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일상성을 뛰어 넘는 시인의 상상에서 비롯되어 언어와 만난다. 이 진부한 말이 시를 이해하는 나침반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에 시인에게 상상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은 덕목이다.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시인만의 독특한 상상은 번쩍이는 영감(inspiration)에서 비롯되고 그 영감은 시인의 영혼과 관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정신이란 이러한 상상의 평원에 펄럭이는 언어의 깃발이라고 할 수도 있다.
유안진의 시집 다보탑을 줍다에는 번뜩이는 시인의 영감이 언어와 만나 시집의 이곳 저곳에서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새롭게 성찰하게 한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의 변경을 새롭게 넓혀 가게 한다.
시인은 시집의 후기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前略) 나는 새것에 목마르다. 새롭게 거듭나서 헌것을 새로운 시로 새롭게 재탄생시키고 싶다. ...(중략) 모든 형식 모든 그릇을 다 만들어본, 그것을 위해서는 그 그릇밖엔 없는 것 같은, 어떤 이즘에 갇히지도 매이지도 않는 무한 자유롭고 엉뚱한 시를,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 담긴 유일무이한 그릇이기를, 편편마다 완전 독립적인 시를바랐는데.’
시집 다보탑을 줍다는, 그래서 이전의 유안진 시집 보다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매우 자유스러운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새것에 목마른 시인의 시정신과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보다 시인의 새로운 것에로의 강렬한 지향은 시인의 상상력을 무한하게 넓혀 번뜩이는 영감으로 미쳐 생각하지 못한 상상의 평원을 보게 한다. 읽는 사람 상상의 가장자리를 무너뜨리게 하여 그 변경을 넓혀 준다.
다보탑은 불국사에 있다. 신라시대 만든 이 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다보탑을 줍다>로 되면 깜짝 놀랄 수밖에. 불국사 대웅전 앞에 석가탑과 나란히 서 있는 다보탑은 손으로 줏을 그런 대상이 아니다. 일상적인 상상의 허(虛)를 찌르고 고정관념을 여지 없이 조각내고 만다. 누가 10원짜리 동전에 그려진 다보탑을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시인은 동전을 줍는 것을 ‘다보탑을 주웠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다보탑을 줍다>-전문
다보탑에서 석존을, 석존에서 영취산으로, 영취산에서 불국정토로 자유자재하게 시인의 상상은 나래를 편다. 시간적으로는 3천여년 가까이를, 공간적으로는 네팔과 인도에서 경주와 서울의 골목길까지 시인의 상상은 한없이 길고 넓은 시공간(時空間)을 넘나들고 있다. 이것이 유안진의 시정신이고 ‘편편마다 완전독립적인’ ‘유일무이’한 시를 지향하는 시정신이다.
유안진의 시세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끝 연의 마지막 2행을 주의깊게 살펴볼 일이다.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 그렇게 살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라는 것은 시인 자신을 향한 물음이다. 다보탑이 새겨진 10원짜리 동전에 시인 자신을 이입 시킨 것이다. 쓸모 있는 듯도 하고 쓸모 없는 것 같기도 하면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 것 아닌가,라는 시인 자신의 자문자답임으로 설의법으로 되어 있다. 한없이 넓고 긴 시공간을 지배하던 시인의 시정신은 이순(耳順)의 삶을 살아온 지혜와 아우르면서 이 작품을 인생시의 반열에 가져다 놓는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비 가는 소리>-부분-마지막 연
이순에 접어든 시인의 지혜는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라는 구절이 말해주고 있듯이 <다보탑을 줍다>에서 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지혜의 가닥들을 모아 시집 다보탑을 줍다에서 다발로 엮어 놓고 있다. 이것을 신경림은 ‘현상을 걷어내고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시인 유안진이 가진 상상력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얼마간 예외의 시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유안진 시의 이러한 인생시적 모습은 즉자적(卽自的)인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인 자신이 경험하고 인지한 것을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철저하게 다지고 다진 다음 직설적인 수사로 표현해 놓고 있다. 표현속에서 현실과 삶에 대한 대자적(對自的)인 사항을 담기는 하지만 시인이 인식한 것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음의 시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내가 나의 감옥이다>-전문
둘째 연에서 바깥은 시인에게 보여지고, 자신의 안은 안 보였다는 표현은 마지막 연과 연결시켜보면 시인 자신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시인 자신이 자신의 감옥이라는 언표(言表)에는 폐쇄적이고 모든 것이 자신에서 출발한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시가 주관적인 예술의 범주에 있는 한 저주받은 장르라는 투의 말을 한 것은 사르뜨르다. 그렇게 심하게 표현하지 않드라도 현실과 사회를 통해 자신을 통찰하는, 대자적 인식의 연장에서 즉자적인 성찰이 따르는 시적 표현의 설득력을 유안진의 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없겠는가. 그렇다면 얼마간 직정적인 시적조사(詩的措辭)의 행간이 유연해 질 수도 있을 것 같고, 얼핏 언어유희로 보이기도 하고 재치로도 보여 단조롭고 다소 경박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시적 표현을 극복할 수 있지는 않을까.
‘진아(眞我)를 찾아 자진(自盡)’하는 세계로 유안진의 시집 다보탑을 줍다를 말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그 진아를 찾으려 살아온 이순이란 연륜의 삶에 대한 무게와 지혜의 다발을 보게 되는 것은 이 시집을 읽는 하나의 보람이다.
내면의 타는 불꽃-고백적 인생론 - 신달자
내면에 불타고 있는 열정을 시로 표현하는 방법의 갈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신달자의 시들을 읽으면 이것을 생각하게 된다.
조정권은 신달자의 시집 오래 말하는 사이를 의미심장하게 언급하고 있다.
삶의 ‘살’이 아픈 이는 시인이 되지만, 삶의 ‘마음’이 아픈 이는 이야기꾼도 된다. 이 살과 마음의 아픔이 겹쳐지는 자리에 신달자 시인이 있어 왔다. 우리는 그간 이 시인의 시 세계가 다분히 인생론적인 면에 무게를 두어왔음을 익히 알고 있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온 삶 들어내기로 실천해 온 작업에 문학적 성과와 비중을 크게 두어왔다.-조정권, 신달자 시집 오래 말하는 사이의 뒷 표지, 부분
조정권은 신달자의 시는 삶의 살과 삶의 마음이 아픈 것을 아우르고 있다고 말한다. 신달자의 시는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온 삶을 들어내기로 실천해 왔다는 것이다. 살을 육체로 보면 마음은 정신이다. 삶에 대한 영육(靈肉)의 아픔을 신달자의 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두고 전력을 투구해 왔다고 보고 있다.
내면에 불타고 있는 열정=전력 투구로 볼 수는 없겠는가.
‘살아낼 것인가’는 맞닥뜨린 삶에 대한 실천적 요구가 ‘살아갈 것인가’ 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욱 거세고 세찬 것은 아닐까.
내면에 불타고 있는 열정을 시인이 마주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두고 영육의 아픔을 직접적이고 거세고 세차게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신달자의 시라고 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면의 불타는 열정을 신달자의 시는 마주하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영육의 아픔으로 직핍하는 그런 갈래의 하나에 속한다는 판단은 그래서 얻게 되는 결론이다. 시집 오래 말하는 사이는 이런 신달자의 시세계가 더욱 심화되고 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통틀 녘 열 길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리는
외할머니 두레박에 어리는 첫 햇살 섞인 말
단 한 알의 돌마저 고르는
어머니 수천 번의 키질 끝에 눈송이 같은
하얀 쌀밥 위에 따스한 김으로 오르는 말
천 날 기원이 깃든 속 깊은 겹겹의 그 말들
덜커덩 젊은 날의 급 물살에 떠내려 보내고
나 무엇을 잃었는지 일생 눈물 끝 찾지 못하고
들릴 듯 들리지 않는 말 찾아 나 오늘도 떠내려 가네
-<말을 찾아서>-전문
‘나 무엇을 잃었는지 일생 눈물 끝 찾지 못하고 / 들릴 듯 들리지 않는 말 찾아 나 오늘도 떠내려 가네’에 시인의 내면 풍경은 집약된다. 이 내면 풍경을 배경으로 신달자의 시는 거세고 세차게 자신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강한 의지로 무장하여 질주한다.
앞으로 살날이 멀었다면서
나보고 팔자를 고쳐보라고 하네
내가 알기로 우리말은
망가진 것을 새로 손보는 것을
고친다라고 하지 않는가
내 인생이 그렇게 망가진 것일까
바늘 자국도 못 자국도 없이
고쳐지기는 하는 것일까
앞으로 살날이 멀었다면
그래 그렇게 한번 팔자를 고쳐보는 일
나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행복의 얼굴을 몰라서
아무거나 행복인줄 안아버리면 어쩌나
안겨버리고 나서
운명이라고 다시 참고 주저앉아 버리면 어쩌나
달콤한 맛에 내 혀는 우둔해서
행복을 먹여도 맛을 모르면 어쩌나
너는 너무 억울하니 팔자를 고쳐보라는
그 목소리 앞에서
나는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어물어물
절절 쩔쩔 얼굴만 붉히고 있네
마음으로는 네 네 네 하라고 부추기는데도
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나
까짓것 한번 고쳐봐도 될 일인데
한바탕 뜨거워져 불이 나도 될 일인데
-<개가론(改嫁論)>-전문
신달자의 시에서 상징이니 객관적상관물이니 이미지의 이론이니를 들이대는 것은 처음부터 불필요하다. 시인의 내면에 불타고 있는 불꽃을 언어에 담아 거세고 세차게 직핍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달자의 시는 어두운 갱도 같은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해 언어를 등불로 하여 어둠을 밝혀가는 광부의 자세를 많이 닮아 있다. 그의 시편들이 인생론적 세계에 무게가 실리게 되는 것은 따라서 당연하다.
시집 오래 말하는 사이에는 시인 자신의 고백적 인생론이 도처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삶을 신(神)도 보인다는 나이 60을 넘게 살았으므로 고백인들 뭐가 두려운가,라고 작정한 듯한 구절들을 예사롭게 만나게 된다. 그 고백들에는 여성 특유의 육감적인 물기가 배여 있기도 하여 시인이 얼마나 온몸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가를 알 수 있게도 된다.
산 도적 같은 놈이
확 덮쳐 안아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 그것 좋지
나는 산 도적을 찾아
내일은 광화문을 압구정동을
눈웃음을 치며 어슬렁거려 봐야지
-<산 도적을 찾아서>-부분
천박하지 않게 위의 구절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거침없이 자신을 내던지기 때문이다. 온몸을 내던져 고독하게 내면의 불꽃을 언어로 타오르게 하는 시편들의 행렬이 신달자의 시집 오래 말하는 사이이다.
<말을 찾아서>나 <줄장미의 비밀> <젖꼭지> <아! 거창>등의 시편이 보여주는, 이 세계를 ‘살아갈 것’이 아닌 ‘살아낼 것’을 말하면서 조금 더 정서의 물가로 발을 담글 수 있게 할 수는 없을까. 그런다면 조금 건조한 듯한 시의 전체적인 톤에 촉촉하게 정감의 물기가 이슬처럼 스며들텐데.
모험과 반란 -고재종, 박정대
단숨에 박정대의 <아무르 기타>와 고재종의 <쪽빛 문장>을 읽었다.
이 시집 속의 아름다운 시편들은 21세기 초반 한국시가 가 닿은 하나의 성과이다. 이들 두 시집 속의 시편들은 지금까지 한국시가 도달한 언덕의 그 끝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들 두 시인의 시 작업은 기왕의 한국시에 대한 하나의 모험이고 반란이다. 고재종의 시들이 개혁적 모험에 속한다면 박정대의 시들은 혁명적 반란이다.
고재종의 시들은 전통적인 한국시의 서정적 터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얼핏 보아 왜 고재종의 시가 개혁적 모험인가에 의아심을 가질 수 있다. 속 깊이 들여다 보면 고재종은 한국서정시가 가졌던 시어들을 개혁하려 하고 있다. 그가 토박이 우리 들꽃이나 산새나 들새의 이름을 시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환경론과 결부시킬 수도 있다. 유장하면서 간결하고 심장한 의미를 행간에 심어 놓은 그의 조사(措辭=poetic diction)는 그의 시어가 환경론의 영역을 벗어나 수사(修辭)로서 하나의 경지를 향해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시집 쪽빛 문장 표제작이 포함된 2부의 연작시들인 <오솔길의 몽상>은 한국적인 정서의 끝자락 한 가닥을 절묘하게 모국어로 빚어놓은 가편(佳篇)들이다.
보길도 예송리 해안의 몽돌들은요
무엇이 그리 반짝일게 많아서
별빛 푸른 알알에 씻고 씻는가 했더니
소금기, 소금기, 소금기의
파도에 휩쓸리면 까맣게 반짝이면서
차르륵 차르륵 울어서 흑명,
흑명석이라고 불린다네요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것뿐이라던
뮈세여, 알프레드 뒤 뮈세여
-<흑명(黑鳴)>-전문
위의 시에서 보는 대로 고재종의 시들은 전통적 한국서정시의 터밭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시인의 즉자적인 주관적 모습이 한국어의 아름다움 속에 묻혀서 한(恨)도 울음도 아닌 그 어떤 진실에로 방향을 잡고 있다. 그 진실의 구체적 모습을 <청대밭으로 가리>에서 엿볼 수는 있지만 아직 확연하지는 않다.
고재종의 쪽빛 문장의 시편들은 기왕의 한국시에 대한 개혁적 모험이다.
고재종의 시가 전통적 한국시를 전통적 방법으로 개혁하려 한다면 박정대의 시는 전통적 한국서정시를 혁명적 반란으로 이어가려 한다. 고재종의 시들이 온건론에 속한다면 박정대의 시들은 과격론 쪽에 있다.
박정대의 시들이 가진 음악성은 종전의 한국시가 가진 자수율에서 획득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산문적 패턴이지만 이미지가 이어지면서 자연히 갖게 되는 그런 리듬이 박정대의 시가 가진 음악성이다. 시집의 표제가 그렇듯이 박정대의 아무르 기타에 나오는 악기는 고전적인 한국악기가 아닌 기타다. 시인 자신의 설명을 빌리면 이렇다.
은델레 기타와 이낭가는 아프리카의 민속악기다 / 은델레 기타는 3줄, 이낭가는 8줄이다 / 이앙가는 시인이 노래하거나 시를 읋조릴 때 반주 악기로 사용했다 한다 / 여기에 모아놓은 44편의 시들은 어쩌면 은델레 기타와 이낭가를 연주하는 그대를 위한 / 나의 소박한 읋조림 같은 것이다 / 바라건대, 나의 읋조림이 그대 生의 기슭에 밀물처럼 고요히 스며들 수 있기를
-시집 아무르 기타-자서(自序)에서
전통적인 한국 악기가 아닌 아프리카의 현악기에 시적 음악성을 두고 있다는 것이 비약이라고 한다해도 박정대의 시적 음악성은 전통적 한국시의 운율에 대한 반란이라 할 만하다. 실제 박정대는 <악사들> <환등기> <망기타>에서는 온건하게, <생의 일요일들> <백야> <실내악> 등의 시에서는 과격하게 기존의 시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기존의 형식들을 무시하고 있다. 모험이고 반란이다.
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 집 마당은 옆구리가 화안합니다
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
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사다리 삼아서 저 밤하늘에 있는 초저녁 별들을 발명했습니까
그대를 꿈꾸어도 그대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여러 곡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저녁입니다
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워서 그대를 발명합니다
-<그대의 발명>-전문
박정대 시의 무엇이 지금까지의 한국시와 다른가를, 박정대의 시가 새로움으로 가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을 바라보는 것을 한 장의 음악-시각을 청각으로, 고독의 발명-초저녁 별의 발명-그대의 발명 등등. 이 얼마나 신선한 반란이고 혁명적 이미지의 조립이며 모험인가.
고재종과 박정대의 시는 그러나 20세기까지 한국시가 올랐던 언덕의 길 끝에서 이제 출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 저 높은 산정까지 오를 것인가를-오른다면 어떻게 오르는가를 주목하는 것은 분명 하나의 즐거움과 기대일 수 있을 것이다.
김선학
1944년 출생. 現代文學으로 등단. 저서로 비평정신과 삶의 인식 한국현대문학사 등. 현재 동국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