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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필 간찰-立讀直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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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公告-알립니다 스크랩 화가도 글씨는 이 만큼 한다.
북명산인 추천 0 조회 117 13.06.17 17: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글씨는 예술의 정수”

과연 그렇고 말고다. 그러고 보니 옛집엔 아무리 작아도 뒤뜰이 필수였다. 건축가 승효상을 만났을 때 내가 물었다.

“좋은 집이 뭔지 간단하게 정의해보세요.”

그는 단숨에 대답했다.

“생각하게 만드는 집이지요.”

묵은당을 보니 그 말이 절로 떠올랐다. 뒤뜰을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전래하던 온갖 미덕을 놓쳐버린 건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깃들었던 통찰과 미감과 천품을 뒤뜰과 함께 잃어버린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뒤뜰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단출하고 고요한 짜임새, 텅 비움, 과하지 않은 식물과 돌, 그 위로 지나가는 바람과 비와 어둠, 자나깨나 그걸 내다보며 사는 이의 심성이 경박하거나 단소할 수 있을까.

솔과 대와 정자를 내다보면서 박대성은 예순이 썩 넘은 요즘도 하루 두 시간 이상 글씨를 쓴다.

“글씨 쓰는 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워밍업이거든. 서법을 익혀야 그림이 가능하다고. 그림은 붓을 어떻게 운용, 장악하는가에 달렸고 붓을 장악하자면 서법을 먼저 익혀야지. 흔히 시서화라고 하잖아? 그게 뜻 없이 하는 말이 아니거든. 시를 익혀야 서가 나오고 서를 익혀야 화에 이를 수 있다고. 아, 심지어 골프도 매일 연습하지 않으면 감각이 둔해진다는데 붓이야 더 말할 나위 있나. 하루도 붓을 놓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하는 박대성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나는, 동그랗게 뭉쳐져서 움직이는 근육 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흡사 골프공을 집어넣은 것 같다. 골프공만한 크기로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근육, 벼루 셋을 바닥낸 서예가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손아귀에 골프공 같은 근육이 생긴 사람은 처음이다.

“서예는 최고의 회화야. 그중에서도 최고는 초서와 예서지. 이왕 하려면 제일 좋은 것을 하는 거지 뭐.”

박대성이 묵은당을 내다보며 날마다 2시간 이상 연습하는 글씨의 교본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서첩이다. 마오쩌둥의 초서와 추사의 예서! 그걸 20년 넘게 날마다 써왔다. 그러면서 필법에 대해 나름의 견해와 방법을 터득했다. 마오쩌둥이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필이란 것을 나는 그날 경주에서 알았다.

“중국 서예사에서 마오쩌둥을 넘어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걸. 이봐. 얼마나 힘이 있어? 얼마나 시원하게 써 젖혔어.”

과연 시원하다. 글씨라기보다 그림이다. 그림 중에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추상이다.

“암, 조형의 최고가 서예지. 조형감각을 익히고 공간 운용을 배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글씨를 써야 해. 내공을 기르는 데도 글씨를 써야 해. 배추장사를 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요량이 있는 사람이라면 글씨를 써야 해. 글씨의 힘을 알려거든 획을 한번 따라 써봐. 따라 쓰면 어떤 기세로 어떤 심정으로 붓을 다뤘는지 금방 느낄 수 있거든.”

호기심을 버릴 수 없는 나는 붓을 잡고 마오쩌둥의 글씨를 따라 써본다. 따라 하기 어렵다. 과연 획의 움직임 속에서 눈으로 봐서는 알 수 없던 것들이 느껴진다.

“마오쩌둥이 혁명을 한 것은 순전히 글씨의 힘이야. 우임이란 서예가와 중국 서예계에서 쌍벽을 이뤘거든. 우임은 장제스 도망길에 따라가버렸지.”

추사를 때려잡자!

그가 붓을 잡는 자세는 독특하다. 종이위에 90°로 세우되 엄지와 검지로 붓대를 당기고 약지로 붓대를 민다. 이런 지필법은 손아귀에 말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간다. 붓으로 종이 위에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크기의 칼로 나무를 파내는 형국이다.

“한 스님을 만났는데 고려불화를 그릴 때는 붓을 그렇게 잡았다는 거야. 그렇게 붓을 잡으면 팔만대장경 수만자를 써도 한 점 한 획 틀린 글자가 나올 수 없다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나니 느낌이 팍 오데. 온 몸과 정신을 붓대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있는 동작이지. 이렇게 잡고 붓을 운용할 수만 있으면 그때는 바위덩어리라도 파낼 수 있는 힘이 붓 안에서 나오는 거지.”

그렇게 붓을 잡으니 무명지 둘째마디 바깥 쪽에 호두알만한 혹이 생기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골프공 같은 근육이 생길 만하겠다. 그는 이야기 도중에도 쉬지 않고 글씨를 연습했다. 중국 여행길에 일부러 마오쩌둥 고향 창사(長沙)에 들른 얘기도 한다. 오석에다 마오쩌둥의 글을 새겼는데 가슴이 벌렁거려 자세히 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와, 참말로 호기가 있데. 천하 명필이데. 앞으로 1000년 안에 그런 명필이 또 나올까 몰라. 우리는 이제 몸으로 보는 감각이 있어 보기만 하면 척 알지.”

이런 식의 평면비교를 해버릴 수야 없겠지만 마오쩌둥 글씨가 암만 좋다 해도 추사에 비하면 어림없다. 추사를 그는 지절치도록(‘지절치도록!’ 이 경상도 사투리는 이후 박대성과 늘 한덩어리로 떠오른다. 표준말 ‘진저리쳐지도록’보다 훨씬 사무치는 격정이 느껴져 실제로 몸 안에 슬쩍 진저리가 지나가게 만든다) 좋아한다.

그렇게 좋았으니 한 시절 추사 글씨를 맹렬하게 모은 적이 있다. 한 50점 이상 모았다. 박 아무개가 비공개의 추사 명품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도 났다. 그런데 어느 때 집을 짓느라고 그걸 모조리 남에게 넘겨버렸다.

“추사를 남에게 넘기고 나니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어. 밤에 잠이 안 와. 그때 딱 결심했지. 추사를 한번 때려잡아보자. 추사도 결국 인간이 아니겠나. 따라가보지 못하란 법이 없지 않으냐.”

그는 한번 목표를 정해놓으면 앉은 자리에서 샘이 솟도록 파고드는 사람이었다. 눈만 뜨면 추사를 따라 써댔다. 잠자리에 들면 이불깃, 차를 타면 앞좌석 등받이, 남들과 이야기할 때면 왼손 엄지손톱 위에 끊임없이 글씨를 쓰고 또 썼다. 근기는 그의 힘이었다. 추사를 때려잡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매달렸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羅漢)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였다. 필사적으로 글씨를 썼다. 박대성이 추사에 미쳤다는 소문이 돌자 어떤 사람이 추사의 서론과 화론을 적어놓은 ‘우일동합기(又一東閤記)’라는 책을 구해다줬다. 내로라는 추사 연구자들도 본 적 없다는 귀한 책이었다. 그는 우일동합기를 한자 한자 짚어가다가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경험을 한다.

‘난경지세 옹치지규’

“‘난경지세 옹치지규’라는 말이었어. 갑자기 전기가 팍 오는 것 같더라고. 순식간에 깨달음을 얻은 거지. 그 후부터 글씨 쓰는 법을 제대로 알게 된 거야. 난은 황제를 상징하는 큰 새인데 그 새가 온몸을 부르르 떠는 모양으로, 옹은 머리에 난 오래 곪은 종기인데 그 종기가 한순간에 살 속을 파고드는 기세로 붓을 움직이라는 것이지. 추사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상황을 묘사해가면서 필법을 가르쳤더라고.”

난경지세 옹치지규를 알고 난 뒤 추사 글씨를 보면 그 힘이 실체적으로 느껴졌다. 글씨 앞에서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현판 하나를 쓰고 사나흘을 앓아눕는다는 말도 확실히 알게 됐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이젠 추사를 가졌다 없앤 것을 애통해하지 않는다. 덤덤해졌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굳이 원한다면 세한도도 강산무진도 추사와 한 획 한 호흡 다르지 않게 방작(倣作)할 수 있다. 부러 세한도를 그려 걸어놨더니 어떤 평론가가 와서 말했다. 국보를 이런 데 걸어두면 위험하지 않느냐고. 그 후로 추사에 큰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깨쳐가는 사람이었다.

“예술이 사기라고? 나는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한 것이 뭔 소린지 모르진 않지만 일반인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거 아냐. 예술은 사기의 반대지. 한 치도 사기여서는 안 되는 게 예술이지.”

한 치도 사기 치지 않기 위해 그는 요즘도 날마다 반복해서 글씨를 쓴다. 글씨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한 워밍업이다. 삼릉으로 향한 통창으로 신라 적 소나무를 내다보며 시공을 뛰어넘는 눈을 뜨고, 그는 기운차고 자유로운 마오쩌둥의 초서를 쓴다. 힘이 안으로 응축되어 고요하기 짝이 없는 추사의 예서를 쓴다. 추사를 말할 때 그의 음성은 열정으로 들뜬다.

“먹은 인류 태동의 정신이라고도 하지만 추사는 ‘먹은 문학이다’라고 했어. 추사만 생각하면 나는 하나도 외롭지 않아. 온갖 설움이 일시에 상쇄돼! 한인으로서 강대국 중국에서 추사만큼 대접받은 사람은 역사상 없다고. 몰라 신라의 최치원은 어땠는지….추사가 얼굴이 살짝 얽었었나 봐요. 22세에 연경에 가서 일흔 살 난 옹방강을 만났어. 옹방강이 나와봤더니 조선서 온 젊은이 얼굴에 서광이 돌거든. 그 자리에서 당장 자기 아들과 의형제를 맺게 해버려. 그래놓고 죽으면서 유언을 해. 이 책과 글씨들을 조선의 추사에게 전하라고. 나중에 옹방강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소바리로 세 바리나 싣고 추사를 찾아와. 장엄하잖아. 남의 나라 청년에게 유품을 남기는 옹방강도, 그걸 싸들고 조선까지 먼 길을 오는 아들도. 제주도 귀양에서 추사는 이웃에 병이 나면 한약을 처방해줬대. 추사의 명성이 중국까지 자자하니 소문 듣고 그 처방전을 받으려고 중국에서들 몰려왔다지. 약이 아니라 추사 글씨가 쓰인 처방전을 받으려고.”

그러나 이제 그는 마오쩌둥에서도 추사에서도 벗어났다. 소산의 자재로운 경지를 이미 획득했다. 소산체라고 불러도 좋은 한글 글씨체를 개발(‘개발’이란 말의 천박함이여. 그 체는 따로 개발한 게 아니라 수십년 글씨를 써온 그의 몸 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라는 말이 알맞다)했고, 그 글씨를 자주 그림의 바탕화면으로 놓기를 좋아한다.

“난 운명이란 말을 믿지 않아. 믿는 건 기도의 힘이지. 뭐든 저절로 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야. 지금 내게 온 것은 그게 뭐든 애타게 찾고 구하니까 온 것이지. 그렇게 찾아 헤매는데 하늘이라고 안 주시고 배기겠어?”



그 맹렬정진의 현장에서 나는 벅찬 마음으로 묵은당을 내다본다. ‘묵은’은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먹이 숨은’이기도 하고 ‘먹 속으로 숨는’이기도 하다. 세상을 다 버리고 먹 안으로 들어간다는 적극적인 결의도 엿보인다.

여든세 살에 집을 나와 낯선 역에서 생을 마감한, 최후까지 깨어 있는 영혼이기를 택한 톨스토이의 언어가 줄곧 그의 곁을 지킨다. 일찍 양친을 여읜 것도, 육식을 끊은 것도, 넉넉한 환경에서도 애써 자신을 불편 속에 내모는 것도 그는 톨스토이를 닮았다. 경주에 김대성에서 추사로, 다시 마오쩌둥과 톨스토이로 이어지는 고독하고 굳센 길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는 그림으로 구도한다. 전통을 현대로 변용하고 문화와 역사를 혼합한다. 그는 남산 아래 크게 솟아오른(大成) 또 다른 산봉우리(小山)다. 그 산에 묵향 그득하다.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글씨 공부에 있어서 타산지석이 될 듯하여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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