小人,大略谓:“执政、侍从、台谏、给舍之选,与三衙、京尹之除,皆朝廷大纲所在,故其人必出人主之亲擢,则权不下移。今或私谒,或请见,或数月之前先定,或举朝之人不识。附会者进,争为妾妇之道,则天下国家之利害安危,非惟己不敢言,亦且并绝人言矣。大臣为附会之说所误,边境之臣实遁者掩以为诬,真怯者誉以为勇,金帛满前,是非交乱,以欺庙堂,以欺陛下。愿明诏大臣,绝私意,布公道。”
进秘阁修撰、知赣州。汉盗有方,境内清肃。丐祠得请,以言罢。理宗即位,以右文殿修撰主管南京鸿庆宫,赐金带。卒。所著有《易系集传》、《书集传》、《诗讲义》、《论语童蒙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