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들이 성령 안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여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매우 취약하고 관심도 적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예언을 한다든지, 병을 치유한다든지, 방언을 한다든지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모든 은사는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은사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사를 잘못 사용하면 개인 및 교회 공동체의 신앙생활에 큰 해를 끼치게 됩니다.
칼이 사과를 깎는데 유용하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임재의 목적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시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데 있습니다.
본문을 포함한 6장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생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1.형제의 범죄에 대하여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 주어야합니다.(1절)
사람은 누구나 죄에 대하여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범죄에 대하여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과 히스기야 왕의 잘못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 믿음의 훌륭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죄에 대하여 연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예수께 와서 말합니다.
요 8:4-5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범죄한 자를 들어내어 끌고 다닙니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줍니다. 그리고 돌로 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입니다. 나의 죄는 보려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 들어냅니다.(마 7:1-5)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정죄하는 자들을 양심에 호소하여 다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요 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께서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용서하셨고 죄를 멀리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사람들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러한 죄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2.무거운 짐을 서로 지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2절)
여기에서 짐이란 개인이 지고 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바로스)을 말합니다. 때로는 1절과 관련하여 혼자 해결하기 힘든 죄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들춰내어 비판할 것이 아니라 함께 걱정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가 그 범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때로는 인생의 여정에서 당하는 사업의 실패라든가 가족의 죽음 등 때문에 절망하는 이웃이 있을 때 같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이웃(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법이요,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3.각자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에게 진실하십시오.(3-5절)
①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3절)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신의 의를 더 크게 나타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 자체가 매우 힘이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면 됩니다.(349장)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②남에게 자랑하지 마십시오. 자랑은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4절)
내가 열심히 전도하고 충성하였다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당연히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그것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이요 나는 교만에 빠질 것입니다.
③각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짐을 지어야 합니다.(5절)
5절에서의 짐은 2절에서의 짐과 다른 개인이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짐(포르티온)을 말합니다. 가정에서 각 식구들은 가정에서 자신이 담당할 짐(몫)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머니로서 담당할 짐을 지지 못한다면 온 식구의 부담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각 직분 자에게 주신 짐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기쁨으로 지고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실천하는 것인가를 잘 살피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제목>
1.남의 허물이나 범죄를 공개하고 정죄한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옵소서.
2.언제나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게 하옵소서.
3.11월 15일부터 17일까지의 영적 대 각성집회를 통하여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공부> 작성자 :
1.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까?
2.범죄 한 것을 발견하였을 때 어떠한 마음으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합니까?
3.잘난척하는 것은 누구를 속이는 것입니까?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갈 6:6-10)
그리스도 인들이 아름다운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종달새가 산 속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인들은 내주(內住)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며 성령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 순종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1.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관계를 맺으십시오.(6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꼭 명심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전하는 자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임을 전제로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의 관계를 정할 때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기준으로 관계가 설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가 개개인의 신앙의 모든 면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학교에서도 훌륭한 학생들은 모든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는 학생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선생님이 자기에게 못마땅하면 불평불만하고 공부도 안하고 학교도 안 가려고 합니다. 결국은 누가 손해를 봅니까? 자신이 손해를 봅니다. 그런 학생은 똑똑할지는 몰라도 지혜로운 학생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학생의 기준에 맞추어서 선생님을 날마다 교체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학생들은 반대로 지나치게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안되면 선생님을 모함하고 악선전합니다.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반 학생 전체의 선생님이지 개인의 가정교사가 아닙니다. 이러한 경우도 개인이나 교사나 교실 전체에 주는 피해는 막심합니다.
교회의 공동체에서도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르치는 자의 책임과 가르침을 받는 자의 자세가 잘 조화를 이루어 질 때 하나님의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나의 신앙의 유익을 위하고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한 길이 어떠한 것인가를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히 13:17참조)
2.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7-8절)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만홀히>라는 말은 '코를 치켜 올린다'는 어원을 가집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향하여 조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심고는 성령의 열매를 바란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입니다.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호박씨를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호박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올 봄에 장인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교회 텃밭에 배추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잎이 나오다가 시들하여 말라져 죽는 거예요. 이유인즉 종자 씨가 불량이라는 것입니다. 잘 자랐다면 올해처럼 배추가 귀할 때 얼마나 요긴하겠어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어떠한 씨를 뿌리고 살았습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뿌린 씨는 생각하지 않고 좋은 열매를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부는 열심히 안하고 좋은 대학을 바라거나 육신을 위하여 살아오고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바라고 영생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절)
지금부터라도 성령께서 원하시는 뜻에 순종함으로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어 봅시다.
3.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마십시오.(9-10절)
그리스도인이 착하게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언제나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로 착하게 사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①선은 그 선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그 선한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야! 누가 알아주나?"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마귀의 속삭임 입니다. 선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선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②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여야 합니다. 착한 일을 하는데는 때를 가려서도 사람을 가려서도 안 됩니다. 돈을 벌어서 착한 일을 해야지 하는 사람은 일평생 착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착한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성령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③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하여야합니다. 믿음의 식구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믿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 먼저 그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교회 안의 어려운 분들을 돕는다는 것은 주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육신을 위하여 심는가? 성령을 위하여 심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대한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심을 때는 전혀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생의 종착역에서 썩어질 것만 있다면 얼마나 허무하고 절망적인 일이겠습니까!
<오늘의 기도제목>
1.우리의 인생이 성령을 위하여 심어 풍성한 열매와 영생을 거두게 하옵소서.
2.선을 행하다가 손해를 입음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게 하옵소서.
3.11월 15일부터 17일까지의 영적 대 각성집회를 통하여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공부> 작성자 :
1.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누구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까?
2.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무엇을 거두게 됩니까?
3.착한 일은 언제 누구에게 하여야 합니까?
"십자가만을 자랑하라" (갈 6:11-18)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지금까지 대필을 하게 한 바울은 서신을 맺으면서 자신이 직접 쓴 큰 글자의 자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11절) 본문은 서신을 쓰게 된 동기로 되돌아가 ①교인들을 율법으로 계속 묶어 두려는 율법주의자들을 다시 경계하고, ②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 자신의 각오와 ③복음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한 축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1.육체로 자랑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11-13절)
12절의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은 신앙의 속 알맹이보다는 신앙의 형식을 중요시합니다. 속이 허한 분들이 외모에 특별히 집착하는 경우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인의 범주에 들어오려면 할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제물을 드릴 때 소의 눈에 눈곱이 있는지 없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강대의 높이와 모양에 신경을 씁니다. 예배의 순서에 사도신경을 넣었느니 안 넣었느니 따집니다. 이런 분들은 대단히 피곤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이 저희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두 가지 이유에 대하여 말합니다.
①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면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의 초창기 때에 기독교가 박해를 받은 이유는 제사 때문이었습니다. 제사를 포용하였다면 그렇게 박해는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 드릴 경우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제 1,2계명을 범하는 것이요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할례를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박해가 대단히 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것이 좋다고 할례도 받고 십자가도 믿으려는 유혹을 받게된 것입니다.
②너희의 육체로 자랑을 삼기 위하여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의 관심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몇 명의 갈라디아 인을 할례 받게 하였는가에 대한 자기 자랑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전도의 목적이 단순히 전도 왕이 된다든지 우리 교회의 숫자를 채우기 위한 전도라면 동기가 바르지 아니합니다. 전도는 오직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전도는 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모양을 중시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자랑을 위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나의 자랑이 되어야합니다.(14-15절)
바울은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 왜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까?
①하나님의 능력(구원하는)이 되기 때문입니다.(고전 1:18)
②화평을 이루기 때문입니다.(엡 2:16; 골 1:20)
③모든 악으로부터 승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골 2:15)
④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롬 3:24)
⑤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합니다.(롬 5:11)
여러분들은 무엇을 자랑하면서 사십니까? 육체와 육체의 가진 것을 자랑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장 귀하신 분 오직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를 자랑하면서 살아갑시다.
3.이 규례(십자가의 도)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입니다.(16-18절)
바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 그리스도의 은혜를 빌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누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복 받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 누가 이 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1)이 규례를 행하는 자입니다. ①십자가의 도(道)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②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앙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③성령의 법 아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그리스도의 흔적(몸의 수많은 상처들)이 있음을 말합니다.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의 가장 큰 상처는 교인들이 복음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갈라디아 서신 전체를 20회에 거처 살펴보았습니다.
핵심은 복음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참 자유를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하여 복음에 더 깊이 들어가시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제목>
1.육체를 자랑하지 말게 하옵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2.우리의 몸에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게 하옵소서.
3.11월 15일부터 17일까지의 영적 대 각성집회를 통하여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