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읍 외량리(外良里)
조선 정종 때 옥씨(玉氏)가 지금의 마을 앞 남쪽 400m 지점에 마을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는데, 응계 옥고(凝溪 玉沽) 선생이 이곳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掌令)에 오르는 등 출세를 하자 옥상(玉相)터라 부르게 되었다. 선생의 호가 응계(凝溪)라 하여 마을 이름을 응천(凝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조선 중엽 참봉 홍우식(洪禹軾)이 금구동(金鳩洞)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여 근처에서 이 마을이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가장 많으며, 어진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여 어르실[양곡(良谷)]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홍씨문중(洪氏門中)이 대성(大盛)하였다고 한다. 칠탄(七灘)마을은 개봉 못 아래 있는 마을로 안어리실 건너편에 위치하며, 남양홍씨가 많이 산다.
옥고(玉沽)
[문과] 정종(定宗) 1년 (139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1위
1382(우왕 8)∼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수(待售), 호는 응계(凝溪). 사미(斯美)의 아들이다.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생원시를 거쳐 1399년(정종 1)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뒤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과 안동부통판(安東府通判) 등을 거쳐 1408년(태종 8) 경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1420년(세종 2) 집현전의 설치와 함께 재행이 있다 하여 교리에 선보(選補)되었으며, 사간원정언·예조정랑·황해도문민질고사(黃海道問民疾苦使)·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고 대구에 은거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할 뿐만 아니라, 총명한 자질로 학문에 힘써 명망이 높았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안동의 묵계서원(默溪書院)에 제향되었다.