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8장
=====8:1
산에서 내려 오시니 - 이말은 5:1의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란 어구와
대칭을 이루는 구절이다. 5:1 및 8:5과 연결 시켜 볼 때 예수께서는 유대 산악 지방에
서 이제 12제자 임명 및 산악 지방에서의 다소 긴 제자 훈련 기간을 마치시고 다시 일
반 백성들 속에서의 사역을 위하여 갈릴리 호수 근처의 낮은 지방으로 내려오셨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전도 여행을
잠시 멈추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심신(心身)을 쉬시는 동시에 집중적으로 제자를
훈련시키는 장면은 이 경우 외에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몇번 더 시행되었다(10:5 -
42; 13:11 - 32 등).
허다한 무리 - 이 말은 5:1의 '무리'나 7:28의 '무리'보다 숫자가 더 많은 무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5:1과 7:28의 '무리란 말, '오클로이'(* )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 그 의미가 한정되어 있는 반면, 본문의 '허다한 무리'란 말인 '오
클로이 폴로이'(* )에는 관사가 사용 되지 않아 그 숫자가 한
정되지 않은 불특정 다수란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산상에서 말씀
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그의 소문이 각지로 퍼져나가서,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그의
교훈을 듣고자 그에게로 모여 들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2
이 구절은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새로운 어떤 사실을 도입하고자 할때
주로 사용되는 (* , 카이 이두 - and behold, 그리고 보라) 말로 시
작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이 말은 여러가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1) 특별한
의미없이 영어의 'there is(was)'나 'here is(was)' 등과 같은 도입사로 쓰인다.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 카이 이두 포네 에크 톤 우라논 -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있었다).
12:10, '사람이 있는 지라'(* , 카이 이두 안드
로포스). (2) 어떤 예화나 비유를 소개하고자 할때 '가라사대'란 말 다음에 소개될 내
용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쓰인다.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
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이두) 씨를 뿌리는 자가 '. 여기서도 가라사대 다음에 쓰인
'이두'('I* , 대문자로 쓰이고 있음)는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되지 않고 있다.
(3) 본문처럼 새로운 사건을 도입하면서 특별히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할 때 이 말이
쓰인다. 4:11'(카이 이두) 천사들이 나아와서 '(*
, 카이 이두 앙겔로이 프로셀돈 - 그리고 보라 천사
들이 나아왔다'). (4) 특별한 주의를 요할때, '갑자기'나 '홀연히'란 의미로 이 말이
쓰인다. 17:5,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 이두 네펠레 포테이네 에페스키
아센 아누투스). 아무튼 본문의 '카이 이두'는 이제 이야기의 한 단락이 끝나고 새로
운 이야기로 진입되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역활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설교를 마치고 하산(下山)하신 후 새로운 사건과 조우(遭遇)함으로써 예수
생애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는 점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문둥병으로
표현된 병이 병리학(patholge)적으로 실제 문둥병(leprosy)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문둥
병을 위시한 제반의 피부병을 일컫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레 13, 14장). 여하튼 유
대인들은 제사장의 판정(判定)에 따라 문둥병이라 지목된 자를 몹시 꺼려했다. 왜냐하
면 문둥병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이기도 했거니와 문둥병자와의 접촉 자체를 의식적으
로 불결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은 죄의 악함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discipline)을 상징하는 것으로(미 12:10, 12; 욥 18:13) 문
둥병자는 종교적 위생적 관점에서 일반 대중과 철저히 분리되어 특정 장소에 격리
되어 있어야 앴다(레 13:45, 46). 만약 이를 어긴 경우 그 문둥병자는 심한 제재 조치
나 돌에 맞아 죽는 수모(受侮)를 감수 해야 했다. 따라서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본문의
이 문둥병자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 그자체가 이미 파격
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편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온갖 죄악된 성품을 다 지니고 있
는 인간은 모두가 다 영적인 문둥병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습
(convention)과 억압을 깨치고 예수께 나아온 사실에서 우리는 세속의 모든 욕망과 죄
의 사슬을 깨치고 과감히 예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임을 배울 수 있어야 하겠다.
절하고 - '무릎을 꿇는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본서에 여러 번 언급된 용어로서
(2:2, 8, 11:; 4:9, 10; 9:18; 14:33) 상대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의 외적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본문에서는 행동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행동의 이면(background)
에 담겨진 문둥병자의 적극적 겸손이 강조되었다. 결국 이런 모습은 그가 예수의 절대
적 치유성을 확신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주여 - 당시 유대인들은 현자(賢者)나 율법학자를 높여 부를 때 주로 랍비(rabbi)
란 말을 사용하였다. 반면 본문에 사용된 '주여'(K* , 퀴리에)란 말은 종이
주인에게 또는 독립된 집단 내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를 부를 때 사용한 존칭이었다. 이
렇게 볼 때 이 문둥병자가 랍비라는 칭호가 아니라 '주여'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예수
를 학자나 설교가로서가 아니라 능력과 위엄을 갖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자신의
주인으로 믿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는 그 뒤에 계속되는 문둥병자의 요청이 선한
가르침을 달라는 것임을 살펴보면 더 명확히 드러난다.
원하시면 - 이 말은 예수에게는 자신의 병을 고칠 능력은 분명히 있는데 다만 고쳐
줄 의사(意思)가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일 뿐이라는 문둥병자의 강한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한 인격적 주체가 어떤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일을 성취하려는 강한
의지와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동시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문둥병자는 예수의 객관적 능력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능력을 자신에게
베푸셔서 자기를 고쳐주겠느냐고 그는 물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3
절의 '내가 원하노니'란 어구에서 발견한다. 즉 예수께서는 그에게 은혜 베푸실 의지
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이는 매우 충격적인 고백과 동시에 요청이다. 왜냐하면
문둥병은 그 치료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것마큼 어려운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
며(왕하 5:7, 14), 오직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만이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여
겨졌기 때문인 것이다(10:8; 11:5).
=====8:3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 구약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와 접촉한 자는 문둥병
자가 상징하는 죄성(罪性)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되어 의식법상 똑같이 부정한 자로 취
급되었다(레 11:40; 13:46). 율법대로라면 예수는 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심으로써
부정한 자가 된것이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의 완성이시며 안식일의 주인
이신 것이다. 즉, 그는 율법에 갇혀있지 않고 율법을 지배하신다. 더욱이 구약의 제사
장들이 문둥병자의 치유 여부를 판별할 때 그에게 접촉해도 부정하지 않았듯이(레
13:2 - 8)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셔도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지 않게 된것은
그분이 곧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해 주는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한편 예수는 부정한 자에게 '대심으로'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
역(逆)으로 부정한 자가 주님의 '대심으로' 정(淨)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
은 '손을 내밀어'란 본문의 표현을 능력 행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는
데(J.D. Kingsbury) 이는 잘못 이해한 해석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손을 펴신다'
는 말이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상징
적 표현이긴 하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손을 내미신 것은 실제 병자를 만지기 위함인 것
으로서 상징적 표현이 아니며 또한 구약의 경우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는 신인동형동성
론적 표현 역시 아닌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부연코저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말씀 그
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성경 말씀에 기록된 사건을 사실 그대로 이해해야지
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방해받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노니 - 2절의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문둥병자의 믿음에 찬 간구에 대한
신적 권위 해석의 답변이다. 이는 결굴 당신이 원하시면, 즉 병을 고쳐주시겠다고 결
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권세와 능력의 말씀이다.
깨끗함을 받으라 - 이는 육체적 치유와 더불어 의식적 정결까지를 포함한(문둥병
판별을 맡은 제사장으로서) 완벽한 치유를 뜻한다(Westcott).
즉시 깨끗하여진지라 - 치유(healing) 선언과 동시에 일어난 결과이다. 이는 예수
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능력의 초월성을 입증해준다. 실로 예수는 손(죄인을 향한 뜨
거운 사랑을 상징)과 말씀(어떠한 장애도 극복 치유시키는 능력)으로 한 생명을 새롭
게 탄생 시키신 것이다.
=====8:4
삼가 이르지 말고 - 공관복음서에서 수차 거듭되는 예수의 함구령(12:16; 16:20;
17:9; 막 3:12; 눅 8:56) 중의 하나로서 마태복음에서는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
런데 예수께서 이같은 명령을 내리신 이유에 대해 (1) 이적에 따른 허황된 소문이나
백성들의 그릇된 신앙관을 방지하시기 위해, (2) 치유받은 자의 교만을 예방키 위해,
(3) 유대인,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견제와 시기를 받고 이로 인해 복음 전파에 방해받
지 않기 위해(Plummer) 등이 있다. 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사실 예
수께서는 허다한 무리가 목격하는 가운데(1절)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당신의 소문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을 의향(意向)은 없으셨다. 단지 예수께서는 그 치유받은 자가
율법의 예를 따라 제사장에게 나아가기 전에 미리 이적(miracle)의 소문이 전파됨으로
써 나타날 제사장의 편견어린 판결을 의식하셨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사장들이 편견없는 순수한 의식으로 그 치유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셨다. 그
러나 그 치료받은 자가 함구령을 무시함으로써 그후로 복음 전파에 많은 장애를 맞이
하게 된다(막 1:45).
모세의 명한 예물 - 바로 앞의 구절에서 예수는 율법의 소극적 조항을 적극적으로
극복하셨지만 그것은 율법을 부정하고 파괴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즉 여기서 보
듯이 레 13:4 - 17의 문둥병 규례에 따를 것을 당부하심으로써 예수는 율법을 이기고
극복하시지만 율법을 파괴하려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고 완성하
는 방법을 택하시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5:17). 한편 문둥병자의 정결 절차는 (1)
신적 권위자인 제사장의 판결을 받고 (레 13:16, 17), (2) 정결의 선언이 주어지면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헌상하고(레 14:4), (3) 8일 후 흠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를 바쳐야 했다(레 14:8). 물론 이런 의식법상의 규례는 예수의
운명시에, 구약의 모든 의식 규례를 집약적(集約的)으로 상징하고 있는 성전 휘장(揮
帳)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성도는 구약 의식의
그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그 내용은 존중 해야 하는 것이다(히 10:14 -
18).
저희에게 증거하라 - 문둥병자가 율법 의식에 따라 완치(完治)된 사실을 확증함으
로써 율법을 통해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인증하게 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는 결국 율법은 예수께서 원하기만 하면 어떤 질병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도구의 역활, 곧 예수의 권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8:5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 4:13에 이어 예수 선교의 중추지였던 가버나움이 두번째
언급되고 있다. 이는 결국 4:13에 언급된 1차 갈릴리 사역이 5-7장에 언급된 산상수훈
으로 중단되고 제 2차 갈릴리 사역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로마의 군단급(1군단은 700명의 기병을 포
함한 3000 - 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은 아니지만 팔레스틴의 분부왕 헤롯 안디바의
보조 부대가 주둔(stationing)했던 곳이었다. 팔레스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는 타국
에서 징집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비유대계열, 여기서는 사마리아 정도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Pulpit Commentary), 레바논 또는 시리아와 같은 이방 지역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쨔든 그들은 이방인들임에 틀림없다.
한 백부장이 나아와 - 가버나움이 헤롯의 관활지에 있던 것으로 보아 이 백부장은
이방 출신으로서 아마 헤롯의 용병(傭兵)이었던 것 같다(Bruce). 여기서 백부장은 수
하에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을 좀더 자세
히 언급하면서(눅 7:2 - 10) 이 사람이 유대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
고 있다.
=====8:6
주여 - 예수를 향한 백부장의 돈독한 믿음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말이다(7:21 참
조).
내 하인이(* , 팡스). 아들 또는 하인에 해당하는 '파이스'란 헬라어는 신
약성경 중에 약 24회 등장한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계급이나 신분상 수하에 있는
자, 또는 피지배인을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서도 하인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 백부
장은 자신의 부모, 혈육이나 상전(上典)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해 굳이
와서 간구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하인은 당시 사회 구조상 천민이었으나
백부장과는 특별한 우정이나 애정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쨔든 자신의 수하
친병(親兵)을 위하여 체면과 만사를 제쳐두고 이처럼 간청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인간
성(humanyty)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어쩌면 그가 이처럼 자상한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는 로마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예수에 대하여 선입관을 갖지 않고 큰 믿
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 중풍병이란 말은 신체의 전체나 일부 또는 얼
굴이나 기타 부위에 일어나는 마비 증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또 현대에 이르러서도 완전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대표적 원인으로는 역시 뇌졸증을 들 수 있다. 뇌졸증이란 뇌의 작은 동맥들이 파열되
어 뇌 속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경우, 또는 뇌 속에서 혼탁한 핏덩어리가 뭉쳐져서 혈
액의 순환이 막히는 경우, 발작이 일어나고 혼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발작과
혼수상태가 발생되는 경우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며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후에라도
반신불수등에 빠지게 된다. 물론 뇌졸증 이외의 원인으로 생긴 마비 증세도 중풍병이
라고 부르고 있다. 어쨔든 이 중풍병은 문둥병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둥병보
다 훠씬 광범위하게 일어난 병으로서 이 또한 그 당시에는 기적이 아니면 고치지 못하
는 병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8:7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 , 에
고 엘돈 데라퓨소 아우톤) - '고쳐 주리라'의 원어 '데라퓨소'는 개역 성경대로 미래
서술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가서 고쳐주랴 ?'라는 뜻의 의문문으로 볼 수도 있
다. 또한 헬라어에서는 동사가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흔히 인칭
대명사 주어가 생략되며 또 이것이 생략되더라도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지만 본문에
는 주어인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 )가 특별히 쓰이고 있다. 즉 본문에서는
주어인 '내가'란 말이 강조된 것이다. 어쨔든 예수의 치유 기적 장면을 보면 주로 병
자들이 예수께 찾아오거나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 하여 치유되었지 예수께서
직접 병자를 찾아가시겠다고 제안한 것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예수는 여기서 굳이 가
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여기 백부장은 헤롯 용병으로
서 그의 혈통적 배경은 로마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일 수 있다. 심지어는 유대인 출신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단 로마 식민 체제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로마인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한편 그 당시 피지배자인 유대인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착취
자 내지 종교적 이방인으로서 경멸하였고 또 로마인은 유대인을 편협하고 위험한 피지
배자로 멸시하였다. 예수는 이런 벽을, 즉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의 벽을 절대적인 사
랑과 정의로써 허물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
을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설사 예수가 병자에게 가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
겠지만 어쨔든 예수는 이상의 방법을 동원해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보이셨던
것이다.
=====8:8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 적
이 있다. 이때 요한은 자신이 예수께 세례 베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백부장의 이 같은 겸손한 행위를 예수는 유대인이고 자신은 이방인이라는
민족 차별적 통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 만약 이러한 이유에서였다면 이 백부장은 예
수께 이런 요청 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치가 않다. 또한 여기
에 사용되고 있는 '감당치 못하다'란 어구의 원어인 '우크 하키노스'(* *
)는 영적, 도덕적 충족성이 몹시도 결여됨을 고백한 말로서(3:11) 어떤
권위있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자
신의 죄악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
(recognition)했음을 반영하는 진술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
이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영혼에게 주의 다함 없는 은혜가 필시 수여될 것이다(시
147:6).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이 백부장은 분명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를 전능한 절대자로 믿었
음을 증명해 준다. 사실 예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말씀으로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기록은 요 4:46 - 53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좀처
럼 찾아보기 힘든 휘귀한 경우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한편 만
약 그가 예수를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
도나 안수등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
은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예수께 대해 신적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
였다.
=====8:9
본절은 개역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지만 앞 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가
르'(* )란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이 예수께 다만 말씀만
해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이유가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 * , 안드로
포스 휘포 여수시안) - 이것은 권세(여수시안) 아래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여기
서 권세란 것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국가에 속한자
란 모두 국가 권세의 정점(頂點)인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 질서 체계를 지적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인으로서 황제로부터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기 수하에
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같은 명령체계와 그 개념은 너무도 명확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 체계라는 인위적 차원에서의 상급자와 그 하
급자 사이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질병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자연 세계에 적용시킨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결국 백부장이 예수를 인본주의적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
재, 즉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본주의적 통치자로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
여 주는 것이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
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하겠다.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 '기이히 여기다'란 말의 헬라어는 '다우마조'(*
)로서 본문에는 단순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 등르로 번역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모든 사건을 지배
하시는 결코 놀라지 않으실 신(神)이신 동시에, 한편으로는 놀라는 감정적 성정을 지
니신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Calvin). 즉 예수가 지닌 신적
인 전지성(全知性) 마저도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제어하지 않았던 것이다(Homer
A. Kent, Jr.). 한편 본문에는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에 대해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셨
던 반면 막 6:6에는 예수께서 고향에 가셔서 권능을 행하고 병자도 고치셨지만 사람들
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신 기록이 있다. 물론 예수께는 신앙과 불신앙 모
두가 무관심이 아닌 일종의 경건한 경이의 대상이 되고있는 것이다(Bengel). 예수께서
는 당신과 접촉한 모든 이에게 특별한 관심(부정적이든, 긍적적이든)을 가지고 계신
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어구는 다음에 대단히 주요한 내용을 말씀하
시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던 말이다(5:18).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 이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메시야로 계시하고 있
는 구약적 배경을 거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어떤 유대인들보다 예수
의 인격과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여태까지 만
나 본 유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낫겠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
다. 한편 마태는 이 백부장의 위대한 신앙을 누가 보다도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 전파의 대상이 유대인들에게서 옮겨질 것임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표현 뒤에 나오는 말씀의 엄숙성과 중요성을 일깨우는
문장이다(10절). 예수는 지금 거듭해서 유대인의 신앙관에 일대 변혁을 이루게 될 이
방인 선교에의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 평행구인 눅 13:29에는 좀 더 포괄적으로 '동서남북으로
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유대 지경 내(內)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거하
는 모든 사람들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바 있는데(사 45; 6; 49:12), 본문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본문의 백부장이 이방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게 되
었음을 예언자의 말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 이는 전 세계 만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신앙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뜻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을 확약(definite promise)받
은 당사자들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의 뿌리들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세 이름들은
이스라엘의 선민 의식과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할 때에 자주 언급된다. 이어서
'앉다'(* )란 말은 '기대어 눕는다'는 뜻으로서 식사
기간 중 거의 눕다시피 식탁에 기대어 앉는 유대인들의 식사 예법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잔치상에 둘러 기대는 상태를 지적한 것이다. 한편 이 잔치는 메시야
왕국의 완성을 상징하는 '메시야 잔치'라고 명명되는데, 이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다(사 25:6 - 9; 65:13, 14 등). 그리고 메시야 잔치, 곧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에 앉을 수 있는 자들은 이방인인 이 백부장의 예(例)에서도 암시되었듯이, 백부
장이 소유했던 그런 믿음을 소유한 자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은 천국에 들어
갈 자들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보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세상 각처에 살고
있는 이 믿음의 소유자들은 나라가 임할 때 먼 곳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
예하게 될 것이다. 한편 '식탁에 앉다'란 말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향
연(饗宴)과 그로 인한 큰 기쁨을 상징할 때 흔히 사용된 관용적 표현이다(마 26:29;
눅 14:15 -24).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 호아 데 휘오이 테스 바실레이아
스). 이는 '그 나라의 자손들'이란 뜻으로서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된 자, 즉 나라에 대
한 합법적인 상속권을 가진 자를 뜻한다. 여기서는 두 말할것도 없이 유대 민족을 가
리키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
로(3:9, 10), 당연히 천국에 속한 자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
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겠기에 결국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셨다.
바깥 어두운데 - 이는 멸망의 장소, 곧 미래에 '메시야의 잔치'가 배설되는 곳의
외부를 상징한다. 한편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는 불의한 자들을 위해 '캄
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다(밸후 2:17). 즉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
나님이 계신 곳은 항상 밝은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곳은 어두운 곳으로서 어
두움의 권세인 사람이 지배하는 곳 내지 영영한 절망이 있는 지옥을 가리키고 있다
(22:13). 결국 '바깥 어두운데'란 존재론적인 절대 소외와 영적인 절망 및 종말론적인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실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빛을 내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요, 진리의 말씀이 없고 하
나님의 빛이 없는 곳은 사단이 지배하는 어두움과 죽음의 세계임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는 지옥의 장면을 더욱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한 표현
으로서(Turner), '운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이를 간다'는 것은 심해(深海)
의 절망을 의미한다(McNeil). 이와 같은 고통과 절망은 그들을 위해 찾아온 메시야를
거절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또 제거할 수 없는 영원한 눈
물과 고통인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신 11, 12절의 두 구절들은 이방인들도 하
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구약의 사상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은 장차 온 땅의 동서남북으로부터 모여든 사람들
로 구성된다(시 107:3; 사 43:5, 6; 49:12). (2)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
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사 45:6; 59:19; 말 1:11). (3) 동서남북에
있는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이다(사 2:2, 3; 60:3 - 4; 미 4:1, 2; 슥
8:20 -23).
=====8:13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주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지
만 이번에는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란 말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다. 이 표현은
마태가 자주 사용한 말씀으로 주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9:22, 29; 15:28). 그런데 '믿
은대로'란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뜻이 파생(derivation)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
은 것을 들 수 있다. (1) 예수는 백부장의 믿음에 비례해서 기적을 행하셨다. (2) 하
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시지만 그 은혜는 인간편의 믿음의 양(量)에 따라 주어진다. (3)
본문의 기적은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었다. (4) 기적이 행사되면서 백부장이 믿고 있는
바병고침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2)와 (4)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
할 것 같다.
그 시로 - 눅 7:6을 보면 예수와 백부장의 집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의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
에, 이미 그의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으로 보아 '그 시'란 말은 바로 그순간, 즉 예수
의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란 말씀이 떨어진 즉시 나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문
둥병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며 실행이고 창조임을 뜻하
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8:14
베드로의 집에 - 이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다.(4:18 -
20). 그리고 요 1:44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빌립과 마찬가지로 벱세다였다. 따라
서 우리는 베드로가 벱세다에서 출생하여 결혼과 동시에 가버나움으로 이거하면서 어
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버나움과 벱세다는 서로 인
접해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설사 고향이 가버나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베세다 사람이라
고 불리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쨔든 예수께서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
문에(8:20) 베드로의 집에 자주 들러 거기서 거처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장모가 - 이 말은 베드로가 결혼하였음을 분명히 나타내 주는 말이다. 훗날
그의 아내는 바울과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고전 9:5). 그
리고 그의 장모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
으며, 마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도 함께 기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메드로의 결혼은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다소
희석(稀釋)시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열병으로 누운 것을 -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은 오늘날의 병명으로 말하자면 아마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의사인 누가는 그녀의 병을 '중한 열병'
에 붙들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녀를 위하여 예수께 구했던 것으로 보
아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눅 4:38, 39).
보시고 - 그 집에 들어서는 즉시 목격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주의에 사람들이 예수
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환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목도(目睹) 하셨던 것이다.
=====8: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열은 어떤 질병에 대한 증상
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열 그자체를 일종의 병으로 여겼던 것같다(요 4:52;
행 28:8). 이런 이유로 해서 유대인의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생활 방식을 구정하고
있는 랍비들의 율법인 할라카(halacha)는 열병이 있는 자들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
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3절에서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 대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환
자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접촉이 금지된 환자를 만짐으로써
환자가 깨끗해진 것이다.
열병이 떠나가고 - 마태복음에서 이 사건은 세번째로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순간적인 치유와 더불어 오랜동안의 건강까지 선사(膳賜)하셨던 것으
로 보인다(Chrysostom).
예수께 수종들더라(* , 카이 디에코네이 아우
토). 여기서 '수종들거라'는 말의 동사 원형은 '디아코네오'(* ,
시중들다, 돌보다, 섬기다)로서 본눈에서는 과거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주지하다
시피 과거 미완료형이란 것은 과거 어는 한시점을 전후해서 사건이 계속됨을 가리키는
시제로서 , 본문은 '섬기기 시작했다'(began to serve)는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
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가 자신을 구원한 주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구원받은 자는 그를 섬기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8:16
저물매 - 이 사건은 막 1:32 - 34과 눅 4:40, 41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으로서 안
식일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 다음에 일어났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귀
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온 시점은 저물 때로서, 곧 해가지고 저녁이 된 때인데, 이
는 해가 지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
해했던 유대인의 시간 개념과 연관이 있다. 즉 사람들은 노동이 일체 금지된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레 23:32
에는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를 철두철미 안식하였
던 것이다.
귀신들린 자를 많이 - 성경은 육체적 질병과 뚜렷한 구별을 두고 '귀신들린 자'를
취급하고 있다(4:24; 12:22; 17:18). 따라서 이는 정신적 질환의 일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경은 정신 질환의 발병 원인을 사단의 역사로 보는 경향이 짙다
(Weiss). 여하튼 예수 당시 유대 지방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
도 지적한 바 있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대단히 사악하였으며 도덕적 신앙적인 면에
서 불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괴상한 마술에 심취하여 악령을 부르
고 또 그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이다(Dr. Lightfoot).
말씀으로 - 마태는 예수의 병고치는 이적을 기록할 때 이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
(3,8절).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능력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 여기서 귀신이란 말은 헬라어로 '타 프뉴마타'(*
)로서 그문자적인 의미는 '영혼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는 이 말이 마귀들을 뜻하는 '다이모니아'(*
)로 표기되어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모두 거기서 '귀신들'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신구약 중간사의 문헌들을 조사해 보면 이 '타 프뉴마타'란 것은 병을 가져다 주
는 사자를 지칭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보통 악한 존재로 설명한다. 한편 예
수께서 귀신의 세력을 축출하시고 그 질환자의 정신을 맑게 하신 것은, 곧 예수께서
영 육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땅에 어두움의 세력을 완벽
히 몰아내고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확증하
는 것이다(사 11:1 - 5; 35:5, 6).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누가는 본 사
건을 어급하면서 "귓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눅 4:41)라고 그때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 마가복음은 이 구절을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막 1:34)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다'(all, NIV)란 표현이
마가복음에서는 '많은'(many, NIV)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상충되
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 고친 것이, 곧 많이 고친 것을 뜻할 수 있
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을 통해 마태는 예수께서 고칠수 없는 질병이 이 세상에 또 어
디 있겠는가라는 자신감 넘치는 신앙을 은연중에 고백하고 있다.
=====8:17
우리 연약한 것을 짊어지셨도다 - 이말은 사 53:4의 인용으로서 마가와 누가의 기
록에는 빠져 있다. 그런데 마태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고 또 다른 성경 기자들이 인용
할 때 자주 사용하던 70인역(LXX)이나 아람어로 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하여 이를
번역했던 것으로 보인다(Stendahl). 다시 말해서 4번째 '종의 노래'인 사 52:13 -
53:12에 대한 70인역이나 탈굼역은 사 53:4의 이부분을 영적인 의미로 번역하여 종으
로서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반면
마태가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어 본문은 이를 영적인 의미로 보다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의미로 더욱 강조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저인 의미로 더욱 강조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육체적인 질병을 대신 '담당하고' 또
'짊어지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개역 한글 성경 사 53:4와 본문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질고'는 '우리의 연약한 것'으로, 또 '슬픔'은 '병'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여
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질고'와 '슬픔'은 분명히 추상적이고 영적인 의미인 것이다
(사 53:4 주석 참조). 그러나 영적 육적인 고통과 슬픔의 원인은 죄에 있다는 점에
서, 속죄의 교리를 담고 있는 사 53:4의 영적인 번역은 본질적으로 히브리 본문과 동
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담당하시고'(* , 에라
벤)란 위치상의 '이동'이나 무엇을 '취하다'(take up)라는 뜻이며, '짊어지셨다'(*
, 에바스타센)는 '참다', '들어 올리다', '고통을 참다'는 의미를 지니
다. 이는 질병이나 고통이 예수께 그대로 옮겨졌다는 의미이기보다 예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질병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는 장차 감당하실 십자가 형벌의 빛나는 열매들인 것이다.
=====8:18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 - 마가는 여기에 '그 날 저물 때에'란 말을 명기해 놓고
있다(막 4:35). 아마 이때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지(14, 15절) 얼마 지나지 않
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의 병고치는 이적을 보고는 떼를 지어 그에
게로 모여들었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무리 중에 자기도
끼워달라고 간구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에워싼 군중들을 피하여
건너편으로 떠나고자 하셨는데 이는 아마 수면을 취할 시간을 가지기도 해야 했던 것
으로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예수는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무리를 떠나 제자 훈련의 시간을 가지고자 하셨던 것 같다.
저편으로 - 예수는 지금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바다의 북서부에 위치한 가버나움
에 계신다. 그렇다면 저편이라고 하는 곳은 아마 디베랴 바다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흔히 예수의 적대자
들로 등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이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해 예수를 뒤따르
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마 이 사람은 어떤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예수의 제자가 되
고자 하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기관이라는 직책이 백성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한 데서도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
태복음에는 서기관들을 긍정적인 양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이 더러 있다(13:52; 23:8
- 10, 34). 여하튼 본문에 언급된 '서기관'은 끝내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은 것을 알
수 있다(21절).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R. Walker) 서기관이라는 신분상의 장애 요인
때문에 '나를 좇으라'는 말도 듣지 못했고 제자로도 부름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
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받아 들여질 수 없다. (1) 일상의 생
활을 포기한 전적 헌신자만이 제자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예수를 믿고 따른 자도 제
자인 것이다. (2) 21절에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또 하나'(Another man, one his
disciples)가 아니라 본절의 서기관과 연결하여 '제자 중에 또 하나'(Another of his
disciples)라고 기록되었다. 이에 대한 헬라어 원문의 해석은 21절 주석을 참조하라.
(3) 예수께로 아무 주저없이 나아왔을 뿐 아니라 예수를 '선생님' 이라 부르고, 또 어
디든 따르겠다는 헌신의 의지를 보인 서기관의 태도는 제자로 부름받기에 충분한 것이
다. (4) 예수께서 두번째 사람에게만 '너는 나를 좇으라'(21절) 한 것은 그 사람이 서
기관보다 제자로 더 적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삶이 즉시 예수를 좇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결단을 촉구한 말씀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 서기관은
분명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았음에 틀림없다.
선생님이여(* , 디다스카레) - 이는 교사 또는 가르치는
자(teacher)라는 뜻으로 서기관이 예수의 가르침에 압도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인 동시
에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 이는 그가 예수의 제자되기를 원한다는 표현이
다. 특히 '좇으리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오'(* )는 '따
르다', '닮다'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는 일이, 곧 그분의 삶을 좇아가고 인격과 모습
닮기를 노력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즉 그는 절대 순복(obedience)의 자세로 예수를 따
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언급하는 예수의 대답을 보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주
를 따르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식치 못하고 있었
음을 암시한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려면 온갖 박해와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야 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8:20
여우도 굴이 있고 거처가 있으되 - 어떤 학자들은 이구절을 두고 예수께서 제자되
길 원하는 서기관의 요청을 거절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됨을 거
절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제자가 될 경우 자기 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이 뒤
따름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굴'은 몸을
숨길만한 장소(굴)를, '거처'는 둥지가 아닌 단지 새가 밤을 지새울 수 있는 나뭇가지
등의 임시 처소를 의미한다(McNeile). 결국 이 말은 아주 빈약한 거주지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심지어 하찮은 짐승들 조차도 비록 엉성하나마 보금자리가 있
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세계에 와서 안식처
없는 나그네,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내쫓김을 당한 방랑자가 되었다는 이 역설적인 사
실을 극명하게 나타내주고 있는 구절이다.
오직 인자는 - '다윗의 아들'이란 칭호가 유대적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고 '하나님
의 아들'이 예수의 신성을 밝힌 칭호라면, '인자'란 칭호는 구약 선지자들에 따르면
종말에 이르러 (단 7:13, 14)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실
자로 인식되었고, 바로 이 용어를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셨다. 자
칭(自稱)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
다(행 7:56; 계 1:13; 14:14). 이 인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하나
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 대칭을 이루어,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
포하고 있는 칭호인 것이다(눅 22:69, 70). 특히 본문에 언급된 '인자'는 단순히 거처
할 곳조차 없는 바로 '나'라는 말로도 대치시킬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인자'는 예
수께서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 하고 앞으로 당신의 당하실 고난을 묵시적(黙示的)
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여하튼 본문에서의 인자란 칭호를 살펴볼 때 예수께서는 인
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이상과 같이 거처도 없는 가난한 삶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는 초월적 사랑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
은 눅 5:24 주석을 참조하라.
머리 둘 곳이 없다 - 이는 머리 놓을 곳, 즉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곳에서 휴
식을 취할 만한 소유나 집 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고 피곤하다는 뜻이다. 실로 이러한
절대적 가난을 통해 예수께서는 온 인류에게 충만한 안식과 풍요한 부(富)를 제공해
주신 것이다(고후 8:9).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 헤테로스 데
톤 마데톤) - 이 어구는 19절에 어급된 서기관 역시 예수의 제자에 속한 자였음을 암
시해 준다. 즉 '또 하나'란 말의 원어 '헤테로스'(* , another)는 신약
성경에서 '알로스'(* , 다른 하나의, 같은 부류 내의 또 하나의)와 같은 의
미로 쓰이는데, 이는 분명, 앞절의 서기관 외에 또 하나의 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
다. 여기서 '제자'란 자신의 전(全) 삶을 예수께 헌신하고 다른 모든 생활을 모두 다
내팽개치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예수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의 가르침
을 따르는 자를 의미하는 것(요 6:66)으로 볼 수 있다(19절). 왜냐하면 제자로 지칭
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부친을 먼저 장사(葬事)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런
요청이 거절당하기 이전에 이미 제자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
질문을 던진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 곧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다름 한 사람
곧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만이 예수의 제자였다고 단정지을 수 없으므로 둘 다
예수의 제자에 속했던 자들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주여 나로 먼저 - 이 두번째 사람은 예수께로 소명받은 제자가 추구해야 할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욕망, 곧 예수를 따르고 싶은 열정과 자시의
의무를 등한히 하고 싶지 않은 소망 가운데서 망설이고 있었다. 실로 앞절의 서기관은
열정적이고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반면 이 삶은 매우 소심한 신앙 태도를 보
였다. 진정 그는 제자의 길이 차선(次善)의 신앙으로써가 아닌 최선의 신앙으로써 상
황을 초월하여 예수를 좇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 부친을 장사하게 - 당시 예수는 전도의 걸음을 재촉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 제
자는 전도보다 먼저 자신의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 연로한 아버지를 섬기다 그가 죽으면 전도의 길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이라는 학
설과 (2) 실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잠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뜻으로 보는
두 가지 학설이 대립되나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전도 사
업에 우선하는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즉 이 제자는 무엇이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인가를 혼동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율법의 의하면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의 척도는 제 5계명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된 자는 반드시 자기 부
모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이었다(출 20:12; 신
27:16). 물론 나이든 부모를 노후에 봉양하는 것 역시 장례에 관계된 의무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이같은 개인적 효도보다 더 우선되는 인생의 최고 급선무
(急先務)는 그리스도 복음의 선교 사역이다.
=====8:22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 이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부자(父子) 윤리조차 무시하는 불효 막심한 반(反) 도덕적인 종교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실로 이 말씀은 인륜과 도덕을 초월하여 계신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이해한 다
음, 설명되어야 하는 말씀이다. 더욱이 교리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장례 절차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실로 예수
께서는 인간적 윤리를 알지 못하거나 또는 무시해서 이처럼 비윤리적인 것처럼 보인
용어를 선택한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우선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 '죽은 자'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뜻을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죽었다는 말을
(1) 어떤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말로서 (2) 그 사물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
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롬 7:4),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11)란 말은 세상이나 율법, 죄 등이
우리 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이는 우리가 그런 것들에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여기에서 이 말을 사용하였던 것도 이
와 같은 의미로 우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즉 '내일에 무관심한 자, 곧 영적인 사망
자들 그리고 죄안에 죽어 있어 우리와 관계없는 자들'로 하여금(엡 2:1) 죽은 자들을
돌보게 하라는 것이다. 즉 영적으로 죽어버린 자들이 육적인 죽음을 맞은 자들을 장사
하게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적 근심에서 자유한 상태로 복음 선교에 참
여해야 했다. 예수께서는 이 제자의 우유 부단한 면을 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던 것
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비나 어미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
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10:37)라고 재차 가르치신 바 있다. 정녕 죽은 자
를 돌보는 일은 좋은 것이나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이보다 더 좋은 더 영원한 일이다
(Chrysostom).
=====8:23
배에 - 배를 가리키는 본문의 헬라어 '플로이온'(* )은 크기와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배를 가리킬 때 쓰이는 낱말이다. 하지만 이 곳의 배는 돛을 달지 않은
약 12 - 13명 정도의 어부와 잡은 고기를 실을 수 있는 조그마한 고기잡이 배였던 것
같다.
제자들이 - 본문의 제자들이란 항상 같이 다니던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
다. 한편 마가에 의하면 예수가 탄 배와 함께 그 뒤를 이어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을
실은 다른 배들도 해안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막 4:36).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 이 구절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때 주위를 환기시키
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카이 이두'(* , 그리고 보라. 그런데 갑자기)
란 말로 시작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번역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큰 놀'로 번역되
고 있는 헬라어 원어, '세이스모스 메가스'(* )는 지진
이나 바다의 폭풍우를 가리킬 때 쓰이는 것으로서 어부 출신 제자들 조차도 심한 두려
움을 느낄만큼 강력한 힘의 풍랑을 뜻한다. 한편 갈릴리 바다에는 이 같은 현상이 자
주 일어나곤 하였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약 240m 아래 위치해 있는 반면 주변의
산들은 고원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갈릴리 바다의 표면온도가 갑자기 상승하면 기압
이 형성되어 남동쪽의 고원으로부터 거센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불어오는 거
센 바람이 이같은 거센 파도를 일으킨다. 그런데 당시 구약성경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을 것이다(욥 38:8 - 11; 시 29:3, 4;
65:5 - 7; 89:9).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 마가는 "물결이 부따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 4:37)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곧 계속되는 풍랑에 의해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가리킨다.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 마가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막 4:38)라고
주무시던 곳을 명시해 놓고 있다. 당신이 머리 둘 곳 없는 처지임을 말씀하셨던(20절)
예수께서는 평지의 안식처를 얻지 못한 채 격랑이 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물에 머리
를 의지한 채 주무시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렇게 풍랑이 치고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
해 있던 시각은 밤으로서 예수는 매우 짙고 피곤하여 깊이 그리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
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자의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격
랑이 이는 상황에서 계속 잠을 청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
다는 예수 자신의 자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다(요 7:6).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 여기 언급된 제자들 중에는 풍랑과 배를 다루는일에
노련한 어부 출신들도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나름대로 경험을 살려 위경(crisis)을
헤쳐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는 점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드디어 현상
적으로는 바다에 문외한인 목수 출신 예수께 나아오게 되었다. 한편 그들이 예수께 나
온 것은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본다.
주여 구원하소서(* , 퀴리에 소손) - 여기서 '구원 하소
서'란 '구출하다', '보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소조'(* )의 제 1 부정 과거형
으로서 지급 즉시 구원해 달라는 간구이다. 이는 눈앞에 닥칠 위기의 급박성을 또렷이
나타내 준다. 즉 제자들은 절규에 가까운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를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눅 8:2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본
질적인 통일성 가운데서 각 저자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 당시 위험에 집
면해 있던 배 안에서는 이 말들이 모두말해졌을 것이지만 각 저자마다 자신이 기억하
고 있는 외침만을 기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여 구원하소서'란 용어는 '우리
를'이라는 목적어가 첨가된 상태로(Metzger) 1세기 이후의 예배 의식 중에 사용되었다
고 한다.
우리가 죽겠나이다 - 헬라 원문에 현재시제로 묘사된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죽
어가고 있나이다'가 된다. 실로 제자들은 자신에게 죽음의 위험이 다가오게 되었을 때
비록 조그마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가닥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았다. 이는 곧 날마다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우리 죄인들이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으
며, 하나님의 분노의 폭풍우가 불어 닥칠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거기서 건져줄 자가 없음을 깨닫게 한다.
=====8:26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배에 함께 타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바람과 파도의 지배권 아래만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
서 지금 꾸짖으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감정적인 공포나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잠재한 불신앙적 성향고 환경 의존적인 미숙한 신앙 상태 때문이었던 것이다. 실
로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단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나타내준다.
결국 이 불완전한 믿음은 그들이 예수와의 관계를 확고히 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필연
적인 결과였다. 정녕 그들이 예수와 완전히 일치된 관계성을 회복할 때 그들은 위험이
나 질병이나 죽음 조차도 무서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모든 것들
을 초월하여 계신 만유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 올리고피스토이) - 이 말은 믿
음의 양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믿음의 질이 좋지 못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특히 본서에서는 이 말이 사물의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그 표면만을 보는 경우에 자주
사용된다. 마가는 이 부분을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라고 기록하고 있
지만 이 둘은 모두 믿음과 두려움과의 대립된 성질, 곧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두
려움은 믿음을 몰아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사랑
과 신뢰는 모든 두려움의 뿌리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다(요일 4:18).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 이는 예수의 탁월하고도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행
동이다. 혹자(Bruce)에 의하면 이 표현은 실제적 권능의 행사라기 보다 하나의 시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예수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다. 진정 예수는 말씀 한 마
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말씀 한 마디로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다스
려가시는 전능자이시다. 한편 본문의 '꾸짖으신데'(* , 에페티
메센)란 말은 미완료 능동형으로서 아직 채 꾸짖는 일이 완결되기도 전에 그 꾸짖음의
효력이 발생하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때 바람 뿐만
아니라 바다에게도 명령 하셨다 그러므로 바다의 풍랑은 그 즉시 그쳐질 수 있었던 것
이다.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 에게
네토 갈레네 메가레) - 직역하면 '큰 놀이 일어나'라는 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의 권위에 찬 명령은 바로 이같은 극단의 변화를 가져오는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자연의 인격적 지배자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그의 말씀은 곧 폭풍우도 굴복시키고 잠잠케
하는 신적 권위인 동시에 전우주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마태는 인간적
인 한계를 지닌 예수의 모습과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예수의 모습을 대비시켜 놓고 있
다. 이것은 마태가 종종 사용하는 방식이다. 사단에 의해 시험받으셨으나 사단을 꾸짖
으셨고(4:1 - 11) 귀신이라 칭함을 받았으나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처럼(12:22 - 32)
여기에서도 예수께서는 육체적인 피곤함으로 인해 잠드셨으나 당신과 제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우를 잠재우셨다.
=====8:27
그 사람들이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본문의 '그 사람들'이란 배에 타고 있던 제자
들인 것으로 보인다(Meyer, Jerome, Nosger) - 그러나 다른 배들도 함께 출항했기 때
문에(막 4:36) 제자들 이외에 다른 배에 승선했던 사람들도(Weiss) '그 사람들'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기이히 여겨 -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그들이 예수의 기적을 전혀 예상치 못했음
을 나타내는 것이라 단정해서는 안된다. 이는 자신들의 간구가 실제적이고도 전인격적
으로 응답됨으로 인해 당황하고 놀란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9:33; 14:33).
어떠한 사람이기에(* , 포타포스 에스틴 후토스) - 이와 같
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감탄의 말이다. 배를 참몰시키려는 파도와 폭
풍우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신 능력의 예수 앞에서 그들은 놀라고 놀라 그가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자 자신들이 지금껏 지
녀온 그분의 인격에 관한 지식이 참으로 보잘 것 없었음을 실토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잠재울 수 없다는 고백인 것이다.
바람고 바다도 순종하는고 - 헬라어 원문에는 '순종하느고'란 말 속에 '그에게'를
강조하여 '아우토 휘파쿠우신'(* ), 즉 '그에게
순종하는 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는 동시에 자연의
능동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강조되고 있다 할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자연의 지배는
구약적 배경하에서(시 89:9; 107:25 - 30) 예수의 신적 탁월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8:28
가다라 지방 - 마가(마 5:1 - 20)와 누가(눅 8:26 - 39)의 기록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표기되고 있다. '가다라'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데
가볼리(Decapolis, 팔레스틴에 있는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로서 10개의 도시를 의미함)
중의 한 도시였다. 반면 거라사는 가다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곳이다.
그러나 본문의 가다라 지방이란 표현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 상충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가다라'는 베레아 지역의 수도(首都)였으므로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거라사'까지 가다라 지방으로 호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Carr). 더욱이 복음서 기자
들은 이 지역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명칭을 통일시키지 않아도 무방
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 지역은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다(4:25). 이는 돼지 떼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로(30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
으로 생각했으므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돼지를 거의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귀신들린 자 둘이 - 마가와 누가는 예수 앞에 등장한 귀신들린 자를 한 사람만 언
급하고 있다(막 5:2; 눅 8:27). 이는 아마 이들이 다른 한 삶은 제쳐두고 증세(症勢)
가 보다 더 심각한 한 사람에게만 주의를 집중시켜 초점을 맞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Augustine, Calvin). 한편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들은 주로 정신적
결함이나 자폐적 환자로서가 아니라 악한 영의 지배권 아래 놓인 자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대항키 위한 사단의 극렬한 저항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Homer A. Kent. Jr).
무덤 사이에서 나와 - 마가와 누가는 이들이 무덤 안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가다라 지방에는 석회암으로 이뤄진 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위에는 고대 무덤들이
있었는데 그 무덤들은 조그만 방이나 굴 식(式)으로 되어 있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유대인의 무덤은 동굴처럼 되어 있으며 성벽 바깥에 흔히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
마도 귀신들린 자에게는 이와 같이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동굴같은 무덤이 거처하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 사람들이 가까이 갈 경우 그사람은 의식적으
로 더럽힘을 입었다고 간주되었다.
저희는 심히 사나와 - 본절과 평행구인 막 5:2 - 6과 눅 8:27에서는 귀신들린 자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실로 이들은 군대 귀신들의 지배 아
래 있었기 때문에 광적인 힘을 과시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격이
파괴된채 오직 마귀의 파괴적 성향만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도 그들이 거하는
곳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친 바다를 잠잠케하셨던 그주께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이곳을 친히 찾아오셨다.
=====8:29
하나님의 아들이여 - 이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지칭할 때, 특히 신성을 지닌 자
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디는 칭호이다(3:17). 이말을 통해서 살펴볼 때 귀신
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정학히 알았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예수의 권위있는 말씀에 의
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영적 감지력(感知力)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
던 것이다(행 19:15).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도 이 진리를 정
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T* , 티 헤민
카이 소이) - 이 말을 직역하면 '우리와 당신(사이)은 무엇이냐'란 말로서 그 뜻은
'왜 우리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당신이 우리를 괴롭히며 방해하느냐?' '제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냐?'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구약에서도 흔히 나타
나는 관용어다(삼하 16:10; 왕하 9:18; 스 4:3). 여하튼 사단의 세력들은 영원한 심판
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 상대적이며, 제한적인 자유가 허락되어 있었던 것이다(엡 2:2;
6:12).
때가 이르기 전에 - 본문의 '때'(appointed time)란 것은 마귀의 최후 운명의 날이
요 세상의 종말, 곧 대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악령들을 미혹하고 괴
롭히도록 허용되지만, 심판날에는 모든 악인들과 함께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벧후
2:4; 유 1:6; Enoch 16:1; Jub 10:8, 9). 결국 본문의 이 말은 그들이 예수가 그 심판
주이심을 알았음을 시사하며 더욱이 지금, 즉 그 때가 이르지도 전에 혹시 무저갱에
던져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계 20:3).
한편 이 '때'가 이르기 전에 예수께서 귀신들의 활동을 억제하시고, 추방하셨다는 것
은 종말의 순간에 예수께서 귀신들을 모두 심판하실 것에 대한 전조적(前兆的) 행동인
동시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이신 것이가
(12:28).
여기 오셨나이까 - 귀신들린 자의 '여기'란 말은 온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할
종말 개념과 연관된 '때 가 이르기 전에'란 말과 결부시켜 볼 때 미혹과 파괴를 일삼
는 귀신들의 활동이 자유로운 이 땅 전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
는 종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하셨던 것이다.
=====8:30
많은 돼지 떼가 - 마가는 돼지 떼의 수효가 약 이천 마리라고 밝히고 있다(막
5:13). 한편 마태는 돼지 떼가 '멀리서'(some distance from them) 먹고 있다는 상세
한 보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기록의 사실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돼지 떼의 바다에의 몰
사(沒死)가 단순히 사람들의 소동에 놀라 도망치다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적
능력에 따른 결과로서 되어진 일임을 시사해 준다.
=====8:31
귀신들이 간구하여 -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이 귀신들린 자를 만나자 마자 귀신
들에게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했음을 밤히고 있다(막 5:8; 눅 8:29). 이에 대해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하는데, 이는 마귀의 활동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뜻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 귀신들이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에 대한 몇 견해가 있
다. (1) 귀신들은 육체적인 '거처'(home)를 소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돼지 떼 속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2) 하나님의 피조물을 증오하는 마음에서 돼지 떼에 들어가 그
돼지 떼의 죽음을 초래하려 했다. (3) 그 지방 사람들의 소유인 돼지 떼들을 몰살시킴
으로써 그 지방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척하고 미워하는 생각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세 가지 의견들 중에서 첫번째 의견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돼지 떼를 자기들의 새로운 '거처'(home)로 삼기를
갈구하였다면 어떻게 그 새로운 거처에 들어가자마자 그 거처를 파괴할 수 있겠는가?
두번째와 세버째에 제시된 이유는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 중에 다른 곳에
서도 예수에 의해 쫓겨난 귀신들이 난폭한 행위나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기들의 분노
를 표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17:14 - 20; 막 9:14 - 32). 한편 율법은
돼지 고기를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레 11:7). 그렇다면 이 돼지 떼를 먹이는 주인
은 이방인이거나 아니면 이방인에게 팔기 위해 이 돼지떼를 기르는 불경건한 유대인이
었을 것이다.
=====8:32
가라 하시니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 예수께서 마귀의 요구를 들어주신 사실에
대해 (1) 어떤 이들은 (Plummer, Weiss)예수가 귀신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귀
신들린자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라고 허락한 것은 아니
기 때문에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소 무리가 따른
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 마귀가 무저갱에 떨어질 종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
므로 그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선택할 일말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Hendriksen). 이와 더불어 (3) 예수께서 그곳 주인들에게 귀신들린 이 두 사람의
가치가 돼지 떼보다 더 귀중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이해하는 학자들(Rosenmu
ler)이 있다 여하튼 귀신들은 모든 생명체, 특히 무인격체에 쉽게 들어가 그 대상을
자유로이 장악할 수 있었기에 돼지에게로 손쉽게 돌입할 수 있었다.
온 떼가 비탈로 몰사하거늘 - 이는 귀신들린 자가 귀신들에게 완전히 놓임받았다
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다. 실로 대자연의 주인이신(23 - 27절) 예수께
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원키 위해 그 천하 중 일부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
였던 것이다. 한편 귀신들의 난폭성이 두사람에게서 떠나 돼지에게로 옮겨짐으로써 판
단력이 결여된 무인격체인 돼지들은 죽음에의 질주(疾朱)를 하게 된다.
=====8: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 이 지방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재
산에 입힌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예수를 체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를 만나려고
앴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보자 그 위엄에 제압당하여 단순히 그곳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
다. (1)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릇된 생각을 불러 일으켜 그리스도를 반대하게
한다. 특히 사단은 '온 시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두려움을 크게 주입시킴으
로써(눅 8:37) 자연히 온 시내 사람들과 예수 사이를 완전히 결별하도록 유도했던 것
이다. (2) 이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곧 가엾은 사람들에게 행하신 선한 일
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들은 구세주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였으며 세상을 더 사랑
했던 것이다. 실로 물질적 한계 상황에만 머무르는 사람들은 진리와 구주를 수용할 여
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 오늘날도 이 가다라 지방 사람들처럼 선한 기적을 보고도 자
신들의 재산에 손해가 온다는 이유로 기독교의 참된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 들
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요청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